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단편 게시판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브롱코스 스타일-한 사람이 앞에서 말을 걸어 주의를 끄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이 뒤를 쳐 강탈하는 수법. 시체말로 뒤통수치기
1. 미국에서는 그 시각...
아침을 맞은 조지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일이 계획대로 되어 가지 않은 데에 대한 실망감은 아침 신문을 읽고 있는 그의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지금 이걸 보고 나더라 해결하라는 건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굳어있는 콜린의 얼굴에 날아든 신문은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그의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 묘하게도 고개를 숙인 콜린의 눈에 들어온 신문의 사진은 대형 건물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 비행기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 비행기와 건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미국인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방부장관으로서 충돌한 비행기와 건물을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견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란 말인가? 국민 여러분 미안합니다. 재수 없게도 우리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네요. 돈을 그렇게 쏟아 붇고도 말이지요. 그래도, 한 번 봐주시지요. 이렇게 말하란 건가? 내가 멍청한 레이건 인줄 알아!>
<<그보다 도 더 멍청 할거요.>>
콜린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의 두터운 얼굴은 그러한 일에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전에 있던 분들처럼 하시는 게...>
<... 또 그걸 하잔 말인가? 국민들도 이제 알건 다 알고 있소이다.>
<CIA국장과는 이미 얘기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번 일에 대한 희생양이 될 겁니다.>
말을 마친 콜린은 그 두터운 얼굴을 조지 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그것은 일종에 암묵적인 동의를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단상에 서면 거친 서부사나이인 조지었지만, 집무실 책상의자에서만큼은 갓 전입해 온 신병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의 상관은 바로 자메이카 흑인 노예 출신의 콜린 이었다.
<좋소. 되도록 이면 빠른 시일 내에 이 일을 무마시켜 야만 하오. 그 건에 대한 건...>
<염려 놓으십시오. 펜타곤에 한 대 추락시키고, 그 전에 이미 자폭장치를 사용했습니다. 설사 남아 있다해도 이미 무용지물입니다.>
<역시! 자네는 역대 미국방부장관중에서도 최고야.>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한 조지와는 달리 콜린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조지의 칭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콜린은 언제나 조지의 그 웃는 얼굴에 한방 먹여 주고싶은 생각뿐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채 조지는 연신 <<최고>>라는 말로 콜린을 추켜세웠다.
<<그리 고, 당신은 역대 미국 대통령중 최저야.>>
<경기가 연일
하강이군요.>
육중한 목소리에 베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TV는 밤새 켜져있었던 모양이다. 그에게는 끈 기억이 없었다. 화면에는 대형건물과 충돌한 비행기의 모습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자막으로는 최저 치로 떨어져가는 숫자들의 목록이 재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스펀도 이제는 물러날 때가 다 되었지요.>
베논의 대답은 상관없다는 듯 상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한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자리 하나를 차지하면 썩는 냄새가 날 테니.>
<왜 이렇게 늦었오?>
<위에 분들 하시는 일이 늘 그렇지요. 이걸 할까? 저걸? 아니야, 모두 아니야. 뭐 이런 식이지요. 덕분에 죽어나는 건 당신이나 나 같은 말단들이지.>
동조를 구하는 듯한 상대의 말에 베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 일이 보수에 비해서 너무 고되다고 느껴오던 터였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에 동의했다고 해서 그가 상대에게 마음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증거 자료나 얼른 넘기시오.>
날카롭게 말한 베논의 얼굴은 서슬 퍼런 살기로 덮여 있었다. 더불어 그의 손은 상의 속에 넣어져 있었다. 손아귀에 만져지는 것은 그의 체온에 의해 알맞게 데워진 금속이었다.
<성격도 참 급하군. 하기사, 그게 우리 같은 말단들의 특징이지.>
<잔소리말고 어서 내놓기나 해!>
베논의 요구에 상대는 순순히 두툼한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의 정면에는 독수리 마크가 선명하게 찍혀져 있었다.
봉투를 받아 든 베논은 성급하게 안의 내용물들을 꺼내려 했다.
<아아... 너무 서두르시는구먼.>
어느새 베논의 목덜미에는 대검이 다가와 있었다. 항상 날을 갈은 모양인지, 세세한 빛의 각도이동에도 변화무쌍한 반사광을 내뿜고 있었다. 가볍게 한 번 선을 긋는 것만으로도 베논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신네 CIA가 늘 그렇게 당하는 거야. 너무 성급해. 당신들이 떠난 자리는 누구나 다 알아. 아, 이건 CIA가 다녀갔던 곳이구나. 하구 말이야. 배트남에서도 그랬지? 당신들이 남긴 머저리 같은 통신문 때문에 우리가 그 일을 덮어 버리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줄 알아? 또, 북한에...>
<MD는 애들 만화 같은 일이 아니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날이 목에 다가서자 베논은 눈을 감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이 그의 경동맥을 뱀처럼 훑고 지나갔다.
<말을 조심해야지. 우리가 그 일에 민감한 거 알잖아. 그래서, 당신들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거 아닌가? 나라를 위해서 좀 희생해 달라고.>
<쳇! 거지같이 부려먹는 것도 모자라서, 욕까지 먹으라고?>
<낸들 별수 있나? 나는 위에 분들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야. 사실, 당신네 국장이 그런 스캔들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우리가 이렇게 당신들에게 손을 벌리지는 않았을 거야.>
말이 끝나자 베논의 목 언저리를 감돌던 칼날이 멀찍이 물러났다.
<확인해 보시오. 굳이 우리들 사이에 영수증을 발급할 필요는 없을 테지? 아, 총은 신경 쓰지 마. 적어도 내 대검이 자네 총보다는 빨라. 이 거리에서는 말이지.>
상대의 말에 베논은 내용물들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내용물이라고 해봐야 고작 책 한 권은 됨직한 두툼한 서류와 CD가 전부였다. CD에는 벌거벗은 여자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베논과 눈이 마주치자 상대는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건성으로 서류를 넘겨보던 베논은 갑자기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타 들어간 종이뭉치는 재떨이 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공중을 부유하고 있었다. 종이가 완전히 다 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베논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것들이 원본이란 걸 어떻게 믿지?>
<믿으시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복사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믿을 수밖에 없는 심정일 테니.>
상대의 말에 열이 치밀어 오른 베논은 노트북을 내던지듯이 탁자에 올려놓았다. 잠시후, 확인해 본 CD의 내용은 확실했다.
그는 주저 없이 CD를 꺼내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부서져 버린 CD의 반사면 속에 베논과 상대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상대는 여유로운 미소를 띄우며 베논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더러운 거래에 항상 뒤따르는 악수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오. 아, 참! 이참에 백악관 쪽으로 올 생각은 없소? CIA는 이제 당신 연봉지불하기도 힘들 정도로 예산이 삭감될텐데.>
<괜찮소. 걱정하지 마시오. 이게 내 천직이니.>
<그럼, 또 봅시다.>
<그럽시 다.>
문을 열고 사라지는 상대를 보는 베논의 눈은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그는 깊은 생각을 할 때면 마치 눈뜬장님처럼 눈에 초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네. 접니다. 말씀하신 대로했습니다. 네. 그러지요.>
짧은 대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끈 베논은 다시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
2. 그 다음 시각 영국에서는...
<또 죽썼나 보군.>
<그러게 말이야. 킥킥!>
뉴스를 보는 스미스와 폴은 고소하다는 듯이 비웃고 있었다. 이미 밖에서는 애도의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생각되어졌다.
<그래도, 미국 측의 대응에는 두손 들었어. 그렇게 빨리 뒤집어씌울 놈을 찾을 수 있었을 줄이야.>
<다른 건 몰라도, 시비 걸어서 전쟁 일으키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놈들이지.>
<설마, 우방국인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걸?>
<이 사실을 알면 조지의 표정이 어떻게 바뀔까?>
스미스의 말에 폴은 손뼉을 치며 좋아라 떠들어댔다. 그 바람에 앉아 있던 의자가 뒤집히고 말았다.
<하하하! 젠장할! 그 콜린 자식도 두꺼운 면상이 한 겁풀은 벗겨질 걸? 그 생각만 하면...>
<그래도 가끔은 우리가 하는 일이 잘 한 건지 회의가 들어.>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은 스미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TV에는 이미 사이렌 소리 외에는 아무런 잡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카메라가 이동함에 따라 일렬로 늘어선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새삼스레 뭘. 우리보다는 자기들 국민을 실험대상으로 삼는 미국 측이 더 나쁜 거야. 적어도 우리 영국은 국민들을 무기 소재로 쓰지는 않아.>
애써 용기를 북돋아 주고자 한 폴이었지만, 그 역시도 스미스와 같은 심정이었다. 새벽녘에 본 뉴스에는 사상자의 숫자가 계속적으로 늘어만 갔다.
<그거야. 네가 잉글랜드 사람이니까 그렇지. 나 같은 스코틀랜드 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스미스의 말에 폴은 조금 화가 났다. 그로서는 구태여 지역구분을 하는 스미스의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로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스미스의 주먹은 무식한 스코틀랜드놈 답게 무자비했다.
<자, 자. 진정하구. 일이나 하자. 휴식 시간도 다 되었어. 오늘은 어디를 감시해야 할까나? 청크애들이나 볼까나?>
3. 같은 시각 프랑스에서는...
<왜 하필이면 SAS지? 우리가 그 자식들보다 못한 게 어디있다구?>
<실망하지마, 롤랑.>
쟝은 애써 흥분한 롤랑을 달래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 역시도 롤랑과 같은 심정이었다.
<영국 놈들은 항상 그래. 손을 잡고는 언제나 뒤통수 칠 일말 생각하지.>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야. 롤랑. 이번 일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독일을 포함한 EU국들이 끼어 있어. 어느 나라나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지.>
<그래도, 그렇지. 애초에는 우리 외인부대가...>
<그만 하자, 롤랑.>
담배에 불을 부치던 쟝은 롤랑의 입에 손가락을 댔다. 그의 눈은 사방을 날카롭게 돌고 있었다. 그러한 쟝의 눈동자를 본 롤랑은 그제서야 겨우 입을 다물 수 있었다.
<... 좋은 기회였는데... 시민권을 딸 수 있는... SAS자식들보다 내가 더 낳다구...>
<알고 있어.>
담배를 한 모금 들이 삼킨 쟝은 아이를 타이르듯이 롤랑에게 말했다. 그는 졸음이 가득 담긴 듯한 눈으로 롤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린 동생을 둔 형의 마음이 단긴 눈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롤랑은 철없는 동생과도 같았다. 지금은 이미 세상을 등진 그의 어린 동생과도 같은 순수하게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자. 시간은 우리편이야. 우리 같은 아프리칸에게는 최고의 축복이지. 그보다 부모님은 안녕하시지?>
<여전하시지, 뭐. 어서 빨리 시민권을 따서 모셔들 와야 하는데.>
<돈은 여전히 송금하고 있어?>
<응.>
<좋아. 오늘 술은 내가 사지.>
<제길! 항상 그러잖아. 적어도 술 한잔 살 돈은 나도 있다고.>
발끈한 롤랑은 품속에서 지갑을 찾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쟝의 손이 더 빨랐다.
<나중에 시민권을 따면 그때는 성대하게 베풀라고. 아프리칸.>
4. 조금 지난 시각 아프간에서는...
<거짓말이지요? 이거...>
TV를 보던 하산은 겁에 질린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역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산의 아버지 이즈마엘에게는 과거 소련군주둔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뉴스가 무얼 말하는지 그는 예언자처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앞으로 벌어질 일들 역시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과거 소련군 주둔시절에 게릴라들의 무기공급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가 무자하딘 형제들에게 전달해준 미국제 무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형제들의 숭고한 정신과 피의 대가로서 이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지만, 그 뒤에는 미국이라는 막강한 돈과 무기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었다.
이즈마엘은 아프간의 그 누구보다도 미국제 무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실전에서의 위력은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들보다도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국경을 넘어야 겠구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아버지!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그래도, 과거에는 소련 놈들하고 싸운 아버지가...>
<하산. 이 아비는 용감한 무자하딘이 아니란다. 그저 그 시절에는 그렇게 하는게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단다.>
이즈마엘은 어린 아들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하산은 그런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가 버렸다.
<하 산..>
2개월 후 이즈마엘은 TV에서 공개 처형당한 자신의 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태양은 아직 정오를 알리지 않았다.
라덴은 그 해를 넘길 때까지 잡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아프간을 떠나있었다. 그런 가운데에 전쟁은 흐지부지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다만, 이즈마엘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는 아들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형틀의 수래바퀴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5. 많은 시각이 지난 파키스탄에서는...
<아우 시끄러워...>
로이는 베개로 머리를 감싸쥔 채 아직 침대 속에서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조금 있으면 부대에 복귀할 시각이었건만, 그는 여전히 벌레처럼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만 일어나요.>
서투른 영어의 여자 목소리에 로이는 겨우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로이는 신경질적으로 베개를 던지며 일어났다. 다행히 여자에게는 맞지 않았지만, 그녀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왜 이리 시끄러운 거야?>
<아마도, 청년시위대들일거에요. 요 근래는 자주 저러는 모양이에요.>
<왜들 저리지?>
<인도하고 한바탕 전쟁이라도 하고 싶어 서지요. 당신들이 우리에게 무기와 돈을 가져다 주었잖아요.>
말을 마친 여자는 창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아침햇살과 더불어 시위대의 고함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들어왔다.
<웬 쓸데없는 짓들이야? 그렇게들 죽고 싶은 건가?>
<당신들은 이해 못할거에요.>
<종교문제나 그런 거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야?>
<... 그런데, 로이... 편지가 왔더군요.>
<뭐?>
여자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로이는 놀라 되물었다. 그로서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 담배를 피우다 어머니에게 걸렸을 때처럼.
<음... 아마도 어머니 같아요. 여자 이름인데, 당신과 성이 같아요.>
여자에게서 봉투를 건내받은 로이는 의심쩍은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봉투의 겉면은 전혀 손 댄 흔적이 없이 깨끗했다. 그로서는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긴 셈이었다.
그는 여자가 볼까 조심스레 봉투를 뜯고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단숨에 읽어 내렸다. 사실은 읽은 척만 했을 뿐이었지만, 로이는 자신의 연기가 훌륭하다고 여겼다.
<어머니가... 이렇게 쓰셨어. 어서 당신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오라고. 방은 이미 준비해 뒀다는 군.>
<정말이요? 기뻐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와락 안긴 여자의 등뒤에서 로이는 슬며시 편지를 구겨 쓰레기통속으로 던져 버렸다.
<<적어도 내년까지는 이 계집애와 재미나 보고... 마누라에게는 전화로 쓸데없이 편지 쓰지 말라고 해야 겠군.>>
로이는 자신의 치밀한 계획을 생각하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한 그의 웃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 역시 섹시한 미소로 답하며 로이의 입술을 덮었다.
여자 역시 로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년까지는 내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거야. 그때쯤이면, 이 놈팽이 양키도 고 홈할테니... 즐길 시간은 많아.>>
6. 해가 바뀌어 한국에서는...
<음... 조금 황당하네요. 이건...>
<하하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앞에 앉아 있는 놈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십중팔구 놈은 다른 놈들과 똑같은 소리를 할 것이다.
<분량도 책으로 내기에는...>
<아니, 이건 거의 시놉시스같은거구요. 편집장님과 상의해서 조금 내용을 다듬고, 분량을 늘리고 싶은데요.>
<흠... 일단 소재는 좋습니다. 기발하네요. 누구도 생각지 못한 걸...>
그럴 테지, 자식아. 네놈들 녹음기처럼 지껄이는 입과 연결된 뇌로는 전혀 상상도 못했을 거다.
<하지만, 역시... 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요새 출판사들이 불경기거든요. 이해하시지요?>
<네.>
이후에는 전에도 수없이 들었을 말들과 내가 내뱉은 의미 없는 쓰레기 같은 말들의 왕복일 뿐이었다. 출판사건물을 나선 나는 주저 없이 곧장 집으로 향했다.
안 피우던 담배마저도 꼬나 물자, 괜스레 서글픈 생각마저도 들었다. 군대제대후 2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아무런 결과물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씨발, 개좆같은 세상 같으니.>
절로 욕이 나왔다. 세상이 나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세상은 나에게 더욱더 힘든 고통을 내려주기만 했다.
<어이 누나. 그 담배 우리도 빨아보면 안될까?>
어디서 굴러먹다 온 양아치들인지 두명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크기도 뭐만한 것들에 상판을 보니 고등어들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세상이었다. 주여 왜 저에게 이러한 불합리한 일들을 겪게 하십니까?
<이런 좆마니 딸딸이 같은 새끼들이! 눈시깔을 확 후벼파 버릴까 부다! 썅!>
육두문자를 몇 마디 쏟아내자 비행 청소년들은 그제서야 알아차리고 사라졌다. 집에까지 오는 동안 담배는 다 비어 있었다. 백수 생활하는 새끼한테 던힐담배는 사치 중에서도 개사치였다.
애꿎은 집포라이터만이 허공을 향해서 불길을 올릴 뿐이었다.
집에 들어오자 마자 킨 컴퓨터는 요란한 팬 소리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먼지 가득 먹은 이 놈의 소리는 마치 세상을 향해서 부조리를 외치는 내 모습과도 퍽이나 닮아 보였다. 하지만, 놈도 알고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이 부조리하다기 보다는 내가 세상과 맞지 않고, 점점 도태되어 가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결심을 굳게 했다. 영어로 이루어진 사이트 메뉴들이 그렇게 친절하게 맞아 주지는 않았다. 이를 악물고 가입 조건을 천천히 입력해 갔다. 어차피 세상에 내 글이 종이에 찍혀 나올 수 없다면, 결국은 인터넷 사이트 뿐이었다. 저쪽을 믿는 수 밖에...
<<smashword.com>>
그리고, 두 번째 들른 곳은 한국 사이트였다. 비교적 쉽게 가입했지만, 몇 가지 설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짜증이 밀려 온다. 조금 더 인내심 있게 진행해서 결국 올렸다.
<<upaper.net>>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길에 따라 방금 전에 출판사에서 보였던 글들이 두 사이트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의 손길은 멈추지 않는 붉은 구두를 신은 것처럼 신들린 듯이 다른 사이트들을 짚어 나갔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왔었음을 알리듯이 그 쓰레기 같은 글들이 남겨졌다.
내가 끌려온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실상은 새벽이라고 봐야 할 시각이었다.
<자네가 이걸 썼나?>
눈앞에 들이댄 스탠드로 인해 상대를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로 보아 대략 40대중반은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민 책의 제목은 낯익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쓴 작가는 내가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자네가 쓴 거야? 아니야? 묻는 말만 답해.>
<일단 한 번 읽게 해주세요.>
남자는 귀찮아하는 듯 했지만, 이내 나에게 책을 건네 주었다. 아마도, 그것이 나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마지막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책의 내용은 내 생각 대로였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주요묘사, 표현 등은 전부 내가 이 손과 머리로서 세상에 만들어 내놓은 것들이었다.
<개새 끼!>
순간 지나가는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했다. 나의 그러한 바람을 들은 것인지 상상 속의 인물이 나타났다.
<씨발새끼! 내 소설 같고 개수작해?>
<흑흑 흑!>
편집장은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보인 그의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 소설을 썼어요.>
흐느껴 울며 비굴하게 매달린 편집장의 말뜻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한강의 야경은 정말 멋있어. 이게 다 우리가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거야.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에 나는 마약까지 팔면서 나라에 충성을 했지. 후후후.>
추억에 잠겨 코웃음을 짓는 그와는 달리 나는 사지가 떨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묶여 있는 발밑으로 보이는 시커먼 강물은 무엇이라도 빨아들이고는 감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무리 깊고 그 끝을 알 수 없다고 해도 이 세상 모든 것을 감출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히히히 히!>
그러한 생각을 하자, 나는 갑자기 이들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물론, 그들은 지금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은 편안하게 해 주마.>
그 것이 내가 세상에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도 미국에게 큰 소리 한 번 칠 수 있겠군요.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이게 있는 한 코쟁이들 우리한테 설설 기어야 할걸? 얼마를 부르면 될까? 이 소설을...>
<그런데, 그게 정말로 숨겨진 사실과 거의 같단 말입니까? 저는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그런 일개 애송이가 어떻게...>
<뭐, 하늘의 뜻이겠지. 아무리 감춘다고 한들 하늘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지. 죽은 녀석이 마지막에 명작을 나긴 셈이군. 녀석에게는 미안하게도 이건 우리들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야. 하하하.>
<이게 뭐지? 작성자... Red Madness Angel? 어라? 탈퇴 회원이네? 연락할 방법도 없으니 원... 애라 모르겠다. 뭐... 재미있는 건 모두가 볼 권리가 있다고. 다른 사이트에도 올려야 겠다.>
브롱코스스타일이라는 제목이 붙은 소설이 지구상의 네트를 돌아 다시 청와대까지온 것은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서였다.
2010년 6월 1일.
버전 2.0 개정.
약자들을 위하여.
진실과 정의가 다시 살아 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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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탐정 이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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