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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m 크기의 거대 가재 무리가 부두를 덮쳐 사람을 습격한다! 아리카와 히로가 쓴 <바다 밑>은 대략 이런 내용으로 흘러가는 소설입니다. 언뜻 들으면 일본에 흔한 유치찬란(?) 괴수물처럼 보이겠죠. 작가도 이런 이미지를 아예 부정하진 않습니다. 작중에서 개그 코드로 나오는 대사를 보면 괴수물이란 소재와 그에 따르는 문제점에 완전히 고개를 돌리진 않아요. 다만, 이 소설은 영리하게 거대 가재가 나오되 가재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괴수는 어디까지나 극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소재고, 작가가 진짜 이야기하려는 건 그 상황을 둘러싼 사람들의 갈등과 싸움, 승리와 패배입니다. 괴수를 조연으로, 사람을 주연으로 결정한 현명한 선택이죠. 하지만 거대 가재 무리는 지진이나 해일 등과는 또 다른 참사를 일으키기에 괴수물을 빙자한 자연재해 장르로 빠지지도 않습니다. 괴생물체가 주는 공포라든가 생물체의 습성을 분석한다든가 하는 장점도 충분히 살렸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가재들이 몰려오자 다급한 나머지 잠수함에 갇힌 사람들과 대책을 세워 괴물을 몰아내려고 하는 경비대의 시선으로 진행합니다. 진짜 주연들을 따지자면 아무래도 잠수함 인원 쪽. 어뢰 실습 간부였던 나츠키, 휴우하라 삼위는 정박 중인 항에서 갑작스레 괴물들이 들이닥치자 민간인 보호에 앞장서나 수가 너무 부족해 오히려 배로 후퇴합니다. 그 와중에 구한 아이들과 갇히고 내내 구조만 바라게 되죠. 하지만 잠수함 특유의 폐쇄적인 드라마는 펼쳐지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망가진 잠수함으로 적 해군과 대치한다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배는 멀쩡하고, 흠집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방사능 누출은 원자력 잠수함이 아니니까 걱정 없습니다. 적 구축함이나 잠수함도 없고, 기껏 적대 세력이라고 해 봤자 가재들뿐인데, 가재가 3m나 된다고 해도 군함을 부술 수는 없죠. 함내 식량, 식수, 옷가지도 충분하니 먹고 살 걱정 없습니다.
문제는 아직 혈기왕성할 삼위 두 명과 아이들이 오도가도 못하는 좁은 함에 갇혔다는 겁니다. 아니, 이것만이라면 괜찮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들 중 중학생인 케이스케와 성격이 크게 삐뚤어진 아이였고, 좁은 공간에 갇혀 군인 두 명의 명령을 듣게 되자 반발심이 먼저 앞섭니다. 어른이라고 존중하거나 지시를 따르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합니다. 하는 짓을 보노라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놈이죠. 평소 같으면 어린아이의 장난으로 끝날 테지만, 배 밖에 식인 가재들이 돌아다니는 터라 사소한 잘못 하나가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나츠키, 휴우하라는 케이스케와 이를 따르는 일련의 아이들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웁니다. 케이스케는 처음에 그저 불평만 하더니 갇혀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삐뚤어진 심성이 걷잡을 수 없이 나락에 빠져들고 급기야는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장난에 몸을 맡기게 되죠. 그렇다고 두 삼위가 제대로 된 어른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두 군인은 그저 혈기만 앞선 청년일 뿐. 아버지상 혹은 어머니상이 될 존재가 없는 이 집단은 상당히 불안합니다. 언제 뭔 일이 터질지 몰라요.
잠수함 상황은 미숙한 어른과 삐뚤어진 아이의 대립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전부 같은 마을에서 왔기 때문에 잠수함으로 피신하기 전부터 이미 억누르고 억눌린 세력 구도가 형성된 상태입니다. 그 와중에 거대 가재들에게 둘러싸이고, 함에 갇히고, 미숙한 어른이 끼어들자 세력 구도가 미묘하게 변해 갈등이 첩첩산중으로 쌓여갑니다. 소위 ‘초딩’에 불과한 케이스케가 그 구도 안에서 나름대로 권력이랍시고 횡포를 부리는 걸 보면 어이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수준. 허나 케이스케의 횡포는 어린이의 투정이라기보다 잘못된 어른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에 단지 웃고 넘어갈 수도 없습니다. 마을 아이들의 세력 구도는 부모들의 세력 구도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잠수함 속 아이들을 통해 어른들의 암투와 질시를 고발하는 식이죠. 케이스케도 결국 순진한 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고발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개념 없는 어른이 아이를 망치는 좋은 사례죠.
그래도 이 와중에서 몇몇 아이들은 숨겨왔던 진가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평소 학교에 다니며 케이스케에게 억눌렸던 아이들이 극한 상황을 만나자 자신만의 특기를 발휘하고 자신감을 찾는 식입니다. 케이스케는 공부 잘 하고 선생님과 부모에게 칭찬 받는 모범생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험 잘 보는 아이라도 잠수함 속에서 투정만 부리면 아무 소용 없죠. 부모가 가게 일에 바빠서 항상 놀림만 받았던 시게하사는 아버지가 식당을 하는 덕분에 오히려 이럴 때 장기를 선보입니다. 아이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부족한 재료를 이용해 최선을 다해 최상의 식사를 조달하는 것. 시게하사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은 이처럼 갈등을 거치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데, 그래서 이 책은 성장소설의 면모도 지녔습니다. 처음엔 중학생에 불과했던 아이들이 후반부에 어른스러운 말투로 지나간 일을 성찰하는 걸 보면 마음이 꽤 뭉클합니다. 죽음을 눈 앞에서 본 만큼 더 깊게 성숙했다고 할 수 있죠.
아이들이 중반부를 지나 완전히 달라지고 후반부에 이르러 성장하는 것과 달리 두 삼위에겐 큰 변화가 없습니다. 미숙하긴 해도 어른은 어른이니까요. 단, 두 사람은 친한 친구인데도 성격은 정반대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나츠키가 항상 고함치고 으르렁거리지만 의외로 챙겨주는 데 비해 휴우하라는 늘 넉살좋게 웃지만 웃음 속에 가시가 숨어있죠. 아이들을 돌보며 각자의 성격이 뚜렷이 드러나는 게 변화라면 변화일까요. 다만, 나츠키의 인생에겐 그야말로 큰 변화가 찾아오는데, 아이들 중 여고생인 노조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매사 엄한 얼굴로 무서운 말만 하지만, 부족한 것이 있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챙겨주는 나츠키에게 노조미는 서서히 호감을 느낍니다. 더군다나 나츠키는 가재들에게 잡아 먹힐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과 아이들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니 반할만도 하죠. 나츠키 역시 아이라고 하기도, 어른이라고 하기도 미묘한 나이의 노조미가 가까이 다가오자 전에 없던 감정이 생기는 건 마찬가지. (키가 크다, 귀엽다, 몸매가 예쁘다 등의 외모 묘사가 자주 나옵니다) 이런 두 사람이 좁디 좁은 잠수함에 갇혀 매일 얼굴을 마주보니 연애전선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 없죠.
나츠키와 노조미의 관계는 등장인물의 관계 구축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지라 이 작품은 어떻게 보자면, 괴수물을 빙자한 연애소설. 아니, 어쩌면 작가가 진짜 노렸던 건 연애물일지도 모르겠네요. 나츠키는 성질 덕분에 엄한 아버지가 되고, 노조미는 제일 연상이라 사실상 아이들을 돌보니 어머니가 되는데, 덕분에 두 사람이 있으면 이제 막 아이들을 돌보는 남편과 아내의 오라가 풍기기도. 극한 상황과 나이차를 벗어나 노조미가 머뭇거리며 우회해서 마음을 고백하려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작가는 섣불리 두 사람을 이어주진 않습니다.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서 쌓은 애정인 만큼 꽤 성숙하게 결말을 맺습니다. 독자에 따라서는 가슴 아픈 전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식으로 흘러갔기에 두 사람의 관계가 보다 현실적이고 빛나는 결실로 마무리되었겠죠. 고생 좀 함께 했다고 단숨에 커플 탄생이라면 생각 없고 문제 많은 커플일 테니.
그러니까 솔로부대의 정취를 느끼는 자는 괜히 괴수물이라고 책을 집어 들면 안 됩니다. 거대 가재보다 나츠키가 더 미워질 수도. (미소녀 고교생을 반하게 하다니.)
부두에 올라온 거대 가재를 막는 경비대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흡입력이 떨어집니다. 커플이 없어서… 는 농담이고, 아무래도 폐쇄 환경에서 지내는 드라마가 한층 극적일 수밖에 없죠. 다만, 경비대 역시 괴수의 활약을 담기보다 가재를 막으려는 기동대원의 참상을 그리려 합니다. 영웅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떻게든 시민을 구하고자 애쓰기 때문에 상당히 눈물겨운 장면이 많이 나오죠. 이 부분의 핵심은 좀 정치적인데, 위에서 말한 두 삼위와 아이들, 그리고 그 밖에 일본 시민들이 갇혀있는 곳이 하필이면 일본에 주둔한 미군 기지라는 것. 건물 일부와 잠수함은 자위대 것이 맞는데, 다른 부분은 미군 소속이므로 자위대가 들어가지 못하고 경찰 기동대로 근근이 방어한다는 겁니다. 치안을 담당하는 기동대에 중화기 따위가 있을 리가 없고, 그래서 거대 가재들을 상대로 시위 진압용 방어막을 세우는 게 고작이죠. 그래서 어떻게든 자위대를 끌어들이려는 지휘관들은 고군분투를 시작합니다. 현장에선 현장대로 멀쩡한 자위대 놔두고 경찰이 괴수를 진압하는 게 힘들어 방어선이 뒤로 밀리는 상황이고….
괴수보다 더 무서운 게 정치라고 할까요. 미숙한 두 어른과 아이들의 대립과 달리 이쪽은 사람 목숨만큼이나 정치적 입장을 따지는 참모들의 대립입니다. 다행히 최고 지휘관과 말단 간부가 서로 죽이 맞는 현장 타입이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기는 하는데…. 자위대를 끌어들이려다 보니 경찰병력이 부족함을 드러내야 해고, 그래서 ‘계획된 패주’ 위주의 작전을 짠다는 것. 즉, 질 것을 알면서도 싸우는 격입니다. 당연히 피해자가 속출하고, 지휘관은 속을 끓이면서도 자신을 욕하며 대원들을 또 현장으로 내보내죠. 질 수밖에 없고, 또 지려고 발악하는 인간 군상인 셈. 비장미 넘치는 사건 진행인데, 언급했다시피 지휘관이 현실 위주로 막 나가는 사람이라 속이 시원하긴 합니다. 덕분에 상당히 깨는 대사도 많은데, 괴수물의 공식을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말한다든지 하는 부분이 그래요. 은근히 개그 코드이면서 작품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장치로 쓰이기에 실소가 나오기도.
그 와중에서도 고지라를 들먹이다니. 역시 일본은 괴수들의 나라.
여기에 제3세력(?)이 끼어드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밀리터리 매니아들. 미군기지의 동향을 살필 방안이 없자 경비대 작전회의는 이걸 일본 밀리터리 팬 사이트에게 맡깁니다.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이나 용어를 그대로 대입했기 때문에 상당히 실감납니다. 정말 괴수가 출현하면 올라올 법한 댓글을 보고 있노라면, 진짜 웃깁니다. 작가는 매니아란 단어 대신 오타쿠란 단어를 내놓고 쓰는데,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저는 재미있게 봤습니다. 사이트 회원들이 온갖 장비와 기지 제원을 줄줄 늘어놓는 걸 보고 지휘관이 얼떨떨해하는 장면이 최고. 사태를 수습하고, 이 사이트 회원들이 모두 모여 이야기하는 장면이 저는 제일 마음에 남았습니다. 잠수함에서의 이별이나 작전회의 해산보다 더 여운이 진했어요. 밀리터리 팬 매니아들이 이만큼 활약할 수 있는 기회는 생애 단 한 번, 우연히 찾아왔기 때문이겠죠. 해상 자위대는 여전히 잠수함에 머물고, 경관들도 계속 치안을 담당하겠지만, 밀리터리 매니아가 실제로 정부 기관과 협조하는 경우는 이제 더 없을 테니까요.
얼굴 한 번 보이지 않고 게시물로만 등장하기 때문에 상당히 이색적인 캐릭터들이기도 했습니다. 가상 공간 운운하지 않고서도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인물을 창출한 셈. 만일 외계인이 한반도로 쳐들어오면 우리 클럽이 이런 식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있으려나?)
전체적으로 괴수물+군사물+연애물이 딱딱 어우러진 재미있는 책입니다. 흔히 라이트 노벨로 알려졌지만, 삽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야기와 캐릭터만으로 승부하기 때문에 읽어볼 만합니다. 특히 괴수 묘사가 부족한 대신 나츠키와 노조미의 감성 라인은 연애소설 뺨칠 정도. (자기 본분을 잊은 책 같기도 합니다) 같은 작가가 쓴 <하늘 속>도 분위기가 비슷한데, 저는 <바다 밑>이 더 재미있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