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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설계자이자 사냥꾼이자 추적자. 이런 캐릭터 흔하지 않죠.]
소설 <쥬라기 공원>과 <잃어버린 세계> 간의 차이점 중 하나는 인물 구조입니다. 전편에 해당하는 <쥬라기 공원>은 제목 그대로 동물원과 놀이 공원을 꾸미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공원을 관리하는 별별 직책이 다 있고, 이들이 나중에 과학자들과 연합하여 생존 전략을 펼칩니다. 반면, <잃어버린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자들 밖에 없습니다. 수학자 아이언 말콤, 고생물학자 리처드 레빈, 동물행동학자 새러 하딩, 공학자 숀…. 다행히도 에디 카는 그냥 기술자이지만, 큰 활약 없이 중간에 랩터에게 죽습니다. 이러니 아무리 말콤과 레빈의 개성이 튄다고 해도 어차피 과학자 입장에서 사건을 진행하고, <쥬라기 공원>에 비하면 다양성이 부족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속편인데도 훨씬 심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엑스트라 직원들까지 포함하면 인구수 차이가 더 커지죠.
특히, <잃어버린 세계>에 나오지 않은 인물로는 로버트 멀둔이 아쉽습니다. 멀둔은 전편에서 공원 경비를 담당했던 사냥꾼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야생 안내자에 해당하죠. 사냥꾼들을 도와주긴 하지만, 사냥꾼은 아닙니다. 동물들에 관해 해박하긴 하지만 과학자도 아니고요. 사냥꾼과 동물학자의 중간 지점에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멀둔은 좀 특이한 직업이고, 사람들이 이런 부류의 작품에서 예의 기대하는 행동과는 좀 떨어졌습니다. 공룡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과학자들은 몸을 바쳐서 공룡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할 겁니다. 뭐, 대개 SF 작품에서 과학자는 자연을 지키는 쪽이죠. 반면, 사냥꾼은 공룡을 죽이고, 특히 T-렉스 같은 큰 놈을 없애서 머리를 트로피로 가져가려 할 겁니다. 다른 SF물에서도 사냥꾼은 항상 동물을 잡아 죽일 생각만 하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멀둔은 다릅니다. 무조건 파괴를 추구하지도 않고, 앞뒤 가리지 않고 자연을 보호할 생각도 안 합니다. 딱 거리를 두고 동물들을 자기 이익에 맞게끔 이용할 뿐입니다. 틀에 찍어내는 뻔한 캐릭터는 아니죠.
로버트 멀둔은 존 해먼드와 만나기 전에 동물원 설계자로 일했습니다. 어느 동물들에게 어떤 공간이 얼마만큼 필요한지, 동물들의 전반적인 위치를 어떻게 구성할지 자문해주는 게 주된 업무였죠. 확실히 상투적인 공룡물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선사시대로 떠나는 탐험대가 동물원 설계사를 필요로 하진 않으니까요. 해먼드와 만난 뒤로는 쥬라기 공원에서 비슷한 업무를 합니다. 호랑이 대신 벨로시랩터를, 코끼리 대신 브라키오사우루스를 돌보는 차이점이 있지만요. 하지만 야생동물 경험이 풍부한 멀둔이라도 공룡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룡을 돌보는 야생 안내원으로서는 세계 최초였으니까요. 랩터나 딜로포사우루스는 매우 위험했고, 멀둔은 공룡을 죽여서 해부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하지만 한 마리를 복제하는 게 워낙 비쌌기 때문에 경영진은 허가를 안 했죠. 그래서 멀둔과 공원 경영진은 사이가 안 좋습니다. 낭만을 제거하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탓이죠.
한편으로 사냥꾼 안내원을 맡은 까닭에 멀둔은 총기류에 관해서도 해박합니다. 그랜트가 공룡 지식이 풍부할지 몰라도 무력에는 약한 반면, 멀둔은 둘 다 유능하죠. 생물학 지식은 그랜트만큼 뛰어나지 않을지라도 그에 못지않은 공룡 지식이 있으며, 야생에서 큰 동물 사냥을 목격한 만큼 동물들을 제압하는 법도 숙지했습니다. 공원에 레이저 조준 미사일 발사기가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고요.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랜트는 공룡을 별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한 무기도 없었고요. ‘공룡과 싸우는 역할’은 멀둔의 몫이었죠. 마취총으로 T-렉스를 쓰러뜨린 것도, 미사일로 랩터들을 날려버린 것도 멀둔이었습니다. 만일 육식공룡이 초식공룡 우리로 쳐들어갔다면, 그 놈을 끄집어내는 일도 이 사람 몫입니다. 그랜트가 랩터 둥지를 조사하러 갔을 때 장비를 문의하기도 했죠. 일반적인 게임에서 그랜트가 벨로시랩터에게 총질하는 건 잘못된 고증입니다. 멀둔이 나왔어야죠.
또한 멀둔은 섬세한 추적자(tracker)이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동물들 발자국을 쫓아가는 것처럼 멀둔은 발자국을 보고 상대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랜드 크루저가 티라노사우루스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멀둔은 부서진 차와 진흙 속 발자국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거의 정확하게 추리해냅니다. 발자국의 종류와 형태를 파악하고, 상처를 보고 어떻게 공격받았는지 알아내고, 잔해를 보고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추측하죠. 바닥에 얼굴을 바싹 붙이고 발자국을 찾아 다니는 모습은 셜록 홈즈를 연상케도 합니다. 옆에서 보던 도널드 제나로의 말에 따르면, 진흙 속에서 원하는 건 다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하죠. 물론 그랜트와 아이들이 이미 멀리 떠났기 때문에 찾아내진 못하지만, 말콤을 찾아서 데려오긴 합니다. 만일 멀둔이 없었다면 말콤은 T-렉스 우리 근처에서 과다출혈로 죽었을 겁니다.
이렇듯 멀둔은 안내자, 야생동물 전문가, 사냥꾼의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그만큼 활약합니다. 하지만 공룡 영화에는 고생물학자가 주인공으로 튀어야 하는 까닭에 로버트 멀둔은 영화에서 금방 퇴장합니다. 총을 들고 랩터를 잡을 것처럼 돌아다니더니 오히려 죽고 말죠. <죠스>에서도 그렇고, 어째 스필버그 동물 영화에서 총 들고 다니는 자들은 다 죽는군요. 소설에서는 그랜트와 함께 끝까지 살아남건만. 게임에서도 앨런 그랜트에게 명성이 밀려 주인공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다만, <오퍼레이션 제네시스>에는 공원 경비 때문에 자주 만나게 됩니다. 화석 표본만 전해주는 그랜트보다 오히려 멀둔이 더 많이 나와요. 헬기를 타고서 초식공룡을 우리로 몰아넣는 것도, 빠져 나온 육식공룡을 저격하는 것도 전부 멀둔이 하는 일입니다. 로버트 멀둔이란 캐릭터를 올바로 활용한 유일한(?) 게임인 셈이죠.
작품 속에서 ‘야생동물 경비대’는 흔한 직업이 아닙니다. 동물학자와 사냥꾼이 워낙 입지를 단단히 다져놓은 까닭에 끼어들 틈이 없거든요. 국립공원이나 동물원 같은 소재가 흔하지도 않고요. 자연 경비대가 최근에야 생긴 직종이기도 하고요. 로버트 멀둔은 이런 드문 캐릭터 중 하나였는데, 영화나 속편에서 너무 짧게 활용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