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序


광무光武 3년, 7월 7일.

신조信祖에서 아뢰기를,

금전에 상上께서 이르시기를, 서경西京사람 시모부始暮符가 제조판의에 부합하는 인물인지 조사하라 하셨사옵니다. 서경사람 시모부는 금번 기유시機儒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그 기교技巧가 매우 출중하여 어렸을 적 부터 서경 사람들이 기계나 자노自奴가 고장나면 이를 시모부에게 맡겼다고 하옵니다. 출신은 비록 중인中人이오나 그 총명함이 남다르니, 제조판의에는 이 이상 가는 인물이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러자 상이 그리하라 일렀다.


광무 11년, 1월 1일.

제조製祖에서 아뢰기를,

제조판의 시모부가 자노는 자노이되 사람모습을 한 자노를 만들었사오니 이를 진상하옵니다.

상께서 시연試演할 것을 명하셨다.


광무 11년, 1월 3일

제조판의 시모부가 그 스스로가 제작한 인형人形자노를 상의 앞에서 시연하다. 그 모습이 흡사 인간과 같아, 대신들이 모두 놀라하다.

상께서 크게 치하하시며 친히 어주를 내리시다.


광무 11년 1월 13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무릇 사람은 천제天帝께서 만드시고 그 인성人性을 부여하신 것인데, 어찌 일개 인간의 몸으로 사람 모양의 자노를 만들 수 있단말입니까. 이것은 좁게는 사대부士大夫를 모욕하는 것이오, 넓게는 황상皇上에게도 욕을 보인 것이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상께서 진노하여 이르시기를,

비록 사람모양이긴 하나 그 역시 자노에 불과하다. 짐余이 듣기로는 자노 중에 가장 만들기 어려운 자노가 사람모양의 자노인지라, 저 멀리 덕국德國에서도 만들지 못하였다 들었다. 그런 어려운 일을 해낸 자를 치하하진 못할망정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는 편협한 무리임에 틀림없도다.


광무 11년 1월 15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인형자노는 그 모습이 흡사 사람과 같아 구분이 되지 아니하옵니다. 혹여 이 인형자노가 도적질을 한다면 그것이 도적이 하였는지 인형자노가 하였는지 구분이 지난할 것이옵니다. 또한 인형자노가 사람을 해치고 그 사람의 모습을 취한다면 이는 만물의 근원이 흔들리는 일이 될 것이오니, 상께서는 숙고, 또 숙고 하여주시옵소서.

상께서 침통해하시며 이를 물리셨다.


광무 11년 2월 3일

남경南京에 호胡가 발호하다. 남경이 함락되니, 상께서 매우 근심하시다.


광무 11년 2월 5일

제조판의 시모부가 ‘비격진천뢰공飛擊震天雷公’을 진상하다.

상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완성된 3기를 남경병마사 이억기에게 하사하시다.


광무 11년 2월 10일

남경병마사南京兵馬使 이억기가 비격진천뢰공을 이용해 남경을 수복하고 호를 격퇴하다.

상께서 크게 기뻐하시었다.


광무 12년 8월 11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비록 제조판의 시모부의 공이 크나, 그 출신이 중인에 불가하옵니다. 중인에 불과한 자에게 종2품의 품계를 하사하심은 전례가 없는 일이옵니다. 이는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상께서 이르시기를,

시모부의 출신이 비록 중인이나 종묘사직과 이 나라 백성을 위해 세운 공이 하늘을 감읍시켰도다. 그가 진상한 신묘神妙한 무기가 없었던들 어찌 호를 저리 쉽게 내칠 수 있겠는가. 이는 짐의 결정이니, 그대들은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 하지 말지어다.

하시었다.


광무 12년 10월 7일

제조판의 시모부가 자노삼칙自奴參則을 만들어 진상하니, 다음과 같다.

一. 자노는 사람을 해하여서는 아니되며, 위기에 처한 사람을 방관해서도 아니된다.

二. 자노는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다만 첫 번째 항에 위반될 경우 무시할 수 있다.

三. 자노는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다만 첫 번째, 두 번째 항에 위반될 경우 무시할 수 있다.

상께서 여쭈시기를, 그대는 무슨 의도로 이 삼칙을 만들었는고 하시니 시모부가 대답하였다.


자노가 사람과 닮아, 혹은 자노가 사람을 해할까 두려워 하는 무리가 있사옵니다. 허나 이는 반드시 틀린 것만은 아니오니, 앞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자노는 다음과 같은 원칙하에 만들어져야 할 것이옵니다.

하니, 상께서 감탄하시여 이르시기를,

이 자노삼칙은 그 의도가 매우 아름답고,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라. 무릇 사람이라면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지켜야 하듯이 앞으로 모든 자노는 이 자노삼칙을 지켜야 할 것이다.

하시었다.


광무 28년 5월 1일

남경 재릉현濟陵縣에서 민란이 일어나다. 민란의 주도자는 망이라 하는 자로, 소작농이라. 나라에서 만든 농업용 자노로 인해 소작을 떼이자 이에 분노하여 무리를 규합해 현청을 습격해 재물을 약탈하다. 남경수군사南京守軍司 왕국모가 경사京師를 이끌고 난을 진압하였다.

상께서 남경수군사 왕국모에게 명하시니,

비록 저들이 발측한 반란의 무리이나, 그 역시 배가 고파서 일으킨즉 주도자만 처형하되 나머지는 방면토록 하라

하시었다.


광무 35년 8월 15일

제조판의 시모부가 만든 자노가 난동을 일으켜 궁인宮人 여럿을 상하게 하였다.

상께서 진노하시니, 시모부가 물러나길 청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이를 허許하셨다.


[세조광무순천선덕중흥영선황제실록世祖光武順天先德中興營善皇帝實錄]




#1 告別



딱-딱-.

순라꾼들이 치는 찰패소리가 새벽의 눅눅한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삼경三更이 넘은 늦은 새벽, 세상은 포근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낮이라면 오가는 행인들로 발 디딜 틈새도 없을 주작대로도 야간순찰을 도는 순라들과 순라들을 보조하는 자노들만이 간간히 보였다.

순라를 보조하는 자노들은 모두 나라의 국기각國機閣의 기유학사機儒學士들이 만든 보조용 자노들이다. 이 자노들은 야간에도 불순한 무리들을 무리 없이 찾을 수 있게 야간 투시안을 달고 있었다. 야간 투시안은 움직이는 사물에서 나오는 복사열을 다양한 색으로 변환시켜 주변을 살필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장치이다. 순라자노들은 이 장치를 이용해 순라외의 사람이 관찰되면 이를 순라들에게 알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간 검은색 도포는 발견하지 못하였는지 아무 소리 없이 순라의 뒤를 쫒고 있었다.


검은 도포를 걸친 남자는 한 기와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달리지는 않았지만 순라꾼들의 눈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니 숨이 거칠어졌다. 늦가을의 공기에 하얀 김이 섞여 아지랑이처럼 퍼져나갔다. 그는 정문을 향하지 않고 곧장 종복從僕들이 출입하는 쪽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쪽문을 특정한 리듬으로 두드리자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열렸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빠끔히 빛을 발했다. 남자는 익히 그 모습을 수차례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길한 색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일개 자노의 눈빛이 야수의 그것과 같단 말이더냐.”


하지만 문지기 자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붉은 두 눈을 굴려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투시검사 완료. 어서오십시오. 대호군大護軍」


탁한 기계음이 거칠게 울렸다. 이내 쪽문이 완전히 열렸다. 그 안에는 사람 모양의 자노가 고개를 꾸벅였다. 물론 누가 봐도 사람과 구별이 갈 정도로 사람과는 닮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생김은 사람의 그것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 허나 지금 그 누가 만든다고 하여도 이처럼 사람과 유사하게 자노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노를 만든 이가 바로 당대 최고의 기유학사이자 희대의 천재인 이작 시모부 영감이 아니겠는가.


대호군 장영실은 쪽문을 지나 별채로 향했다. 원래라면 본채의 사랑방으로 가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시모부 영감은 그를 은밀히 만나고자 하였다. 무슨 일 때문인가. 영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별채에 다다른 영실은 별채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았다. 기침 소리로 자신이 왔음을 알리려 헛기침을 하려는 그를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제지했다.


“공연한 기침 일삼지 말고 어서 들어오시게.”


영실은 머쓱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그가 마루에 두 발을 디딘 순간, 마루 밑에서 검은 밧줄 같은 자노의 팔이 신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영실은 조용히 장지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조그마한 나무 평상과 서가가 전부였다. 그 흔한 병풍 한 폭 없었다. 중인의 신분으로 종2품의 품계까지 받았던 기유학사의 방 치고는 너무 조촐해보였다. 영실은 되려 숙연한 마음에 시모부를 쳐다보았다.

바싹 마른 몸에 정갈하게 정돈한 콧수염, 밤샘작업을 너무 많이 한지라 눈에는 커다란 수정안경水晶眼鏡이 올려져 있었다. 항상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는, 그 변치 않는 모습에 영실은 잘 벼려진 한 자루의 칼을 떠올렸다. 영실이 장지문을 닫고 시모부의 앞에 정좌하자, 그제야 시모부는 붓을 멈추고 영실을 쳐다보았다.


“어떤가, 대호군. 그 도포는 마음에 드시던가?”

“예, 영감. 확실히 순라자노가 저를 알아보지 못하더이다. 소생의 생각에는 열을 차단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지. 어쨌든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일세.”


영실의 대답에 시모부는 만족한 듯 마른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장인에게는 그 스스로의 창작물이 인정을 받을 때가 가장 기쁜 것이리라. 그렇게 마른 고목에 꽃이 피듯 비쩍 웃던 시모부는 쓰고 있던 종이를 영실에게 건네었다.

영실은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바라보다 흠칫 어깨를 떨었다. 영실은 고개를 들어 시모부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결코 농담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떠한가?”

“영감, 이건 아무래도…”


영실은 말끝을 흐렸다. 시모부가 건네 준 것은 도면圖面이었다. 아니, 상상도想像圖라 하여도 옳을 것이었다. 그 안에는 사람과 같이 사고할 수 있는 자노에 대한 것이 적여 있었다.

시모부는 영실이 대답을 회피하자 눈을 부릅떴다. 그 눈빛에서 파란 광기가 일렁였다. 허나 그는 이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영실은 시모부의 감은 눈이 파르라니 떨리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려왔다. 잠시 뒤 격랑激浪을 숨긴 대해大海와 같은 목소리로 시모부가 물었다.


“왜, 대호군마저 헛된 망상이라 여기시는가.”

“영감. 비록 자노가 영감의 손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는 하나 아직 그 수준이 걸음마 단계임을 아시잖사옵니까. 이제 고작 형식틀사고나 기초적인 논리상자가 실용화된 수준이옵니다. 아직 제조나 국기각에서조차 자율연산自律演算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실은 조목조목 반박하면서도 언제 시모부의 호통소리가 날아들지 조마조마하였다. 제조판의 시절, 제조의 무수한 관헌들이 이작 시모부 영감이라 하면 치를 떨지 않았던가. 그건 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영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실의 예상과 다르게 시모부는 나직한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하더냐. 네 눈에도 아직 요원해보이더냐.”

“솔직히 말씀드리오면 그러하옵니다, 스승님.”


영실은 스승의 낙담한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여 고개를 숙였다. 그 위로 스승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내 나이 어언 환갑. 스물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기유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니 그 후부터 여지껏 황상과 종묘사직,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신명을 바쳐왔다.”


그 음성이 너무 황망하여 영실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아직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니옵니다, 스승님.”


모루는 고개를 가만히 젓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만곡彎曲의 달이 부른 배를 안고 밤 하늘에 휘영청 걸려 있었다.


“영실아.”

“예, 하문하소서.”

“내 내일부로 낙향할 것이다.”


스승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영실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찌….”

“내 비록 황상의 은을 입어 어울리지 않게도 영감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살고 있으나, 그 천성은 속이지 못하는 것 같구나. 이제는 조용히 고향인 패비현貝肥懸으로 돌아가 그것이나 연구하며 살아 보련다.”


영실은 자신의 손에 든 종이를 새삼 내려보았다. 아무리 스승이 희대의 천재라지만 이것만은 불가不可해보였다. 뇌석雷石(번갯돌)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자노는 스승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승의 이전에는 그저 아주 단순한 보조기구나,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지만 스승 이후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 모든 부분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 되었다. 허나 그 역시도 아직은 사람의 간단하고 고정된 명령(저 물건을 집어서 여기로 옮긴다) 정도만을 수행할 뿐이다. 헌데, 사람과 같은 자율연산이라니.


“스승님께서 정히 그리하시겠다면 말릴 이는 없을 것입니다. 허나 제자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더냐?”

“정녕 자율연산, 사람과 같은 사고능력을 지니게 되는 자노가 만들어진다면 그 자노는 삼칙參則을 위반하지 않겠습니까?”


영실의 물음에 시모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음이 맞다. 아마도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삼칙을 거스를 것이다.”

“허면, 어찌 삼칙을 만드시고 이번에는 그것을 거스를 것을 만드시려 하시나이까.”

“자노란 무엇이더냐.”

“예?”


스승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영실은 의아해했다. 하지만 시모부는 영실이 추측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던졌다.


“자노란 무엇이더냐. 난 그 물음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했다. 자노. 인공자동노예人工自動奴隸의 줄임말 아니겠느냐. 그 이름부터가 스스로 움직이는 노예이다. 삼칙은 자노가 노예일 경우에는 목숨처럼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허나, 그것은 자노가 자노일 때만 법이 되는 것이다.”


시모부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걸어가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영실은 가만히 스승의 말을 곱씹다가 충격을 받았다.

스승께서는 도대체 어떤 자노를, 아니 어떤 ‘것’을 만드실 생각이란 말인가. 자신보다 세배에 가까운 삶을 살았으면, 그 사고의 날카로움이 무뎌질만 하건만 스승의 눈은 도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단 말인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영실의 앞에 푸른 비단보 한 개가 내밀어졌다.


“이것은?”

“풀어보거라.”


영실은 떨리는 손으로 비단보의 매듭을 풀었다. 비단보의 안에는 ‘이작총서怡作總書’라고 써 있는 책 두 권이 있었다.


“내가 만들려 했거나 혹은 너와 함께 만들고 싶었던 물건들을 적어놓은 책이다. 네 실력이라면 나 없이도 능히 만들 수 있을 터. 그 책을 잘 살펴 황상과 종묘사직, 그리고 백성들을 위하거라.”

유언과도 같은 그 말에 영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스승께 대례大禮를 올렸다. 시모부는 그저 말없이 밤 하늘의 달만 바라보았다.



#2 交叉

이제 완연히 겨울이 된 중경中京의 바람은 잘 든 칼날처럼 매서웠다. 두루마기 안쪽에 작은 발열기를 달아 옷의 안쪽은 훈훈하건만, 가릴 수 없는 얼굴은 그 가차 없는 바람에 두들겨 맞아 차갑게 얼어붙었다. 남들보다 한배 반은 더 클법한 코도 빨갛게 여물었다.

영실은 발걸음을 급히 했다. 비단 날씨가 추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어제 저녁 도승지가 밤 늦게 찾아와 건네준 한 장의 종이가 아니었다면 쉰이 넘은 나이에 이렇게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황상께서 어인일로 불초한 이 몸을 찾으신단 말인가.’


도승지가 건네준 한 장의 종이는 밀지였다. 북쪽을 향해 사배를 올린 후 펼쳐든 그것에는 황상의 친필인 듯 유려하고 강건한 필체로 자신을 찾아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모든 것을 은밀히 하라’라는 당부도 적혀 있었다.

영실은 눈 앞에 만영궁의 붉은 담이 보이자 그 걸음을 더 급히 했다.


선대의 황제인 광무제는 내치內治보다는 강병强兵에 더 중점을 두셨다. 하지만 지금의 황상은 다르다. 무보다는 문을 숭상하시고, 그러면서도 예악, 기유 등 그 중요성에 비해 천시되던 부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다. 덕분에 스승인 시모부가 종2품의 품계를 받았어도 할 수 없었던, 정2품의 판서를 맡을 수 있었다. 물론 그로 인해 사헌부를 비롯한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으나 황상의 뜻이 지엄하여 결국 그들도 뜻을 꺾을 수 밖에 없었다.


영실은 만영궁의 입구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붉은 도포를 입고 창칼을 치켜든 특임위사特任衛士들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제의 거처를 보호하는 자들이다 보니 다른 위사들보다 훨씬 위압감이 강렬했다.

영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화톳불 뒤에 있는 해태 동상을 보니 절로 가슴이 펴졌다. 그 동상은 자신이 직접 고안하고 만든 기계이지 않은가.


“누구시오!”


특임위사들은 영실이 다가오자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외쳤다. 그 음성에는 젊은 패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음성에 왠지 모를 시기심을 잠시 느낀 영실은 새삼 자신이 늙은것인가 하며 속으로 나직히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대답했다.


“제조판서일세.”


특임위사 중 한 명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다른 위사들보다 덩치가 한배 반은 커 보이는 남자가 흑오경黑烏鏡을 쓰고 배달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었다. 붉은 중갓을 쓰고 있는 걸로 봐서 특임위장特任衛將인 것 같았다. 그 특임위장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황상께서 미리 귀뜸하셨으리라.


영실은 소매 안에서 호패를 꺼내들었다. 옛날 호패하고 크기는 같지만 그 역할은 천지차이인 물건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제한된 구역을 통과하려면 이 호패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특임위사중 한명이 성큼성큼 다가와 호패를 가져갔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해태의 입에 그 호패를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머리 부분의 단추 몇 가지를 만지작거렸다. 만약에 이 호패가 등록되지 않은 자의 것이거나 혹은 위사가 입력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해태의 눈에 붉은 등이 들어오게 되어 있다. 맞다면 청색등이 들어오게 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해태의 눈은 청색으로 빛났다.

그러자 미늘창을 엇갈려 문 앞을 막고 있던 특임위사들이 좌우로 갈라서며 길을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충忠!”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겠지만, 특임위장이 미리 말을 한 듯이 그저 조용히 군례만 취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특임위장이 우뚝 서 있었다. 영실이 다가오자 특임위장은 흑오경을 벗고 손을 가슴에 올리며 군례를 취했다.


영실은 고개를 끄덕여 그 군례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새삼 특임위장을 보고 놀랐다. 이런 걸물이 있었던가.

금강역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팔뚝 굵기가 영실의 허리 굵기 만하고 손은 솥뚜껑만했다. 앙 다물은 입매는 강건하고 수염은 단정하게 정돈 되어있었다. 그리고 눈매는 보는 사람을 겁먹게 만들 호랑이 눈이었다. 하지만 영실은 그 눈에서 어린아이 같이 빛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던가. 영실은 그 눈빛에서 순박한 황소의 눈빛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그 눈빛은 거무튀튀한 흑오경 뒤로 숨었다.

영실은 그 눈빛에 왜인지 모를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자네 이름이 무언가?”


특임위장은 최대한 자신의 놀람을 감추려는 기색을 보였다. 아마 판서쯤 되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깨가 움찔하는 것 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영실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특임위장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소장, 특임위장을 맡고 있는 장만수라 하옵니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제조판서 영감.”


그 웃는 모습이 평상시 모습과는 너무 다르게 보여 영실은 놀랐다. 그리고 장만수의 말에도 한번 더 놀랐다.

구면이었던가. 그래서 처음 보는 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호감이 들었던가.


“미안하네. 구면이었던가.”

“아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때 소장은 고작 국기각에 소속되었던 일개 군졸이었고, 제조판서께서는 국기각에서 기유학사들을 가르치셨사옵니다.”

“그럼에도 용케 나를 기억하는구먼.”

“소장이 기유학에 관심이 좀 있다 보니…”


만수가 벌쭉 웃자, 영실은 마주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반의 작자들도 그렇지만, 무반의 무사들도 기유학사들을 무시하기 일쑤인 세태다. 그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기유학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말이다. 헌데 황제의 호위를 맡는 자가 기유학에 관심이 있다니 어찌 대견하고 기특하지 않겠는가.


“도승지께서 오시는 대로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소장이 앞장서겠습니다.”


만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지팡이처럼 집고 있던 배달검을 왼손에 들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타고난 역사力士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는 배달검도 만수가 들자 회초리 든 것마냥 달랑달랑 거렸다. 영실은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믿음직했다. 어느새 거리가 벌어지자 영실도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곳곳에 호위를 서고 있는 특임위사들은 만수가 보이자 황급히 창을 거두고 군례를 취했다. 그 군기가 매우 정엄해 보는 이가 절로 듬직해졌다. 만수는 손을 들어 일일이 군례를 받아주면서 느리지만 착실한 걸음으로 만영궁의 사민각思民閣으로 향했다. 그곳은 작금의 황상께서 개인적으로 용무를 보시는 곳이다. 일개 누각의 이름에서 조차 백성을 위하려는 그 마음이 전해져 영실은 마음이 애틋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민각의 밖에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던 상궁이 둘의 모습을 보더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도승지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안하네. 내 걸음이 늦다보니.”

“그토록 사인교四人轎(네 명이서 드는 가마)를 보내드린다 했거늘.”

“허허. 내 아직 두 다리가 성하거늘, 어찌 다른 사람의 다리를 빌리겠는가. 자, 어서 들어가지.”


도승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영실은 스쳐지나가는 눈빛이 ‘역시…’하는 눈빛이라는 걸 눈치챘다. 비록 제조판서의 자리에 올랐지만 역시 중인 출신이라는 것은 결국 떼어낼 수 없는 족쇄라는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도승지가 맨 앞에 서고 영실과 만수가 그 뒤를 따랐다. 문득 영실은 만수가 아직도 배달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쟁 중이 아닌 평시에 황제의 앞에서 무기를 들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호위총사 뿐이다. 영실은 그 사실을 지적해주고자 만수를 쳐다보고 손을 가리켰다. 흑오경을 벗고 있던 만수는-황상 앞에서는 안경을 쓰는 것도 무례다- 그 큼지막한 눈을 끔뻑거리다가 이내 영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오히려 웃으면서 손사레를 쳤다. 영실은 의아해했다. 괜찮다는 것인가? 하지만 이런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그들은 사민각의 내실에 도착했다.


“폐하. 신臣 도승지이옵니다.”

“들라하라.”


나인들이 문을 열자 세 사람은 일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대례를 취했다.


“일어나 고개를 들라.”


그제서야 세 사람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하지만 도승지는 이내 일어나서 황상의 좌측에 우두커니 시립하였다.

황상은 자단목으로 만든 책상에서 가만히 책을 읽고 있었다. 어두운 실내였지만 그 자신이 직접 만들어 진상한 용명등龍明燈이 있어 책을 보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어보였다.

황상은 그대로 조용히 책을 넘겼다. 황제가 머물기에는 좁지만, 그렇다고 결코 좁다고는 이야기 하지 못할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사르락 거리는 책소리 뿐이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책을 덮더니 둘둘 말린 족자 하나를 집어 들고 오른쪽에 시립해 있던 호위총사에게 건네줬다. 호위총사는 두 손으로 그것을 공손히 받고 영실에게 건네주었다. 영실이 의아해 하자 황상의 옥음이 들렸다.


“열어보라. 짐이 오늘 그대를 부른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


영실은 매듭을 가만히 풀었다. 그리고 들여다 본 그것은 서경의 감찰사가 보낸 장계였다. 가만히 내용을 읽어가던 영실은 의아해했다. 틀림없이 내용은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 서경에서 도적이 창궐하였는데 그 신출귀몰함이 귀신과 같아 백성의 피해가 막심하다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장계는 형조판서에게 보여줘야 할 내용이지 자신에게 보여줄 내용이 아닌것을.


“그리고 이것도 읽어보라.”


황상의 음성이 들리고 역시 호위총사가 또 다른 장계를 가져다 줬다. 그것을 열어본 영실은 놀랐다. 그 안에는 정상적인 글이 아닌 숫자만이 가득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해독관解讀官이 풀어놓은 내용을 주겠지만, 무엇보다 그 밀어密語체계는 그대가 만든 것이니 원본을 줬도다. 해독할 수 있겠는가.”

“예. 폐하.”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시험일지도 모른다.

영실은 장계를 바닥에 펴놓고 가만히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밀어체계는 규칙 자체는 쉽지만, 해독하기에는 힘든 방식이었다. 우선 언어체계는 정음을 기본으로 한다. 고유의 문자체계라는 점도 그렇지만, 음소音素 단위로 자를 수 있다는 점에서 정음이 한문보다 밀어를 만들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우선 정음을 음소단위로 분해하고 그 음소에 숫자를 부여한다. 기억(ㄱ)은 일, 니은(ㄴ)은 이 라는 형식으로. 이것이 밀어체계의 기본이다. 여기에 주역周易과 칠정산 내편을 교차해 보름단위로 그 부여되는 숫자를 변경한다. 간단하지만 꽤나 복잡한 이 밀어를 해석하려면 전문 해독관들이, 엄중하게 관리되는 책자를 펴놓고 두 세 명씩 매달려야 한다. 하지만 영실은 순식간에 장계의 해독을 끝냈다.

해석을 마친 영실은 무례하게도 고개를 번쩍 들어 황상을 쳐다보았다.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러자 황상의 온옥溫鈺같은 목소리가 그 조아린 머리위로 떨어졌다.


“벌써 다 해독하였는가. 과연 제판이로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헌데 폐하, 이 내용은…”

“그 내용 그대로이다.”


황상의 말에 영실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장계는 황상께서 서경으로 밀파한 암행어사가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영실의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었다.



소신 박문수가 황제폐하께 아뢰옵니다.

서경西京 소진왕素眞王의 반란 동태는 아직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서경에는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속칭 활빈당活貧黨이라 자칭하는 도적의 무리가 횡횡하여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신이 직접 조사에 나섰습니다.

이 활빈당이라 하는 도당은 ‘천수세인天授世人 멸기환인滅機換人 의기천추義氣千秋(하늘은 세상을 사람에게 주었으니, 기계를 멸하고 세상을 사람에게 돌려주니. 이 의로움은 영원하리라.)’를 기치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도적질을 함에 있어서도 사람은 결코 해치지 않되, 자노는 파괴하거나 약탈해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허나 이상한 점은, 파괴된 자노를 살펴보니 그대로 파괴했다기보다는 파괴한 후 번갯돌을 포함한 다른 물건들을 가져갔다는 점입니다. 소신의 능력이 미천하야, 없어진 물건들의 연관관계는 알지 못하나 없어진 번갯돌만 기백이 넘습니다. 혹여 이 사라진 번갯돌을 안좋은 일에 사용한다면 가히 좌시하지 못할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사옵니다. 소신은 활빈당의 무리를 계속 추적하겠사옵니다.

부디 보중保重하소서.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황상의 음성은 낮지만 부드러웠다. 영실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신 제조판서 장영실 아뢰옵니다. 소신의 단견으로는 단순한 도적의 무리는 아닌 듯 싶습니다.”

“그리 생각하는 연유는 무엇인고.”

“활빈당이라 자칭하는 도적의 무리들이 내세운 기치 자체는 새롭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선제 폐하 대에 있었던 ‘망이의 난’을 기억하시옵나이까.”


영실의 물음에 황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그것을 잊을 것인가. ‘망이의 난’은 그 규모는 단순히 민란에 그쳤지만, 망이의 난이 후에 가져온 여파는 굉장히 커다란 것이었다.


세상은 하늘이 사람에게 준 것인데, 어찌 기계가 사람의 일을 뺏어 사람이 배를 곪고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작 시모부라는 천재는 단순히 장난감 수준에 그쳤던 자노를 계량해 세상 곳곳에 이득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수십 명의 사람이 일일이 모를 심던 모내기도 모내기 용 자노가 혼자 수십 판의 모판을 이고 논밭을 달리면서 마치 자로 잰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모를 심게 되었다. 추수를 할 때도 추수용 자노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벼를 추수하는데 낱알 하나 흘리는 법이 없어 중간에 조금씩 벼를 가져가는 소작농보다 이 자노를 선호하는 추세였다.


또한 시모부의 제자이자 작금의 제조판서인 장영실의 업적은 또 어떠한가. 5경 12부의 모든 관아에 칠정산을 기반으로 한 시보時報를 만들어 황제로부터 ‘세상의 시간을 하나로 묶었다’라며 극찬을 듣기도 함은 물론 천문, 농업, 치수, 군사 등 모든 분야에 이르러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다. 낮게는 농업용 자노로 인해 소작을 떼이게 된 소작농부터, 높게는 자노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사람의 존엄을 해친다는 사대부들까지 그 계층도 다양했다.

그 반발이 처음으로 터져 나온 것이 바로 ‘망이의 난’이었다. 선대의 황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주도자인 망이만 처벌하고 나머지는 모두 방면했다. 역모죄임을 생각해보면 더할 나위 없이 관대한 처분이었다.

그 이후 환인換人이라 하여 자노를 모두 없애고 옛날로 돌아가자는 자들이 생겨났다. 지금 암행어사의 장계에서 말하는 기치가 바로 그것이다.


“환인의 무리들이 난동을 부리는 것이 처음이 아니나, 그 대부분이 자노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능률적으로 변하여 자리를 못 찾은 직인이나 소작인들이 왈패들과 합세하여 난동을 부리는 정도였사옵니다. 또한 그치들은 자노를 부수어 화를 푸는 정도에만 그쳤지, 그것에서 무언가를 가져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소신이 보건데 이것은 환인의 소행을 빙자하여,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소행으로 사료되옵나이다.”


영실이 망극함에 고개를 조아리며 고하자, 황상은 가만히 수염을 쓸어내렸다.


“환인, 환인이라. 이작이 그들의 등살에 밀려 물러난 것이 어언 서른해가 다 되가느니라. 선제께서 이작을 내치시고 나서 내전에서 서글피 우시던 것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구나.”

“…스승은 낙향하는 순간에도 오직 선제폐하와 종묘사직, 그리고 백성의 안위만을 걱정하였나이다. 선제께서 스승을 위해 옥루를 흘리셨다는 말을 들으신다면 망극함에 몸둘 바를 모를 것입니다.”


영실은 새삼 시모부와 마지막 만남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스승의 낙향이후 몇 번의 편지왕래가 있었지만 연락이 끊어진지 어언 십년이 다 되어갔다. 제자된 도리로써 단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으나 본디 국기각이라는 곳이 여유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계속 찾아뵈어야겠다는 마음만 먹을 뿐이었다.


“문수가 올린 장계에는 사라진 번갯돌이 기백에 이른다 하였다. 이 정도면 어떤 일을 도모할 수 있느냐.”


복잡한 심사가 된 영실에게 황상이 질문을 던졌다. 영실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대답하였다.


“번갯돌 하나면 소형 자노 일기一機를 능히 3년을 움직일 수 있사옵니다. 대형공방의 자노가 번갯돌 열개로 공히 육개월을 버티니, 기백이라 함은 굉장히 많은 숫자이옵니다.”

“그것이 모반에 이용될 수 있겠는가.”

“무기공방을 수십 개 지을 수 있는 양이옵니다. 어찌 위협적이지 않겠사옵니까.”


영실의 말에 황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제조판서 장영실은 짐의 명을 받들라.”


갑작스러운 칙명勅命이었지만, 영실은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를 하였다. 납작 엎드린 영실의 머리 위로 만국의 제왕인 황제의 추상과도 같은 음성이 내리 꽂혔다.


“제조판서 장영실을 태상호군太上護軍에 임하며, 태상호군은 서경으로 가 활빈당이라 자칭하는 무리들을 척결하여 백성들을 살피도록 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종1품에 해당하는 태상호군의 직책에 자신을 임명하자 영실은 멍해짐을 느꼈다. 비록 호군의 직책은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긴 하지만, 중인의 신분으로 종1품의 관직이라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혜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임위장은 들으라.”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특임위장은 사민각을 나가는 순간부터, 태상호군을 짐과 같이 여겨야 할 것이다. 도적의 무리를 상대하다보면 무력武力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받으라.”


황상은 품에서 금색 패 하나를 꺼내 호위총사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본 호위총사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중암重巖이라는 호가 무색하게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명은 지엄한 법. 호위총사는 이내 그 패를 수습해 만수에게 가져다주었다. 만수는 떨리는 손으로 그 패를 받아들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한 금빛 패에는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이 꿈틀대는 용 다섯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용은 짐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영수. 그 패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게 보여준다면 즉시 병력을 내줄 것이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만수는 떨리는 손으로 패를 받아 품에 넣고 오체투지를 하였다. 황상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도 선황과 함께 벌판을 달리던 피가 식지 않은 이들이 있는 듯 하다. 허나 쉬지 않고 달리는 말은 쓰러지고 지나치게 당긴 활은 부러지기 마련. 비록 문수가 형님이 역모를 꾸민다는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는 하나 분위기는 심상치 않도다. 또한 그곳은 본디 땅이 척박하여 사람들의 기질이 드센 곳. 부디 보중하거라.”


영실과 만수는 망극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경의 소진왕이 지금 황상의 이복형이었고, 대군시절부터 선황을 따라 정복전쟁에 참가한 무골 중의 무골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비록 배다른 형제라지만 나라를 위해서 형제를 견제해야하는 절대자의 고독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황제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물러가라.”


*


사민각을 나오자, 어느덧 동쪽에서 해가 움트기 시작했다. 머얼리 동쪽의 지평선의 어둠이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완연한 추위에 영실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몽실몽실 흘러 나왔다. 만수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품에 넣은 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장승같은 청년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우스워 영실은 웃음을 지었다.


“어찌 그런 표정을 짓고있는가. 폐하께서 막중한 임무를 맡겨 주셨으니 삼생의 영광 아닌가.”

“제조판서 아니, 태상호군 영감. 이건, 소장에게는 너무 막중한 책임입니다.”


생각보다 소심한 그 모습에 영실이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려는 순간, 잘 벼린 칼과 같은 음성이 날아들었다.


“놈! 아직도 수양이 덜 되었구나!”


누군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호위총사가 서 있었다. 호위총사는 영실을 보자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비록 태상호군이 실권은 없는 직책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종1품에 해당하는 무관직武官職이었다. 정2품의 호위총사보다는 높은 직책인 것이다.

같이 고개를 숙여 예를 받아준 영실은 문득 호위총사가 저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암重巖 박민규朴珉奎는 그 호에 걸맞게 말수가 없고 듬직한 이 였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 나온 만수의 대답이 영실을 더 놀라게 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쯧쯧. 덩치는 천산의 백곰만한 녀석이 어찌 성정은 그리 어리단 말이냐.”


추상같은 질책에 만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민규는 탐탁치 않은 눈으로 만수를 바라보다 이내 영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영실은 당황해 민규의 어깨를 잡았다.


“왜 이러시오, 총사.”

“태상호군 영감. 스승 된 자로서 제자의 모자람을 채우지 못하였으니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아니오. 어찌 총사께서는 특임위장이 모자라다 하시는게요. 내 비록 무도에 대해서는 무지하나 특임위장의 기세가 범인의 것과 같지 않음은 알겠소. 폐하께서 특임위장을 호위로 붙여주셨으니 이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든든하오.”


영실의 말에 민규의 얼굴은 밝아졌다. 역시 내심 영실이 만수를 내치지 않을까 걱정한 탓에 은근히 영실을 떠본 것이리라. 민규는 몸을 빙글 돌려 만수를 쳐다보았다. 만수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그 큰 눈을 끔뻑거리다가 민규가 쳐다보자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만수, 이놈. 듣거라.”

“하문하소서.”

“폐하께서 네놈에게 중임을 맡기셨지만, 나는 네놈이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 내 늘 말하지만 천장天將의 신력神力을 지니고 있어도 마음이 금강金剛같지 아니하면 검에 사념邪念이 담긴다. 검에 사념이 담기면 그것은 네가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야. 검이 네놈을 휘두르는 것이지. 내가 왜 너에게 배달검을 물려주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라. …그리고 부디 이번 호행護行에서 많은 것을 얻었으면 좋겠구나. 알겠느냐.”

“…예. 감사합니다. 스승님.”


처음에는 날카로운 창끝 같은 어조였으나 가면 갈수록 제자에 대한 걱정으로 민규의 어조가 점점 따뜻해졌다. 만수는 그 따스함을 느꼈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영실은 두 사제의 모습을 보며 30여년 전 자신과 자신의 스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스승의 고향 인 패비현 역시 서경이 아니던가. 영실은 이번 기회에 한번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규와 헤어진 영실과 만수는 이내 만영궁의 동문으로 걸어 나갔다. 문득 지평선을 넘어 고개를 든 해가 다홍빛 햇살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아침이 밝은 것이다.


#3 旅程


“이거 참 신기하군요. 나으리.”


본디 만수가 영실을 호칭할 적에는 ‘태상호군 영감’ 혹은 ‘제조판서 영감’이라 하는 것이 옳지만 지금 영실과 만수는 일종의 암행감찰을 나선 것이다. 보는 눈이 한두 곳이 아닐터인데 그런 호칭을 쓴다면 대번에 이목의 집중을 불러올거라 생각한 영실이 먼저 만수에게 제안을 하였고, 만수는 능숙하게 그 역할을 해내었다.


“허허, 아직도 신기한가. 이제 좀 적응이 될 법도 할 터인데.”


영실은 조종타를 능숙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만수는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에 그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두리번 거렸다. 그 모습을 본 영실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귀신도 때려잡는다는 특임위사들의 우두머리라 믿겠는가.

중경에서 서경까지의 거리는 어언 만리길. 아무리 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쉬지 않고 달린다 해도 보름이 넘는 거리다. 그것도 천상 무인인 만수나 가능한 일이지, 평소에 말을 탈 일이 없는 영실을 고려한다면 한 달이 훌쩍 넘는 여정이었다. 게다가 계절은 여행 가기에는 가장 곤혹스러운 겨울이었다.

만수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각종 방한 털옷과 조난당했을 경우를 대비한 비상식량 등 겨울 야숙에 필요한 물건들을 산더미처럼 싸들고 영실의 집에 찾아왔다. 그 모습을 본 영실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곳간으로 안내했다.

곳간에는 곡식들은 쌓여있지 않고 무슨 괴상하게 생긴 물건만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강철로 만든 조약돌처럼 생긴 물건을 영실은 자동차自動車라 불렀다. 하지만 만수는 이해하지 못했다. 차車라 하면 바퀴가 있어야 할 것인데, 자동차라는 녀석은 밑 부분에 수백장의 철판을 이어붙인 것 같은 긴 띠 같은 것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실은 마차의 바퀴하곤 비교도 할 수 없는 무한궤도無限軌道라고 설명해주었지만, 만수는 납득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동차는 말보다도 빠른 속력으로 지치지도 않고 서쪽을 향해 관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카르르르-


“하지만 말입니다, 나으리. 어째서 이 편한 물건을 폐, 아니 그분께 알리지 아니하신 겁니까?”

“글쎄…”


무한궤도가 대지를 짓밟으며 나는 소음에 만수는 평소보다는 조금 큰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영실은 바퀴모양으로 생긴 조종타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아직 이 자동차가 완성품은 아니라는 사실일세. 여기저기 결함이 많지.”

“결함이라 함은?”

“자네, 자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영실의 물음에 만수는 가만히 생각을 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뇌석기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뇌석기관은 사람으로 치자면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지. 그리고 그 뇌석기관을 만드신 분은 내 스승님이셨지. 허나 이 자동차에 있는 뇌석기관은 순전히 내가 고안한 물건인지라, 아무래도 효율성도 떨어지고 이모저모 불안하지. 게다가 이 자동차는 말이나 마차하고 다르게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다보니 속도를 줄이기가 쉽지 않아. 이런 부분은 필히 많은 사고를 불러 올걸세.”


영실이 눈을 살짝 내려 속도계를 보니 ‘백오십리里’까지 눈금이 올라가 있었다. 한 시각에 백오십리를 내달릴 수 있는 속력이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길게 뻗은 관도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영실은 감속발판을 밟아 속도를 살짝 줄였다. 빠른 속도로 녹아들던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지.”


자동차가 느려지는 것을 느낀 만수는 도대체 어떤 구조로 이게 느려지는지 궁금해 여기저기를 쳐다보다 다시 영실을 쳐다보았다.


“허면…?”

“환인들일세.”

“아!”


만수는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영실은 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았지만 새삼 환인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영실은 입술을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망이의 난 이후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치들은, 원통하게도 지지층이 너무 넓어. 일개 소작농에서부터 당상관에 이르기까지. 당장 우의정만 해도 대표적인 환인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편리한 물건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우습지 않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일세. 허나 내가 이 자동차를 그분께 진상한다고 생각해보세. 열이면 열 환인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터이지. 어찌 그리 당장의 이득만을 생각해 앞을 보지 못하는지.”


영실의 탄식과도 같은 말에 만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만수는 노을 진 지평선을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찬란한 노을빛에 눈이 부셔야하겠지만 흑오경을 쓴 영실과 만수에게는 별 느낌이 없었다.


“나으리. 저기 건물이 보입니다.”

“대충 거리가 어느 정도 같은가?”

“얼추 30리 정도 일 것 같습니다.”


영실은 그 거리의 건물이 보인다고 말하는 만수의 안력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요즘에야 망원경이 있어 월궁月宮을 훔쳐보기도 한다지만, 사람의 맨눈으로 30리 거리를 바라본다는 것은 경우가 다른 지 아닌가. 영실은 자신도 몰래 눈을 잘게 모아 앞을 바라보았지만, 쭉 뻗은 관도 위에는 저물어 가는 해와 지평선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내 포기한 영실은 조종타를 굳게 움켜쥐었다.


“30리라면 조금 아슬아슬하구먼. 해가 떨어지기 전에는 도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아무거나 꽉 잡게.”

“나으리, 설마!”


만수는 경악하는 표정으로 영실을 바라보았지만 영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속 발판을 힘차게 밟았다.


카드드드-“우아아아악-!”

자동차의 굉음을 뚫고, 만수의 비명소리가 황혼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


역리驛吏는 어지간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평선에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던 것이, 말도 없고 바퀴도 기이하게 생긴 마차니 아무리 역리들이 신기한 경우를 많이 본다고 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허, 참. 이게 정녕 움직인단 말입니까?”


역리의 감탄 섞인 물음에 영실은 난처한 듯이 웃었고, 만수는 능숙한 여행객처럼 받아쳤다.


“방금 전에 봐놓고는 무에 딴소리를 한단 말이오? 객쩍은 소리 말고 어서 방이나 내주슈. 그리고 아직 밥을 못 먹어서 그러니 저녁도 준비해주시구려.”

“예끼. 이보슈! 여기가 무슨 주막이라도 되는지 아시오?”


만수의 말에 역리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져 따지고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역관은 공적인 용무가 있지 않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지금처럼 사방에 역관 외에 건물이 없을 경우에는 암묵적으로 투숙이 허용되지만 그렇다고 영실과 만수가 역리를 주막 주모 대하듯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허, 이사람. 왜 그리 화를 내시나. 자자, 잠깐 이쪽으로 좀.”


역리의 화내는 모습을 본 만수가 피식피식 웃으면서 역리를 끌고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역리와 만수가 걸어나왔다. 왠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던 역리는 영실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요. 우선 안으로….”


말을 마친 역리는 꼬리에 불이 붙은 말처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영실이 만수를 쳐다보자 만수는 미소를 지으며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보였다.


“푼돈 몇 푼 쥐어줬습니다.”

“그것만으로 저렇게 공손해지지는 않을터인데…?”

“흐, 마침 파리 한 마리가 지나가더군요.”


그리고 가장 가벼운 것의 무게가 50근이 거뜬히 넘어간다는 그 배달검으로 파리를 잡았겠지. 영실은 만수의 혈기 넘치는 행동에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는가. 영실은 별말하지 않고 둘의 뒤를 따라 역관驛館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층구조로 만들어진 역관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하지만 그 구조가 중경의 것과 사뭇 달라 영실의 호기심을 이끌었다. 중경에서는 보통 마당에 평상과 식탁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 역관은 특이하게 건물 내부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게 일층은 역리들이나 전령들이 머물며 식사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졌고, 나무계단으로 올라가는 이층에는 그들이 잠시 눈을 붙이는 침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영실은 난생 처음 보는 그 구조가 신기하여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만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영실을 쳐다보았다.


“왜 그리 두리번거리십니까, 나으리.”

“아닐세. 그저 건물 구조가 특이하다보니.”

“여기부터가 서경 초입이라 그렇습죠.”


영실의 의문을 해결해 준 것은 만수가 아닌 역리였다. 영실과 만수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자, 역리가 쟁반에 다기를 들고 주방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웬 차인가 싶어 영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만수를 바라보자 만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서경지방은 중경처럼 물이 맑지 않습니다. 중경지방은 천산에서 시작되는 미루하美淚河가 흘러 물을 그냥 먹어도 되지만, 서경지방은 미루하처럼 큰 강이 없어 주로 지하에서 물을 끌어 올립니다. 그렇다보니 그냥 물을 마시게 되면 탈이 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항상 차를 마시는 끓여마십니다요. 중경 사람들은 차를 높으신 양반들만 먹는답니다만, 여기는 태어났을 때부터 어미 젖 대신 차를 마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죠.”


그 설명에 영실은 탄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자신은 자리에 앉아 월궁을 훔쳐보고 서경은 물론이요 저 멀리 사라센의 시간도 계산해 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의 세계. 영실은 여태껏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허. 내 견문이 이리 짧았던가. 이번 일이 잘 끝나면 솜씨 좋은 방자를 데리고 전국을 돌아 다녀봐야겠구나.’


영실은 새삼 이번 일이 행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리는 능숙하게 찻잔에 차를 따랐다. 비취빛의 찻물이 또로록 소리를 내며 나무 잔을 채웠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영실은 가만히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내음새가 코를 간질였다. 차를 조금 머금어 혀로 입안에서 굴리자 씁쓸하면서도 강한 냄새가 입안 가득히 맴돌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 차를 넘기자 시원한 청량감이 감돌았다.


영실은 자신이 문득 눈을 감고 다향에 취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그러자 역리가 무언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차일세.”


영실의 말이 주효했는지 역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나으리께서 중경에서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특별히 내온 차입니다요. 연하차蓮荷茶라고 서경에서만 나는데, 서경사람들도 없어서 못 마시는 귀한 것입죠.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구먼요.”

“…그렇수? 나는 잘 모르겠구먼.”


역리의 희희낙락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영실뿐이고 만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역리는 살짝 기분이 상한 듯 보였으나 만수가 무서운지 별말은 하지 않았다.


“허어, 그리 귀한 걸 선뜻 내놓으니 이거 어쩐다.”


영실이 부담스럽다는 듯이 몸을 추스르자 역리는 호들갑스럽게 손을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이구, 아닙니다요. 중경에서 오신 높으신 분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요, 네.”

“…높으신 분? 누가 내가 높으신 분이라 하던가?”


영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역리는 왠지 모르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영실은 살짝 눈을 돌려 만수를 쳐다보았다. 만수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예? 아니, 그냥. 이렇게 듬직한 호위무사도 두시고 저렇게 신기한 물건도 타고 다니시면서 중경에서 오셨다면 당연히 높으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이거, 착각하게 해서 미안하구먼. 나도 높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네만, 난 이제 겨우 생원에 불과하다네.”

“…생원, 요?”

“그렇다네. 오십 평생을 과거에만 연연하다가 이제 겨우 생원이 됐다네. 마침 중경의 높으신 분이 긴히 심부름꾼을 내가 가진 연줄을 다 동원해 간신히 잡은 거라네. 그 말없이 달리는 마차와 여기 호위무사도 다 그 분의 것일세. 허허.”


영실이 멋쩍은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하자 역리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을 타고 온 데다, 같이 온 호위무사라는 사람은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하게 생겼으니 영실이 높은 사람이라고 착각 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크흠! 식사까지는 좀 기다려야하니 잠시 앉아게슈.”


어느새 말투까지 바뀐 역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부뚜막으로 향하는 뒷문을 열고 휑 하니 사라졌다. 역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영실은 쓰게 웃었고 만수는 화가 났는지 수염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 건방진!”

“허어. 앉게나. 여기서 난동을 피워봐야 좋을 건 없지 않는가.”

“끙!”


영실의 조용한 만류에 만수는 불편한 소리를 내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 앉는 기세가 하도 과격하여 영실은 의자가 부서지지는 않았는가 하는 실없는 걱정을 했다.


“그나저나 저자가 이곳이 서경의 초입이라 하였지?”

“그렇습니다. 이 역관을 지나는 순간부터는 서경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옵니다. 서경은 상경 초입의 우한관牛汗關이나 동경과 세외를 가르는 장성長城같이 그 경계를 명확하게 나누는 곳이 없지요.”


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그 모습이 마치 누가 들을 것을 염려하는 모습이라 만수 역시 덩달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영실은 차를 홀짝이며 다음날 조식에 대해 이야기 하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 역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군.”

“…세 가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첫째는 정말로 우리에 대해서 모르는 상태로 넘겨 짚은 것. 둘째는 중경에서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입수하고 그것을 확인하려 한 것. 마지막은 서경의 누군가로부터 중경에서 오는 모든 사람을 감시하라고 명령을 받은 것이지. 중경으로부터 서경까지는 허허벌판이 계속되는지라 서경에 들어가려는 사람 대부분은 필히 이곳을 거쳐갈 것일세. 그러니 서경에 사는 누군가의 더듬이 역할을 하기에는 매우 좋은 입지라 할 수 있지.”


영실의 설명에 만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노숙을 할 준비가 철저하게 되어 있는 상단의 무리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서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 역관에 머물기 마련이다. 본디 역관이라는 곳은 주막이나 여관하곤 달라, 공무를 지니지 않은 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사방 백리에 묵을 수 있는 곳이 이곳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연 그렇군요. 헌데,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요?”

“그 역시 세 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지. 첫째, 이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데, 소진왕 전하일세.”


만수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 이름에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혹여 누군가 들은 이가 있는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 만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는 오히려 역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역이라 하시면?”

“그분께 연결된 정보원이라는 거지. 그래, 창위廠衛라거나. 이 경우에는 우리에게 큰 위협이 아니되겠지. 그리고 마지막인데, 이게 가장 가능성이 낮다네. 하지만 묘하게 이 마지막에 무게를 두고 싶구먼.”


영실은 말을 맺으며 생각에 잠겼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가능성은 가장 낮았지만 아까 전부터 이 가능성에 이상하게 집착이 갔다.


“바로 그 활빈당인가 하는 도적의 무리들일세.”


영실의 목소리는 작고 나직했지만 만수는 묵직한 것으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과연 틀림없이 가능성은 낮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그 정도로 세력이 크겠습니까.”

“내가 여기 오며 이르지 않았는가. 환인의 무리는 아래로는 몸종부터 위로는 당상관까지 그 뿌리가 매우 깊고 넓다네. 그리고 지금 활빈당이라하는 무리는 비록 도당이지만 그 기치를 환인의 그것으로 삼고 있다네. 환인이라면 누구나 의심해볼 수 있겠지.”

“허나….”


만수의 말은 끼익 하며 부뚜막 문이 열리는 소리에 중단됐다. 영실과 만수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 그릇이 담겨 있는 소반을 들고 걸어오는 역리가 보였다.


만수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역리를 도와주었다. 역리의 말대로 이곳은 주막도 아니고 그 역시 주모가 아니다. 비록 만수가 그 행동의 불손함에 반 협박을 하였다지만, 마패馬牌나 용패龍牌를 보이지 않는 이상 그들은 어디까지나 손일 뿐이다. 가만히 앉아서 밥상을 받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어이쿠, 이거 아주 맛있겠습니다, 나으리.”

“허허, 이거 너무 큰 신세를 지는구먼.”


만수의 너스레에 영실은 웃음을 지으며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자 역리도 그리 꼬인 사람은 아니었는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소반 위에는 국밥과 밑반찬이 소박하지만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영실이 눈짓을 주자 만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허리춤에서 죽통을 꺼내들었다.


“역리께서 이리 뜨근한 밥을 내오셨으니 반주는 내가 내놔야 하지 않겠소?”

“허헛. 이거 도리를 아시는 분이구먼요, 그래. 소인은 그저 박가朴家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특임위장이라면 무반 중에서도 고위층에 속한다. 허나 그것을 티 내지 아니하고 능숙하게 시전 호위무사 흉내를 내는 곧잘 내는 만수를 보며 영실은 속으로 나직히 웃었다. 자신을 박가라 소개한 역리가 잽싸게 나무 그릇을 내와 한잔 두잔 걸치기 시작하니 조금은 냉랭했던 분위기가 어느새 화기애애해졌다.


“에이, 소인은 그래서 장생원님이 정말 저기 중경의 높으신 양반인줄 알았다니까요?”

“허허. 나도 그러면 오죽 좋으련만.”

“나으리가 좀 있어보이긴 한가 봅니다? 으하하.”

“허, 장무사님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러한가. 생김새가 어딜 봐도 최소 판서급아닌가. 안 그렇습니까, 나으리.”

“판서라. 상상만 해도 즐겁구먼. 허허.”


영실은 만수의 농이 약간 지나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물고 늘어져봐야 의심만 더 살 뿐이었다. 영실은 술을 즐기지 않는 터라, 평소에 간혹 마시던 청주도 두 세잔이면 더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만수가 꺼내놓은 술은 맑은 것은 청주와 같은데 그 냄새와 맛이 여간 독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뭐라 하는 술인가요? 물처럼 맹숭하게 생긴 것이 여간 톡 쏘는게 아닌뎁쇼?”


박가의 질문에 영실이 불콰해진 얼굴로 만수를 쳐다보았다. 만수는 텅 비어버린 호리병을 보며 아쉬운듯 입맛을 다지며 대답했다.


“소주라는 거요. 나도 자세한건 모르지만 청주는 막걸리처럼 쌀을 담구는 거고 소주는 쌀을 불로 어떻게 한다더군. 그래서 불사를 소燒를 써서 소주라 한다나. 다만 청주에 비해서 쌀이 많이 필요해 가격도 조금 비싼 편이라오.”

“아! 과연.”


비싼 술이라는 말에 더 동한 듯 박가는 빈 나뭇잔을 보며 괜한 군침을 삼켰다. 영실은 그때 만수의 눈에서 빛이 번뜩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만수는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박가에게 몸을 기대며 넌지시 물었다.


“이 소주는 독하기가 아주 독해서 날붙이에 상했을 때 부어주면 아주 좋수. 그래서 난 먼 길을 다닐때마다 조금 비싸긴 해도 많이 들고다니는 편인데, 어째 한 두어병 드리면 받으실꺼요?”

“어이쿠. 비싼거라는데 소인이 받아도 될는지…….”


하지만 말과 다르게 박가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수는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바랑에서 죽통을 두 세 개 꺼내 박가에게 건네주었다.


“저녁밥도 얻어먹었고 편안한 잠자리도 마련해줬으니 이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니겠소. 하하하.

“하하하. 장무사님은 통쾌하시군요.”


그렇게 껄껄 거리며 웃던 만수는 갑자기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말이오. 내 나으리를 뫼시고 서경길에 오르기 전에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소문이오?”

“그렇소. 그, 뭐더라. 활, 뭐시기한 도적떼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해서 말이요. 아무래도 호위를 맡고 있는 만큼 영 껄끄러워서….”

“아, 활빈당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순간 영실과 만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으나 박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박가는 신이 난 듯 떠들어 댔다.

“요즘에 그 활빈당 때문에 난리가 났지요.”

“허어. 내 들은 바로는 일개 도적에 불과할 터인데 난리라니. 서경의 군사들은 정엄하기가 서릿발 같기로 유명하고 용맹하기가 호랑이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들었거늘, 어찌 도적의 무리가 그리 활개를 친단 말인가?”


영실의 말에 박가는 주변을 살짝 두리번거렸다. 박가는 얼굴을 들이밀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요. 그 활빈당이라는 자들이 보통이 아니랍니다요.”

“보통이 아니라면? 어디 무술의 고수들이라도 된단 말이오?”


만수의 시큰둥한 발언에 박가는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흥분한 듯이 떠벌거렸다.


“활빈당의 무리 중에 무술의 고수 아닌자가 없답니다요.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출중한 것이 활빈당의 당수인 ‘홍길동’이라는 자인데,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10장 밖의 바위도 가루로 만들어 버린 답니다.”

“에이, 그건 말이 안되다오. 내 비록 호위무사를 하고 있는 몸이지만,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그건 무리요, 무리.”


박가는 만수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더욱 흥분해서 손짓발짓을 하며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아닙니다요. 이건 제가 직접 본건 아니고 서경과 중경을 왕래하는 파발꾼 친구에게 들은겁니다만 그 친구가 서경의 와호현臥虎縣 가는 길에 활빈당이 그들을 잡으러 온 관군과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답니다. 그런데 붉은 도포를 입은 아주 호리호리하게 생긴 자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관군들을 무찌르는데, 관군들이 손도 못쓰고 나가 떨어졌답니다요. 그러던 와중에 한 관군이 슬그머니 다가가 삼지창으로 그 작자의 등을 찔렀는데! 이건 웬걸! 피를 토하며 꺼꾸러지긴 커녕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이 부러지더랍디다. 그 친구도 나중에야 그 홍포를 입은 자가 활빈당 당수인 홍길동이라는 걸 알았답니다요.”

“허어,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백성들이 아주 힘들겠구먼.”

“그건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요.”

“아니, 도적떼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그렇지가 않다니. 그 무슨 소리인가.”


박가는 만수와 영실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 활빈당이라는 도적들은 그냥 도적이 아니라 의적義賊입니다요. 의적.”

“하! 의적? 이보시오, 박가. 의적이라는 건 어디에도 없소. 신체건강하고 그만한 무술을 지녔으면 나처럼 시전 호위무사라도 할 일이지, 그걸로 재물을 턴다는 건 그 자들이 정당치 못하다는 말 아니요? 틀림없이 훔친 재물을 조금 떼어내서 인심 쓰듯이 주는 것일거요.”

“…서경 들어가시면 그런 말은 조심해서 하셔야 할 겁니다.”


워낙 짧은 순간의 일이라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영실은 박가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았다. 박가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서경에는 활빈당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장무사님 말 처럼 부자들의 곳간을 털어 나누어 주는 것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여타 도적과 다르다보니…….”

“근본적인 부분이라?”

“예. 그, 자노를 모두 없애자 라고….”

“환인!”


만수는 부지불식간에 나온 탄식처럼 내뱉었다. 영실이 가볍게 만수에게 눈치를 주며 박가를 보았지만 박가는 무언가를 눈치 챈 기색이 아니었다. 애초에 시전 호위무사라는 직업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곳도 많고 듣는 것도 많아 아는 것이 많은 직업인 것이다.

박가는 만수에게 허락을 얻어 죽통의 마개를 빼낸 후에 잔에 술을 따랐다. 물 처럼 맑은 술이 꼴꼴 소리를 내며 잔을 채웠다. 박가는 목이 탄지 술을 쭉 들이키고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도적들이라면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이들을 살려두진 않을 겁니다요. 하지만 활빈당은 다르답니다요. 저도 소문으로만 들어서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답니다요. 그리고 쳐들어간 관아나 부자집에 있는 자노는 꼭 다 부순답니다요. 그러다보니 천한 것들이 그네들을 의적 취급할 수 밖에요.”

“아니, 왜 자노를 부수는데 백성들이 좋아한단 말이요?”

“에그, 장 무사님은 호위무사지 않으십니까요. 어디 자노가 감히 발이나 들여놓겠습니까만, 다른 직업들은 그렇지 않지요. 당장 소작 부치는 농꾼들만 해도, 지주들이 자노를 쓰면서 소작 떼인 이들이 얼마나 많은뎁쇼. 게다가 공방 같은 곳은 말도 못합니다. 어디 촌구석의 대장간은 아직 안 그럽니다고 합니다만, 서경에 있는 대형 공방 같은 곳은 전부 자노를 써대니 장인이 필요가 없답니다요. 그러니 어찌 불만이 없겠습니까요.”

“허어. 허나 자노가 있어 편해진 것이 많지 않은가? 가령 광산 같이 위험한 곳에서는 사람 대신 자노가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게 또 그렇지 않습니다요. 당장 먹고살게 없어지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요. 근데 높으신 양반들은 그걸 모릅니다요. 그저 뭔가 새로운 자노를 만들면 어떻게든 투입을 못해서 안달이니. 그런데 활빈당이 나타나서 가려운 곳을 긁어주니 좋아할 수 밖에요.”

“허허. 그건 또 그렇구먼.”


만수는 영실의 눈치를 살폈다. 그 ‘새로운 자노를 만들어 어떻게든 투입을 못해서 안달인 높으신 양반’이 바로 영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실도 이 자리에서 그런 티를 낼 정도로 수양이 얕지 않았는지 오히려 박가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한 잔 두잔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죽통 하나를 다 비웠다. 취기가 얼큰하게 오른 영실이 자리를 파하길 권하자 만수와 박가는 찬성했다.


박가와 만수가 식탁을 정리하는 동안 영실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기다란 탁자 같은 것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부드러운 짚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 영실은 의아해 했다. 탁자에 짚을 깔아놓다니. 짚을 건조시키려 한 것은 아닌 것 같은 데 어인 이유인가 하고 궁금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자동차를 몰고 온데다 술을 마셔 그런지 피로감이 갑자기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영실은 바닥에 주저앉고서야 이곳에는 온돌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때 문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으리. 만수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들어오시게.”


장지문이 스륵 하고 열리며 만수가 성큼 들어왔다. 품에는 요와 베개가 들려있었다. 만수는 요 한 장을 탁자위에 깔고 한 장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배게 역시 그 위에 올려놓았다.


“아니, 왜 요를 바닥에 깔지 않고 탁자위에 깐단 말인가?”

영실의 질문에 만수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서경은 온돌 가옥이 별로 없습니다. 좋은 돌을 구하기가 힘들어서라는데. 어쨌든 그래서 대부분 이렇게 바닥 위에 잠자리를 마련하지요.

침대라고 합니다. 아마 서경과 상경쪽 사람들 아니면 평생 보지도 못할 것입니다.”


“허허, 그러한가. 내 정녕 무지했구먼.”

“아닙니다. 나으리 만큼 박식한 분이 세상에 또 어디 계시단 말입니까.”

“아냐, 아냐.”

만수가 술에 취한 영실을 부축해 침대로 옮겨주자 영실은 어린애처럼 도리질 쳤다.

“내가 망원경으로 월궁을 훔쳐보면 뭐하리. 내 사는 땅의 풍습조차 모르거늘. 백성들을 위해 자노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백성들을 괴롭게 한다니. 헛배웠어. 장영실이여. 넌 헛배운 것이야.”

“약주를 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만 주무시지요.”

“아니 그러한가! 특임위장.”


자신을 눕히려는 만수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영실은 강한 어조로 물어봤다. 만수는 영실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만수는 문득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은 영실의 손이 아프게 느껴졌다. 만수가 뭐라 대답하려는 순간 등불이 픽 하고 꺼진 것 처럼 영실이 쓰러졌다.


만수는 나직하게 웃으며 영실을 눕혀주고 그 위에 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잠든 영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십의 나이에 당대 최고의 기유학사이자 종1품의 관직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달빛이 비추는 초로의 얼굴이 안쓰럽게만 보였다. 아마 스승 시모부의 낙향 때부터 환인에 대한 생각을 마음 속 깊게나마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실제로 맞닥뜨리는 순간 느꼈을 감정을 생각해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만수는 그런 영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영감. 비록 세상이 아직 자노를 받아들이지 못하나, 필시 수 백년 후 온 후손들이 입을 모아 영감과 영감의 스승을 칭송할 것입니다.”

달이 교교하게 자태를 뽐내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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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 쓰고나서는 우왕~ 했는데 이제 보니 습작 이상은 안되네요, 허허 ㅠㅜ

시모부는 아이작 아시모프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맞습니다. (아)이작 (아)시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