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단편 게시판
올리고보니 한부 분량이 적다는 느낌도 있네요. 그래도 이야기적 효과를 위해 이대로 두는게 낫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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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소는 몇달 뒤에 있을 대회때문에 육상연습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는 운동장이 두개나 있었는데, 육상부나 운동부를 위한 운동장과 일반 체육시간을 위한 운동장이었다. 물론 미소는 육상부를 위한 운동장에서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약간은 초조한 마음과 함께. 1학년이면서 학교대표로 나가게 된 부담감 때문인지 성적이 전혀 나아지지가 않았다. 코치도 한시간인가 봐주더니 결국엔 「마음의 문제인 것 같으니까, 내키는 대로 달려봐.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라는 말과 함께 가버렸다. 그렇게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코치면 방법을 알려줘야지.
하지만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헉- 헉-」
아무 생각없이 달린게 벌써 세시간째. 중간중간 쉬기는 했지만 다리는 힘이 풀려 비틀댔고, 숨은 가파오고, 머리는 어질어질 했다. 마라톤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거리주자가 세시간씩이나 연달아 달리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저질러 버렸구나.」
물을 마시며 하늘을 쳐다보자 날이 잔뜩 흐려져있었다. 안그래도 저녁시간이라 어둑해지는 하늘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물을 잔뜩 들이킨 미소는 근육풀이겸 한바퀴 더 돌고 갈 것인지, 이대로 기숙사로 갈 것인지 고민했다. 한바퀴 더 돌면 비가 와서 땀에 젖은 몸이 씻겨지겠지, 라는 어이없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날씨는 미소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미처 결정도 하기 전에.
투-투툭- 후두둑-
한 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금방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
「야, 잠깐만! 너무 하잖아!」
미소는 다급하게 옷가지와 물통들을 들고 스탠드로 뛰었다.「너무 빠르다구!」그런 미소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번쩍!
콰르릉-
하고 천둥까지 치기 시작했다. 어쩐지 악의가 가득찬 것 같다. 비는 세차게 쏟아지고 간헐적으로 천둥 번개가 쳤다.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 중에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고함을 지르는 녀석도 있었다. 미소는 학교에 들어가서 몸을 말리고 가야할까 하다가, 그 고함소리에 깜짝놀랐다. 남자의 목소리. 그랬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미 땀에 젖을대로 젖어있던 미소의 옷은 비에 의해 완전히 젖어서 몸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운동복이라 금방 마르겠지만 지금 학교로 들어갔다간 남학생들의 눈빛을 견딜 수 없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미소는.
「역시 기다려야겠구만.」
남자같은 말투로 혼잣말했다.
비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한번 내리기 시작한 것을 신호로 이대로 장마가 되려는지 세차게 쏟아졌다.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거야? 라고 미소는 중얼거렸지만 빗소리에 삼켜졌다. 눅눅한 옷은 잘 마르지 않았고, 빗방울소리는 거셌다. 스탠드 위의 플라스틱 막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이대로 기숙사로 달려가야 하나 생각했다. 만약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한 사람만 없었다면 달려갔을 것이다.
「어?」
세찬 빗줄기 사이로 한 사람이 걷고 있었다. 비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느릿한 걸음으로. 빗줄기를 배경삼아 마치 더운 여름날 늘어진 고양이처럼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감기에 걸릴텐데.’ 그렇게 생각한 미소는 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학생인걸까?’한참을 바라보던 미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소름이 돋았다.
「설마?」
원래 여고였던 해미 고등학교엔 이상한 전설이 많았다. 제작년부터 남녀공학이 된뒤로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여고 선배들에게서 한번 들으면 절대 잊지 못할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비오는 날의 까마귀괴물이었다. 어째서 요즘세상에 찾아보기도 힘든 까마귀인지는 모르지만, 비만 오면 까마귀괴물이 운동장을 맴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까마귀 괴물과 만난다면 절대로 눈을 마주치면 안되고, 질문에 대답해서도 안된다고 했다. 만약 눈을 마주치면 기억을 잃고, 질문에 대답하면 온 몸이 하얗게 되어서 죽어버린다고 했다.
그 까마귀 괴물이 어떻게 생겼더라. 미소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째서 까마귀괴물이었더라. 아마 모습과 관계된 이름이었을 텐데. 어쩌면 깃털이라도 뒤덥고 있나? 아니면 까마귀처럼 부리가 있다던가.
비슷했다.
괴물이라기엔 가냘픈 몸이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멀리서보면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할만큼 선이 가늘었다. 그렇지만 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상은 까맣다 라는 것.
「까마귀다!」
미소는 달아나려했다. 하지만 그 순간 미소를 붙잡은 것이 있었다. 어쩌면. 만약에 저 사람이 그냥 학교의 소녀고 비에 젖어서 걸어오는 것이라면 자신의 수건이 필요할 것이다.
‘몹쓸 짓이라도 당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오는 것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느릿한 걸음이 절망과 고통의 걸음걸이 같았다. 미소는 자신을 비웃었다. 요즘 세상에 괴물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잖아. 연습을 너무 오래한 탓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철녀는 달려갔다. 빗줄기를 뚫고 뛰어갔다. 빗방울이 눈앞을 가리고 천둥번개가 콰릉거리며 울었지만 무시하고 달려갔다. 오랜 연습뒤라 피곤에 젖은 몸은 무거웠지만 달렸다. 달려갈수록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여자애-그렇게 생각했다-의 걸음걸이는 비틀거리는 것 같았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비가 잔뜩 고인 운동장을 달려간 철녀는 그녀앞에 섰다.
까만 숄을 어깨부터 무릎아래까지 감싸고 있었다. 그 숄끝에는 까만 매듭이 수없이 매어져있었는데, 마치 까마귀의 깃털같았다. 그리고 그 까만숄 아래엔 희디 흰 다리가 있었다. 어쩐지 맨다리다. 철녀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시선을 점점 올려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잔뜩 기른 머리카락이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흰 뺨과 가는 턱. 부러질 듯한 목. 그리고 분홍 입술.
「괘,괜찮아?」
철녀는 빗방울에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말했다. 비에 젖어서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고,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눈을 괴롭혔다. 그래서 아마 그녀의 입술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테다. 어쩐지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입을.
「괘,괜찮냐고! 아니, 아니다. 일단 저기로 가자.」
철녀는 소녀의 팔을 잡았다. 가냘픈 손목이 잡혔다. 그대로 달려가려던 철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뛰기 힘들정도로 아픈건 아니지? 조금만 참아. 이대로 달릴테니까.」
그 순간, 소녀의 입이 슬며시 벌어졌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왠지 빗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텅빈 공간을 울리는 소리처럼.
「내가 무섭지 않아?」
그렇게 말했다.
3.
「꺄아악! 무서워!」
가시가 비명을 질렀다.
「으응? 그래?」
「어, 무서워. 무서워.」
가시는 정말 무섭다는 듯 팔을 부볐다. 하지만 이야기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쩐지 불만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림자는 약간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애는 괜찮았어?」
「......잠깐. 너 도대체 무슨 이야기 들은거야. 그 여자애가 까마귀괴물이었다는 거잖아.」
가시의 말에 그림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게......그냥 무섭지 않아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고.....그리고 진짜 소녀였을 지도 모르잖아.」
「아냐. 확실해. 그 여자애는 까마귀괴물이었던 거야. 어우 무섭다. 그런데 그 뒷이야기는 어떻게 됐어?」
가시의 물음에 철녀는 하핫 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어색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미안. 그 뒷이야기는 사실 단순해. 그 여자애는 사실 진짜 아픈 여자애였어. 우산없이 나왔다가 비에 맞아서 돌아가다가 진이 빠져서 그렇게 됐대.」
「에?」
가시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림자는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철녀는 모두의 반응이 ‘황당하다’가 되자 더욱 어색한 투로 말했다.
「미안.미안. 하지만 나 진짜 무서운 이야기는 모르는 걸.」
「그래도 너무했다. 이제야 재밌게 되나 했는데. 그냥 진짜 여자애였다니. 왠지 속은 기분이야.」
「정말 미안. 별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어서.」
「역시 철녀.」
「.......맞을래?」
가시와 철녀가 그렇게 서로 투닥거리고 있을때, 이야기꾼은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갸우뚱한 표정으로. 시선은 철녀를 향한 채로 한참을 바라보던 이야기꾼은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대 모서리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러자 가늘고 긴 다리가 이불사이로 삐져나왔다. 달빛에 다리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투로.
「거짓말.」
이라고 말했다.
철녀는 그 말에 당황했다.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네 이야기.」
「어째서?」
철녀의 물음에 이야기꾼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철녀를 바라보았다. 달빛 가까이에 선 이야기꾼은 달의 이야기라도 들려줄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감싼 이불은 밤의 자락처럼 어두웠고, 긴 다리는 물가에 솟은 자작나무처럼 희게 빛났다. 진중하며 깊이 있고 울림있는 목소리로 이야기꾼이 말했다.
「실제로 그건 까마귀괴물이었어.」
모두 침묵했다. 철녀 역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야기꾼만이 입을 열어 말했다.
「먼저 빗속을 아무 이유없이 걸어다니는 소녀는 없겠지. 그리고 그 소녀는 물었어. 무섭지 않아? 라고. 그 말은 그 소녀자신이 무서운 존재라는 반증이 되겠지. 내가 생각하기에 넌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어, 분명히. 내가 추론한 이야기는 이래. 아마 이편이 더 재미있을거야. 들어봐.」
그리고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뒤로 뻗어 가상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중성적인 목소리로.
「‘응? 무섭지 않은데. 왜?’」
히익! 이야기꾼의 말에 가시가 비명을 지르려다 입을 막았다. 그리고 저 목소리 들었냐는 듯 그림자와 철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철녀는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이야기꾼은 이번엔 반대편 팔을 내밀어서 가상의 손에 잡힌 것처럼 팔목을 들었다. 고개를 숙이며 웃는 듯한 목소리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어? 난 까마귀괴물이라고’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 날 무서워 하지 않는구나. 나와 대화를 나누면 사라져버린다고 했었는데, 넌 사라지는게 무섭지 않아?’
‘.......그,그런게 사실일리 없잖아.’
‘그럼 나의 눈을 바라볼래?’
‘......진짜 네가 까마귀괴물이야?’
‘그래. 지금은 그렇게 부르더군.’」
연극처럼 대화를 이어가던 이야기꾼은 잠시 말을 멈췄다. 대화사이의 휴지처럼. 주위의 소녀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사람들을 죽이는거야?’
‘죽이지 않았어.’
‘네가 하얗게 만들어 죽인다고 하던데.’
‘그건 날 무서워해서야. 그리고 죽이지도 않았어. 희게 만들긴 했지만.’
‘왜 그런짓을 해.’
‘날 무서워하니까. 하지만 넌 희게 만들지 않을게. 날 무서워하지 않으니까.’
‘뭐?’
‘미안. 더 대화하고 싶지만 난 이 학교에 들어가야 해. 그러니까 그만 내눈을 바라볼래?’
‘뭐?’
‘네가 나와 이야기했던 기억이 남아있으면 안되잖아. 그건 내가 싫거든.’」
쿠쿡- 하고 이야기꾼이 웃었다.
「‘싫어. 안볼래.’」
가시와 그림자가 철녀를 바라보았다. 철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야기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멈춰 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이 달싹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하지만 기억하면 안되는데 그게 규칙이야.’
‘날 희게 만들거야?’
‘아. 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있구나. 난 까마귀야. 빗속에서만 어둡게 도드라지지. 희게 된다는 건 말이야. 어디에도 없게 되는거야.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거지. 그래. 마치 없던 것처럼 말이야.’
‘사라진다고?’
‘그래, 완전히. 그러니까 그만 내눈을 봐.’
‘안보면 사라지게 할거야?’
‘그래.’」
이야기꾼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이불을 숄처럼 감싸쥐고 발그레한 얼굴로 철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됐어?」
그것이 철녀에게 향한 물음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랜 시간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난.......」
철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 싫어.」
누가 한 대답인지 알수 없었다.
4.
「에고. 잘못 돌렸네. 다시 돌려야겠어.」
커터칼은 비어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가시는 손을 으쓱였다. 그러다 테이블을 옮기다 접질린 손목을 감싸쥐었다.
「에이-, 합창대회있는데.」
「손 다친것하곤 상관없지 않아? 아. 설마 너는 손부리영감 같은거야?」
「무슨 소리야!」
가시가 발끈했다. 그림자는 그만하라고 말리고 싶어했지만 선뜩 입이 열리지 않는 듯 당황해했다.
「어쨌든 다시 돌릴게. 이걸 돌려서 나오는 사람이 첫번째 이야기꾼이야.」
「아까 말했잖아.」
가시가 말했다. 그 말에 이야기꾼은 웃음을 웃었다.
「그런가? 어쨌든 첫번째로 이야기 할 사람은.......」
커터칼이 돌아갔다. 빙글빙글. 칼끝이 달빛에 반짝였다. 꽤 오랫동안 돌아간 커터칼은 속력이 줄어들더니 곧 멈췄다. 그 칼끝에는 가시가 있었다.
「으,응? 나? 이거 이거. 나 진짜 무서운 이야기 안다고. 들었다가는 오늘 밤에 잠도 못잘 걸.」
가시의 말에 이야기꾼은 기대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벌써부터 두려움 어린 눈으로.
「그래도 너무 무서운 이야기는......」
「규칙은 규칙이야.」
「후훗. 그럼 이야기해볼게. 2년 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때의 일이야. 봄이었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