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역사 포럼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1.남북전쟁때 남군과 북군은 1853 enfield musket, 1861 spring field musket등의 전장식 라이플 총으로 무장했습니다.
라이플 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주로 횡대 진형으로 싸웠는데
서서나 앉아서 장전해야 하고 장전시간이 오래 걸리는 전장식의 한계때문에 그런건가요? 아니면 양 군의 장교들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인가요?
2.제가 첨부한 사진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표트르 황제때 제정 러시아 군의 4열 일제사격 방식이라는군요.
워털루 전투때 영국군은 주로 4열 횡대로 있었다고 들었는데 저런 식으로 사격을 했나요?
3.남북전쟁때 피터스버그 전투는 9개월이나 질질 끈 참호전이었는데
그 당시에 맥심같은 자동 기관총도 없었고 오로지 전장 총밖에 없었는데(물론 소수의 기병들은 연발총으로 무장하긴 했지만)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1차대전처럼 교착상태의 참호전 상황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아이고 정정합니다. 남부 기병대중 일부가 머스켓으로 무장했었다는건 지나친 비약이었던것 같습니다. 명색이 기병인데 당연히 전장식 카빈소총정돈 갖고있었겠죠. 그리고 일주일치 탄약을 하루만에 써버린다가 아니라, 양키들은 일요일에 한번 장전을 해두고 재장전없이 일주일 내내 쓴다 입니다.
라이플과 관련된 글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나 곰곰히 생각하다 어제 출저가 생각나 링크겁니다. http://blog.daum.net/nasica
전장식 소총을 사용하는 무대가 진형을 이루고 싸운 것은 당시 전장식 소총의 명중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에게 위협과 피해를 가하려면 방법은 여러 명이 동시에 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화망'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여럿이 동시에 사격을 하려면 서로 간의 공격에 방해받지 않도록 옆으로 나란히 서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한번 사격을 하면 화약의 연기로 다음 사격이 방해를 받게 마련이므로 가능한 전원이 함께 쏘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전장식 소총이라 해도 참호전 형태의 구성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바로 '장해물'의 존재입니다.
전장식 소총의 사격 명중률은 떨어진다고 하나 여럿이 동시에 쏜다면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당시는 탱크가 없었고 병사들은 걸어서 달려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중간 장벽이나 울타리가 있다면 이를 지나고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일 길이 좁다면 더욱 어렵습니다.
단단한 요새가 있다면 더욱 어렵습니다. 요새의 적은 전장식 소총만이 아니라 대포로도 쉽게 물리칠 수 없습니다. 탄탄한 방어 진영을 이룬 적군에 대한 공격은 언제 어느 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피터스버그 전투는 장기 포위전인데... 역시 탄탄한 방어 진영 때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남군의 강력한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북군에선 별별 수단을 동원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yayanim
당시 라이플의 보급률이 그리 높지 않았는데 이는 다름아닌 탄약보급의 문제였다고 합니다. 강선으로 인해 사정거리가 늘어났다 한들 분단위로 발사를 하고, 백병전이 잦아 탄약소모가 상대적으로 적던 당시 발사가 초단위로 이뤄지던 라이플과 연발권총은 며칠치 탄약을 단기간에 소모하기에 충분했지요. 드라마 게티츠버그 중에서도 능선 방어를 위해 대열을 갖추며 주인공이 병사들의 탄약을 확인하며 개인당 60발이란 대답에 적을 막기에 충분하다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특히 공업화된 북부와 그렇지 못한 남부에서 그 차이가 두드러지는데요, 총기부터 탄약 제작까지 대부분의 것들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던 남부는 기병대들도 카빈소총이 아닌 일반 머스켓 소총을 무장한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북군 기병대의 대부분은 일곱발들이 라이플을 갖추고 있었죠. 당시 남군의 농담으로 양키들은 일주일치 탄약을 하루만에 써버린다는 말도 있었으니 군수기술을 따라가지 못한 생산과 보급기술의 결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