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역사 포럼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내년이면 소련이 붕괴한지 20주년이 되는군요. 현재 자유 시장경제 체제는 거의 모든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시스템으로 자리잡았고, 공산주의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요.(적어도 제가 아는 한에서는 말입니다)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의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체계적인 사회주의의 실험으로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라고 평가가 있는 반면에 '전체주의와 권위주의에 더럽혀져서 본연의 기능을 잃어버렸다'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저는 대체적으로 후자의 생각을 가지고 '반공주의자'까진 아니지만 나름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북한을 주적으로 둔 현재 상황이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영향을 많이 끼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19c와 20c의 일반 민중들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폐해때문에 겪은 고통 ,그 당시의 암담한 상황을 생각해볼때 무조건적인 평가절하도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당시의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 이런 모순적인 현실을 타계할 수 있는 방법은 공산주의가 유일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어떤 평가를 매겨야 할까요?
추가질문 : 만약에 프랑스나 영국같이 유구한 민주주의의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가정했을때, 사회주의의 역사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저는 전자에 가깝습니다.
근데 후자는 오히려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찬양 쪽에 가까운 것 같네요. (오용으로 본연의 기능을 잃었을 뿐) '원래는 좋은 것이다'라는 이상주의적인 관점이 엿보입니다.
공산주의의 가장 큰 단점은 인간, 더 나아가 생물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하지 않고 이상적인 '선'을 대전제로 했다는데 있습니다. 절대 평화주의같은, 인간의 본능 자체를 뒤엎지 않으면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인 거죠. (덕분에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적 새 인간형' 같은 개념도 나왔지만, 세뇌로 본능을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범죄는 진작에 사라졌겠죠)
결국 자본주의의 단점에 대한 대안/반작용으로 작용하면서 인류 사회의 전반적인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 자체로서는 '안티 자본주의' 그 이상이 될 수 없었고 자본주의가 개선됨에 따라 더 이상 쓸모 없는 이론이 되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공산주의를 '이상은 휼륭하나 현실에 맞지 않는 이론' 이라고 생각됩니다
레닌과 마르크스가 사람의 욕심의 동기를 너무 쉽게 생갹했습니다
그러난 공산주의의 잔재(?)로 각종 복지들이 있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의 실험은, 수 많은 SF의 탄생에도 기여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값어치가 있죠.
예프게니 I. 자먀찐의 <우리들>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 치하 공산주의 사회가 어떻게 될 지 예언했고, <우리들>이 없었다면 조지 오웰의 <1984>는 쓰여지기 힘들었겠죠. 자먀찐은 저 소설 때문에 하마터면 처형당할 뻔 했지만, 고리끼의 필사적인 주선으로 해외 추방 쪽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미하일 불가꼬프는 간 크게도 레닌을 풍자한 <비운의 달걀>과 스탈린을 풍자한 <개의 심장>을 썼고, 둘 다 소련의 현실 공산주의를 비판한 작품으로 SF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작가로서 출판 금지 & 의사로서 의료 활동 금지' 조치를 당하였고, '스탈린의 따스한 배려' 덕분에 처형까지 당하지는 않았지만 살아 있어도 정녕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됩니다. 결국 불가꼬프는 끝없는 탄압 속에 살아 생전 출판이 불가능했던 <거장과 마르가리따>를 열 번 이상 고쳐쓰다가 시력까지 상실하고 비참하게 죽었죠.
'이상적 사회주의'를 옹호한 이반 예프레모프의 <안드로메다 성운>이라든지, "공산주의 혁명 만세"를 외치는 블라디미르 마야꼬프스끼의 <미스쩨리야 부프>같은 SF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희한한 것은 이반 예프레모프의 <안드로메다 성운>의 경우 그 문학적 성과와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 사회주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부로부터 "현실의 소련 공산주의 체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고, 마야꼬프스끼는 평생 "공산 혁명 만세"를 부르짖는 글만 썼는데도 스탈린의 고향인 그루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정치적 제거 대상이 되어 결국 소련 정부에 의해 체포당하기 직전 스스로 자살을 선택합니다.
스뜨루가츠끼 형제는 <종말 전 10억년>을 쓰던 시절만 해도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하지는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그들의 작품에 대한 칭찬이 높아지고 소련 정부에 대한 비판의 수위 또한 높아지면서 결국 탄압 대상이 됩니다. 스뜨루가츠끼 형제는 미스테리와 SF를 접목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공산주의 사회의 폐쇄성을 '작품의 환경'으로 적절하게 활용하여 오히려 작품의 밀도와 긴장감을 높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체제 비판으로 가버린 것이죠. 그 바람에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 탄압으로 작품 활동을 거의 못하게 됩니다.
소련 정부 시절 공산주의 체제에서 문단의 거물 역할을 했던 친기즈 아이뜨마또프는 일찍부터 SF에 관심이 많아서, <백년보다 긴 하루>, <카산드라의 낙인> 등을 썼습니다. 그의 SF는 인류의 보편적 양심에 호소하는 작품 성향을 보이고, 얼마간 소련의 체제에 비판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너무 오래 살았던 것이 되려 발목을 잡았습니다. 소련이 붕괴된 후, 친기즈 아이뜨마또프는 소련 정부 시절 문단의 권력자였음에도 수 많은 작가들의 인권 탄압에 침묵하면서 소련 정부에 동조하였던 과거 행적이 문제가 되고, 결국 그것은 죽을 때까지 그에게 멍에가 됩니다.
공산주의 치하의 동유럽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SF를 쓴 사람은 귄터 쿠네르트입니다. 그의 단편 중에는 <때아닌 안드로메다 성좌>, <병 통신>과 같이 현실 공산주의 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SF가 많습니다. 심지어 시 조차도 SF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공산주의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죠. 계속 공산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풍자하는 글을 쓰다가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결국 1970년대 후반에 서독으로 망명합니다.
동독 출신의 거물 작가 중 장르 문학과 관계가 있는 사람으로는, <카산드라>,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와 같이 그리스 신화에서 취재한 테마를 가지고 아주 진지한 패미니즘 팬터지를 써냈던 크리스타 볼프가 있습니다. 크리스타 볼프는 냉전 시절 독일 문학권에서 사실상 최고의 작가였고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였지만, 동독 시절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이 독일 통일 이후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크리스타 볼프의 문학성이 워낙에 뛰어났고 또 국제적으로 공인된 국가대표급 거물 작가였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동독 공산당이 저지른 수 많은 정치적 인권 탄압에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는 논란이 벌어지자 "작가로서 양심을 저버렸다"는 국민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궁지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됩니다. 크리스타 볼프는 1980년대 이후 자신은 공산당의 노선과 다른 길을 걸었다고 해명하였지만 통하지 않았죠. 결국 20세기 후반 독일 최대의 작가는 동독 시절 공산당의 핵심 인사였다는 이유로 통일 독일에서 사회적으로 매장당합니다. 아직도 용서받지 못한 상태죠.
동구권의 공산주의 정부 시절 헝가리의 작가 기요르기 달로스는 1982년 조지 오웰의 <1984년>의 뒷 이야기를 다룬 속편 <1985년(빅 브라더는 죽었다)>를 씁니다. 철두철미한 디스토피아 소설이었던 <1984년>과는 달리, 전제 정권이 무너지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를 나름 다이나믹하게 묘사하는데 주안점을 둔 SF의 전형이었죠. 그런데 헝가리 공산당은 이 작품이 동구권 공산 독재 정권이 몰락했을 경우를 상상하여 쓴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저자는 조국을 떠나 망명객이 되어야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기요르기 달로스가 <1985년>을 쓴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그가 소설 속에서 썼던 일이 모두 현실이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사실 공산주의 정부가 SF라는 장르를 근본적으로 싫어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좋아했죠.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회 건설' 자체가 본래 상상속의 SF에서나 가능했던 "이상 사회 건설의 실험"을 직접 실천한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거든요. 때문에 소련 시절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세계 SF 문학 전집을 정부 차원에서 출간하기도 했고, SF라는 장르문학을 체제 선전의 도구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작가의 창작 활동에 대해 정부가 직접 간섭을 하려고 들었다는 게 문제가 되겠지만요.
공산주의 정부가 SF에 얼마나 많은 참견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으로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에서 쓰여진 황정상의 <푸른 이삭>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남한의 출판사 '도서출판 한'에서 정식으로 출간되기도 한 작품입니다. 조국에 봉사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엘리트 연구원들이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놀라운 과학기술적 진보를 달성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작품으로,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선전하고 그 체제에 충성하는 이상적인 엘리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작가들은 이렇게 공산주의 정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만은 않았습니다. 스스로 창작을 통해 정부의 간섭을 초월해 버리기도 했죠. 그 대표주자가 폴란드의 스타니스와프 램입니다. 스타니스와프 램은 작품 속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폐쇄적이고 답답한 의사결정 구조를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다만 품격을 가지고 나름 현학적으로 또 유머를 가지고 공격하죠. <솔라리스>에서 '솔라리스 학'의 발전 과정이나 학자들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라든지, <사이버리아드>의 로봇들이 나누는 만담으로 인간 세계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통채로 비웃는 것 등입니다. 놀라운 완성도의 SF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 공산주의는 물론 서방 자본주의까지 싸잡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오히려 통쾌할 지경이죠.
이제 공산주의 시절의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실험도 과거의 산물이 된 지금, 이를 작품 테마로 하여 쓰여진 SF / 팬터지 시리즈도 있습니다. 바로 세르게이 루키야넨코의 <나이트 워치>, <데이 워치>, <더스크 워치> 연작이죠. 이 소설은 오래된 빛과 어둠의 싸움의 과정에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실험이 실시되었고, 인간이 본래 불완전한 존재인만큼 그 실험도 불완전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뉘앙스를 가지고 냉전 시절의 과거를 말합니다. 완전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은 완전한 디스토피아만큼이나 인간에게 유해한 것이었고, 그것은 필연이라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을 작품 속에서는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의 오랜 싸움의 진행 과정의 일부로 파악하고 있죠. 이미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냉전 시대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실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금, 그것을 팬터지 세계관의 재료로 활용하기에 이른 셈입니다.
사회주의가 이상주의라고만은 생각되기 힘든게 개입을 적극적으로 역설했거든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손을 숭배하던 자유주의에 반성하게 된 계기가 공산혁명이라고 생각해보면
초기 자유주의보다는 사회주의가 더 현실적이라고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소련중심 사회주의일뿐이고
다른 사회주의 관련의 상당한 기능이나 제도는 프랑스나 이태리에 상당히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 발전 단계에서의 부합하는
공산혁명은 사실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언제 다시
공산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왈레스타인 같은
사람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기는 하지만.. 현 체제가 한계에 달하면 마르크스가
역설한 공산혁명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죠.
공산혁명 이후에 공산당에 의한 1당 독재가 전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국가에서
발생했다고 해도 아닌 공산당이나 사회당이 혁명이 아닌 자신들의 목소리를 가질수 있는 정당의 하나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소련이나 별 다를바 없을것입니다.
공산 혁명 이론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치명적인 문제는, 자본가가 왜 악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구조적인 설명을 시도하면서도, 혁명 후 그 자본가의 힘을 쥐게 된 무산 계급에 대해서는 그 설명을 적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선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처음부터 자본가와 무산자에 대해 적용하는 규칙 자체가 다른 거니까, 이건 이상적이냐 아니냐를 떠나 이론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생물과 무생물은 화학 반응 자체가 다르게 작용한다고 믿었던 과거의 유기 화학과 무기 화학 구분 같은 거죠.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가 '변질'되었다고 합니다만, 한두 명도 아니고 한두 국가도 아닌 그 수많은 인민과 국가들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변질되었다... 그럼 변질된 사람이나 국가에 문제가 있다고 볼 게 아니고 원래의 이론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겁니다.
'현실의 공산 국가는 변질되었으므로 이상적인 공산주의와는 다르다'라는 건, 마치 '음식이 썩는 건 보존을 잘 못해서 그런 거지 음식 그 자체가 썩게 되어 있기 때문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멸균에 진공 포장을 한다 해도 영원히 보존될 수는 없고, 또 만일 그렇게 된다 해도 먹기 위해서 '뜯는 순간부터' 부패는 시작되지요.
북한은 이미 70년대 주체자상을 제1 이념으로 도입하면서 하면서
순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국가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주체사상의 도입과 함께 폐기했습니다.
북한은 단순한 독재국가일 뿐이며, 그저 공산국가의 탈을 뒤짚어 쓰고 있는 것입니다.
90년대까지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라고 할수 없듯이 말이죠...
그들이 권력을 잡게된 이유는 대중이 기존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도구로써 선택한 것이지, 그들의 이상을 동의해서가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르혼 님의 말씀에 동감입니다.
사회주의 이론은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악(惡)으로 가버릴 수 있다"는 것을 치열하게 논증한 것이 큰 공로이죠.
하지만 20세기 내내 사회주의 이상 세계 건설을 수행하는 실험을 실제로 해 보니,
본래의 숭고한 이상을 저버리고 변질되어버린 케이스가 무려 100 %를 기록하고 있다는 게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 누가 사회주의 이론 가지고 혁명을 진행하고 이상 세계를 건설하려고 애쓴다고 한들
과거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변질될 게 뻔하다라고 보는게 오히려 더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죠.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실험'에 너무 얽매여 생각하지 말고,
그냥 실제로 실험을 해 본 결과 100 % 실패율을 보인 이론이 있다고 칩시다.
물론 실험을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전 세계에서 실험을 진행해 본 결과 예외없이 100 % 실패율을 보이고 있다면
그건 애당초 이론이 틀렸기 때문에 실험 결과도 100 % 실패했다고 보는 게 더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이죠.
100 % 실패를 경험했다면 "이론은 맞는데 실험 방법이 틀렸다"고 계속 미련을 가지고 강변하기보다,
이론 자체를 다 뜯어 고치거나 아예 폐기하고 다시 새로운 이론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게 정상이죠.
세르게이 루키야넨코의 팬터지 <나이트 워치> 시리즈에서는 이 대목을 꽤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대략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를 몸으로 겪은 세대의 '최후 진술'이라고나 할까요.
유토피아 이상세계를 만들고자 애썼던 선조들의 노력이 디스토피아로 귀결된 것에
러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웠고 자존심 상하고 가슴 아파 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지요. 초기 공산주의 이론은 전형적인 모더니스트 이론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고요.
그야말로 "계몽주의"의 극단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와 환경에 따라 인간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환경을 전반적으로 재구성하고 바꿀 수 있으면 자본주의로 인한 폐악을 멈추고 보다 이상적인 상태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이게 소위 '사회주의적인 인간'이라는 개념이었는데, 문제는 이게 기계적인 인간정신개조라는 계몽주의적 악몽의 비탈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많은게 꼬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지요. 사회적 경제적 체제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참으로 교묘하고도 지속적인 과정인데, 그것을 단순히 지속적인 교육과 세뇌와 같은 강압을 되풀이함으로써 단시간 내에 바꿀 수 있다고 믿어버린 것이 여러 면에서 비극을 만들어냈지요.
무엇보다도 애초에 근대 공산주의의 아버지인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그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 부터가 자본주의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 했는데, 기본적인 제국주의 이론을 수립할 당시 레닌의 저서의 이름부터가 <제국주의: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는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20세기 초중반의 상황이 '자본주의의 최후의 시대'라고 확신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어요. 그 결과 탄생한 소련은 사실, 어느 면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실패할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 수 있었지요.
불안불안한 세계의 정국,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파경,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은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예견한 거의 그대로의 수순으로 진행되었고, 이것은 어느 면에 있어서 로마의 마지막 날들을 살아가던 기독교화된 로마인들이 "이제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 멀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과 유사해요.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예언'된 그대로 세상일이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사상가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들뜨고 기대에 가득찰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지요.
애초에 소련의 수립을 주도한 소련의 혁명가들은 러시아의 특수성에 기대어, 비록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지는 않았지만,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러시아에서 먼저 혁명을 일으키면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서방의 - 특히, 독일의 - 혁명을 연쇄적으로 일으킬 것이라는 예상을 했어요(고리 이론). 전쟁에 비유한다면, 말하자면 한국전쟁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는거죠. 인천에 상륙하여 제2전선을 만들어내면 그에 발맞추어 밀고 올라오는 협공을 하겠다... 는 식으로, 먼저 소련에서 혁명을 일으켜버리면 이에 고무받은 서방의 모든 혁명가들이 연쇄적으로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일어나지 않으니 말하자면 적지에 달랑 혼자 상륙해버린 꼴이 된게 바로 소련이라는 거죠.
그렇다고, "으아, 실패다. 혁명 취소하자" 라고 할 수도 없으니, 그 상황에서 하나의 신생국가로서 생존을 모색하였고, 이후 소련의 모든 내부적, 대외적 정책은 오로지 "생존"이라는 두 글자에 목숨을 걸다보니 애초에 내걸었던 공산주의가 그대로 소멸해버렸다는 것이죠. 기실 당시의 정책에 대해 소련의 지도자들은 "국가독점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어요. 사회주의 국가의 수립을 향해 나아간다는 목표는 변함이 없지만, 당장 기대하던 연쇄적 혁명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낙후된 러시아의 환경을 조금이라도 사회주의에 유리한 방향으로 맞추기 위하여 자본주의적 구조를 갖추어 나가되, 그것이 자본가들에게 힘들 실어주어 그대로 일반 자본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할 수는 없으니 국가가 그 모든 과정을 독점하고 주도하여 감독하겠다는 의도였거든요. 즉, 신생 소련의 정치경제적 구조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니었음을 애초에 그 지도자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다는거죠.
문제는 레닌 사후에 벌어진 권력대립에서 승리한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 및 "현실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었어요. 본래 레닌이 주도하던 지도부의 이론은 국가가 과정을 감독하고 독점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차차 서방에서 혁명이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을 하면서 일단 시간을 끌어 살아남겠다는 것이었고, 이것이 트로츠키의 "계속혁명론" - 계속적으로 혁명을 일으켜가지 않으면 소련은 혼자서 말라죽을 수 밖에 없다는 이론 - 으로 정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권력대립에서 스탈린이 승리한 이후 공산당 좌파에 대한 일제숙청이 벌어지면서 공식적으로 소련의 현재 상태는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일종의 사회주의이고, 세계적 혁명의 도움 없이 일개 국가로서 혼자서 사회주의적인 완전체를 이루는 "일국사회주의"이며, 이론적으로 뭐라고 떠들던간에 지금 이 시스템만이 현실적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사회주의"라고 못을 박아버렸다는거에요.
우리가 근현대사에 있어서 '공산주의의 실패'를 얘기할 때는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사실들이 전제가 되어야 해요.
소련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그러한 행보를 걷고 있을 동안, 서방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되지요.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시도된 것은 인터내셔널 운동이었고, 특히 제2차 인터내셔널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공산주의 역사상 가장 고결했던 시도 중 하나인 "노동자의 힘으로 전쟁을 멈추자" 운동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유럽 모든 국가의 노동자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에 협력을 거부하여 모든 나라의 모든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겠다는 참으로 거창한 시도였지만 -_-a 애국주의의 물결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고요.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부터는, 20세기에 초입만 해도 그토록 가까이 다가온 것만 같았던 세계혁명의 전망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명민한 이론가들은 알아차리게 되었지요. 아무리 강렬하다고 해도 이론과 신념만으로 대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한 이상, 어째서 체제에 종속된 인간은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가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게 되는데, 세계 사상사에 있어 최초로 "헤게모니"의 개념을 등장시킨 안토니오 그람시를 필두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발휘하는 장악력 및 인간성, 역사 등의 분야 있어서 보다 깊은 연구를 시작하게 되요. 이것은 이후 T. 아도르노, G. 루카치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학문적/철학적 사회주의의 기반을 이루게 되지요.
특히, 혁명의 발발가능성이 사라진 만큼, 직접적인 혁명시도는 포기를 한다고 해도 중요한 정치세력을 일굼으로써 정치의 제도권 내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담당하겠다는 역할의 전환을 노리게 된 것이 사민주의 및 유럽 전역의 사민당 운동으로 이어졌지요. 물론, 사민주의 또한 대충 70년대 이후 부터는 이론적 기조로서 마르크스 계통의 공산주의는 거의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고.. 보는 시각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마르크스 계열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일단 확연히 포기되었고,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보다 많은 대중의 사회적 이익에 봉사한다는 쪽으로 다른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로 보기도 하고, 그냥 뭐, 다 포기하고 넓은 의미에서 '좌파주의' 정도의 의미만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도 하지만요.
하지만, 정치세력으로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명맥이 끊긴 것과는 달리, 학문 - 특히 역사학 및 철학의 분야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굉장히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요. 90년대를 전후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으로 굉장히 약화가 되었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으로 다시 약화가 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기조로 유지하고 있는 학파들이 뭐,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요. 만탱이가 가버려서 범죄자가 되버리기 전까지는 -_-a 루이 알튀세가 사상사의 측면에서 거의 초신성급이었고, I. 월러스틴은 자본주의가 계속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으로 그 세계적 성격에 주목하여 세계체제이론을 등장시켰죠. 93세의 나이로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는 에릭 홉스봄은 현대사에 있어서 거장 중 하나이고, 영국사연구의 걸작 중의 걸작인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의 E. P. 톰슨도 있고요. 요즘은 슬라보예 지젝이 엄청나게 주목을 받고 있고...
그런 면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적어도 제 생각으로는 전혀 끝나지 않았지요. 촘스키의 말마따나, 애초에 자본주의의 대극으로 제시된 하나의 이상이기에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공산주의는 끝날 일이 없거든요. 160년이 넘는 실험기간 동안 한 쪽에서는 비극의 자국을 깊게 남겼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성의 성찰이라는 정신적 분야에 있어 마찬가지로 깊은 자국을 남긴 상태로 지금은 휴지기에 들어가있다고 봐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가 불러온 필연적인 배드앤딩이라는 측면, 즉 후자의 입장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합니다.
뭐 제가 사민주의적 우파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요.
사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누구 맘대로 인간 본성이 어떠어떠하다 라고 정의하는데?"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기실, 자본주의의 자기합리화 수단 중 가장 전형적인 것이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 가장 부합한다"라는 주장인데, 족히 3천 년은 넘게 철학자들이 궁리해왔어도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한게 인간 본성이거든요.
그것은, 어떻게 확답을 내리거나 확증할 수 없는 추상적 '본성에 대한 정의'를 근거로 구체적인 사회체제를 정당화한다는 점에 있어서 전형적인 은폐기재, 혹은 자기합리화의 수단이라고 마르크스주의는 얘기해요. 현생인류가 이 세상에 나온지 수 만년은 되었는데 기껏해야 최근 300~400년에 들어서야 겨우겨우 자본주의의 흔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다가, 본격적으로는 19세기를 경계로 지금과 같은 발전했으니까요. 굳이 현생인류이라는 엄한 기준을 쓰지 않고, 역사적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6,000년 정도라고 해도 지금까지의 97%의 시간을 다른 형태의 체제 아래에서 살아왔고, 최근 3% 정도의 시간만 '자본주의'라는 것이 등장했는데 이 정도를 갖고 인간 본성이 어떤지를 누구 맘대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느냐는거죠.
또, 두루두루 탐욕과 이기심을 충족시키고자 한 모습을 옅볼 수 있는 만큼이나, 그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 보이기도 해요. 예컨데, 고대는 물론 중세, 근세까지도 마을에 인접한 산지나 초원, 임야 등은 그 마을 전체 공동의 것으로서 누구 한 사람에게 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두가 필요에 의해 필요한 만큼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 간주되었어요. 숲이나 임야를 왕이나 귀족 한 사람에게 귀속시켜 마을사람들이 사냥을 하거나 나무를 베는 행위를 금지시키는 행위는 민중들에게 아주 커다란 불만거리 중 하나였고 종종 그런 짓을 벌이는 사람은 폭군으로 간주되기도 해요. 때로는 폭력적 저항이나 봉기를 정당화 시키거나 최소한 제3자가 그러한 불만의 폭발을 온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 정도의 악습으로 간주 되었지요.
마을 사람들 모두 어느 정도는 자신의 사유지를 원하였으나, 모두의 것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것들에 사욕으로 손을 대어서는 안된다는 합의가 사회 전반에 걸쳐 인류 역사상 대부분 존재해왔죠. 그게 무너지고 모든 땅되기가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귀속되어 사유화되는 과정은 근세 중후반에 들면서 시작되었을 뿐이고,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민중은 하나같이 그에 엄청나게 저항해왔지요. 땅이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되어 사적소유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역사가 오래된 이상으로, 어떤 종류의 땅은 결코 사유화 되서는 안된다는 공공선에 대한 개념도 존재해왔던 셈이죠. 이러한 사고방식이 사라지고, 어떤 땅되기던 간에 내 것은 내 것, 니 것은 니 것이라는 식의 생각을 사람들이하게 된 것은 그다지 역사가 오래되지 않아요.
뭐, 그런 식으로 배타적 소유에 대한 이기적 욕구의 모습 만큼이나 그와는 정 반대 되는 모습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거죠.
어찌되었건, "인간 본성"이라는 모호하고 애매한 것을 끌어들이는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대표적 에러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게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죠. 소유=삶=본성 이라는 등식에 대해 "누구 맘대로?"라는 회의를 던지니까요. 기실, 이 등식은 자본주의적 체제가 공고화 되고, 기본적으로 그에 따라 사람들이 자신과 주변의 관계를 정의하면서부터 "참"이 된거지, 처음 부터 그것이 "참"은 아니었다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지요.
카프카스 님께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는데, 인간의 본성은 철학이니 뭐니 따질 것 없이 그냥 생물의 본성을 보면 됩니다.
35억년 동안 지속되어 온 생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존해 왔는가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고요. 생물 집단의 행동 양식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면 '개별 이익의 극대화는 전체 집단의 극대화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며, 적절한 선에서 평형을 이룬다'가 됩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온갖 부조리와 불평등이 일어나는 건데, 이런 생물의 본성을 도외시한 채 이상적으로 '최적화된 집단'만 생각하면 실현은 요원하죠. 마치 순도 100%의 금을 만들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한번 끓여서 녹였다 굳히면 95%의 금괴가 완성되는데 (수정 자본주의), 억지로 100%를 만들려고 클린 룸을 만들어서 불분물 정련을 99번 해 봤자, 100% 순금은 못 만들고 금값보다 더 비싼 공정비만 나가게 되죠.
또 한가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자본주의는 사회 현상이고 공산주의는 인문학 이론입니다. 애초에 범주 자체가 달라요. 어느날 갑자기 '우리 자본주의를 하자'해서 자본주의가 시작된 게 아니고, 어떤 주의 주장도 아닙니다. 그냥 사회가 어쩌다보니 그렇게 흘러간 것인데, 자본주의의 기원을 찾자면 '잉여 생산력'의 발생, 즉 역사 시대부터 쭉이라고 봐도 됩니다. 정확히는 잉여 생산력을 가치 훼손 없이 축적할만한 경제 규모가 되었을 때, 즉 화폐 경제가 이루어졌을 때 이미 자본주의는 발생했고, 온갖 폐해를 가져왔습니다. 로마 시대의 노예 농장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죠. 사실 자본주의의 폐해는 항상 그렇게 역사와 함께 흘러왔습니다만, 근대 자본주의가 새삼 문제가 된 것은 자본주의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평등이라는 패러다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로 희생되는 인간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그제서야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의식된 것이지, 사실은 그 전부터 항상 존재해왔던 '아주 자연스런' 집단 생활 방식인 거죠.
따지고 보면 평등 사회나 인권 같은 게 인간 역사에서 훨씬 짧게 등장하고, 인간 본성에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대통령 님이 다 해주실 거야'라는 서민의 기원 어디에도 인간의 평등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죠.
공산 이론가는 거의 항상 인문학 쪽에 치중하여 발생하지, 이공계, 특히 생물학 쪽에서는 그다지 발견하기 힘듭니다. 인간 본성에 대해서 '진짜' 잘 아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라 생물학자이기 때문이죠.
글쎄요. 정의상으로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이 좀 있네요.
일단 생물적 차원에서 자기 이익을 위한 행동과 집단이익을 위한 행동이 일종의 평형관게에 있다는 것 자체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이 두가지 이익이 반드시 별개의 것으로 상충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집단을 위한 이익이 곧 개인을 위한 이익이 될 수도 있고, 개인의 이익추구가 집단의 이익으로 귀결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지의 우선권을 따지는 것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시각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항상 개인의 이익을 낳지는 못한다는 사실만큼이나 그 역관계 - 자본주의의 정당화를 위한 기본적인 전제 - 또한 아주 비극적이고 졸렬한 결과를 낳을수 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충분히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성론"에 따라 자본주의가 "인성에 부합하는 체제"라고 주장을 한다는 것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본성론'을 사회체제가 기능하는 방식에 갖다붙이기 시작하면 이것은 기실, 그 논리에 있어서 현실사회주의를 주창한 공산권 국가들의 다수가 매우 기계적인 방식으로 인성의 개조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과 동일한 오류를 반복한다고 밖에 할 수 없어요. 인간의 성향을 결정짓는 요소를 단순한 기계적 요소의 반복 및 환경의 조작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인간은 본성이 명하는 그대로 기계적으로 행동할 뿐이라는 것은 역시 똑같이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지요. 인간 사회는 개미군체나 벌의 군체가 아니거든요.
특히, 굳이 생물학적인 측면까지 끌어들어야 한다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유대의 형성 및 사회집단의 유지, 공동생존을 위해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에요. 사회집단의 형성 및 유지 그 자체가 본능 레벨에서 프로그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행동을 하기야 하는데, 그것이 벌이나 개미처럼 유전적 프로그래밍의 레벨에서 이미 어떤 식으로 어떤 시스템의 사회를 만들라는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거에요. 즉,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한 시스템이라는 주장은, 사회집단의 형성 및 유지, 집단 내에서의 [개별이익--집단이익]의 평형을 잡아가는 방식을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만들라고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인데, 자본주의는 역사발전의 도상에서 발생한 하나의 체제일 뿐이지 인류의 탄생부터 점지된 운명을 실현하는 그런게 아니라는거죠.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그런 소리를 했었죠.)
즉,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봉건주의, 노예제니 등등 거론되는 수 많은 인류의 체제 중에서 유독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정확히 무엇이든간에) 본성에 따라 사회를 형성하고 상호간의 관계를 조율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시대와 환경의 물질적 기반, 그 시대의 한계, 시시각각의 상황, 의식의 흐름, 그리고 때로는 우연 등, 여러가지 요소의 변화로 인하여 권력관계가 어떻게 여기저기로 이동해갔는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결과에 불과하다는겁니다.
자본주의에 대해 내리신 정의는 좀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단순히 "잉여생산물의 발생과 교환, 거래행위의 존재가 곧바로 '사회현상'으로서 자본주의로 정의되기에 자본주의는 항상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가 힘들어요. 자본주의의 수립에 화폐경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잉여산물을 원래 값 보다 비싸게 사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은 완전히 잘못되어 있어요.
자본주의는 특정한 형식을 갖춘 생산관계로서, 그 사회 내의 생산수단 및 생산의 원동력이 어떠한 식으로 그 사회 구성원간의 관계를 규정하거나 재규정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돈을 내고 무엇을 거래를 하는 행위에 자동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정의가 따라붙는게 아니라는거죠.
고대의 노예제에 있어서 생산수단은 토지니 작업장이니 하는 고정적인 요소 외에 노예 그 자체가 중요한 생산의 수단이 되는 것이고, 생산을 담당하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는 말 그대로 주종으로서 예속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관계죠. 이런 식으로 그 시대의 생산수단과 생산의 방식에 따라 그 사회 구성원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또한 규정이 되는 바, 이 체제의 경제적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구성원의 일부가 노예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으며, 경제적 성장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예의 유입을 필요로 하고요. 즉, 그 경제적 환경 및 그에 기반한 사회적/정치적 환경 양자가 통합된 것을 '체제'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러한 맥락에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단순한 화폐경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곧 생산수단이 되어 사회 전체가 자본가-노동자 사이의 고용-임노동의 관계로 전환한 그 전체적인 정치경제적/사회경제적 양상을 의미해요. '자본'은 르혼님 말씀처럼 역사적으로 늘 존재해왔지만 '자본주의'는 근대의 산물이에요. 권위를 빌어 반론을 펼치자는 의도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기원'을 고대에서부터 늘상 존재해왔던 것으로 여기는 주장은 (자본주의의 정당성에 인간 본성론을 개입시키는 행태와 더불어) 지난 세기의 우파사상가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현재 학문적으로는 전혀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주장이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인문이론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원리에 대한 분석한 일련의 경제학 이론으로 출발했고, 자본주의라는 경제적/물적 조건에 대해 그것을 기반으로 형성된 생산관계가 모순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변혁해야 한다는 정치경제이론으로 발전해나간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같은 위상에서 대극관계에 있는 정치경제적 체제이론이에요.
마지막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에 있어 철학자와 생물학자의 위상에 대해 논하신 것은 정말로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B. F. 스키너의 기계적/환원주의적 행동심리학과 동일선상에 있는 사고방식이 아니던가요. 인간의 생물적 진화와 더불어 심리적 진화에 대한 최신연구들이 진화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로 정립되어 지금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매우 흥미롭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음악]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작곡가들 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하나의 시각만으로 인간심리를 그런 식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철학을 너무 우습게 보시고 계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요.
문제는 이 두가지 이익이 반드시 별개의 것으로 상충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집단을 위한 이익이 곧 개인을 위한 이익이 될 수도 있고, 개인의 이익추구가 집단의 이익으로 귀결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지의 우선권을 따지는 것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시각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말한 '평형 관계'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평형은 시각의 차이가 아니라, 결과로 나온 현상입니다. 공산주의를 포함한 이런저런 주의나 주장, 개인의 욕망들이 어우러져 평형을 이룬 게 현대 사회의 자본주의적 구조이지, 어떤 시각의 차이에 의해서 이런 평형 상태도 있고 저런 평형 상태도 있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온갖 시각 차이의 합산된 형태가 바로 평형이라는 거죠.
그리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시각 차' 따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는 시각이 없기 때문이죠. 계속 말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래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고 '이렇더라'라는 현상입니다. 범주 자체가 달라요. 굳이 비유하자면 자본주의는 강이고, 공산주의는 유체역학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항상 개인의 이익을 낳지는 못한다는 사실만큼이나 그 역관계 - 자본주의의 정당화를 위한 기본적인 전제 - 또한 아주 비극적이고 졸렬한 결과를 낳을수 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충분히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성론"에 따라 자본주의가 "인성에 부합하는 체제"라고 주장을 한다는 것이에요.
이미 말했지만, 자본주의는 정당화 하고 말고 할 물건이 아닙니다. 현상이거든요. 지진이나 폭풍에 정당화가 필요할까요.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나 하는 탐구, 더 나아가서는 그로 인한 재해를 피하기 위한 대처법 연구가 있을 뿐입니다. '인성에 부합하니 정당하다'가 아니라, '인성이 그런 식이니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가 적절한 방향입니다.
게다가 공산주의는 '인성이 그런 식이니까'를 반쪽짜리로 적용해서 실패한 경우지요. 자본가에 대해서는 '인성이 원래 그러니까 어떻게든 악해질 수 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무산자는 '공산주의적인 새 인간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성에 대한 인식이 맞고 그르고를 떠나, 이론 체계 자체에 문제가 있어요.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과 연결된다는 주장이 불합리하다면, 자본가의 악에 대해 인간 본성을 이용해 설명하는 공산주의는 어떨까요. 그런 설명이 공산주의에 없었다면 모르거니와, 아주 조악한 방법으로 - 자본주의가 왜 그런가를 설명할 때보다 더 조악한 -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공산주의의 가장 치명적 단점 중 하나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성론'을 사회체제가 기능하는 방식에 갖다붙이기 시작하면 이것은 기실, 그 논리에 있어서 현실사회주의를 주창한 공산권 국가들의 다수가 매우 기계적인 방식으로 인성의 개조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과 동일한 오류를 반복한다고 밖에 할 수 없어요. 인간의 성향을 결정짓는 요소를 단순한 기계적 요소의 반복 및 환경의 조작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인간은 본성이 명하는 그대로 기계적으로 행동할 뿐이라는 것은 역시 똑같이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지요. 인간 사회는 개미군체나 벌의 군체가 아니거든요.
그 두 가지가 결합된 결과가 현재의 수정 자본주의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이 지적한 부분이 현실 자본주의에 반영된 게 복지와 성장을 동시에 고려하는 현대의 수정 자본주의이지, 결코 자본주의를 자연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본주의는 '현상'이고, 말씀하신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상태 그 자체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현상이 어떠하다와 그게 옳다 그르다는 다른 얘기죠.
그리고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를 걸고 넘어진 공산주의에 대해 양비론을 언급한다고 해서 공산주의가 더 현실적인 이론이 되는 건 아닙니다. 말씀대로, 잘 해 봐야 '똑같이 잘못된 견해'일 뿐이죠.
즉,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한 시스템이라는 주장은, 사회집단의 형성 및 유지, 집단 내에서의 [개별이익--집단이익]의 평형을 잡아가는 방식을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만들라고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인데, 자본주의는 역사발전의 도상에서 발생한 하나의 체제일 뿐이지 인류의 탄생부터 점지된 운명을 실현하는 그런게 아니라는거죠.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그런 소리를 했었죠.)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하다는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이 별다른 제한 없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다보니 자본주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개별 이익과 집단 이익의 평형을 잡아가는 건 본능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는 게 맞습니다. 그렇지 않은 생물은 모두 멸종되었거든요. 자본주의가 역사 발전의 한 단계라고 하는데, 사실은 유사 이래로 항상 자본주의였습니다. 그 수준이 얼마나 되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저축 가능한 잉여 소득이 생겼을 때, 그리고 이자 개념이 생겼을 때 이미 자본주의는 정립된 겁니다. 그 이전의 오래된 '선사 시대'에 자본주의가 없었기에 인간 본성하고 별 관계가 없다는 말은, 오랜 기간 도시나 국가 집단을 이루지 못했으니 그것도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계속 말하지만 자본주의는 일종의 '평형 상태'지, 본능 그 자체를 설명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에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욕심과, 다른 이들이 자기 욕심대로 행동한 결과로 자기에게 피해를 주지 말기를 바라는 도덕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둘의 절충이 실제 인간의 행동이고요.
자본주의가 인류 탄생과 함께 하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인류 문명과 함께 한 것은 사실입니다. 적어도 국가 규모의 문명을 구축한 사회 집단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자본주의를 이룩하고 운영했습니다. 이를 겨우 '역사의 한 단계'라고 말하는 건, '언어는 인간이란 동물의 한 가지 특징에 불과하다'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로 중요성을 폄훼하는 얘기입니다.
즉,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봉건주의, 노예제니 등등 거론되는 수 많은 인류의 체제 중에서 유독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이 저와의 명확한 인식 차이인데, 저는 봉건제와 노예제는 모두 자본주의가 작은 규모로 구현된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노예제와 봉건제 모두 화폐제도와 이자, 자본의 축적에 의해 이익을 얻는 유한 계급이 있었습니다. 근대 자본주의와는 공장 노동자가 노예로, 농노로 대치된 것일 뿐, 근본적으로 경제 체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적어도 공산주의와 비교하면 말이죠.
굳이 경제 체제를 구분하자면 원시 수렵 사회 - 자본주의 - 공산주의 사회 정도로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원시 수렵 사회는 국가 체제를 이루지 못한 상태였고, 자본 축적이 이루어진 이래는 쭉 자본주의였습니다. 공산 사회는 플라톤의 철인론 이래 수천 년이 흘렀지만, 그냥 이상으로 머물고 있죠. 비폭력 평화주의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이상화되었지만 현실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서 실현하고 유지하기가 극도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100% 순금이나 마찬가지로, 자연 상태에서는 만들어질 수도, 유지될 수도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형식을 갖춘 생산관계로서, 그 사회 내의 생산수단 및 생산의 원동력이 어떠한 식으로 그 사회 구성원간의 관계를 규정하거나 재규정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돈을 내고 무엇을 거래를 하는 행위에 자동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정의가 따라붙는게 아니라는거죠.
돈을 내고 거래하는 건 자본주의의 특징이 아닙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바로 '자본'에 있습니다. 그냥 거래만 한다면, 화폐 경제라 하더라도 자본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요. 자본과 재산의 가장 큰 차이는, 내가 아무 노동을 하지 않아도 자본만으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상황, 즉 유한 계급의 유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에 이자가 붙기 시작하면 비로서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지요.
카프카스 님의 말씀처럼 근세에 와서 이런 현상이 생긴 게 아니라, 그 전부터 쭉 그런 경우는 있어 왔어요. 유사 이래 쭉 이어오던 자본주의가 근세에 와서야 새삼 문제거리가 된 건 오로지 노동자 계층의 인권 때문입니다. 노예든 농노든, 국가의 지배를 받는 농민이든 간에, 그 이전의 노동자들은 하층민으로 인정되고 (심지어 죽어가면서도) 노동을 해서 상류층을 먹여살리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된 것은 산업혁명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인권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 때문이라는 것은, 그 이전의 대량 생산 체계로 제국을 운영해왔던 로마의 경우를 보더라도 명확합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기원'을 고대에서부터 늘상 존재해왔던 것으로 여기는 주장은 (자본주의의 정당성에 인간 본성론을 개입시키는 행태와 더불어) 지난 세기의 우파사상가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현재 학문적으로는 전혀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주장이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어요.
이런 시각이 현재 학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학문을 말씀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저는 오히려 경제학 주류에서 공산주의가 제대로 된 이론 취급을 받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인문이론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원리에 대한 분석한 일련의 경제학 이론으로 출발했고, 자본주의라는 경제적/물적 조건에 대해 그것을 기반으로 형성된 생산관계가 모순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변혁해야 한다는 정치경제이론으로 발전해나간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같은 위상에서 대극관계에 있는 정치경제적 체제이론이에요.
공산주의는 경제학 이론으로 출발해서 정치경제 이론으로 발전해나간 것이 맞습니다. 맞고요.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현상이지 이론이 아니에요.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와 대비되는 어떠한 경제 이론도 정치체제 이론도 없습니다. 누가 자본주의를 하자고 논문을 써서 그 체제가 성립된 것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사회 구조고, 근세 경제학이 출발할 때 이미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경제학 그 자체가 자본주의를 규명하기 위해 생긴 것이지, 어떤 경제 이론이 현실에 적용된 것이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혹시나 단어에 대한 오해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싶어 첨언합니다만 '자본주의'의 '주의'는 capitalism의 ~ism을 직역한 결과지, 단어 의미 그대로 어떠한 주장이나 이론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류머티즘이 이론이 아니라 현상이듯 캐피탈리즘도 이론이 아닙니다. 벌써 몇 번째 강조하는지 모르겠는데, 공산주의와는 범주가 달라요. '새'와 '물고기'의 차이가 아니라, '하늘을 날다'와 '거북이'의 차이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에 있어 철학자와 생물학자의 위상에 대해 논하신 것은 정말로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B. F. 스키너의 기계적/환원주의적 행동심리학과 동일선상에 있는 사고방식이 아니던가요. 인간의 생물적 진화와 더불어 심리적 진화에 대한 최신연구들이 진화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로 정립되어 지금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매우 흥미롭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음악]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작곡가들 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하나의 시각만으로 인간심리를 그런 식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철학을 너무 우습게 보시고 계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요.
물론 진화심리학을 포함한 생물학이 인간 심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철학보다는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거지요. 철학의 주된 관심은 인간 본성이 아닐 뿐더러 (그것도 포함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을 규명할 때 실증적 방법보다는 연역적 방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본성에 대한 연구에서 겨우 10년 동안에도 패러다임이 바뀔만큼 빠르게 발전하는 상황에서, 구체적 증거 없이 사변만으로 일관하는 철학은 인간이나 생물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철학에는 철학 고유의 영역이 있고, 생물학에는 생물학 고유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철학보다는 생물학 주제에 더 가깝습니다.
생물학이 인간 본성 모두를 알 수 없지만, 화학자보다 의사가 인간의 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철학보다는 좀 더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학문임에는 확실합니다.
작곡가가 아니더라도 음악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설명이 적절한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죠. 종교 지도자들도 우주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게 맞는지 아닌지는 전혀 다른 문제 아니겠습니까.
뭐, 서양사람들이 즐겨사용하는 표현처럼,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것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마무리지을 수 밖에 없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제 주장의 포인트를 그냥 정리만 한다면:
(1) 자본주의는 '현상'의 범주에 있는게 아닙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기류는 더운 곳에서 추운 곳으로 흐르죠. 이런게 '현상'입니다. 자본주의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고, 어떤 하나의 주체가 단 번에 이론적으로 완성해낸 것은 분명 아니지만, 인간의 모든 사회체제가 그러하듯 그 시대의 그 역사의 내부에서 이루어진 권력관계와 종속의 관계가 대립하는 와중에 형성된 것이지, 그것을 그냥 그대로 자연현상으로 이해나는 것이야말로 "종교적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 자본주의인가?"라는 설명에 "원래 인간은 자본주의적이니까"라는 믿음에서 출발하니까요.
(2) 인간 역사단계의 발전에 대한 시각은, 어떻게 돌려 표현을 해도 피할 수 없으니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철저한 몰이해에 기반해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적 정의 자체를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부터가 오류고, 애초에 그런 잘못된 개념적 정의를 기반으로 사회체제의 역사를 파악하니 그것이 줄줄이 사탕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3) 자본주의가 원래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어느 학문인지를 외려 반문하고 싶군요. 적어도, 기본적으로 역사학에서는 자본주의가 원래부터 자연적 현상의 범주에 속해있다는 설명은 절대로 안하거든요. 경제학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사학적 범주 내의 경제사에서도 그런 소리는 안나와요. 오히려, 이런 종류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제가 기억하기로는 90년대 중후반 사이에 합리적선택이론이 유행하면서 원래부터 그런 주장을 하던 아인 랜드 계통의 우익사상가들이 합리적선택이론을 그대로 따와서 자신들의 정치이론이나 사회이론에 접목시키려던 했던 시도로부터 크게 퍼져나갔지요.
(4) 마지막으로, 인간의 본성이 철학보다 생물학에 가깝다는 주장에대서야 말로, "누구 맘대로?"라는 질문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네요. 인간 본성이야말로 "신"이라고 은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고, 반대로 없다고 증명할 수도 없어요. 그냥 어떠한 행동방식에 따라 유추를 할 수 밖에 없고, 어떠한 뚜렷한 경향성을 보이는 것 같다가도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요. 인문과학이 사변과 연역에 불과하다고 내쳐봤자 생물학이 '본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 계량적 결과를 내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인간 행동의 피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마찬가지의 사변과 연역과 추론, 그리고 결정적으로 "해석"에 기반해있을 뿐이에요. 그러한 보이지 않는 "신"이 우리 인간이 만드는 사회체제의 기반을 이룬다는 생각이야말로,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게 맞는지 아닌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것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좋은 말이네요. 저 역시 동의합니다.^^
인간 역사/사회와 자연 현상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반대로 일원론적입니다. 사회나 문화/문명 역시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거죠. 자본주의는 현상이라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고요.
이런 관점은 어떤 학문 혹은 학계를 대표한다기보다는 저의 관점이고, 사실 경제학에서도 자본주의가 현상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안 합니다. 왜냐햐면, 학문의 실질적인 목적이 자본주의 안에서의 개선 방향을 탐구하는, 즉 실천/응용 학문 쪽에 가까워서,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원론적인 분석은 별로 안 하거든요. 뭐 처음 배우는 개론서에서는 그럴듯한 학문 답게 크게 잡고 들어갑니다만, 거의 현학적인 얘기에 가깝고, 다들 관심은 '현실 경제'에 있죠.
다만 철학쪽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역사학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해 '역사적 의의'를 크게 보는 관점은 있지만 이것을 '미래에 대한 기대'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를 떠나, 애초에 역사학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크게 경계하는 학문이거든요. '과거에 이랬으니 앞으로 이럴 것이다'는 차라리 정치학 쪽에 가깝지, 역사학 쪽에서는 설령 그런 생각이 있더라도 겉으로는 거의 표출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과거에 대한 적확한 규명이 역사학의 본령이고, 이미 기록된 과거에 대한 설명도 서로 의견이 분분한 터에 미래 예측까지 학문적 무게감을 가지고 (즉, 자신의 학문적 명예를 걸고) 말하기는 어렵죠.
마지막으로, 인간의 본성을 '신에 가깝다'라고 보시는 관점은 그야말로 제 시각과 바다같이 큰 간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신' 자체를 별로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며, 인간을 그냥 현재 자연에 잘 적응해 번성한 동물로 보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존재 증명하고 제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하고는 한참 거리가 벌어질 수 밖에 없고, 철학보다 생물학 쪽이 인간을 연구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죠.
개인적으로는 철학은 인간의 이성, 즉 '생각' 그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이고, 다른 모든 학문의 뿌리가 되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반대로 다른 학문들의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방법에 양보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논리적인 사고란 무엇인가'라는 것은 철학에서 밖에 다뤄주지 못하는 주제이지만, '인간이 왜 다른 동물보다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가'는 생물학 쪽이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덧) 아마 '인간 본성'에 대한 단어적인 정의도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제가 의미하는 '인간 본성'이란 '곤충의 본성', '늑대의 본성'과 동일한 위상에 있는, '생물로서의 공통적이며 종으로서의 차별적인 비 신체적 특징'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인간이기 이전에 생물이며, 또 그와 동시에 다른 생물과는 다른 차이점을 보이는 '동물계 척추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 사람'의, 물질적 실체를 제외한 특성을 의미합니다.
그냥... 딴지 걸려는 의도는 전혀 없구요.
B. F. 스키너 - 올드 SF 팬이라면 아마도 이 사람의 책 안 읽은 이들이 별로 없을 것인데, 위에 이 사람이 왜 언급되는지 솔직히 잘 알 수가 없어서요. 이 사람은 사람을 '생물'로 파악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학자거든요. 문제는 스키너 본인이 생물학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죠. 인간을 생물로서 파악하고 접근하는 게 맞다고 했고, 또 뜬 구름잡는 소리를 떠들어대는 것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정확히 측정해 보자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 자신이 생물학이나 행동공학에 대하여 전문 지식을 익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스키너는 그냥 60년 전의 심리학자이고, 그런 사람이 <월든 2>를 썼습니다 - 심리학적 이상사회 건설을 테마로 해서요. SF 팬 사이에서는 <월든 2>가 십 수 년 전부터 필독서였지만, 평판이 별로 좋지는 못했습니다.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도 많고, 무엇보다 스키너 이 양반이 행동공학이나 생물학 등을 잘 모르면서 인문학적 소양만 가지고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를 멋대로 재단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경제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던 제레미 리프킨이 물리학은 제대로 거의 알지도 못하면서 <엔트로피>에서 자기 멋대로 사회 현상을 물리학에다가 갖다 맞추어 가려고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학문간 융합은 둘 다 확실하게 꿰차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못할 때는 당연히 배가 산으로 갈 수 밖에요. 오히려 <월든 2>는 유토피아 소설로서의 가치라든지 행동공학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교육학 쪽에서 <월든 2>에 묘사된 교육 방법론이 쓸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저자의 학문적 본령도 본래 그 쪽이었죠.
그냥 사족으로...
인문학을 한 사람이 자연 과학에 관련된 이론을 가져다가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경우, 제대로 된 말이 나올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이해 수준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인문학 한 사람이 이공계 공부를 한다고 한들, 전문적인 수식 나오면 당장 접근 불가가 되어 버릴 수 밖에 없고, 그 벽을 뛰어넘지 못하면 어차피 껍데기밖에 모르는 것이거든요. 소위 그 바닥에서 거장이라는 스키너나 리프킨도 그 지경인데, 거장 레벨이 아닌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이공계가 인문학 쪽을 이해하는 것은 (무지하게 어렵긴 하지만) 그럭저럭 가능하기는 한 것 같더군요.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경우 인지공학과 행동공학(한국에서는 산업공학 內의 세부 전공임)을 전공한 사람이죠. 그런 사람이 <괴델, 에셔, 바흐>를 썼습니다. 그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공계에 대한 지식과 마인드, 연구 방법에 대한 훈련이 기반에 자리하고 있거든요.
사족 2...
저는 제 자신이 평생이 걸려도 인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뿌리부터가 이공계이고, 인문학은 취미삼아 책 몇 권 읽었을 뿐인데 그것 가지고 그 세계를 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인문학적 테마에 대해서도 소박한 의견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 의견의 기반이 허약하고 그 분야의 프로 전공자에게는 상대도 안된다는 것 쯤은 잘 알죠. 죽었다 깨어나도 호프스태터처럼 인문학이나 철학 공부는 못할 것 같아요.
인간이 꿀벌이나 개미도 아니고, 심지어 꿀벌이나 개미들의 세계에서도 숫개미나 숫벌은 일 안하고 놀고 먹는다고 하는데..
물론 이용가치가 없으면 죽인다고 하더군요.
공산주의라는 것이 현실적이 않지만, 그렇다고 이상적이라고 말할수 없는 것이 인간은 이성이 있고 개인적인 욕망이 있다는 것 입니다.
언제인지 모르는 미래에 만일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오면 공산주의 비슷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계란을 생산하는 닭장 속에 닭들의 세상은 공산주의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알을 낳지 못하거나 병들지 않았다는 전제 조건하에..
그냥... 뱀다리(사족)이었습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사실) 인간은 이성을 가졌습니다.(정의)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특수한 기관을 유난히 발달시킨 인간의 탄생은 필연일까요? 우연일까요?
진화의 궁극은 무었일까요? 그리고 그 때 인간은 어떠한 삶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을까요?
수 많은 SF 작가들이 사변을 거쳐 미래를 예측해왔습니다.
가령 스타트랙의 세계에서는 '화폐'가 소멸했지요. 모든 물질을 '에너지'로 만들 수 있고 이 에너지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일종의 에너지 공산주의 사회처럼 보입니다.(뭐 스타트랙 함선 한대의 에너지가 행성 하나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죠.) 물론 저는 스타키가 아니므로 제 오해 일 수도 있구요.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가치'의 분배 방식에 대한 나름대로 인간이 '정의'한 정의 입니다. 요즘 자본주의는 '거품'때문에 너무도 위태위태해 보입니다.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믿고 현대 민주국가를 건설했습니다만, 현대 국가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이룬 국가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믿고 그러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 노력하는 것이 헛된 일일까요?(물론 공산주의가 그러한 이상사회는 결코 아닙니다.)
저도 생물학을 배웠습니다만, 르혼님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생물학'이 '철학'보다 더 인간의 본질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생물학이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것은 단지 새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직도 무궁무진한 연구 거리가 남아 있는 듯 하긴 합니다만...
가령 인체의 구성물질은 뼈와 같은 부분을 제외하고는 2년에 되면 완전히 물갈이 되고, 뼈도 10년이면 완전히 물갈이 된다고 하지요.
엄밀히 말하면 10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물질적으로는 전혀 별개의 존재이고 오직 '정보'의 연속체일 뿐이라고 할 수 도 있습니다.
이 생물학적 사실에서 우리가 어떤 의미를 찾는 다면 그것은 결국 '철학'적 가치가 아닐까요?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다 지금 현실의 문제 입니다.
자본주의도 조만간 대 수술이 필요해 보이고 앞으로 어찌 변해갈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가치'에 대한 정의가 바뀐다면 그에 맞추어 세상이 변해갈 것이라는 것에만 동의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미묘한 얘긴데, 본질과 본성은 또 조금 다릅니다. 또한 말씀하신 정보의 연속체는 '나'라는 면에선 중요하지만 '인간'이란 면에선 또 별로 중요하지 않고요. (신체의 모든 원소가 물갈이 된다고 해서, 사자가 물이냐 물이 사자냐 같은 장자적 물음이 '인간'과 '사자'의 차이에 큰 의미를 가지냐 하면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위에서 말한 '인간의 본성'이란, 지극히 생물적인, 그러나 '다른' 생물과는 다른 인간의 특징을 의미합니다. 허구한 날 키워로 지새우는 인터넷 세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사회 수준이 발달하고 활용할 도구가 정교해진다고 해서 쉽사리 그 본성이 바뀌지 않습니다.인간은 경쟁에 의해 적자 생존하는 생물의 속성을 모두 갖추고 있고 우리가 흔히 고차원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논리나 이성은 그런 적자 생존을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즉 논리나 이성은 어떤 절대적인 가치나 견고함을 가진 객관적인 척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물을 번성하게 만든 '직관적인 선택의 집합'일 뿐입니다.
기본적으로 논리는 비논리적이에요.
'A=B이고 B=C이면 A=C다'라는 유명한 삼단논법은, 사실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 A=B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무슨 의미냐 하는 것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논리는 사실상 논리 전개 이전 단계에서 인류의 사고 방식이 전반적으로 '공감'하는 사고 방식을 체계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이들 가르치다 보면 흔히 막히는 부분, 그런 게 논리의 맨 밑바닥에 깔린 비논리성이죠. '빨강은 왜 빨갛냐'나 '1+1이 왜 2냐'같은 것 말입니다. 이건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1+1=2라는 건 19세기에 집합론으로 겨우 설명 가능해졌지만, 그 집합론 자체가 또 비논리적 한계 = '구멍'을 가졌다는 데서 근본적인 해답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제가 방금 말한 이런 부분들은 모두 철학적인 주제이긴 한데, 저는 이런 철학적인 '정의'가 완료되고 나면 그에 따라 '탐구'하는 건 세분된 하위 학문들의 영역이라고 봅니다. '나'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등은 철학에서 고민해야할 주제지만, 적어도 집단적인 경제 생활을 누리는 인간의 생태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이유로 어떻게 그런 경제 체제를 만들고 유지하게 되었나는 철학에서는 한 걸음 떨어진 주제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 철학이 가치 판단을 내려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걸 '더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과학자의 연구 실험이 윤리적인지 아닌지는 판사가 더 잘 판단할지는 몰라도, 그 연구 대상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판사보다 과학자가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나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것 외에는 가상시민 님의 관점, 특히 자본주의가 어떻게 변해갈지 모르겠다거나, 가치에 대한 정의에 따라 세상도 변해갈 거라는 것 (패러다임의 변화)에 거의 동감하고 동의합니다.






르혼
lightsaber
무르쉬드
유럽을 기준으로 하자면, 공산주의 혁명은 유럽의 자산가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복지와 분배에 신경쓰는 계기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혁명은 실패했지만, 그 점에서 인류 역사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도 생각합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실질적으로 매우 높은 복지, 분배 제도가 정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