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단편 게시판
본 글은 [ 페스디코 ver.Short ] 의 외전입니다.
“하아… 하아”
나는 뛴다.
숨이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도 나는 뛴다.
그래, 다리가 부러지든 팔뚝에 생채기가 나든 상관없다.
단지… 이 지독한 운명의 사슬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빌어먹을 신이 친히 채워주신 운명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면, 어떤 짓이든 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뛴다.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
나는 내 옆에서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내 친구, 카이릭 던헨을 바라봤다.
역시… 내 예상대로 한계까지 치닫은 체력 덕에 죽을상을 짓고 있다.
나는 선택받은 몸이기 때문에 결코 쉽게 죽지 않는다.
하지만 던헨은 지극히 일반사람이다.
우리가 달린 거리가 100km 가 넘는 것을 감안해 보면 분명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져있을 것이었다.
그런 것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힘든 것을 내색하며 휴식을 권한 것이다.
‘게다가 자존심만 지독하게 고집하는 녀석이, 절대로 말하지 않았겠지. 끝까지.’
내가 쉬자는 말을 꺼내자마자 던헨은 바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숨을 골랐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예의상 거절도 하지 않았다.
풋, 더위 먹은 개 마냥 헥헥 거리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온다.
녀석의 모습을 보니 이 모든 것을 몰랐던 옛날이 떠오른다.
젠장할… 정말 평범한 날이었는데.
그 녀석들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웃고 떠들며 친구들과 놀고 있을 텐데.
아니, 그 운명록만 보지 않았더라면. 운명록… 이렇게 쫓기는 신세가 된 것도 결국 그 빌어먹을 것 때문이지.
천계, 영혼, 페스디코, 운명록.
제길, 이 모든 것이 실존한다고 떠들어봐야 누군들 한마디 들어주려고 할까?
소위 미친놈 취급하며 무시해 버릴 것이다.
그래, 인정한다. 나도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으니까.
문제는 이것들이 다 진짜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부인해봤자 내 자신을 속이는 꼴이 되겠지.
“이봐… 하일드.”
“왜 불러?”
“그 놈들이… 온 것 같아.”
“…”
벌써 인가?
던헨의 말과 함께 내 앞에 있던 석상이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시공간 초월이 사용될 때 나타나는 징후.
공간의 비틀림이다.
‘이제 곧 도착하겠군.’
“던헨! 다시 뛰자!”
나는 던헨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는 부축을 하며 분주히 다리를 놀렸다.
- 끼이이익
얼마쯤 갔을까, 석상이 다시 원래 모양으로 복구되며 이상한 괴음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내 몸도 얼어붙었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녀석들이… 도착했다.
“하일드 로스트. 이제 네 운명에 순응하라.”
녀석들은 천계인.
시공을 다루는 재주가 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도망쳐봐야 얼마안가 붙잡히겠지.
무모한 도전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서라도, 아니 던헨을 위해서라도 나는 뛰어야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이니까.
“단지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는 거냐? 하일드 로스트? 역겨워. 넌 지금 너 자신조차도 속이고 있다. 결국 넌
시덥지도 않은 네 신념 때문에 가족을 몰살당하게 만들고 무고한 주변사람들까지도 죽게 했다. 이제와서 지키고 싶다고 발악하는
거냐?”
나는 천계놈들의 말을 무시하고는 계속 발을 움직였다.
놈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의지이다.
바꾼다고 발악을 해봤자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오랫동안 비어있던 입안에서 단맛이 났다.
팔도 얼마 전 부러졌고, 이제는 다리마저 후들거린다.
정신 빼고는 모든 것이 한계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신마저 포기하면 나는‘신념도 뭣도 지키지 못한 머저리’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기에 나 자신을 속이면서 까지 도망가는 것이다.
“너에게는 운명을 바꾼다는 것. 그 것이 그렇게 소중하다, 그건가? 틀렸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는 오직 신 밖에 없다. 하찮은
벌레 따위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산을 무너뜨릴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 그렇지 않은가 벌레여?”
“네 놈이야 말로!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운명은 단지 인도자일 뿐이라고! 우리는 운명의 인도에 따르거나 혹은 따르지 않으
며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아니. 너와 나. 모두 운명에 귀속된 존재이다. 그것이 진리이고 불변의 법칙이다.”
“그래. 네 말은 맞아. 하지만 다른 점이 있지. 나는 운명의 길을 바꿔가는 존재이고, 너는 네 길이 바꿔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스스
로 운명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것!”
“벌레 주제에 잘도 그럴 듯한 논리를 지껄이는 군.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설명할거지?”
“…뭘 말하는 거냐?”
“죽은 네 가족들 말이다. 그 것도 운명이다. 너는 왜 그 운명을 바로 잡지 않았지?”
“그… 그것은! 다, 단지 그 때 내 힘이 부족…”
“그래. 오랜만에 옳은 말을 했군. 너는 운명을 바꿀 힘이 부족하다. 너나 나나 똑같은 거지. 그걸 알았으면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
고 이제 네 운명에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가? 천계의 수장이 된다는 거. 별로 나쁜 운명은 아니지 않는가?”
분명 녀석의 말, 모두 옳은 것을 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모두 이해한다. 네 말대로 운명에 순응하는 것.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잘 아는 군. 그런데 왜 이렇게 반항하는 것이지?”
“글쎄. 네 논리. 날 이해는 시켰는데, 설득시키진 못했거든. 이 빌어먹을 놈아!!”
나는 그 말과 동시에 내 손에 들려있던 돌멩이를 녀석에게 던졌다.
하지만 돌멩이는 그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고 허상과 같은 육체를 통과해버렸다.
“이제는 돌팔매질까지 하는 건가? 나는 물리적 충격을 받지 않는 다는 것쯤은 알텐데? 좋아. 말로 해결이 안되니 폭력이라도 쓰겠
다는 거군. 그렇다면 말이다…”
천계인의 말과 동시에 내 왼쪽 다리 주변에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발을 빼려했지만 공간의 뒤틀림에 얽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퍽석
“끄아아아악!!”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내 다리가 공간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녀석은 비웃으면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마치 죽어가는 강아지를 보며 측은해하는 듯한 눈길을 주며.
“아아. 아주 잘 어울리는 군. 그래. 다리병신이 되니 소감이 어떤가? 이제는 달리는 데 꽤나 많은 힘이 들 것 같군. 아니지. 저 옆
에 있는 놈이 도와 주려나? 그렇다면…”
녀석은 잔인한 미소를 띠며 쓰러져서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는 던헨의 곁으로 다가갔다.
혹시. 설마…!
“안 돼! 던헨! 도망쳐!”
나는 필사적으로 던헨이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
던헨은 기절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던헨의 주위에 있던 기운이 급속하게 빨리 회전하고 있었다.
시간고속화.
그는 이런 내 행동이 재밌다는 듯 비웃으며 빈정거렸다.
“풋. 그렇게 지렁이처럼 기어서 구할 수 있다면 해보시지? 녀석에 주변에는 시간고속화가 걸렸다. 이제 10초만 있으면 가루가 되
어서 흙으로 돌아갈 테지. 마음껏 감상하라고. 너도 그렇게 될 테니까.”
“!!!”
안 돼… 내가 죽으면 운명에 순응하는 꼴이 되 버린다고!
젠장할, 내가 페스디코 따위가 될 것 같냐!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 나는 갑자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이런 순간에 까지도 결국 내 걱정이나 하고 있는 건가? 나의 마지막 존재가. 날 돕다 개죽음을 당하고 있는데? 결국 나는
이런 쓰레기 이상은 아닌 거냐고…’
던헨의 육체가 점점 흙이 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무력했다.
너무나 무력했다.
그를 돕지도 못하고 다리병신이 되어 쓰러져 있는 내가 너무나 한심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순간까지도 내 걱정이나 하는 내가 너무나 역겨웠다.
어쩌면 이 천계인의 말이 옳을 지도 몰랐다.
난 벌레이고 쓰레기라고.
시덥잖은 신념 따위에 목 메이다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고 나 자신마저 잃을 거라고.
눈물이 흘렀다.
멈추고 싶었지만, 여태 참아왔던 눈물이 내 볼을 타고 내려와 끊임없이 흙바닥을 적셨다.
정신력으로 억누르고 있던 온갖 감정들이 날 잠식해왔다.
슬펐다.
이렇게 하염없이 울면서도 위태로운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의지하게 어깨를 빌려줬던 내 친구, 카이릭 던헨을 위한 눈물은 흐
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슬펐다.
“…좋아. 운명에 순응하지. 나는 무력해.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고. 네 놈들의 승리다.”
내가 자괴감이 실린 목소리로 낮게 내뱉었다.
그러자 녀석은 뭐가 좋은지 만족하는 표정을 띠며 나에게 다가왔다.
“페스디코가 되는 과정을 어렵지 않아. 단지 이 세계에서 영혼이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지. 명을 다할 시 그 주위를 방황하다 소멸
해 버리는 것이 보통의 영혼이지만 넌 선택받은 자니까.”
“그렇다면… 죽으면 된다는 건가?”
“그렇지. 어때, 좋은 조건 아닌가? 넌 이미 죽음을 초월한 고통을 느껴봤으니까.”
그 녀석이 점차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힘이 탁 풀린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던헨은 이미 흙이 되어서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무언가 속삭임 같은 것이 들려왔다.
‘……’
“자아. 내가 친히 워프검으로 네 영혼을 그 더러운 육체로부터 정화해 주마.”
천계인의 손에는 공간의 비틀림이 실체화된 검.
워프검이 들려있었다.
천계인의 능력인 시공제어술의 결정체.
워프검 주위에 공간이 정신없이 꼬이고 비틀리며 기괴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 순간을 즐기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검이 들린 손을 들어올렸다.
저것만 맞으면 온몸이 비틀리며 검안으로 빨려 들어가겠지.
- 쩌적
“크윽…큭”
워프검이 내 가슴에 박힘과 동시에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몇 백번이고 기절을 할 정도의 고통.
나는 입술을 깨물고 버텨냈다.
어떻게든 기절을 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녀석이 조소를 했다.
“버티는 모습. 참 안쓰럽군. 최대한 빨리 영혼을 거둬주마. 아아. 선택받은 몸이라서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한 저주
라는 거 너도 알겠지?”
몸 안에 있던 힘까지도 시공의 뒤틀림에 의한 기운에 휩쓸려 빠져나갔다.
나는 남아있던 힘을 쥐어짜서 뒷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산 자의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군. 이제 네 육체와는 이별할 시간이다.”
“…너야…”
“오오. 아직 말할 힘이 남아 있었나? 그래 뭐지? 이런 상황에서 까지 말하고 싶은 건?”
“…죽는 건 너라고 했다 이 빌어먹을 놈아!”
나는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뒷주머니에서 꺼내 착용한 아크 스캐터를 녀석의 가슴에 가져가고는 명령어를 외쳤다.
“에너지 방출. 최대치”
“뭐… 이런, 으아아아악!”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아크 스캐터는 신체 에너지를 아크 에너지로 전환, 증폭시킨 것.
플라즈마나 전기처럼 가시화되기는 하지만 물리적 충격은 받지 않는다.
“이건… 물리적 공격이 아니라, 네 영혼을 조지는 거니까 말이야. 잘 가라.”
순식간에 내 앞에서 비명을 지르던 천계인은 사라지고 하얀 가루만 남아서 바람에 흩날렸다.
극한의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카이릭 던헨.
그의 영혼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환청에 당황했지만 천계인이 내뱉었던 말이 내가 틀렸음을 말해주었다.
‘명을 다할 시 그 주위를 방황하다 소멸해 버리는 것이 보통의 영혼이지만 넌 선택받은 자니까.’
던헨은 육체가 소멸한 뒤 주어지는 영혼의 시간동안 나를 도운 것이었다.
아크 스캐터를 꺼내어 천계인의 가슴에 쏘라고.
분명 던헨은 내가 행복해지길 원하며 자신의 마지막 생명까지 나에게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난 모든 걸 잃었어. 친구도 가족도… 하지만 그 잘난 운명록도 틀린 것 같군. 크큭.”
운명록에는 분명 ‘하일드는 가족과 친구가 몰살당하여 그의 마지막 친구인 카이릭 던헨과 함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도주한다. 하
지만 카이릭 던헨은 얼마 안가 명을 다하고 하일드 로스트 역시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한다.’ 라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멀쩡히 살아있다.
그것도 날 죽여 페스디코로 각성시키려던 천계인도 죽이고 말이다.
“큭큭큭. 결국 내가 맞았다고.”
천계인에 대한 복수에 의한 희열, 살인에 대한 죄책감, 알 수 없는 자괴감 등 각종 감정이 겹치며 내 입에서 미친 듯한 웃음이 퍼
져나갔다.
그런 웃음은 어느 덧 슬픔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 눈에서 던헨에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이 흐른 것이다.
뒤돌아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돌아보면 내 죄업들이 날 옥죄일 것 같아서 그 슬픔과 행적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를 것 같아서.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검은 물체가 떨어졌다.
마계인이었다.
천계인에 대항하는 세력.
천계인들과는 반대로 나를 도와주던 자들이다.
나에게 찾아온 자는 마계인들 중 나와 가장 친했던 자, 필칸트 퀘르스였다.
내 가족이 죽은 뒤 나를 보호해주며 천계인들과 싸워주었던.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 모습이 꼭 아들을 감싸러 와주는 아버지의 모습 같았다.
단지 더 이상 무너질 수도 없을 만큼 무너져버린 내 마음이 안식이 필요하여 만들어낸 거짓 일지라도.
나는 상관없었다.
그냥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지독한 꿈같은 날이었어요.’라고 말하며 마음껏 울고 싶었다.
“필칸트…”
내게 다가온 필칸트는 화전을 꺼내었다.
마치 누군가를 죽이려고 결심한 사람처럼 비장하게.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푸욱’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의 화전이 내 복부를 꿰뚫었다.
화전에서 피어오르는 지옥의 염화는 게걸스럽게 내 복부를 휘감쌌다.
입에서는 핏물이 새어나왔다.
“어… 어째서.”
- 푸욱
내가 멍하니 풀린 눈을 하며 그에게 다가갈수록 그의 화전이 점점 더 뱃속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익숙한 눈동자.
지겹도록, 하지만 질리지 않고 바라봤던 나의 기둥이자 조언자였던 사람.
“아… 아버지…?”
그는 내 말을 듣더니 나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저히 이 상황을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가 환생해서 나를 죽이러 온 건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날 보호해 준 건 뭐야?
설마, 그런 것 조차도 운명이라는 것은 아니겠지?
필칸트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개는 여전히 돌린 채로.
“넌… 후대 페스디코가 아니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친 듯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내가 후대 페스디코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죽으면,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개죽음 당하는 건가?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에서만 맴돌 뿐, 이미 내 몸을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후대 페스디코는 이미 결정되었다. 그리고… 넌 전대 페스디코다.”
“…”
전대 페스디코라면, 그렇게 지겹게 들은 천계와 마계에서 종적을 감추고 이계로 탈출한 자를 말하는 거다.
나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를 바라보던 고개조차도 떨구었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그의 말.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 그리고… 네 죽음. 또한 나의 환생도. 이 모든 것이 운명록에 기록된 일이다.”
내 몸은 그 말과 동시에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 때 마지막으로 떠오른 기억은 던헨과 함께 도주할 때의 대화였다.
* * *
내가 그에게 질문했었다.
'너는 운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라고.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운명이란, 안내자 같은 거야. 우리에게 우리가 걸어 나갈 삶의 방향을 인도해줘. 하지만, 결국 그 길을 걷는 것 은 우리이지.'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말에 수긍했었고, 또한 그러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그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운명이란 두 갈래 길과 같다'고.
어느 쪽으로 가던 그것은 나의 의지이자 선택이지만, 결국 그 종점은 운명에 쓰인 대로 걸어 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던헨… 아직도 우리가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 넌 틀렸어.
단지 우리는 신이 채워준 우명의 족쇄에 신이 정해놓은 운명록의 발자취에 맞추어 걸어 나가며 자신의 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 일뿐이라는 것을.
너도 이제는 알겠지? 카이릭 던헨…
* * *
그리고 이렇게 내 856년의 긴 생은 초라한 막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