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라곤>, <엘디스트>, <브리싱거>는 크리스토퍼 파올리니가 쓴 판타지 작품입니다. 유산 3부작에 해당하는 시리즈로 드래곤 라이더, 즉 용기사를 다루죠. 원래 계획은 3부작이었는데, 인기가 많아서 4부작으로 늘린 듯. 정확한 판매량은 잘 모르겠지만, 편성을 늘릴 정도로 히트하긴 했나 봅니다. 작가는 현재 마지막 권에 해당하는 4권을 쓰고, 얼마 안 가서 나올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꽤 재미있게 읽었고, 특히 2권인 <엘디스트>부터는 상당한 필력과 흡입력을 자랑합니다. 한 번 책을 붙잡으니 놓기가 힘들었어요. 그런데도 다 읽고 나면 뭔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겁니다. 읽을 때는 재미있는데, 정작 그 후에는 소감이 별로라고 해야 하나. 읽기에만 재미있는 책 같아요.

 

물론 읽기 재미있으니 이 책은 대중 소설의 본분을 다한 겁니다. 그 점에서 보면 나쁜 책은 아니에요. 시중에 나오는 소위 양산 판타지에 비교할 수준은 아니겠죠. 하지만 그 이상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집중해서 읽다가 한 번쯤 책을 무릎에 내려놓고, 상념에 젖게 하는 그런 마력은 부족해요. 마침내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인식의 범위를 넓혀주는 깨달음 혹은 각성도 미약하고요. 유산 3부작은 작중에서 갈버토릭스의 통치 문제나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 복잡한 정치 상황 등을 논하기는 하지만, 그게 인식의 지평선을 확장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교양 서적이나 여타 판타지 작품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문제 제기에 그치고 말죠. 다시 말하지만 단점은 아닙니다. 재미는 있으니까요. 어디까지나 아쉬운 점이라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설인 듄 연대기에 비교하자면, 읽기 쉽고 재미있는 건 유산 3부작입니다. 책장도 술술 잘 넘어가고, 문체도 훨씬 나은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크리스토퍼 파올리니가 엄청난 설정을 지어냈다거나 아이디어가 참신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듄 연대기를 볼 때는 우와와, 프랭크 허버트는 혹시 숨겨진 천재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파올리니는 그런 이미지랑 연결이 안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랭크 허버트는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극지방을 제외하면 온통 모래로만 이루어진 행성, 모래 속에 서식하는 거대한 육식동물 샤이-훌루드, 그리고 몇 만년에 걸친 행성 생태계의 변화와 그로 인한 천연자원을 둘러싸고 벌이는 암투. 나온 지 이미 몇 십 년이나 되는 책이지만, 아직도 그 상상력은 빛이 바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뻔한 자연환경 이야기보다 이만큼 생태계를 신비하게 말한 장르소설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산 3부작에서 작가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건 이야기 그 자체 밖에 없는 듯해요. 나머지는 기존에 있던 것을 가져다 보기 좋게 짜맞추었을 뿐이죠.

 

비단 설정만 그런 게 아닙니다. 서술 방식도 그렇죠. 영어 원문을 보지 못해 문체는 뭐라고 할 게 못 되겠지만, 서술 방식은 어쩌면 그리 <반지전쟁>과 비슷한지. 특히, 엘프 도시로 들어가는 관문은 이게 지금 로스로리엔인지 엘레즈미라인지 헛갈릴 정도. 어차피 장르 판타지가 <반지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지만, 최소한 작가의 개성이란 게 있을 텐데요. 영어권 소설은 아니나 <로도스도 전기>나 <드래곤 라자> 같은 엘프가 각자 자신들만의 개성을 살렸다면, 유산 3부작은 좀. 디드리트가 제아무리 게이샤처럼 웃는 엘프라고 해도, 이루릴이 거기에 영향을 받은 아이돌 엘프라고 해도 여하튼 이전의 엘프들과는 달랐잖아요. <에라곤>에 나오는 아리어는 예쁘다는 묘사가 수 십 번은 나온 것 같은데도 워낙 공기 같아서 정감이 안 갑니다. 설정이 워낙 똑같아서 개성마저 없다고 해야 하나요. 아무리 짜맞추기만 한다고 해도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이 한 번쯤은 나올 텐데, 희한하게 그런 게 안 보인단 말이에요.

 

물론 어떤 소설이든 작가에게 제일 중요한 건 필력일 겁니다. 그리고 유산 3부작은 굉장한 필력으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책이 어떠한 영감을 주거나 창의성에 자극을 줄지는 의문입니다. 글은 잘 쓰는데, 설정이 뒤따르지 않는 작가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장르 소설에선 필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설정을 잘 짜는 작가가 더 낫다고 봐요. 아서 클라크나 러브크래프트가 필력이 안 좋다는 말을 허구한 날 들어도 그 사람들 작품을 읽고 나면 지구가 지구로 안 보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