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무협 포럼
판타지, 무협 세계의 정보나 설정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그 다채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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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wolf님의 Kierrn을 보던 중에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오랜만에 다시한번 Kierrn을 읽어보니 몇가지 추가된 점과 함께 본문을 더욱 잘 읽을 수 있도록 밝게 만들어 놓으셨더군요. 즐거운 마음으로 Goldenwolf님의 글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Artist 일을 하시는 Goldenwolf님께서는 아쉽게도 롤북이나 출판 계획같은 것은 없다고 하시더군요. Goldendwolf님의 말씀으로는 Kierrn은 그림을 그리는데 참고하기 위한 설정입니다. 그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의문스러운 것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뭔가 그림 이외의 형태로 나오게 된다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Kierrn의 설정을 조금 인용하자면 이렇습니다.
Kierrn은 늑대인간의 한 형태입니다.
하지만 Kierrn은 단순히 Big Bad Wolf로서가 아니라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힘을 사용할 줄 아는 늑대들이죠.
Kierrn들의 그러한 힘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축적된 Life Force의 연장으로 볼 수 있는데, kierrn들이 이 Life force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에게서 Life force를 얻어와야 합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측면에서 사람을 사냥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현대의 시대에는 Kierrn들의 약점도 알려져있고 사람들이 마냥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Kierrn들은 오랫동안 허기를 참지만 보통은 두 주에 한번씩 사람을 사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흉포함과 허기에 사라잡히게 되며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파멸하게 될 것 같군요.
문제는 Kierrn들이 자신들의 종족을 구하는 것 또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과연 그렇게 Kierrn이 된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에 직면하게 되고 뭘 느끼게 되는겁니까? 그들의 본능적인 갈망과 배고픔이 결국은 사람의 Lifeforce를 탐하게 된다해도 그들은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이었습니다.
호의(?)를 배푼 Kierrn이 가르쳐줄수도 있겠지요. 본능과 협박모두로 강압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의문스럽군요.
많은( 혹은 주로 뱀파이어들도) 소설들 속에서는 어찌되었든 결국 희생자는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정말 그런일이 갑작스럽게 개인에게 닥쳤을 때 그 개인들은 결국 납득하든, 즐기든, 저주하든, 아니면 스스로 파멸하든 긴 과정동안을 어떤 감정과 마음으로 보내게 되는 걸까요? 소설들에게서는 어쩌면 쉽게 재시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다른 이유로 사람 사냥을 금지하는 이미 죽다의 멘하튼 뱀파이어 사회나 흔히 등장하지 않는 반대극단에 있는 렛미인도 있긴합니다.
덧붙임 : Kierrn들은 사냥한 희생자에게 희생물에 대한 경의의 표시에서 뼈까지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웁니다. 물론, 어쩌면 영혼일지도 모르는 영적인 측면을 빼앗긴 희생자에게는(단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바로 Lifeforce를 영혼의 힘과 비슷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 한데 Goldenwolf님께서 분명하게 해놓지 않으셨군요.) 좋은 대접이 아니겠지요.
덧붙임 2 : 번역에 문제가 있을 것 같은 영어단어들은 그냥 그대로 썼습니다.
덧붙임 3 : Goldenwolf님께서는 예전부터 WoD의 늑대들을 즐겨 플레이 하신것 같습니다. Kierrn들도 WoD에서 기본적인 모티프를 얻으신 것 같습니다.
Story Teller, writer and World Maker; and also I'm a wolf. I like S.F and Fantasy; write genre story. I have nothing to show you, yet; sadly. I'm making story in this time.
스토리 텔러, 작가 그리고 세계관 기획자; 또한 늑대. S.F와 판타지를 좋아하며 장르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 입니다. 지금 만들어져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네요; 아직,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중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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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사람이었다고 해도 변이를 겪으면 다른 종이 되는 거죠. 길게 생각해볼 문제도 아니라고 봅니다.
왜 변화 혹은 변신을 겉모습만 받아들이고 내부는 받아들이지 않는 설정으로 꾸미는지 모르겠습니다. 외부 환경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변하면 당연히 내부 의식도 바뀌기 마련입니다. (카프카야 은유와 풍자를 위해서 그렇다고 쳐도 말이죠)
다른 종으로 거듭난다해도-한순간의 절정을 맞건, 그것이 몇개월이 걸리든- 그(남녀 구분 없이)의 모든 것은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은 결코 혼자사는 동물이 아니고(숲속에서 늑대같은 야생동물을 돌보며(?) 살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주변의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든 세상입니다(혹은 그렇게 알아왔던). 전혀 예상치 못하게 운명(달리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을) 일이 찾아왔을 때 그걸 쉽게 설명할 수 있는걸까요?
늑대를 예로 들어서, 호의를 베푼 늑대가 가르쳐줄수도 있고 무리의 알파가 새 일원이 되었다며 이해 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에서 직접적인 간섭이 온다해도 간단하게 볼 문제는 아닌가 싶습니다.
P.S 인간으로서 살 경험없이 어릴때부터 받아들였다고해도 주변에서 받아들이고 소통할 수 있는 다른 존재들은(그렇지 않아도 되고, 양육자가 그걸 막게 되겠지만) 인간입니다. 접촉하게 된다는 건 서로 통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렛미인을 특별하게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장 좋은 뱀파이어 소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렛미인에서 뱀파이어라 불리는 부류의 존재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합니다. 달라진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스스로를 죽일 수 없을 정도로 어렸기 때문이지요.
석아찬님의 말씀을 들으니 렛미인이 떠오르는군요.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래의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대략적으로는 어떤 느낌으로 하신말인지 알것같는데 구체적으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첫 댓글에 토픽을 제가 잘못 맞췄군요;;;고질병인듯
사람 사냥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각인과 생존 중 어떤 것이 우선이냐고 한다면 당연히 생존이겠죠. 1972년 안데스 산맥에서 있던 비행기 추락 사고 중에 생존자들은 희생자들의 시체을 먹으면서 살아남았습니다. 아주 절박한 외부환경은 각인도 뜯어 고칠 따름이죠.
물론 각인이란 것은 정신적으로 매우 강력한 족쇄입니다. 하지만...그것도 어느 정도입니다. 먹어야 산다면 먹을 수 밖에 없지요. 몇 달 전인가? 스펀지에서 세계의 대표 샌드위치를 다루더군요. 거기서 나온 멕시코 샌드위치는 벌레가 들어가 있었죠.(못 먹을 것이라고 생각안합니다.) 결국 진행자들은 방송의 진행을 위해 그리고 그들의 업을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먹었습니다.
결국 블루그리폰님이 혹은 본문에서 말하신 Goldenwolf라는 사람이 상상하시는 늑대인간이 필히 인간을 사냥해야한다면...뭐 결국은 그리 되겠지요. 인간이라는 자의식은 금 간 유리 한 장보다도 약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자주 보지 않나요? 어렸을 땐 김치라곤 입에 대지도 않다가 커서 별 것도 아닌 계기(억지로 먹은 친구네 김치가 끝내줬다같은)로 환장하는 사람들;;;비슷한거죠.
살인과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살인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회적 금기이고, 살인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도 다른 생물을 죽이는 것에 비해 훨씬 심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필요한 상황(예컨데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될 상황)에 놓이면 살인을 할 수 있게 되고, 또 그런 일을 거듭할수록 무감각해지기도 합니다.
전쟁터의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쟁 중의 피폐해진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생존을 놓고 사람을 살해했는가 많은 매체들이 전하고 있지요.
겟우님이 말씀해주셨던 유리와 같은 자의식이라는 표현이 날카로운 파편들을 떠올리게 하네요(원래의 표현과는 다른말이지만 그런 느낌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사냥을 받아들인다는 일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혹은 그녀)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어쩔 수 없이 사람을 헤치게 되었다고 해도)? 그보다는 마음속이 상처와 뒤엉킨 죄책감으로 차버리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한다는 건 어려운 과정이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이나 가족을 헤치고도 그건 먹이였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겠지요.






자신이 피식자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하물며 야생의 초식동물들도 일단 도망은 가지요. 붙잡혔다해도 발버둥은 칩니다. 반대로 기린을 사냥하던 사자(사자가 기린을 주식으로 삼을 만큼은 아니지만요;;무리사냥용 특식...)가 기린의 발차기에 목이나 다리가 부러져도 사자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요.
피식과 포식관계에서 의도의 순수성이나 본문에서 하신 말씀하신 경의같은 것은...전혀...관계가 없지 않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히려 행위 자체가 너무 순수해서 의도의 순수성 따위는 퇴색되어 버리는 것이죠. 피식자에게는 어차피 포식행위의 시작(포식의 의지가 외부로 확실하게 표출되는 상태)부터 포식자가 기피의 대상이고 말 그대로 아주 순수한 의미의 '적'이 되버립니다. 그 순간부터는 피식자에게 포식자가 약점을 공략당해도 포식자는 할 말이 없죠. 말 그대로 쌍방이 삶과 죽음을 놓고 벌이는 단순한 사투입니다. 미사어구도 필요없고...관용구도 필요없습니다. 피식자와 포식자가 지적 생명체라고 하더라도요
피식과 포식의 관계는 소설보다는 다큐멘터리를 더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편이 단순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에서 제시된 해법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글쎄요...자신이라는 스케치북에 타인의 심상이라는 크레파스로 칠을 한다고 생각되네요. 그 해법에 반문을 제기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유도된 생각이니까요. 어차피 소설은 즐거우라고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해학과 풍자 이상의 현학적인 무언가를 찾기 위한 지침서가 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현학적인 소설도 철학이나 과학 논문이 될 수는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