창작 단편 게시판
“아직 인가요? 탐정 아저씨?”
쿨러가 볼멘소리를 냈다.
“이제 5분 지났을 뿐입니다. 쿨러 양. 조금 더 오래 누워 계셔야 해요. 인내심을 가지세요.”
“제길, 내 인내심은 바닥이라고!”
참다못해 파피루스가 벌떡 일어서면서 외쳤다. 하지만, 이광희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 마디만 던질 뿐이었다.
“배터리가 바닥이시라고요?”
신음 소리를 내며 바닥에 눕는 동생을 보며, 킨들 DX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 밖에 나와서 햇빛을 쐬는 것도 나쁘지는 안잖아?” ‘너야 당연히 그러시겠지. 미국산 돼지야.’ 파피루스는 속으로만 소리치면서 끓는 속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누트1이 그들을 순시하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만 많은 파피루스로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탐정 선생. 이렇게 누워 있기만 하면 되는 거요? 이렇게 해서 얻는 게 대체 뭐요?” 누트2가 살며시 패널 각도를 올리며 물었다. 그는 방금 전에 슬립 모드로 전환될 참에 다시 재가동 된 것이다. 이광희는 절묘한 시간에 맞추어서 슬립 모드 전환 직전에 페이지 전환 버튼을 눌러 주었다. 그래서, 어느 기기 하나 빠짐없이 계속 활성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으헤헤헤!” 자지러지는 듯 한 웃음소리의 쿨러를 잠시 진정시킨 후, 이광희는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어느 사이엔가 살며시 다가와서 조치를 취하곤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들 전자책 단말기 모두의 생체 시계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는 듯 했다. 이동하던 그의 걸음이 스토리 앞에 머물렀다. 그는 손을 뻗으려다가 잠시 움찔했다. 그것은 어떤 예감에 대한 염려처럼 보였다. 아주 좋지 않은 예감과 염려. “나는 상관하지 말고 눌러요.” 이광희의 걱정을 간파했는지, 스토리가 한 토막말을 날렸다. “오늘은 볕이 좀 따갑군요. 제 예상이 맞다면, 화면 일부가 흐려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염려라면 하지 사양하겠어요. 누트1씨가 당신을 부른 건 그런 염려 따위나 하라던 게 아니니까요.” 망설이던 이광희의 눈이 누트1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악보로 치자면 일종의 쉼표에 불과했다. “으음...” 약간 찌푸린 그의 이마를 본 스토리는 직감적으로 상황을 깨달았다. 안경테에 걸린 두터운 압축 렌즈에 반사된 자신의 패널 일부는, 누군가 입김을 불어 넣을 것 마냥 글자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팩트적으로 말하자면, 글자 자체가 패널에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읽을 만하군요. 소문의 그 모습보다는 보기 좋습니다.” 이광희의 이 대책 없는 위로랍시고 한 말에 스토리는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른 분들도 한 번 체크해 보죠.” “하나 마나라고. 누트2가 거만하게 몸을 흔들어 댔다. 그의 패널에 올라온 글자는 굵은 폰트 덕에 한 층 더 진하게 보였다. 역시나 자연광 아래에서 백라이트 유닛을 사용하지 않는 E-Paper는 가독성이 LCD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탐정 양반, 나는 좀 어떤가?” 킨들 DX가 큰 패널의 화면을 전환했다. 글자 안의 주인공은 광대한 우주의 공간을 넘어서, 결국 시간까지 초월한 영원 자가 되는 일시적인 결말을 맞이하던 참이었다.(*1) “양호합니다. 폭스콘(*2)의 제조 능력도 있었겠지만, LAB21(*3)의 설계 덕이 더 크지 않을까 싶군요. 실용적이고 멋진 설계 덕에 안쪽 프레임 구분 설계는 누트2에서도 참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4)” “뭐라고? 내가 저 덩치의 동생이라고?” 누트2가 발작적으로 소리 쳤다. “아니요. 킨들 1,2요. DX씨는 아니고요. 훗.” 비웃는 듯이 입 꼬리를 올리며 이광희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파피루스는 냉소로 점철된 그의 얼굴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10분 정도 지났습니다만, 아직까지는 별 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뭐... 스토리 양은 예외입니다만, 제 예상대로라고 할 수 있군요.” “뭐라고! 우리가 지금 너 같은 3류 엔지니어 측에도 못끼는 얼푼이의 예상이나 맞추려고 여기 있는 줄 알아?” 파피루스가 당장에라도 휘둘러 댈 것처럼 스타일러스 펜을 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광희의 손에서 리듬 체조의 곤봉처럼 원을 그리고 있을 따름이다. 방금 전 각 단말기들의 버튼을 누를 때, 파피루스의 페이지 전환은 무엇으로 했던가? 그는 없는 이를 악물며 분노로 몸을 떨었다. “자, 여러분. 아직 테스트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누워 주십시오. 오늘 태양은 정말 최고조입니다. 이런 가을 날씨에 온도 상승을 유발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조도일 겁니다. 우리는 참 운이 좋군요.” 전자책 단말기들은 볼멘소리를 내며 다시 화단에 누웠다. 서늘한 흙이 뒷면의 냉각을 도와주었지만, 태양이 직격으로 내리 쬐는 패널이 붙은 앞면은 상당히 뜨거웠다. 다시 10분이 지났을 때 이광희는 다시 단말기들의 페이지 전환 버튼을 눌러댔다. 스토리는 이제 거의 화면에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져 버렸다. “당신에게 더 이상의 실험은 무의하군요. 태양이 당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만은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누트2가 슬며시 일어서며 물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분들은 다시 계속 할 겁니다.” “뭐라고!” “그리고, 스토리양은 화면을 그대로 둔 채로 그늘로 가세요. 절대로 화면 전환 버튼을 스스로 누르시면 안 됩니다.” “잔인한 새끼!” 누트2가 울분을 터트리듯이 외쳤지만, 그것은 스토리가 걱정되어서 나온 말은 절대 아니었다. “오. 이봐요. 탐정 양반. 숙녀에게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소?” 킨들 DX도 항의를 했지만, 이광희의 고집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의며, 킨들 DX의 페이지 전환 버튼을 눌렀다. “어라! DX... 화면 전환이 조금 느려졌어!” 파피루스가 깜짝 놀라 말을 조금 끊어 버렸다. “무슨 소리야? 착각이겠지?” 누트2는 애서 담담한 목소리를 냈지만, 역시나 그 역시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말처럼 단지 착각이라고 여겼지만, 신중치 못한 파피루스 덕에 어느 정도 사실 일 수 있는 확률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누트2씨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리! 이 몸은 예전부터 한 여름 뙤약볕에서도 독서를 즐겼던 몸이라고!” “뭐, 거짓말은 아니시겠지요. 여러분. 아직 제가 생각한 시험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누워 주세요.” 묘한 긴장감이 전자책 단말기들 사이에 감돌았다. 하나 같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스토리를 바라보다가도 서로를 다시 바라보았다. 형제들의 패널에 어떤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유심히 보려는 듯이.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다가 올 불운의 전조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또 다시 기다린 10분은 그들에게 있어서 영원보다도 더 긴 시간이었다. 정오를 넘겨 고도가 가장 높은 태양의 직사광선은 그 순수한 수직의 벡터 덕에 빛의 직진성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을 만한 고통을 단말기들에게 안겨주었다. “달깍. 달깍.” 이광희가 다시 페이지 전환 버튼을 눌러대는 소리는 차라리 안도의 한숨보다 더 값진 청량제였다. 적어도 이 견디기 힘든 열 지옥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옥을 탈출한 그들의 패널속 이야기 주인공들은 여전히 느릿하게 자신의 인생이라는 시간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와 마주친 후치 일행의 바싹 조여드는 심정은,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 외부 관찰자의 시점에서는 긴장감보다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여유롭고 권태로운 흐름의 일환일 뿐이었다. 너무도 느리게 다가오는 공포의 이동은 이제는 지루함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예정된 시간이 점점 다가옴에 따라, 전자책 단말기들은 모순된 두 감정에 발버둥치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이 뜨거운 태양 볕 아래에서 한 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발버둥 쳤다. 이제 시험 시간도 점차 끝나 가고 있으니, 그늘에서 한 순간 쉬면 조금 나아지리라. 하지만, 이 실험이 끝났을 때 자신들의 패널은 무사할까? 불과 10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스토리의 운명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들 생각했다. 하지만, 킨들 DX의 느려진 화면 전환 속도를 보자, 차마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가장 완성도 높은 킨들 DX마저도 태양 아래에서는 그 한계를 드러냈으니 말이다. “자, 시간되었습니다. 모두들 수고들 하셨습니다. 이대로, 실내로 이동하겠습니다.” 이광희의 목소리에 전자책 단말기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하나 같이 착잡한 심정들이었다. “쿨러!” 누트1의 다급한 목소리가 모두의 주의를 한 순간에 집중시켰다. 누트1의 품에 안겨 있던 쿨러의 패널은 처참한 노이즈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1 아서 클락 원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마지막 장면. 스타 차일드의 탄생. *2 애플의 아이폰, 아이팟을 외주 생산하는 대만 업체입니다. 킨들 시리즈 역시 이 회사에서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3 아마존의 자회사격인 연구소입니다. 킨들에 대한 연구와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진행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4 이 부분은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누트2를 분해해서 킨들과 비교했을 때 프레임 구분적인 부분이 유사하다고 느꼈기에 적어 보았습니다. 실제로 벤치마킹했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eBook탐정 이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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