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끝났습니다.”

나는 막 잠에서 깬 환자를 상대로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건넸다.

그 환자는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눈을 꿈뻑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보통 깬 직후에 몇 초간 분간을 못하고 허둥대는 거야 많이 벌어지는 일이니 나는 조금만 더 참을성을 갖고 환자에게 다시 말했다.

인터페이스 Interface에서 내려와 주세요. 다음 손님이 기다리신답니다.”

이렇게 까지 말했음에도 이 환자는 계속 멍하니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슬슬 이 상황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받아야할 환자가 많다.

이렇게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받는 환자, 그러니까 수입이 줄어든다.

이런 생각까지 미치니 내 영업용미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오늘 업무할당량도 많아서 기분도 별로 안 좋았는데 이 환자덕분에 점점 더 기분이 하락하게 되었다.

아니 대체 앞에 사람은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겁니까?”

역시나 아우성들이다.

참을성 없는 사람들 같으니.

나는 더 이상 이 환자에게 시간을 지체하는 것을 그만두고 대신 다음 교대해줄 동료를 불렀다.

하아어이, 마크! 일단 이 환자 임시침실에 놔두고 올 테니까 바로 교대해.”

알았어. 대신 그 인간 빨리 좀 정신 차리게 해봐. 저러다 며칠 동안 코마상태 빠지면 곤란한 건 우리라고.”

그 이야기 꺼낼 줄 알았다.

그래, 곤란한 건 우리지.

나는 남들 모르게 작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알았다, 알았어. 젠장할.”

정말 여러모로 귀찮게 하는 환자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가끔씩 이렇게 현실과 꿈속을 분간하지 못하고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를 우리는 코마 Coma 라고 부른다. 1000명중에 1명꼴로 벌어지는 희귀한 상태이상이긴 하지만 저런 것이 며칠 가면 책임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책임이라는 게 또 어이가 없다.

분명 약관에 드림 리딩 Dream Reading 과정 중 생기는 일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도 드림 리더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는데다가 우리가 이 대목만 따로 짚어서 설명을 해도 잘만 동의서명을 한다.

그리고서는 나중에 실제로 코마 같은 일이 일어나면

멀쩡한 사람 정신이상자로 만들어놓고서는 그깟 조항으로 얼버무릴 셈이냐고 도리어 화를 낸다.

실로 지독한 이기주의가 아닌가 싶다.

신나게 벽에 낙서하다가 걸려놓고서는 벽 주인에게 여기 벽이 있으니까 낙서를 하지!’라며 화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자신들도 즐기기 위해 여러 위험성을 안고서도 드림 리딩을 하겠다고 제 발로 찾아오는 것인데 말이다.

나는 속으로 끝없이 푸념을 늘어놓으며 내 품안에 안겨있는 환자를 침대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정말 여러모로 귀찮게 하는 인간이다.

보통 사람들처럼 얌전히 깬 뒤 출구로 걸어 나가면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생각과는 다르게 내 얼굴에는 편안함이 떠올랐다.

이제 3시간동안은 정신을 쉬게 해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나 혼자만 드림 리딩을 했기 때문에 하루 중 15시간,

그러니까 밥 먹고 자고 화장실갈 시간 외에는 내 뇌를 편하게 해줄 여가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런 상태가 1~2달 지났을까, 나와 같은 드림 리더, 그러니까 마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서로 3시간씩 교대를 하며 드림 리딩을 하게 되었는데

확실히 정신적 피로를 회복할 시간이 주어지니 업무진행속도 또한 빨라졌다.

여전히 정신력소모가 만만치 않은 것은 똑같지만.

슬쩍 옆을 바라보니 아까 그 환자가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 ? 그렇다면

잔다는 것은 현재 의식이 돌아왔다는 증거였다.

보통 코마에 빠지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자는 행위조차 못하고 무의식의 늪 속에 방황하고 있기 마련.

나는 안도의 한숨-환자의 안위 때문이 아닌 번거로운 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을 내쉬고는 나 또한 임시침실에 몸을 뉘였다.

3시간동안 눈을 좀 붙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짬짬이 쉬어주지 않으면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하루에도 몇 백 명씩 환자가 찾아오니까.

눈을 감으니 방금 전 드림 리딩을 한 뒤 생긴 꿈의 잔해들이 펼쳐졌다.

드림 리딩을 할 때 눈 여겨봤던 장면들이 사진처럼 남아서 나를 스쳐가는 꿈의 잔해는 정말 골백번은 본 것 같은 데도 질리지가 않는다.

원래 드림 리딩 후에는 모든 기억들이 소거되는데, 그 재가 되어버린 꿈속에서 찾을 수 있는 꿈의 잔해는

유일하게 나의 무의식의 발자취를 볼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어차피 시간도 남아있으니 조금만 더 잔해를 파헤쳐보기로 했다.

대체 저 환자와는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으음대체 이 환자 무슨 의뢰를 했었지?’

드림 리더들은 단기 기억력이 상당히 좋지 않다.

하루에도 수백 번 드림 리딩을 해야 하기 때문에 뇌가 그에 맞추어 진화-이런 표현이 맞을까 모르겠다만-한 것이다.

쓸데없는 기억들을 바로바로 잊어버리도록.

하지만 이 환자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최근 것이니 어느 정도 찾다보면 나오겠지.

2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점점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힘들게 찾아서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환자가 의뢰한 꿈의 내용은 전쟁이었다.

남자환자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문제는 남자환자들이 주로 선호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 환자는 여자였다. 그것도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어쩐지 호기심이 일었다.

후후후. 좋아. 그러면 남은 시간동안 꿈의 잔해들을 한번 모아볼까?’

, 사생활 침해긴 하지만 이건 나와 같은 드림 리더 외에는 모르는 사실이니까 별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얼마간 잔해를 뒤적거려보니 꿈의 기억들을 몇 조각 모을 수 있었다.

꿈의 기억은 꿈의 잔해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 꿈의 내용 중에서 소각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몇 시간-실제 시간상으로는 몇 분도 흐르지 않았겠지만- 간에 사투 끝에 건진 것은 꿈의 기억 5조각.

나는 그것들을 차례대로 내 앞에 늘여놓고는 하나하나 분석해보기 시작했다.

‘A Silver Picture Production 이라에에 뭐야? 영화잖아, 이거. , 이젠 꿈도 남의 생각을 빌려서 꾸다니.’

뭐 말이 이렇지 실은 드림 리더들을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영화 시나리오를 직접 겪는, 그런 꿈을 꾸게 해달라고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 드림 리더들이 다른 평범한사람들보고 손님, 또는 의뢰인이 아닌 환자라 부르는 것이다.

창의력 부족 환자.

물론 우리들끼리 이야기할 때만 그렇게 하지, 실제 사람들 앞에서는 손님이라고 부른다. 만약 이렇게 부르는 것이 탄로 나게 되면 한동안

드림 리더들, 이대로 좋은가라고 떡하니 신문 1면을 장식하게 될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용은 봐야지.’

나는 내 돈줄, 아니 환자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그만 두고 다른 꿈의 기억들을 집어든 뒤 살펴보았다.

이상한 기계, 아니 문어랄까. 뭐 그런 이상한 괴생물 여럿이 SF적인 디자인을 한 비행선을 뒤쫓고 있는 모습이었다.

! 잠깐. 이 문어, 아니 기계 어디서 본 것 같단말야? ! 맞아! 매트릭스였어! 센티넬이던가? 그랬지.’

아무래도 이 내용은 고전 SF명작영화인 매트릭스의 시나리오인 것 같았다.

그런데 매트릭스가 전쟁영화였나?

, 꿈의 내용에서 총 쏘는 모습을 보고 대충 생각해버린 거니까.

이제 내용은 알았으니 꿈에서의 나의 형태를 알아볼 차례이다.

드림 리더는 무조건 의뢰인-환자라는 칭호는 잠시 그만 사용 해야겠다- 의 꿈에 같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드림 리딩에 대해 다룬 법에 명기되어 있는 첫 조항으로 이런 조항을 넣은 이유는

드림 리딩을 할 때의 꿈과 보통 꿈 사이의 차이점 때문이다.

보통 꿈은 아무리 오래 꿔도 12시간 안에 일어나기 마련인데 드림 리딩을 하게 되면 꿈과 현실 사이의 시간 개념이 헝클어진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눈을 깜빡일 시간이 꿈속에서는 100, 1000년의 시간도 넘을 수 있다는 말이다.

또 그와 반대로 꿈에서 기지개 한번 폈는데 현실에서는 50년이 흐를 수 도 있다.

이런 시공의 뒤틀림을 정정해주고 꿈의 출구를 만들고 또한 길을 안내해주는 역할을 드림 리더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드림 리딩을 하게 되면 꿈속에서 3~4 시간, 현실에서는 3~4분을 보내게 된다.

꿈에서의 시간은 현실 시간과 오차가 10배를 넘으면 안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조항이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미쳐버리는 경우를 막기 위한 법률이긴 한데 드림 리더들에게는 별로 좋은 법은 아니다.

생각해봐라.

드림 리더들은 하루에도 적게는 수십 번, 많게는 수백 번 드림 리딩을 해야 한다.

게다가 한 번의 드림 리딩은 뇌 활동량 3~4시간을 잡아먹는다.

쉽게 말하자면 하루하루를 보통 사람 뇌 회전량의 수백 배를 감당해야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드림 리더들이 세계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이유다.

이렇게 말하면 좀 자랑 같지만 엄청나게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자들 중 뇌파를 다루는 능력을 가진,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드림 리더가 될 수 있다.

만약 뇌파를 다루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정신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며칠도 못가서 미쳐버리고 만다.

뭐 결론은 드림 리더들은 세계인구중 0.001%도 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들이며

이런 드림 리더들이 꿈속에서 의뢰인들을 에스코트해주지 않으면 의뢰인들은 영원히 꿈속에서 헤매다 죽는 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림 리더들은 어떤 형태로든 의뢰인의 꿈속에 존재한다.

가령 이웃집 개라던가, 가로수라던가, 금붕어라던가 생명체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개로 된다면 출구로 졸졸졸 걸어 나가면서 의뢰인을 따라오게 하면 되고, 가로수는 껍질에 지도를 그려놓으면 되고,

금붕어면 어항채로 들고 다니면서 나침반처럼 머리의 방향을 바꿔 나가면된다-물론 이런 형태를 갖출 때는

꿈의 내용을 드림 리더에게 조차도 알리기 싶지 않을 때만 돈을 더 받고 되어준다. 어떤 내용일지 상상에 맡기겠다-

, 일반적으로는 들러리라던가 친구쯤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가끔씩은 애인이나 동행자 등으로도 나온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꿈속에서 내 형태가 중요한 것이다.

언제였더라, 내가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드림 리딩 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다.

문제는 그 꿈에서 내가 주인공 앤드 듀프레인으로 나왔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영화를 본 사람은 영화 중반부에 주인공에게 어떤 성적인 변화가 찾아오는 지 알 것이다.

- 이게 실로 엄청난 트라우마였기에 기억력 나쁜 나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차라리 금붕어나 지나가던 똥개로 나타는 게 낫지 그런 끔찍한 역은 다시는 맡고 싶지 않다.

나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명하며 꿈의 기억들을 뒤적거렸다.

기억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니 어렵지 않게 의뢰인과 나의 꿈에서의 역할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의뢰인은 여자이니 만큼 트리니티로 나왔다.

하긴 꿈에서라도 남자가 여자가 된다던가 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꿈은 무의식의 깊은 밑바닥 속에 숨어있는 생각들을 끄집어내어서 정리하는 행위로 드림 리딩도 그런 꿈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무의식이 반대의 성,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성별이 반대이지 않고서는 성별은 드림 리딩중에도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나는 네오네. 주인공이라니 좋은데?’

나는 내가 주인공-꿈속이지만- 이라는 사실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떠오른 생각에 몸이 얼어붙었다.

영화의 후반부, 그러니까 네오가 현실로 돌아온 직후에 트리니티와 네오가 벌이는 행위 때문이었다.

크흑! 어째서

내 동정을 빼앗아 가다니!-비록 꿈속이지만- 나는 아직 23세 숫총각이란 말이다!

나는 그나마 매트릭스2가 아니었던 것에 안심을 표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어차피 꿈인데 뭐. 예전엔 더 심한 것도 당했는데 이정도 쯤이야.

그렇게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는 동안에도 내 얼굴을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개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으며 안정을 되찾았다.

하아, 이건 현실이 아니잖아? 꿈이니까

꿈은 꿈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나마 옛날엔 꽤 감성적인 목적을 위한 거였는데 지금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버린 것 같다.

나는 어쩐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며 꿈의 기억들을 다시 꿈의 잔해들 속에 집어던져 놓고는 눈을 서서히 떴다.

눈 감은지 30분은 더 지난 것 같은데 시계는 초침은 이제야 30번 움직여 있었다.

이러다간 시간개념 다 말아먹겠네. 아직 30초도 안 지났다니, .”

아직 교대시간까지는 2시간 5930초나 남아있다.

나는 그때까지 뭔가 시간 때울만한 것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꿈속에서 나랑 파트너였던 의뢰인이 보였다. 얼굴을 보니 어쩐지 꿈 생각이 나서 다시 또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렇게 의뢰인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휘파람을 불고 있는데 서서히 의뢰인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지 놀란 토끼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당황해서 영업용 대사를 고저도 없이 읊어댔다.

흠흠. 좋은 꿈 꾸셨나요?”

그러자 의뢰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나를 바라봤다.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오르고-어째서!!- 있었다.

. 그런 것 같네요.”

어쩐지 의미심장한-나만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대답이었다.

나는 의뢰인을 빨리 돌려보내기 위해 이번에는 손님 배웅용 대사를 읊었다.

자아. 그렇다면 이제 완전히 현실로 돌아오신 것 같기도

지금은 대체 얼마나 지난 거죠?”

하니?”

시간 말이에요. 분명 몇 달은 지난 것 같은데

큰일이다. 역시 이 사람 드림 리딩은 처음이라고 하더니 시간 개념을 꿈하고 현실하고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제길. 그러니까 처음 할 때는 3~4시간 정도로 잡으라고 했건만

아까 설명했듯이 보통 드림 리딩은 꿈의 시간으로는 3~4시간, 현실 시간으로는 3~4분간 진행된다.

그런데 가끔씩 돈을 더 지불하고 더 오랫동안 꿈속에서 머물게 해달라고 의뢰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것을 LDT, 그러니까 Long Dream Tale-긴 꿈 이야기- 이라고 부른다.

현실도피나 정신적 안정이 필요한 사람들이 주로 의뢰하는 것인데, 문제는 우리가 현실시간은 3~4분 이상 투자할 수 없기 때문에

꿈의 시간과 현실에서의 시간차의 폭이 너무 커진다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영화가 있다.

영화 후반부에‘ 1년 뒤라고 나온 다음 이야기를 매듭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영상 상으로는 잠깐 글자가 깜빡인 뒤 사라지는 짧은 시간이지만 꿈으로는 그 1년을 직접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깬 직후에 지금 시간이 몇 시냐고 물어온다.

이때 실제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면 태반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없는 허무에 잠겨있거나 밀려오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운다.

만약 몇 년, 혹은 몇 십년간의 자신의 삶이 모두 꿈이었고 실제로는 정말 찰나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다고 생각해봐라.

정말 어디에 호소할, 시원하게 욕이라도 할 곳도 찾지 못하고 3분전에 나 자신을 끝없이 원망하게 될 것이다.

심한경우에는 정신분열까지 일으키는 데 이럴 때는 의뢰인이 갑자기 난폭하게 변하여서 드림 리더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사실 LDT는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불법행위를 감행하는 이유는 단지 돈. 돈 때문이다.

저번에 가장 많이 받은 의뢰비가 3천만 달러이니 말다한 거다.

물론 그만큼 내 정신력이 많이 소요되는 만큼 환자들도 덜 받아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그 막대한 금액은 그런 리스크쯤은 무시해도 될 만큼 크다.

그래서 이번 의뢰도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한 것 이고 말이다.

분명 엄청나게 생각해댄 것 같은데 이제야 저 인간은 눈 한번 깜짝이는 건가그럼 조금만 더 생각해 볼까나.’

드림 리더들은 정신을 자유자제로 다룰 수 있다.

이런 것은 드림 리딩을 하루에도 수백 번보다 더하게 되면서 저절로 깨우치는 것인데,

같은 드림 리더들끼리는 마인드 컨트롤 Mind Control 이라고 한다.

실제 사회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이는 데 우리끼리는 말 그대로 생각을 조종한다.’ 라는 뜻으로 쓰는 것이다.

이 능력은 누구나 탐낼 만큼 그 혜택이 꽤나 대단하다.

바로 현실에서도 생각과 현실의 시간차를 벌릴 수 있는 능력인데 그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말하자면 남들은 현실시간 24시간에 걸쳐 생각할 내용들도 나는 1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해치울 수 있다는 것.

물론 그만큼 뇌의 사용량이 급격하게 증가하긴 하지만 어차피 그래봤자 70내지 60 퍼센트밖에 안 되니 건강에 해로울 건 없다.

단점이 있다면 내 생각상의 속력과 내 신체상의 속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날아오는 공이 있어도

와아~ 맞으면 아프겠구나. 빨리 피하고 싶은데 몸이 느리게 움직이네?’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의 시간으로 1, 실제 시간으로는 1초가 지났을 무렵, 의뢰인이 내가 빨리 대답을 안 하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이야기가 딴대로 샌 것 같은데, 이런 타입의 의뢰인들에게는 사실을 전하기보다는

대충 얼버무리고 돌려보낸 후 직접 그 차이를 천천히 실감해 나가는 것이 낫다.

이건 의뢰인이 이곳에서 난리를 칠까봐 고안한 방법으로 말하자면 그런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라는 태도이다.

아마 몇 분쯤 지나지 않았을아차!”

실수다.

대충 얼버무린다는 게 너무나도 솔직한 대답을 들려줘버렸다.

역시나 의뢰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 그런! 분명 몇 달이 넘는 시간을 보냈는데설마! 혹시 그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은 아니겠죠! 대답해주세요!”

아아. 곤란하게 됐다. 망할 놈의 입 같으니라고.

나는 이 상황을 모면하고 빨리 이 의뢰인을 돌려보내기 위해 다시 마인드 컨트롤을 감행했다.

좋아. 이렇게 하면 되겠네. 후후.’

이런 적 있나요? 분명 꿈에서 깬 것 같은 데, 분명 현실로, 진짜 세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그 것이 도리어 꿈보다 더 꿈처럼 느껴질 때, 있지 않나요?”

네에? 갑자기 왜 그런?”

지금까지 현실에 있었던 것이고 이제야 꿈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느껴질 때, 있지 않나요?”

대체 무슨, 가끔씩 그래요

걸렸다~’

그렇다면 지금이 꿈이라고 생각 하나요 현실이라고 생각하나요?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현실이요.”

, 틀렸습니다.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네요. 분명 이곳이 꿈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 빤히 보여요.”

하지만! 전 지금 막 꿈에서 깬 걸요?”

단지 잠에서 깬 다는행위만으로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나요?

만약 꿈 안에서 꿈을 꾼 것이 라면요? 만약여태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꿈이고 꿈이라고 믿었던 것이 현실이라면 어떻게 할 건 가요?”

그건.”

꿈과 현실을 구분 짓는 갈래, 그것은 스스로가 믿기 나름이에요. 그리고 지금 당신은 이곳이 꿈이라고 믿고 있으니, 이곳은 꿈이에요.”

그러면.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당신은 대체 누구죠?”

당신의자아입니다. 아니면 무의식이라고 해두죠.”

됐다. 미안하지만 다 거짓말이었어요. 이제 저기 있는 문으로 나가주세요.

제발. 나는 열심히 놀리던 입을 다물고는 양 손으로 출구를 가리켰다.

이제 당신의 선택입니다. 이것을 꿈이라고 믿어요. 트리니티. 이제 얼마간의 꿈을 꿀 동안, 쉬세요.

그러면 곧 비행정 안에 있는 침대위에서 눈을 뜨게 될 테니까요.”

알았어요. 이제

그렇게 내 말을 듣던 의뢰인은 이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잘 가세요. 도둑.”

분명 작게 중얼거린 것 같은데 의뢰인이 몸을 멈칫하더니 나를 바라봤다.

설마 들은 건 아니겠지?

지금 뭐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답하였다.

아니요. 이곳은 꿈이랍니다. 잊어버리세요. 단지 꿈일 뿐이니까

이 말을 마지막으로 길고도 긴 얼버무리기를 끝낸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 다시는 LDT따위 안 해줄 거다!

 

그렇게 환자 한명을 내보낸 뒤 잠시 휴식에 젖어있던 나는 곧 이제 남은 시간동안 또 무슨 일을 할까라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런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노트북 컴퓨터.

비록 내가 게임 같은 것은 안하지만-하긴 꿈 내용을 게임으로 설정해 놓으면 만사오케이인 내가

굳이 시간만 잡아먹는 게임을 할 필요가 없다- 뉴스 같은 정보는 주로 컴퓨터를 통해서 본다.

지금 마땅히 할 일도 없는 이상 뉴스도 보고 오랜만에 협회에도 들어가 볼 겸 겸사겸사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얼마 후, 컴퓨터가 완전히 부팅이 되며 잔잔한 효과음을 내뱉었다.

바탕화면에는 뭐하나 없이 깔끔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게임이나 각종 어플리케이션 따위로 가득 차있었겠지만 내가 컴퓨터를 이용하는 일이라고는 딱 두 가지,

뉴스확인과 협회방문 밖에 없기 때문에 바탕화면에 보이는 거라고는 인터넷 브라우저 하나밖에 없었다.

자아- 그러면 먼저 협회에 들어가 볼까?”

이때 말하는 협회는 드림 리더 협회로서 아프리카부터 아시아까지 거쳐 전 세계에 살고 있는

활성화상태의 드림 리더들이 모여 만든 협회를 말한다.

활성화는 말 그대로 드림 리딩 기능을 완벽하게 사용하게 된 상태를 일컫는 것인데 굳이 이런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드림 리더가 될 수 있는

재능을 갖추었음에도 너무 젊거나 늙거나 가난하거나 소외된, 그런 사람들을 제외한 드림 리더들은 극히 일부이기 때문이다.

현 드림 리더 협회의 회원들은 총 3400명으로 현 세계인구가 80억명인 것에 비례하여 턱없이 작은 수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그린피스 회원 수에 1000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이 작은 단체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라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런 것이냐고 묻는 다면 내 답변은엄청난 재력 때문이다.

드림 리더들은 처음에 드림 리더 협회에 원조를 받고 성장을 하게 되는 데

완전히 성장을 하여 하나의 드림 리더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대개 3~5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자신이 스스로 협회의 원조 없이 살아가기 전까지 3~5년 동안은 협회로부터 돈을 지급받는 다는 것이다.

이렇듯 협회의 도움을 받고 성장한 드림 리더들이 나중에 자신의 수입 중 10%를 협회 유지비용으로 기부한다.

드림 리더들이 1년에 버는 돈이 대략 3억 달러 정도 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10% 라고 하더라도 3천만 달러이다.

이런 거금을 3400명의 회원이 기부해 온다고 생각해봐라.

좀 거짓말 보태서 말하면 전 세계 달러의 흐름은 드림 리더들이 쥐락펴락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협회의 회장이 누군가하면바로 나다. 드림 리더 협회 회장, 알렌 크러스트.

아아. 회장이라고 한들 대단한 건 없다.

그냥 원조 필요한 회원들에게 돈 보내고 수금하고 대충 사이트 관리하고 간부들이랑 몇 마디 해주면 회장의 역할은 끝이다

-게다가 돈 관리는 내가 개발한 프로그램을 써서 하기 때문에 실제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www.dreamreader.com/f7k28382 좋아. 엔터.”

-

키보드자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짧은 타격음이 들려왔다.

www.dreamreader.com, 뭔가 많이 대충지은 듯한 이름인데 내가

이 도메인만큼 우리 협회의 특성을 잘 살려주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주장해서-떼써서- 정한 것이다.

그리고 뒤에 붙는 f7k28382협회 공식 넷 드라이브 접속 암호 코드로 이 암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공개용 사이트로 접근되고,

입력하면 회원용 사이트로 접근된다.

삐빅하는 작은 기계음과 함께 웬 팝업창이 같이 떠올랐다.

뭐지 이거? 분명 이런 건 내 허가 없이는 올리지 못하도록 했을 텐데?’

회장의 허가 없이 공식 협회 사이트를 수정했다는 건 중요사안 이라는 뜻.

보통 때라면 나의 뛰어난 반사 신경이 바로 X버튼을 눌러버렸겠지만 내용이 뜨기 전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긴급 공지. 근 일주일간에 회원 342명이 실종되었습니다. 그 중 드림 리더 협회의 고급 간부였던 마헬 프로모트가 길거리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으나 이미 코마상태에 빠져든 뒤였습니다. 현재 과학 수사 인력을 지원받아 수사망을 좁혀나가고 있으니 그 전까지는 몸을 사리시길 바랍니다.

…… 이건 뭐

젠장할. 이건 또 뭐다냐.

3400명 중에 342명이면 10%에 달하는 회원들이 죽었다는-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것이었다.

게다가, 마헬 그 인간은 왜 코마상태라는지.

코마는 정신력이 허약한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정신질환 아니면 정신병, 뭐 그런 것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는데

정신력 강하기로는 세계 최고봉인 드림 리더들 중에서도 고위 간부급인 녀석이 코마상태라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나저나 일주일 안에 342명이 실종되었다니 드림 리더 전용 전염병이라도 돌고 있는 건가?

이건 개인의 소행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아니면 드림 리더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집단?

, 그나마 가장 현실성 있네.

아마 민간인 단체는 아닐 것이다.

민간인들은 돈을 퍼 붓더라도 드림 리딩을 하겠다며 몰려드니까, 그 인간들도 생각이 있다면 드림 리더들이 없어질수록 희소가치가 상승,

가격이 오른 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우리가 돈을 굴려먹는 것 때문에 매일 복통에 시달리고 계시는 유대인 단체쯤 이려나.

이래 뵈도 정신상으로는 벌써 200년을 넘게 산 현자란 말이지.’

두뇌 상으로 날 이길 자는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다.

뭐 대충 누군지 윤곽은 잡았으니 돈 좀 풀어서 경호원 몇 명 붙여주면 끝나겠지.

나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협회 정보 창을 열었다.

협회 전용-정확히 말하면 내가 압력을 넣어서 만든- 뉴스 확인 창이 서서히 떠올랐다.

하아. 오늘 뉴스도 역시 별 것 없네. 지루해, 지루해.”

나는 그렇게 푸념 섞인 말을 늘어놓고는 뉴스 창을 꺼버렸다.

요즘 뉴스는 다 그게 그거인 것 같단 말이야. 맘에 안 든다.

지 맘대로 억측성, 추측성 기사를 남발해놓고는 조회 수만 올리자!’하는 마인드가

정말 언제 한번 날 잡아서 100년 동안 악몽을 꾸게 해주고 싶다.

결국 별 수확도 없이 컴퓨터를 켠 지 10분 만에 다시 전원을 껐다.

에이. 괜히 전기세 아깝게 켰네-재벌 주제에!- 아니지, 그 이상한 회원 실종 사건은 중요할라나.

나는 몸을 일으켜서 내 동료, 마크와 교대 받은 인터페이스로 다가갔다.

마크 녀석은 아직 드림 리딩 중인지 눈을 감고 환자와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몇 분이면 끝날 테니 보조 의자에 걸터앉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그냥 교대해서 드림 리딩이나 다시 하자이다.

이게 무슨 꼴이냐. 제기랄. 쉬라고 시간 줬는데도 일하겠다고 제 발로 오다니후우.”

그래, 그래. 잘 아네.”

? 우왁! 벌써 깼냐?”

허허. 왜 이렇게 놀란대? 꿈 깬 거 처음 보냐?”

, 그런 건 아니지만아니! 그게 아니라. 나 이제 교대한다.”

뭔 소리래? 놀기 좋아하는 네가 갑자기 웬 칼 교대냐?”

으음그냥. 업무량도 많은 데 일찍 끝내고 빨리 가려고.”

알았어. 그럼 나 쉬고 있을 테니까, 3시간 다 채우면 불러.”

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녀석은 임시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좀 더 쉬라고 빈말이라도 해주면 덧나나?

의리 없는 녀석. 아닌가.

동료일 뿐, 친구는 아니니까

나는 마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생각을 하고는 인터페이스 옆에 붙어있는 이너 베드 Inner Bed 에 앉았다.

아직 인터페이스에 마크가 드림 리딩을 하던 환자가 누워있었다.

다행이도 이 환자는 드림 리딩을 몇 번 해봤었는지-아니면 정신력이 강한 편이거나-

혼자서 눈을 뜨더니 나에게 좋은 꿈 꿨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출구로 걸어 나갔다.

귀찮은 짓은 안 해도 돼서 다행이다.

이제 전 환자가 돌아갔으니 다음 환자를 부를 차례이다.

나는 이너 베드 가장 자리에 달려있는 버튼을 눌러서 인터페이스 룸 Interface Room 접근제어도어 Door를 열었다.

그러고는 목을 살짝 가다듬어 들어오세요.’라며 대사를 읊으려는 찰나 얼마나 동작이 빠른지 다음 환자는 말도 채 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내 앞에 와있었다.

15살 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저런 어린 나이에 드림 리딩을 부탁하러 왔다니, 재벌 2세 정도 되나 보다.

나는 이런 속마음과는 다르게 무덤덤하게 손을 들어 인터페이스를 가리키고는 다음 대사를 입에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인터페이스위에 몸을 뉘여 주세요. 준비가 완료되면 바로 드림 리딩에 들어갈 것입니다.”

고저가 없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이상했던지 이 환자는 푸웃 하고 웃고는 나를 바라보며 생글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내 말투가 그렇게 웃기나?

옛날에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었는데 어떤 환자가 느끼하다고질책을 하는 바람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런 사무적인 말투로 개선하게 된 것인데 말이지.

인터페이스가 뭔데요?”

아무 것도 모르잖아? 이거. 그럼 들어올 때 그 당찬 발걸음은 뭐지?’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의문을 표한 뒤 환자의 물음에 답하였다.

인터페이스란, 꿈과 현실을 연결해주는 사슬이랍니다.”

나의 애매한 답변에 이 작은 환자는 나랑 똑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질문을 해왔다.

에에~ 너무 애매하다구요! 조금은 성의 있는 답변을 해주세요!”

나에게 이 이상의 성의 있는 대답을 바라다니 꽤나 건방지다.

나는 이 꼬마-보통 사람들 눈에게는 숙녀쯤으로 보이겠지만 정신연령이 200살이 훨씬 넘는 나에겐 적어도 그리 보였다- 의 말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내 잎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혹시 인터페이스의 뜻이 아니가 아니라 아십니까?”

나의 물음에 이 환자는 또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떠올리는 듯 싶더니 이내 대답을 해왔다.

에에그러니까,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든 거

. 잘 아시네요. 그렇다면, 이 인터페이스라는 기계의 목적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거야, 꿈을 꿀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애다운 대답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인터페이스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움. 그건 꿈과 사람들끼리 의사소통을!”

이 환자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후후. 이것이 바로 자문자답, 스스로 깨우치게 하여 스스로를 이해시키는 나만의 설명방법이다.

나는 이 작은 환자의 그런 모습에 뭔지 모를 감정을 느끼고는 다시 한 번 설명을 이어나갔다.

인터페이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을 꿈이라는 세계와 이어주는, 일종의 매개체랍니다. 그럼, 이제 인터페이스에 누워주세요.”

그제서야 이 궁금증 환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터페이스에 몸을 누이고는 엄마 품에 안긴 고양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나는 조용히 손을 환자에게 내밀었다.

드림 리딩을 하게 손을 내밀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이 꼬마는 뭔 짓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뚱하니 바라봤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를 상대로 다시 드림 리딩을 할 때의 절차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대체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지제기랄. 나도 모르겠다.’

하아. 드림 리딩이라는 것이 굳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손을 서로 잡은 뒤 서로 생각을 공유해야지 가능한 거랍니다.

상대방이 마음을 닫아버릴 경우 드림 리딩은 실패하게 된단된답니다.”

나는 이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며 순간 나도 모르게 나오려는 반말을 삼키며 다시 호칭을 경어로 바꾸었다.

다시 밝히는 거지만, 내가 위에 말한 내용은 공식적으로 밝혀진 내용일 뿐,

사실은 강제적으로 정신을 개방시켜서 악몽 같은 것을 꾸게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드림 리더들이 무슨 서로 교감 같은 것을 해서 꿈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데, 아까 알려줬다시피,

뇌파를 다루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허락 없이도 꿈을 다룰 수 있다.

나는 평상시 사람들이 물어오면 별 생각 없이 공식적내용을 말해주지만 어쩐지 이번만큼은 아주 살짝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느꼈다.

순수한 아이에게 거짓말을 한다라는 죄목정도랄까.

하지만 이도 잠시 나는 곧 환자의 손을 잡는 형식적인 절차를 마치고는 꿈 내용 의뢰를 해달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이제 의뢰인이 될 이 아이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다시 눈을 뜨고 밝게 웃으며 내게 말하였다.

천국이요!”

, 천국?

나는 아이의 말을 듣고 잠시 의아해 했다.

세계여행 이라던지, 우주여행 같은 극히어린애다운 답변이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아무 대답도 안하자 아이는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엄마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세요! 꼭 이에요! 3시간만이라도, 만나고 오고 싶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얼어붙었다.

이 아이, 부모를 잃은 뒤 그 슬픔에 잠겨 있다가 있지도 않은 돈을 모아서 드림 리딩을 하겠다고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이 아이에게 동질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도 애시당초 가족이라는 존재를 모르고 살아왔으니까.

가장 맛있는 열매를 가진 포도나무의 줄기가 가장 약한 것처럼, 나를 낳았던 부모는 내가 채 2살도 안 되었을 때 죽었으니까.

그리고 형제라는 것도 모른 채 여태껏 살아왔으니까.

나는 애써 어두운 표정을 삼키며 의뢰인-이제 의뢰를 하였으니 의뢰인이라는 호칭을 써야한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정말 오랜만에, 어쩌면 생애 처음일지도 모르는 진정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좋은 꿈꾸세요.”

 

 

 

나는 누군가 나를 찌르는 듯한 느낌에 이끌려 서서히 눈을 떴다.

조그만 여자아이가 살짝 통통한 손가락으로 감히 내 배를 쿡쿡 찌르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날 깨우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아한심하네. 명색의 드림 리더 협회 회장이 오늘 처음 드림 리딩하는 꼬마보다 정신을 늦게 차리다니

아무래도 현실에 돌아온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조금 더 늦게 일어났다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코마상태에 빠진 드림 리더가 될 뻔했다.

그나저나 이 아이, 정말 특이하다.

나야 오늘만 해도 LDT 1번에 일반 드림 리딩만 어림잡아 6시간, 꿈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대략 3년에 다다르는 긴 시간을 보낸 것이다.

안 그래도 뇌가 과부하인 상태에서 LDT를 또 한 번 감행했으니, 정신 못 차려도 싸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도 은근히 한심하다는 생각이 밀려왔지만 나는 애써 누르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여자 아이를 바라봤다.

사실 이 아이가 지불한 돈으로는 기껏해야 2~3시간 정도밖에 드림 리딩을 못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LDT를 해주다니나도 참 한심하다.

게다가 아무리 고위 간부급 드림 리더라도 하루에 LDT 1번이상은 무리인데다가 한번만 하더라도

정신력 무리가 오기 때문에 어느 정도 머리를 쉬어주어야 한다.

몇 십분 전까지만 해도 다시는 LDT따위 안 해줄 거다~’라고 다짐했던 마음은 이미 저만치 날아가 버린 지 오래인 듯하다.

, 혹시 내가 부모를 잃었다는 동정심이라던 지 나와 같은 부류의 아이라는 동질감 따위로

코마상태에 빠질 위험까지 감수하며 LDT를 해준 것은 아니다.

뭐 굳이 밝히자면그냥 나도 행복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도 짧게 짧게 끝내려고 했는데, 꿈속에 들어가서,

그토록 바라던 천국에 도착해서 지은 이 아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그런 웃음을 보니 내 마음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마음에 들었던 건.

우후후. 내가 부로 나왔다는 것.

웃기지 않는가? 현실에서는 부모나 아내, 가족 그런 것은 추호도 모르고 살아왔던 내가,

꿈속에서는 한 아이의 아비로, 또 한 여자의 아내가 되었다니.

그리고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그때, 드림 리더로서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되는 생각을 해버린 것이었다.

참 어이없지. 드림 리더 협회장이 이 꿈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

그래. 너무나 위험한 생각을 해버렸다.

어차피 꿈인 걸, 이런 꿈같은 거 아무리 애써봐야 ’, 그 이상도 이하로도 남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가

조금이라도 여기서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결국 나는 너무나도 달콤한 꿈 안에서 8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더 웃긴 점은, 이것이다.

내가 의뢰인들을 인도하여 꿈속에서 빠져나가게 해야 되는데, 도리어 의뢰인이 나에게 이제는 나가야 한다고,

더 환상 속에 머물러 있어봤자 상처만 받는 다고 말한 것이었다.

젠장. 정신연령 200세인데도 여전 부족한 것 같다. 이제야 15살 정도 되 보이는 새파랗게 어린 꼬마한테 쓴 소리나 듣다니.

나는 오늘만 대체 몇 번째 쉬는 건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아이를 마주 바라봤다.

동글동글한 아이의 얼굴을 보니 또 다시 꿈 생각이 나서 기분이 씁쓸했다.

나는 한참을 말없이 티 없는 웃음을 생글거리는 아이의 미소를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제가야지. 이젠, 더 이상 꿈이 아니란다.”

차가움이 묻어나는 나의 말에도 아이는 여전 생글거리며 대답을 했다.

, 저도 알아요! 이제 집에 가야하는 걸요.”

나는 이상하리만큼 밝은 아이의 목소리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참 이상하다. 나도 꿈에 대한 환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데 내 앞에 있는 소녀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 지

시종 웃기만 하며 나를 대하고 있다.

이곳이 더 이상 달콤한 꿈이 아니라, 환상의 나라가 아니라 부모도 없고 그 무엇도 없는 차가운 현실속이라는 것을 알려줬는데도.

어쩐지 배알이 뒤틀렸다.

나는 상처받고 있는 데 대체 왜 이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질투랄까, 그런 감정이 날 휩싸여왔다.

나는 이 천진난만한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기 위해-지독한 이기주의다. 남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며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기 위해

쓸데없이 상처를 주는- 다시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여긴 네 부모 따위도 없고 네가 상상했던그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건 그냥 다꿈일 뿐이었어.”

나는 말을 하면서 터져 나오는 감정을 막기 위해 중간 중간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문제는, 이런 나의 말에도 아이의 표정에는 손톱만큼의 변화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뒤를 이은 아이의 대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요. 여긴 현실이에요. 저도 안다구요. 그렇더라도, 그냥 꿈속이었어도, 엄마를 만나고, 아빠를 만나고,

또 그분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보기도 하고충분히 행복했어요.

비록 단지 꿈이었더라도 그 안에서 저는 행복했어요.

그리고 그건 제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될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이렇게 꿈이라는 걸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가끔 제가 꿈에서 엄마 품에 안기듯,

그렇게 잠시만이라도 의지하는 것이, 그것이 드림 리딩이 생겨난 목적아닌가요?”

에이. 드림 리더라면서 그런 것도 몰랐어요? 그런 거라구요!”

나는 문득 전 세계에 존재하는 3400명의 드림 리더들보다 이 작은 15세 소녀가 드림 리딩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까와는 다르게 만면에 살짝 미소를 잔잔히 퍼뜨리며 이너 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갑자기 뭔 짓이냐는 듯한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에에. 뭐 하세ㅇ… 와앗!”

아이는 더 이상을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나의 행동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는-절대 성추행 아니다- 인터페이스에 누워 나를 바라보는 아이를 바닥위에 서게 하였다.

그리고는 옆으로 걸어가서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듯 흘깃 쳐다본 뒤 말을 이어갔다.

꿈은 끝이다. 그럼집에 가야지. 꼬마 숙녀님.”

졸지에 꼬마 숙녀님이 되어버린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직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했다.

알겠어요. 그런데 대체 왜 제 옆에 서계시는 거예요?”

오늘 일 다 끝났어. 그냥 집에 가는 거려고 일어 선거야.”

. 그럴리가요? 분명 배너 Banner에는 아저씨가 앞으로 3시간동안 마크라는 분하고 교대한다고 나오던데요? 지금 3시간 끝나기 전까지 아저씨한테 드림 리딩 받으려고 줄 선 사람만 30명이라구요.”

아저씨라니, 말조심해!가 아니라아차, 배너가 있었지.

나는 순간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의뢰인이 돌아가는 길까지 같이 걸어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나 하려고 무심결에 거짓말한 것이 3초도 안가 탄로나 버렸기 때문 이었다.

, 여기서 배너란, 인터페이스 룸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기자들이 기다리는 곳인 엔터 룸 Enter Room에 있는 80인치의 대형 LCD모니터를

말하는 건데, 이 거대한 화면에는 현재 앞사람의 드림 리딩 진행도 및 대기자 총 인원수, 현재 담당 드림 리더 등이 나온다.

그리고 시시각각 상황이 변할 때 마다 화면이 바뀌며 메시지를 뜨게 한다.

나도 마크와 바꾼 것이니 배너에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당연지사.

. , 내 입으로 이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는 의뢰인들에게 인기가 꽤 많은 편이다.

외모 때문인지, 꿈속에서 일-일이라고 하니까 뭔가 찝찝하지만-때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확실한건 지금 내 입장이 곤란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눈동자를 또그르르 굴리며-내가 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때 하는 습관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지 고민했다.

나는 이내 눈동자를 바로잡고는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우후후. 미안하다. 마크. 뒤를 부탁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임시침실로 잠입해 들어갔다.

마크 녀석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문 옆 벽 부근에 담당자교환 알림버튼이 달려있었다.

나는 살짝 그 버튼을 누르고는 곧장 이너 베드로 달려갔다.

다음 환자 호출 버튼이 바로 이너 베드에 달려있기 때문.

스르릉 하는 작은 소음과 함께 인터페이스 룸의 접근제어도어가 얼렸다.

어쩐지 인상이 사나워 보이는 남자가 성큼 들어왔다.

이제야 제 차례입니까?”

남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인터페이스 룸에 퍼지며 입니까, 입니까, 입니까라는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젠장. 목소리도 맘에 안든다.

나는 애써 미간의 주름을 다시 피며 다시 영업용 미소를 얼굴에 드리웠다.

죄송합니다, 손님. 임시침실 내에 마크 메르틴 Mark Mertin , 담당 드림 리더가 계시니 들어가서 부르시길. 그럼 전 이만.”

어이! 어이! !”

나는 축생의 울부짖음을 감상하며 아까부터 죽 내 옆에 서있던 아이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갔다.

황혼에 접어들 시기에 퍼지는 은은한 빛이 하늘을 천천히 잠식해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7, 아니 8시 정도 되려나.

나는 잠시 하늘을 보며 시간을 대략 짐작하고는 아이를 살짝 앞세운 뒤 천천히 걸어 나갔다.

둘 다 아무 말도 안하니 역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망할. 뭔가 해주고 싶은 말은 많은 데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될지 모르겠다.

역시 드림 리더에 대한 것이 좋겠지? 뭐가 있을까

내가 화젯거리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데 아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으음. 혹시 자각몽 自覺夢 Lucid Dreaming 꿔본 적 있어요?”

자각몽이라이 아이, 뭔가 드림 리더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한참 모른다.

아니, 이건 드림 리더들 끼리만 아는 내용이니까 모르는 게 당연한 건가?

자각몽이라

나는 궁금증 유발을 위해 한차례 뜸을 들이고는 힐끗 아래를 내려다 봤다.

현재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 키가 183cm 이고, 이 아이는 키가 이제야 155~160cm 정도 되 보이는 만큼, 나는 내려다보고,

아이는 올려다봐야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과연 내 예상과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힘들게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작은 키에도 애쓰며 하는 아이의 행동을 보고 살짝 미소를 흘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너 자각몽이 뭔지 아니?”

내 질문에 아이는 살짝 자존심이 상한 듯 뚱한 표정을 짓더니 당차게 대답을 했다.

! 그런 걸 왜 제가 모르겠어요! 자각몽은 자기가 꿈이라는 것을 알고 꿈을 꾸는 거잖아요!

, 아직 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현실하고 꿈하고 차이를 느낄 수 없다고 해요.”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렇다면, 너 이거 아니? 드림 리더들은 을 꾸지 않아. 아니, 못한다고 해야지 맞겠구나.”

네에? 그럴리가요! 그러면 대체 드림 리딩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드림 리딩은 꿈을 상대방과 공유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야. 굳이 비유하자면, 상대방의 뇌파를 조종한 다음 내 정신을 침입시킨다고 해야 하나?

그렇기 때문에 드림 리더들은 누군가가 있지 않으면 꿈을 못 꿔. 말하자면 공생이 아니라 기생이랄 까나. 그래, 바이러스처럼.”

그런.”

꿈은 말이야너희들만이 꿀 수 있는 거야. 꿈은 축복이야. 그러니까, 그 축복에 감사하면서 살아야지.

우리 같은 존재는 다른 이의 꿈을 훔쳐서 꿀 뿐, 진정한 을 꾼다는 것은 정말 에서나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내 잔잔한 말 속에 아이는 내 슬픔을 읽었는지 살짝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애당초 꿈이라는 것을 꾸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가 맞겠다.

우리는 절대로 남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따위 한번 도 꿔본 적이 없다.

그래, 남들은 할 수 없는 능력인, 드림 리딩 이라던 지 마인드 컨트롤 같은 걸 가지고 있으니, 비록 꿈은 꿀 수 없지만,

꿈을 선물해 줄 수 있으니 내 삶에 만족하며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정말 가끔씩은 드림 리더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벗어버리고 마음 놓고 꿈을 꿀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으면,

하며 소원을 한 적이 있다. 대체 왜 남들이 소중한 지도 모르고 마음껏 꾸는 꿈을, 자기 혼자서 소유하는 꿈을,

왜 우리는 꿈마저도 남들 것을 훔쳐야 되는 지, 왜 나의 꿈을 소유할 수 없는지, 참 운명이 싫었다.

그렇게 원망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말이다.

갑자기 이 세상물정모르는 순진한 아이에게 이 한가지만은 알려주고 싶어졌다.

나는 손을 아이의 머리위에 놓고는 비벼서 나를 바라보게 하였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꼭 새겨들어야 돼. 뭐냐 하면

-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뭔가 강렬한 통증이 머리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통증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무심결에 위를 바라본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돌 머리 아냐? 머리한 번 무지 단단하네.”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내뱉었다.

난 전봇대나 가로수 같은 것에 머리를 박은 것은 아니었으며, 누군가에게 망치 같은 걸로 얻어맞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대체 뭘 먹었는지 강철의 두뇌를 가진 미모의 아가씨와 머리를 정통으로 박은 것이었다.

젠장. 생긴 거와 다르게 머리는 장난 아니게 단단하잖아?

내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뭔가 한마디 내뱉어주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돌 머리 아가씨가 먼저 선수를 쳤다.

환영합니다.”

이 말을 남기고는 여자는 뒤도 안돌아보고 나를 지나쳐서 가버렸다.

나는 당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그 자세로 앉아있었다.

환영한다니? 뭔 소리야 그건?

자기랑 박치기한 걸 환영한다는 거야 지금?

내가 그렇게 멍청히 앉아있기만 하자 아이는 나를 쿡쿡 찌르며 재촉했다.

아아. 빨리 일어나라구요. 여긴 제 집이 아니에요!”

그래야지.”

나는 새빨간 벽돌로 된 벽을 손으로 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머리가 얼얼했다.

빈혈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나를 맴돌았다.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손을 부여잡고 다시 발을 놀렸다.

아이의 말대로 여기서 평생 있을 것도 아니니 말이다.

으음. 그나저나 뭔가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야젠장. 다 그 돌 머리 아가씨 때문이야.’

나는 씨알도 안 먹힐 핑계를 대며 투덜댔다.

나는 일어난 뒤에도 밀려드는 빈혈기에 머리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자세를 취했다.

아이는 내 모습을 보고 또 킥킥 거리기 시작했다.

. 남자가 머리 박은 거 때문에 그렇게 끙끙대요? 아까 저 여자는 멀쩡하게 걸어가던데.”

그래, 미안하단다. 난 이래 뵈도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머리를 다치면 큰일 나.”

에에. 그거랑 머리 부실한거랑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없이 앞을 바라본 뒤 보폭을 널찍하게 걷기 시작했다.

조금 힘겹게 만들어서 날 귀찮게 만드는 어린 영혼을 눌러줄 심산이었다.

과연 아이는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총총 걸음으로 나를 힘겹게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장신長身, 고로 걸음 보폭만 넓게 잡아도 아이가 한번 내딛는 거리보다 2배는 더 빨리 걸을 수 있다. 치사하다고 보지는 말아주시길.

이봐요! 같이 가요! 키만 멀대 같이 커 가지고는!”

억울하면 너도 키 크렴.”

내 승리다. 나는 성취감? 승부욕? 같은 감정에 득의양양 해져서는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뭐 어린 아이를 들어 승리했다는 점이 좀 걸리긴 하지만.

그렇게 어린애들 같이-아니 나만 제외하면 어린 아이 맞다- 투닥거리며 한참을 걸어가던 중에 나는 뭔가 이상한 점 하나를 깨달았다.

아직 이 아이의 이름조차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아이를 부르던 호칭은 죄다 의뢰인’, ‘환자’, ‘꼬마 아이’, ‘꼬마숙녀님’, ‘아이등등 일관성 없이 내 맘대로 붙인 거였으니.

나는 방금 전 말싸움에서 진 것에 대해 뚱해있던 아이를 불렀다.

이보세요. 꼬마 아가씨.”

왜요.”

아아 이런. 살짝 화난 상태로군.

생각보다 자존심이 강했던가 보다.

아니면 작은 키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었다던가.

나는 말투를 좀 고쳐 사근사근하게 바꾸고는 다시 말을 걸었다.

. 우리가 아직 이름도 모르네? 통성명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 꼭 해야 하는 것이란다. 이름이 뭐니?”

, 댁부터 말하세요.”

나는 순간 안 그래도 어질한 머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초인적은 인내심과 미성년자에 대한 배려, 정신연령 200살이니까 참아야지 등등의 갖가지 이유를 나 자신에게 들며 뭔가

울컥하려는 것을 참아내고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며 대답을 했다.

배너에 있지 않니? 분명 알렌 크러스트 Allen Crust라고 나왔을 텐데?”

원래 이름은 본인한테 직접 들어야 하는 거라구요!”

좋아, 좋다. 그러면 이제 네 이름을 들어야 할 차례로구나.”

끝까지 날 이기기 위해 발악하는 소녀를 한 번 쥐어박고 싶다는 욕구를 또 다시 참아낸 나는

얼굴에 퍼지는 경련을 가까스로 막고는 말을 이어갔다.

네 말대로 이름은 본인한테 들어야 하는 거니까 말이다.”

으음. 좋아요! 제 이름은 루시아 젤론 Lucia Zelon 이에요. 헤헤.”

. 루시아 젤리라

루시아 젤론이라구요! 젤리가 아니에요! 첫 글자부터가 달라요! 젤론 Z로 시작하고 젤리는 J라고요.”

좋아, 좋아. 루시아 젤론.”

루시아 젤론이라

루시드 드림 Lucid Dream, 자각몽에서 딴 이름이지?”

! 예쁘죠!”

아니.”

나는 그렇게 동심어린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아서 조잘거리는 입을 봉해놓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각몽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자신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한 상태로 꾸는 꿈을 말하며,

꿈과 현실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생생한 꿈을 꾸게 된다.

이 때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데, 말하자면 드림 리딩하고 가장 근접한 꿈일 까나?

뭐 실제 드림 리더들은 자각몽 따위는 꾸지 못하지만 말이다.

예쁘다고 말해요!”

나는 옆에서 바락 바락 대드는 중인 루시아는 결국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제풀에 겨웠는지 씩씩거리며 음소거 상태로 들어갔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다시 얼굴에 걸쳤다.

루시아. 네 이름누가 지어줬니?”

여전 말이 없다. 나는 화난 건 아닌 가 힐끗 표정을 쳐다보니 살짝 침울해져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루시아라는 이름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과 연계되었는지 알아차리고는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바꾸었다.

루시아, 너 집이

엄마요.”

?”

나는 생각외의 반응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엄마가 지어줬어요. 돌아가신 후에

루시아는 말꼬리를 흐리며 말을 맺었다. 확실히 무언가 사건이 있었다.

돌아가신 후에?

그게 가능한 일인가?

무당이라도 만나서 신내림을 받지 않은 이상 가능할 일이 없다.

나는 루시아가 무슨 말을 하려가 했는지 마인드 컨트롤을 써가면서 까지 생각해 보았지만 죽은 사람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실례지만, 어쩐지 뒷이야기가 궁금해졌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고는 루시아가 이어갈 말에 귀를 이어갔다.

그러자 루시아는 잠시 침울한 표정을 하며 입을 다물고 있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엄마는 제가 5살이었을 때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제가 이름을 받은 것은 7살 때에요.”

어떻게 7살 때

저는 입양아거든요. 4살 되고도 5개월 째 되는 날 입양되었어요.”

……

그렇게 딱, 7개월은 정말 행복했어요. 그리고 엄마가 너무나도 좋았어요. 절 낳아준 분보다 더요.”

, 7개월만 행복했다는 거니?”

내 물음에 루시아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강도였어요. 강도에게 찔려서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그렇게, 7개월 동안 저를 정성스럽게 돌봐주신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저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너무 어렸으니까

. 너무 어렸죠. 그래도 한 가지는 정말 기뻤어요.”

뭐 때문이니?”

유언장을 봤어요. 아니, 유언장 이라기보다는 편지였어요. 저는 그 날 어디서 놀고 있었고, 엄마는 그 편지를 써놓은 다음 장을 보러

시장에 갈 참이었죠. 그런데, 그 때 돌아가신 거예요. 편지를 쓰고 있던 중 강도가 들이닥쳤거든요.”

대체, 어린 나이에 그런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사랑하는 루시아에게. 오늘 네 이름을 생각해보았는데, 루시아가 어떠니? 루시아 젤론. 예쁜 이름이지?’

그리고 그 편지를 발견한 건 2년 뒤였어요.”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드디어 자신을 양육해주던 엄마가 이름을 지어줬는데, 그게 유언장이 되다니, 정말 운명이라는 거, 얄궂은 것 같다.

이제야 갓 15살 정도 되 보이는 소녀가 이정도의 정신적 충격을 받으며 살아왔다니.

그래서 였나? 그렇게 밝게 웃으려고 한거. 얼굴에서 슬픔을 지우려고.’

얼굴은 그 사람의 일생을 바라다보는 창이라고 했다.

하물며 어릴 적 그런 트라우마를 받으며 자라온 아이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 만큼 빨리 조숙해지고, 자신의 얼굴이, 일생의 발자취가 슬프게 변해간다는 것은 알아차렸을 터, 그것을 덮고자 웃는 걸을 택했을 것이다.

어쩐지, 입 안이 썼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한 듯 루시아는 먼저 총총 걸음으로 달려가서는 문을 열었다.

아까 전 슬픈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그 빈자리는 환한 웃음이 대신하고 있었다.

아까 그 이야기를 들어서 인지 웃는 모습임에도, 너무나도 슬퍼보였다.

. 그럼 나는 이제 가야겠구나. 조심히 있으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루시아를 바라봤다.

알았어요. 그럼 잘 가요! 바래다줘서 고마웠어요!”

쾌활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답례로 손을 흔든 나는 내 집으로 가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문이 열렸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아무도 없이 빈 집에 신고식을 올리며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재꼈다.

LDT2번이나 한 탓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결국 내 발은 씻지는 않았음에도 침실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스르릉

내가 문에 다가가자 방탄유리로 제작된 자동문이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열렸다.

커다란 2인용 침대가 날 반겨주고 있었다.

아아. 피곤해. 잠시 자볼까.”

비록 드림 리더들은 꿈을 꿀 수는 없지만 잠은 잘 수 있다.

이런 경우 있지 않은가?

잠은 잤는데 꿈은 꾸지 않은 것.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런 경우를 1365일 겪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피로 회복을 위해 잠을 적당히 자주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보통은 잠을 자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일반 사람들처럼 잠을 안자면 그 다음날 좀비처럼 걸어 다닌다던가 병 걸린 닭 마냥 꾸벅꾸벅 졸지는 않는다.

그냥 조금 더 정신력에 무리가 간다는 것?

말하자면, 일반 사람들은 배터리를 달고 살기 때문에 잠을 자면서 재충전을 하는 것이고,

드림 리더들은 자체 발전소가 있기 때문에 별도의 충전을 반드시 해줄 필요는 없지만

그 발전소의 원동력이 자신의 정신력을 갉아먹기 때문에 쉬어주는 것이 뇌가 과부하에 걸리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 뇌 과부하 걸린 나로서는 잠을 자줘야 한다. 이럴 때는 몸에서 자동으로 졸리다라는 느낌을 전해주니까 말이다.

나는 그렇게 중얼대면서 몸을 침대위로 던졌다.

푹신함에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으음

그렇게 나는 잠에 빠져 들었다.

 

 

 

 

- 화악

“…지”

나는 갑자기 시야가 밝아져 옴을 느끼고는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누군가 불을 켰는지 전등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불 좀 꺼”

“일어나야지!”

…아까부터 누가 나한테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몸을 반쯤 일으키고 주위를 휙휙 둘러보던 나는 이내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여자였다. 그런데 어쩐지 얼굴이 익숙했다.

아니, 그보다 분명 문을 닫았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어떤 여자아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집에 들어와서는, 침대로 직행했다.

그리고는 바로 침대에 쓰러져서 잤다.

그런데 갑자기 구면인 듯한 여자가 내 방에 들어와서는 아까부터 나에게 소리를 치고 있다.

“빨리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뭐? 아침? 지금이 아침이었나, 벌써?

그나저나 이 여자의 얼굴을 확실히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몇 초쯤 지나 홍채가 밝은 공간에 적응을 하자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내 눈에 찬 모습의 주인공을 본 나는 얼어붙었다.

“…어머니?”

으음. 분명 언젠가 보았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나의 목소리를 들은 ‘어머니’로 추정되는 사람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재차 나를 불렀다.

“오늘도 늦잠이구나. 어서 나오렴. 루시아도 벌써 나와 있단다.”

루시아? 그게 누구였지?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머리를 쥐어짜보았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질문을 했다.

“루시아…가 누구죠?”

“으음? 그게 무슨 소리니?”

의문문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숨을 고르며 재차 물어보았다.

“루시아…가 대체 누구죠?”

‘어머니’는 내 물음이 이상했던 탓인지 한차례 작게 웃고서는 대답해주었다.

“호호. 네 딸도 모르면 어쩌니? 잠에서 깨더니 이상해졌구나. 빨리 나오렴.”

딸? 나에게 딸이 있었나? 루시아는 분명… 딸… 이었나? 그것보다 루시아는 대체 누구지?

“으음…”

나는 갑자기 지끈거리는 머리 탓에 한 차례 신음을 내뱉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 풍경, 눈물이 흐를 만큼 익숙하다. 아침에 날 깨워주는 엄마, 그리고 가족끼리의 식사…

‘긴 꿈을 꾼 것 같아. 질리도록 긴 꿈…’

대체 이 상황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지금 식탁에 가야하며, 루시아라고 불리는 내 ‘딸’을 봐야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어머니’도.

“아빠! 빨리 와요! 에이. 오늘도 또 늦잠이야!”

뭔가 살짝 화난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나를 보며 소리쳤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이 또한 정말 익숙한 얼굴이었다.

분명 내 예상이 맞는다면 저 아이가 내 ‘딸’이겠지.

나는 식탁의자를 뒤로 빼어 앉으며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그냥 그 모습을 보고 있기만 해도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실웃음을 흘리자 루시아는 표정을 풀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헤헤. 빨리 드세요. 빈속으로 지내면 안 좋다구요!”

“아… 그래. 먹어야지. 루시아. 너도 먹으렴.”

“헹. 저는 다른 거 먹을 거라구요. 땅콩잼 토스트라니. 순 아빠 취향이잖아!”

“음. 그런 뭘 먹을 건데?”

“계란 토스트요!”

그게 그거 아닌가? 둘 다 토스트는 맞는데 말이지.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땅콩잼 토스트를 좋아했었구나.

언젠가 땅콩잼을 병 채로 가져다 놓은 뒤 몰래 다 퍼먹었던 기억이 났다.

“풋.”

아주 오래전일 같지만, 그냥 꿈이었을 뿐인걸.

‘그냥 꿈…’

혼잣말처럼 내뱉은 이 말에 뭔가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만면에 미소를 퍼트리며 어머니와 딸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데 말이지.

“아! 엄마는 지금 어디 있니?”

딸이 있으면 아내가 있을 터, 이상한 논리 같지만 독특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불변의 법칙이니까.

- 끼이익

말이 맺어짐과 동시에 화장실문이 열리며 2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여자…”

또한 구면이었다.

어쩐지 최근에 본 듯한 느낌이지만, 내 아내인 듯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 거지?

아까 루시아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엄마의 이름도 모르는 것 같은데?

‘아내’로 추정되는 여자는 방금 감은 듯한 긴 금발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식탁에 앉았다.

“예쁘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당황한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뱉은 말인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 말을 들은 미모의 여자, 그러니까 아내로 추정되는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되받아쳤다.

“제 얼굴 하루 이틀 봐요? 새삼스럽게. 후후”

아, 그렇지. 내 아내라면, 언제나 봐왔었겠지.

여자 3인방은 나의 잘 달아오른 얼굴을 감상하면 쿡쿡 거리고 있었다.

두 명까지는 이해하는데 이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자는 대체 왜 웃는 건지?

보통 어머니라는 존재, 부드럽고 온화하며,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분위기에 휩쓸려 웃는 모습이라니, 상상이 깨진다.

‘잠깐. 상상이라니? 분명, 언제나 봐왔던 어머니일 텐데…’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분명, 분명 언제나 봐왔던 광경일 텐데… 모든 것은 진짜였다.

나는 지금까지 아주, 정말 아주 긴 잠에 빠져있었고, 드디어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마 꿈속에서는 이렇지 않았나 보지.

“뭘 그렇게 중얼대는 거예요?”

내가 고개를 숙이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으니 걱정되었나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차례 웃어주고는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아참,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름을 물어봐야한다.

각각 어머니와 아내로 ‘추정’되는 여자들의 이름말이다.

“저… 너 이름이 뭐였더라?”

- 멈칫

아무래도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젠장.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이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아보니 적당한 것이 생각났다.

누군가가 내게 해줬던 말 같았다.

“아니. 이름은 본인한테 직접 들어야 한다고 했거든. 그리고… 그냥 갑자기 들어보고 싶어.”

내가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그런 모습이 적잖게 웃겼는지 다시 또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을 해주었다.

“푸훗. 트리니티. 트리니티 크러스트 Trinity Crust에요.”

“음. 트리니티? 예쁜 이름이네.”

라기 보다는 익숙한 이름이랄까.

그래, 어떤 영화에서 나왔던 이름 같은데 말야.

뭐, 그런 건 상관없나?

이 세상에 동명이인쯤이야 널려있으니까.

루시아는 나와 트리니티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는 심통이 났는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나를 불렀다.

“헹! 내 이름은 예쁘다고 한적 한 번도 없으면서!”

“으음. 그게 말이지. 루시아…”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리자 트리니티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루시아, 우리 오늘 피크닉 가잖니? 준비는 다 했니?”

‘피’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표정이 180도 달라진 루시아는 다시 방글방글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헤헤. 벌써 먹을 것도 다 챙겨놨다구요!”

역시 동심이 풍만한 아이답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웃음을 누른 채 토스트를 입에 넣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빨리 다녀오렴. 늦지 말고 와야 된다?”

“네. 어머니”

역시, 어머니라는 호칭은 너무 딱딱한 것 같다.

나중에 개선의 여지가 필요할 듯하다.

지금 나는 파란색과 보라색 스트라이프 남방에 가벼운 남색 반바지를 입고는 피크닉용 나무 바구니

-루시아가 꾸역꾸역 넣어놓은 음식이 가득 들어있는-를 든 채 얼떨떨하게 서있는 중이었다.

트리니티와 루시아는 무슨 준비할 것이 그리 많은지 아직 화장실에서 아옹다옹 거리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작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등을 현관문에 살짝 기대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에서 깬 뒤로, 대체 뭔 꿈을 꿨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다 익숙하고 친근하다.

이들 없이는 한시라도 지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막연한 느낌이 딱히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왁!”

“우와앗!”

누군가 지른 괴성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루시아가 발돋움을 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듯한 표정이었다.

음?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에에. 몇 번이나 불렀는데 왜 계속 눈만 감고 있는 거야!”

날 불렀었나? 분명 나는 잠시 동안만, 정말 잠시 동안만, 아, 20초 정도 되려나, 그 정도만 있었는데 루시아가 부르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뭐, 다른 생각에 집중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나는 계속 삐약 삐약 거리며 훈계를 늘어놓는 루시아를 보며 머리를 비벼서 헝클어놓고는 가벼이 웃어주며 허리를 휘감싸 번쩍 안아들었다.

그러자 꺄아 하며 작은 비명을 지르던 루시아는 이내 다시 웃으며 날 바라봤다.

잠에서 깬 지 3시간도 안된 것 같은데, 대체 감정의 변화가 얼마나 많이 온 것인지, 참 감정표현이 풍부한 아이 같다.

아아. 이러면 제 3자의 견해가 돼버리는 건가?

이래봬도 루시아는 내 딸인데 말이지. 좋아.

내 딸은 참 감정표현이 풍부한 아이다, 가 더 올바른 표현 같네.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며 살짝 루시아의 허리를 간질였다.

과연 루시아는 온몸을 비틀면서 내 품을 벗어나려고 했다.

“뭐해요! 꺄악!”

누가 보면 순수한 어린아이를 추행하려는 변태청년… 쯤으로 오인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긴 둘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후후후.

내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또 간지럼을 태우자 루시아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반격을 시작했다.

“아앗! 뭐하는 거야!”

어느새 가녀린 소녀의 손에는 내 흑발 머리카락이 움켜쥐어져 있었다.

그 자세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좋아…악! 그만 할께… 악!”

아직도 손가락이 허리에서 떼어지지 않고 있자 루시아는 내 머리칼을 쥔 손을 움찔거리며 두피를 괴롭혔다.

결국 나는 간지럼을 태우던 손을 완전히 위로 들어 올리고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을 했다.

“항복합니다. 루시아 양.”

그제서야 루시아는 가엾은 내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는 다시 발을 내딛고 섰다.

그 순간 또 한발의 매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 딱

“악! 뭐야 루시…”

나는 매운 꿀밤의 소유자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우리들의 옆에는 어느새 피크닉 준비를 다 마친 트리니티가 두 팔로 허리를 받치고는 살짝 한쪽으로 다리를 구부린 채로

우리들의 장난질을 ‘관람’하고 있었다.

“어서 가요. 늦게 가면 얼마 못있다 온다구요.”

‘늦게 나온 게 누군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자제심을 짜내어 겨우 겨우 추스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아의 손을 잡은 채로 문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바라본 집 외관은, 뭐랄까 전형적인 펜션 같은 분위기를 띠었다.

집 자체가 휴양지랄까.

휴가철에 따로 어디놀러가지 않아도 될 만큼 아름다운 집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와서 ‘여기 방 있나요?’ 하고 두드릴 것 같은 분위기.

이곳이 내 집이겠지.

그렇게 집 앞마당까지 나오는 길에 중얼거리던 찰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을 알아차렸다.

대체 어딜 가야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까 식탁에서야 그냥 그랬었나보다 하고 넘겨버렸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지금 당장 목적지를 향해 발을 움직여야 하는데 나중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나는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 날 따라오던 트리니티를 바라봤다.

“저기… 우리 어디로… 피크닉 가는 거였지?”

순간 루시아와 트리니티의 움직임이 동시에 정지했다.

역시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나?

나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다시 또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절대 모른다는 게 아냐. 정말이야. 그냥 우리가 어디 가는지 한번만 더 확인해 보려고 물은 거…”

“오늘, 당신 이상해요.”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내려가 바구니 위를 적셨다.

- 톡

“그… 그게 무슨 말이야?”

트리니티는 갑자기 내 코앞까지 성큼 다가와서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부터, 이름을 물어보지 않나, 피크닉이 있었다는 것도 까먹질 않나, 게다가 행동이나 몸짓 같은 것도 평소랑 달라요.”

깊은 담갈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식은땀이 흘렀던 자리를 소매를 훔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나도 모르겠어… 뭔가…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은 데… 그냥…”

확실한 것은 그거였다.

오늘 아침부터, 이상했었다.

분명히 모든 것은 익숙했고 또한 마음을 의지할 수 있을 만큼 포근했다.

그런데도 미묘하게 무언가 엇갈린 듯한 느낌이, 줄곧 느껴져 왔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위에서 다시 트리니티의 목소리가 들려져왔다.

“혹시, 오늘 꾼 꿈 때문인가요?”

“……!”

대체 그걸 어떻게… 나는 고개를 힘없이 가로저었다.

이성적인 판결이 아닌 본능적으로 저어진 고개였다.

이 모든 것이 꿈 때문이라는 것쯤 나도 어렴풋이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명쾌하게 알 수는 없었다.

아주 희미한 꿈에 대한 기억만 스치듯이 떠오를 뿐.

무언가에 의해 막혀진 것처럼,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꿈의 내용만은 기억나지 않았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아주 긴 꿈’이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잊어버려요. 그런 꿈같은 것은. 현실이잖아요? 더 이상 불행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아도 되는, 꿈…”

여기까지 말을 하고 살짝 뒤끝을 흐리던 트리니티는 싱긋 웃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웃었을 것이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잊어버려요. 모든 걸 잊고, 이제 피크닉이나 가자구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트리니티는 재차 미소를 짓고 내 손을 붙잡았다.

“오늘 피크닉 장소는, 뒷산이에요. 당신이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래, 모든 건 악몽이었을 것이다.

트리니티, 내 아내의 말대로 다 잊어버리고 피크닉을 떠나버리면 된다.

그런데 여전히 가슴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돌덩이는 치워지지 않았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도착한 뒷산을 본 나는 또 다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 앞에 펼쳐진 장관 때문이었다.

보통, 뒷산하면 나무가 울창하고 좀 큰 산이면 개울가와 이어져 있을 지도 모르는, 그런 것이 뒷산 아니었나?

문제는 그런 내 고정관념을 이 뒷산이 완벽히 깨부수어 버린 것이었다.

펜션 같은 집도 모자라 에덴동산 같은 뒷산이라니 어이없다면 어이없는 상황임에도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놀랄 일이 많은 것 같으니까. 비록 그것이 단지 내 예감일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간단하게 뒷산의 모습을 표현하면… 과장 좀 많이 보태서 천국을 보는 듯 했다.

정말 빈말이 아니라 누구든지 이 장관을 본다면 그리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지금 유일하게 유감인 점은 나를 포함한 3명의 사람들 외에는 이 근방에 아무도 이 모습을 볼 사람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봐라. 너른 초록 들판에 간간히 붉은 푸른 꽃들이 만개해 있고, 나비들이 날아다니는데다가 주홍빛 따사로운,

하지만 과하지는 않은 햇살이 나른히 내리쬐는 광경을.

‘언제나 내가 상상하던 낙원이야…’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인격체가 내뱉는 듯한 생각에 잠시 놀랐지만 그런 생각쯤은 곧 사그러들었다.

다른 잡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기에는 내 앞에 펼쳐진 ‘천국’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넋을 놓고 이 진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트리니티가 다가와서는 내게 속삭여왔다.

“어때요? 아름답지 않나요? 언제나 그리던 꿈처럼…”

이 한마디에 정신이 다시 들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한 번 흔들어 다시 혼을 붙잡고는 아까부터 팔짝 팔짝 뛰며 좋아하는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래, 아름다워. 피크닉은… 여기서 하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시아는 쌩하니 달려와서는 내가 들고 있던 피크닉 바구니에서 먹을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허허 하고 한차례 웃고는 루시아의 머리 위에 잘 익은 알렌표 꿀밤을 하나 얹어주었다.

“아빠가 힘들게 들고 왔는데 잽싸게 먹을 것만 꺼내기야? 아빠, 엄마도 도와드려야지!”

짐짓 화내는 듯한 나의 말투에 루시아는 울상이 돼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죄 없는 샌드위치만 쿡쿡 찔러대었다.

어지간히 먹고 싶었나 보다.

“풋.”

나와 트리니티는 동시에 실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봐도 루시아의 행동은 너무 귀여웠다.

사실 아까 내 말도 장난으로 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말하면 또 내 머리카락이 수난을 당하게 되겠지?

살짝 눈동자를 굴려 우리들의 웃음을 눈치 챈 루시아는 살짝 혀를 내밀며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돗자리를 편 뒤에

다시 또 그 위에 음식들을 차례 차례 늘여놓기 시작했다.

나는 등을 땅에 누이며 황금빛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 처음 본 듯한, 내가 살아있을 동안은 절대로 못 볼 것 같은 그런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이질감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포근한 느낌만이 날 감쌀 뿐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려 트리니티와 루시아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너무나도 행복한, 정말 보기만 해도 웃음이 피어오르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 무엇이든 상관은 없다.

단지 확실한 것은 내가 지금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설사 이 모든 것이 꿈이더라도 절대 깨고 싶지 않을 만큼.

 

 

 

그렇게 피크닉은 끝이 났고, 저녁 늦게까지 있겠다고 바락 바락 악을 쓰는 루시아를 강제로 들쳐 업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에는 살짝 덜 익힌 찹스테이크와 오렌지에이드, 스프 등이 지금 막 차려진 듯 하얀 김을 내뿜고 있었다.

어머니가 우리가 나가 있었을 동안 저녁 준비를 다 해놓으신 것 같았다.

내가 바로 의자에 털썩 걸터앉아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자 트리니티가 주먹으로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어른이 돼서는 씻지는 않고 점심을 먹는 법이 어디 있어요? 루시아가 보고 따라하겠어요. 빨리 씻고 와요.”

뭔가 훈계 받는 어린아이와 선생님을 보는 듯한 모습이지만 놀랍게도 이건 부부간에 대화라는 것이다.

본래라면 적응 못할 것 같지만, 지금의 나는 그간 9시간 동안 이런 패턴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토 달아봤자 득이 될 것 없다는 것을 감지한 나는 슬금슬금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서

간단하게 세수와 손 씻기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깨끗하게 갈아입었다.

과연 씻으니 깔끔하고 뽀득뽀득한 모습이 거울에 비추어 졌다.

나는 한차례 거울 속에 나를 향해 웃고는 식탁으로 갔다.

어느새 루시아와 트리니티는 나이프로 고기를 잘게 자르고 있었다.

쳇, 나만 남겨두고 혼자 먹는다니.

그나마 위안 삼을 거리는 어머니는 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다는 것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나 역시 한손에는 나이프, 또 다른 손에는 포크를 집어 들고는 스테이크를 자르기 시작했다.

찹스테이크답게 별 다른 무리 없이 부드럽게 잘렸다.

나는 포크를 그걸 집은 뒤 입안에 넣고 우물대며 트리니티를 바라봤다.

뭔가 물어볼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막연한 느낌일 뿐이었지만, 혹시라도 그 예상이 맞다면 분명 저녁 후에 약속이 있을 것 같았다.

워낙 오늘 하루는 내 머리조차도 불신하게 만드는 이상한 날이니까 말이다.

나는 흠흠 하며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떼었다.

그 때였다.

“오늘 9시 20분에 친구 만나러 가는 거 잊지 말아요.”

“내… 에? 어떻게 안 거야?”

내 물음에 트리니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뭘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방금 그 말, 내 질문이 나가기도 전에 선수 쳐서 대답한 거잖아?

설마 트리니티의 숨겨진 능력이 독심술이라던가 하는 건 아닐 꺼고 말이야.

여전 당체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트리니티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려 이상함을 표출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니, 분명 나는 질문도 안했는데 먼저 대답을 했잖아? 그거 말한 거야. 설마 독심술이라도 배운 건 아닐테고…”

내 물음에 한차례 작게 웃은 트리니티는 입을 가리고 대답해 주었다.

“당연히 그거 말고 있겠어요? 오늘 아침부터 할 일을 기억을 못했었던 데다가 지금 남아있는 약속이라고는 당신 친구,

마크하고 만나는 일 밖에 없으니 당연하죠. 이 정도 예상은 루시아도 할 수 있을 걸요?”

“그럼요! 에헴.”

칭찬과 험담을 구분 못하는 천진난만-어울리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한 루시아는 잠시 제껴두자.

나는 그럴 듯한 말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의 뜻을 표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확실히 내가 아침부터 뭔가 이상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트리니티는 눈치가 빠르고, 내 태도도 딱 모르는 것을 물을 때의 그것이었으니 아귀가 딱 맞는다.

‘뭐 더 이상 생각할 이유는 없겠지.’

그렇게 다시 식사를 개시하려 하는데,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마크라는 이름,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본 듯 했다.

익숙한 이름.

루시아와 트리니티는 딸과 아내니 그렇다고 해도, 마크라는 이름은 전혀 새로운 것 같은데 많이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익숙한 느낌이라는 게 또 묘해서 마치 가까이는 있어도 결코 다가갈 수는 없는, 제한된 거리를 두고 익숙한, 그런 느낌이었다.

아아, 한낱 느낌이 이렇게 구구절절 감상평을 늘여놓을 필요는 없지.

나는 오렌지에이드가 가득 담긴 컵을 들어 목을 축이며 ‘크으’하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은 다음 재차 트리니티에게 물어보았다.

“트리니티, 마크라는 사람. 누구야?”

역시 누가 봐도 이상한 모습이다. 늦게 만나서 술자리를 같이할 만한 친한 친구가 누군지도 몰라서 아내에게 물어보는 상황이라니.

나조차도 내가 한심해졌지만, 아예 모르고 만나서 질책을 받는 것 보다는 낫겠지.

여러 의미로 꽤나 심각한 질문이었는데, 트리니티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말없이 대답해 주었다.

“마크. 마크 메르틴 Mark Mertin. 당신 친구에요. 대학교 1학년부터 친해져서는, 지금은 의사가 되었다죠?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요.

술 먹고 들어온 날엔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설ㅊ…”

“아아. 좋아. 그만! 그렇다 이거네. 마크 메르틴이라…”

나는 말로 트리니티의 언어행패를 저지하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허나 확실한 점은 지금 나는 그와 절친한 친구라는 것이다.

예컨대, 마크의 얼굴 역시 많이 익숙할 것 같다.

아니, 그 역시 베스트 프렌드이기 때문이겠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익숙한 것 말이다.

전혀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무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친숙함 이라던지 익숙한 기운 같은 거 말이다.

뭐, 만나면 자연스럽게 녹아들겠지.

어머니라던지, 트리니티, 또 루시아처럼.

이것으로 약속 이야기는 식탁위에서는 일단락 지어졌다.

다들 부지런히 자른 스테이크를 입속에 넣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슥 들러보아 식사하는 모습들을 잠시간 지켜본 뒤 나 자신도 모를 듯한 엷은 미소를 흘리며 나 또한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그럼, 다녀올게.”

나는 그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고는 ‘트리니티가 말해준’장소,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차고로 갔다.

석유-소비-의 나라 미국답게 약속장소까지만 족히 70km 나 되어 걸어서 가려면 한나절이 꼬박 걸릴 것이 분명했다.

사실 우리 집이 지극히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는 탓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근방에는 마을은커녕 사람 사는 집조차 없다. 대체 장보러 갈 때 어떻게 하나 몰라.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차고의 문이 열렸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치워진 모습이 자주 관리를 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차고 안을 바라보며 감상평을 논하던 나는 그 옆으로 시선을 옮기었다.

나는 내 눈 안에 들어온 차량을 보고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포르쉐 뉴박스터 New Boxster…”

스포츠카와 경주용 자동차, 마지막으로 4대 스포츠카 중 하나인 포르쉐로 유명한 회사 ‘포르쉐’에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오픈 기종 뉴박스터, 그것이 바로 내 차였다.

황혼을 등진 내 머리 뒤로 검푸른 황혼의 빛이 곡선을 따라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아’라고 작은 감탄사를 터트리고는 차에 탔다.

열쇠는 꽂혀있었다.

누가 보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차의 열쇠를 막 굴릴 수 있냐고 어이없어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견해로는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한 달에 차 한 대 지나갈까 말까 한 시외까지 출장 나와서 이 차를 가져갈 수 있을까 싶다.

- 딸칵

열쇠홀더를 오른쪽으로 꺾음과 동시에 부드러운 엔진 진동이 느껴져 왔다.

대단해 역시. 나란 사람은.

비록 뉴박스터가 포르쉐치곤 저렴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고가인 것은 여전, 가격대 성능비도 높다.

이런 걸 타고 다닐 정도면… 적어도 시시한 잡 일 따위는 하지 않겠지?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직업도 모르네. 분명 연봉 3억을 넘을 거야, 물론.

나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자화자찬을 하고는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

차디찬 숲의 공기가 머리를 빠르게 가르며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혼자서, 혼자뿐인 도로를 고속으로 시속 120km 에 다다르는 고속으로 주행하고 있으니 자꾸 떨쳐냈었던 상념이 떠오르려고 했다.

나는 밀려드는 잡생각들을 고개를 흔들어 다시 지워버리고는 뉴박스터가 빠르게 가르고 있는 옆의 풍경들을 바라봤다.

한참을 말없이 홀린 듯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고는 나직히 내뱉었다.

“자 그럼… 목적지는 카베사 Cervesa 인가?”

자신에게 한 듯한 목소리는 곧 바람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카베사 Cervesa. 영어로 비어 Beer, 즉 맥주를 라틴어로 쓴 것이다.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카사노바 같은… 조금 안 좋은 단어를 연상하게 하는 건전치 못한 작명센스인 것 같다.

뭐, 어차피 술집이니까 상관없나?

나는 정열의 색 붉은색으로 빈티지틱하게 쓰인 알파벳 일곱 개를 보고 그렇게 짧은 감상평을 휘갈기고는

비밀의 동굴-다른 의미로 비밀의 동굴이긴 하다만-이라도 되는 양 어둑어둑한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불건전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꽤나 건전한 음주문화를 주도하는 가게 같았다.

아니지, 이런 시덥지 않은 평을 늘어놓는 것은 마크인지 보드마카인지 하는 내 ‘베스트 프렌드’ 친구 앞에서 해도 된다.

먼저 그 인간이 어디에 앉아있는 지를 좀 찾아봐야겠다.

일단 전체적인 내부 모습을 보기 위해서 나는 한참 DJ가 디스크판을 긁고 있는 앞 스테이지로 나왔다.

다들 앞쪽에는 관심도 없고 술만 부지런히 축내던 중이어서 나를 의식하는 사람은 200명에 달하는 넓은 홀 내에서도 극소수였다.

벽에 머리를 붙인 뒤 파노라마 사진을 찍듯 고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다 보니 내 눈에 무언가가 하나 밟혔다.

양 손을 들고 반갑게 허공을 휘적거리고 있는 20대 남성 청년을 홀 구석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야아아아~ 여기야아아!”

으음. 엄청 반가워한다.

혹시 5년만에 재회하는 감동의 시사회는 아닐꺼고 말이야.

그냥 성격 탓인가?

이렇든 저렇든 저렇게 맞아주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나는 조깅하듯 살짝 발을 빠르게 놀려 순식간에 마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깐 멀리서 봐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표정도 상당히 밝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호쾌한 청년? 뭐 그 정도랄까.

“여어. 어서와. 오랜만이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꽤나 오랜만에 재회인 것이야 분명, 나는 이 상황에 맞추기 위해 즉석에서 대답을 했다.

“그래, 오랜만이네? 한 2년? 아니 1년 됐나?”

내 질문에 마크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내 눈을 응시했다.

뭐야, 틀렸나? 왜 이래? 아까 오랜만이라며?

마크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정확히, 34시간 32분 만이네? 뭐야. 그 정도 계산도 틀리고?”

…34시간 32분이라는 숫자는 저기 버려놓고, 보통 사람이 하루 내지 이틀 되는 기간을 오랜만이라고 하지는 않지 않나?

설마 1년 365일 화장실 빼고는 언제나 같이 다니는 그런 사이는 아닐 텐데?

내가 자신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마크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짝 하고 박수를 치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하! 새로운 개그 코드인가? 접수해 둬야겠어. 우후후.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하라고~”

…뭐라니. 무인도에 혼자 버려놓아도 하루 만에 다중인격자로 승화되어서

일개 소대의 인간을 제조-정신상으로-할 것 같은 특이한 성격에 소유자인 것 같다.

아니면 “엿 먹어!” 라고 말해도 “정말 주는 거야? 고마워~”하면서 망상의 나래를 펼친다던가.

이래저래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역시 밉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소리나게 의자에 주저앉고는 탁자위에 놓여있던 맥주 조끼를 들어 한 숨 들이켰다.

캬아. 시원하다. 거품이 살짝 입 주변에 묻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고 마크에게 말을 걸었다.

“아아. 그나저나 말이야. 너 요즘 일은 잘돼가?”

“푸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나는 내 안면이 시원해지며 살짝 톡톡 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느꼈다.

마시던 맥주를 그대로 힘차게 방출해 바로 앞에 있던 내 얼굴에 정확하게 퍼부은 것이었다.

대체… 이 인간 역시 이상하다.

나는 소매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터져 나오려는 화를 억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 그냥 일상적인 대화잖아? 일을 잘돼가 라던지, 건강을 어때 라던지 말야.”

조금 진정 좀 하라고 한 말인데 더 놀란 것 같다.

대체 왜?

아무리 봐도 지극히 정상적인 대화다.

이번에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상대였다.

“네가 그런 말한 적은 처음이야. 그거 몰랐어? 와. 나는 네가 이런 딱딱한 언어를 구사하는 줄 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그럼?”

“말장난이라던가, 뭐 그런 거 말야.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애쓰는. 내 별명이 보드 마카가 된 게 너 때문으로 기억하는 데?”

그런 사람이라. 그래도 오늘은 곤란하다. 오늘은 마법의 날이니까.

나는 머쓱하게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꽤나 스케일이 크다. ‘사실 나는 유머맨이었다-’라니.

나는 얼른 말꼬리를 돌려 술을 마시는 쪽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켰다.

“아하하. 그게 말이다. 오늘은 좀 그렇네. 내가 정신이 없어서 말이야. 일단 맥주부터 마시자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마크는 씨익 웃으며 맥주 조끼를 얼굴 높이까지 치켜들었다.

건배- 라던가, 위하여-같은 거 해야겠지, 역시?

“친구의 자아를 위하여!”

대충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내가 모르는 상황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건 실패했다-

술을 마신 우리는 한 11시 쯤 되었을까, ‘죽지 말고 잘살아’라는 이상한 말을 건네고는 각자 차를 타고 갈라졌다.

 

- 탁

여기는 차고다.

대략 11시 40분 쯤 되었겠다.

역시 음주는 늦은 귀가의 불씨인 듯하다.

아마도 다들 자고 있겠지.

나는 조용히 문을 열며 거실에 누군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이미 불은 다 꺼져있었다. 쥐죽은 듯한 고요한 적막만 집 안의 공기를 맴돌 뿐, 별다른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보자. 내 방이… 저기군.

거실로부터 왼쪽에 위치한 내 방의 문이 어둠 사이로 흐릿하게 형체가 드러났다.

- 끼익 끼익

뭔가 역사가 깊은 듯한 나무 마루에서 기이한 소리가 퍼져 나와 귀를 자극했다.

누가 듣진 않겠지? 작은 소리니까.

- 끼리릭

살금살금 걸어오다 보니 어느새 방문 앞까지 도달했다.

손을 문고리위에 가져댄 후에 오른쪽으로 반 바퀴 돌리니 작은 소음과 함께 문이 서서히 열렸다.

“뭐해요?”

“와악!”

하아… 순간 CPR이라도 한 듯 급격하게 충격이 온 심장에 비명을 지른 뒤 풀썩 마루위에 주저 앉아버렸다.

서서히 위를 올려다보니… 트리니티였다.

아직 안자고 있었나?

“아직 안잤고 있었어?”

내 물음에 트리니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안 왔는데 편히 잘 수 있는 아내가 있겠어요?”

아아. 그래. 트리니티는 확실히… 내 아내이다.

여러 주변사람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말이다.

나는 아직도 폭발이라도 할 듯 뛰어대는 왼쪽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음을 안정시키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일어나자 트리니티는 기다렸다는 듯이 살짝 나를 안고서는 바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잘 자요. 다신 오늘과 같은 꿈은 꾸지 말구요.”

포근함에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답문을 해주었다.

“그럼 너도 잘 자.”

그렇게 취침 전 인사를 나눈 우리는 각자 방-각 방인가, 그러면-으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 봤던 침대가 내 눈에 찼다. 분명 아침에 이 침대에서 깬 것 같았다.

‘하아…’

침대에 몸을 누이니 솜의 포근함이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그 나른함이 자꾸 잠을 독촉이는 부채질을 해댔지만, 잠은 잘 오지 않았다.

“…”

막연한 느낌이었을 뿐이었지만, 지금 여기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면, 영영 이곳에서 깨어나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나를 잠식해왔다.

- 투둑

‘어…?’

왼쪽 뺨을 타고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슬픔의 의미도, 그리움의 의미도 아니었다.

이 눈물은, 행복함에 젖어, 너무나도 행복하여 흘리는, 그런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래, 분명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건.

 


모든 것이 이상하지만, 또한 익숙했던, 너무나도 길고도 짧았던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절대 그 침대에서 깨지 못할 것이라고 느꼈던 나의 예감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금까지 아침을 본 햇수만 1460번이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나 혼자만 되새기고 있는 ‘망각의 날’로부터 오늘부로 딱 4년이 지난 것이다.

지난 4년 동안의 삶은 한마디면 표현이 가능하다.

그 어떤 표현도 이 보다 잘 어울릴 수는 없을 것이다.

‘행복하다. 눈물이 흐를 만큼’

지난 4해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천국, 그래 그것도 동의어쯤으로 치부해 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단 한 가지, 너무나도 행복할 때면, 나 자신도 모르게 흐르고 있던 눈물에 당혹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

가히 내 삶은 성공적이며, 남에게 기쁨을 주고, 또 받으며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선택받은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매일 느껴왔으니 말이다.

“아빠! 토스트 드세요!”

“그래, 곧 갈 거란다. 루시아.”

나는 소파에 누이고 있던 몸을 단번에 일으켜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식탁으로 걸어갔다.

오늘 메뉴는 땅콩잼 토스트와 밀크커피. 4년 전과 하나 다를 것 없이 똑같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어리버리 했지만’

어쩐지 쿡, 하고 작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곧 헛기침을 하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제 어딘가에서 곧 소리가 들려올 거다. 분명.

“잘 잤어요?”

트리니티다.

나는 망각의 날의 마지막 악장에서 들은 ‘잘 자요’라는 말도, 그 다음날 들은 ‘잘 잤어요?’하는 말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못 잊는다가 낫지 싶다.

지난 4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하지만 질리지는 않게 들어왔으니 말이다.

나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해 주고는 커피 잔을 들어 목을 따뜻하게 데웠다.

아직 아침시간의 퍼즐 중 맞추어지지 않는 하나의 조각이 남았다.

“에에. 아직도 신문이 안 왔네?”

바로 신문이다.

대체 이 거리까지 와주는 신문배달부가 있는지 참 용하지만,

신기하게도 매일 아침 신문배달부가 와서는 새로 나온 신문을 문 앞까지 와 내려놓고 간다.

한 날은 대체 누가 신청도 안한-신청했더라도 오지 않을법한-신문을 매일 아침 가져다주는 지 알아보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서

마당 벽 뒤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국 얼굴은커녕 그림자조차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언제나, 말 그대로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꼬박꼬박 와서는 신문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런 신문이 정상 시간보다 1시간 늦은 듯 한데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이다.

내 투덜거림이 섞인 말에 루시아는 코코아를 떠먹던 티스푼으로 탁자를 소리 나게 탁탁 치며 설교를 늘어놨다.

“사람은 기다릴 줄도 알아야한다구요! 게다가 사람은 실수의 동물이라구요! 고마우신 분한테 감사할 줄 알아야죠!”

이제는 19살, 어엿한 숙녀가 된 루시아.

문제는 여전히 말투는 십대 초반 소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입을 손으로 살짝 가리며 쿡쿡 웃고는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루시아의 말투를 놀려먹으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문 왔습니다!”

“엥?”

“에에?

“무슨?”

각각 루시아, 나, 트리니티가 신문배달부의 첫 방문에 대한 감탄문이다.

늘여놓고 보니 반응의 수준이 나와 루시아가 버금가는 것 같단 말야.

그나저나, 신문이라니. 게다가 직접 대면이라니.

확실히 놀랍다.

나는 셋 중 대표로 문 앞으로 가서는 문을 똑똑 두드려 반응을 해주었다.

“정말 신문 맞아요?”

내 물음이 이상했던 탓인지 배달부는 크게 웃어댔다.

“하하하하! 그럼 가짜 신문도 있습니까? 4년만이네요. 얼굴을 뵙고 싶어서 단장을 좀 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처음에 신문배달부를 가정한 강도-이런 외각에 출장을 온다는 가정 하에-인줄 알고 긴장했던 나는 ‘4년만’이라는 말을 듣고 안심을 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진짜’ 신문배달부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언뜻 떠오른 이상한 생각이 내 동작을 멈추게 하였다.

‘방금 말, 이상했다고 느낀 건 착각이겠지?’

나는 내 뒤에서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를 지켜보던 여자 3인방을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들여서 아침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할까봐. 잠깐 기다려.”

트리니티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역시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을 해주었다.

“알았어요. 빨리 들어와요. 꼭.”

나는 그 말을 뒤로하고 문을 열어 현관으로 나갔다.

4년동안 내가 애타게 찾던 그 신문배달부가 바로 그 앞에 있었다.

“너… 너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뒤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아려왔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상황 탓에 이런 아픔에 신경 쓸 겨를은 추호도 없었다.

“신문 배달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내 눈앞에 서있는 신문배달부는 분명히 웃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알 듯 모를 듯한 비웃음, 조소가 어려 있었다.

“아…”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오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남자는 표정을 풀고 살짝 벌려있었던 입을 열었다.

“잘 있었어? 4년간…말이야.”

 

철로 이루어진 꽃으로 장식된 문 뒤에 서있던 것은, 정말 확실한 것은 신문배달부 따위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랑 티끌하나 틀리지 않고 모든 것이 똑같은, 거울 같았다.

“4년간? 대체 무슨 말을…”

“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행복하게 지냈냐고 묻는 거다. 그 날 후로 말이다.”

그날, 분명 망각의 날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오직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그런 것이다. 일개 신문배달부 따위가 알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내 앞에 있는 인간은 지금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 휘익

“푸하하하. 뭐하는 거지? 이게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네 자신도 믿지 못하다니.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나 보네?

하긴, 지금까지 네가 살았던 것이 진실일 리가 없지.”

내가 손을 들어 힘겹게 남자의 형체에 손을 가져가보았지만, 손이 다리를 뚫고 지나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힘없이 막힌 손이 다시 아래로 추락할 뿐이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건 꿈이 아니다.

그리고 환상도 아닐 거다.

그런데 어째서 나랑 뭐든 것, 심지어 복장조차도 다를 것 없이 똑같은 인간이 내 앞에 서있을 수 있는 거냐는 말이다.

도플갱어? 그런 가설따위 믿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실제 도플갱어 가설 상으로는 도플갱어 둘이 한 장소에서 만나게 되면 소멸한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그 무엇도 아니라면 이 자는 대체 무어라는 것인지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가볍게 떨리고 있는 입을 열어 말을 짜내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구지? 그리고, 신문배달부는 대체…”

- …그러면.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당신은 대체 누구죠?

- 욱신

“아악!”

나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매었다.

무언가 풀어진 느낌과 함께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내 어떤 힘에 의해서 다시 사그러 들었다.

그와 동시에, 긴 창으로 뇌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통증이 밀려들어왔다.

흡사 억지로 닫힌 문을 열려다 문이 박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기척에 위를 올려다보니 남자가 내 앞까지 걸어와 있었다.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뭔가 기억하나가 열린 듯한데? 니가 스스로 가둬놓은 기억들 말이야.

니가 싫어했던, 피하고 싶던, 그런 모든 기억들, 다 가둬버렸잖아? 아아. 그것조차 기억이 안 나려나? 그 기억조차 가둬두었을테니.”

스스로… 기억을 가둬? 그런 것이 가능한 일이긴 한건가?

대체 이 자는 뭐라고 하는 거야. 대체…

마음속 깊은 곳부터 울림 같은 것이 느껴져 왔으니 이내 무시해 버렸다.

그 울림,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당신… 대체 누구인거야? 대체…”

“글쎄? 너의 자아. 아니면 무의식이라고 해두지.”

- 당신의…자아입니다. 아니면 무의식이라고 해두죠.

- 욱신

또 다시 머리가 아려왔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까 전에도 봤지만 거울이라고 해도 무색할만한 빼닮은 외모였다.

단 한 가지, 살짝 순한 듯한 내 분위기와는 달리, 세상을 등지고 모든 절망과 분노를 너무나도 짧은 기간 동안 느껴온, 그런 분위기였다.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는 것을 보니 순간 고개를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만 두었다.

피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당신, 대체 누구야!”

질책이나 비명 따위가 아닌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하지만 여전 남자의 표정은 금하나 가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나, 네 자아라고? 네가 만든 파라다이스 속에서, 네가 만든 달콤한 환상의 존재들과 함께, 거짓 행복을 누리고 있었잖아.

전에 상처는 네 머릿속 깊은 곳에 가두어 놓고는. 지금 네 짓,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내면에 숨어버리는 거?

상처만 미루고 행복만 담아두고 살겠다라…”

잠시 숨을 고르며 뜸을 들인 남자는 재차 말을 이어갔다.

“세상은 만만치 않다. 그리고 지금 네 앞에 서있는 나도, 사실은 현실 속에서 네가 보낸 존재라고.

이대로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얼간이.”

‘얼간이’라고 내뱉은 말에는 조소가 어려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남자가 내뱉은 말 중 ‘현실 속’이라는 말을 듣고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 속?

그럼 이게 꿈이라도 된 다는 거야?

내가 고개를 푹 숙이거나 말거나 남자는 자신이 할 말만 늘어놓았다.

“사실. 조금 더 놔둘까, 싶었거든. 그런데 지가 만든 존재랑 같이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매일 지켜보다보니까 배알이 뒤틀리더라고.

그리고 말야, 어이 고개 들어.”

그는 이제야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것을 보고는 한마디 툭 던져주었다.

“고개 들어 인간아. 니가 그렇게 찾던 친절한 신문배달부가 눈앞에 있는 데도 눈 내리깔고 있어야겠냐?”

뭐? 신문배달부? 이 인간이? 내 앞에서 시덥잖은 말이나 던져대는 인간이 그 배달부라고?

나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부정이라고 보기에는 그냥 납득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내 반응이 재밌던 것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 그는 한번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네가 그리던 모습하고 다르나? 하긴, 그렇겠지? ‘너의’신문배달부는 이런 먼 교외까지 와서 먼 주택에게 신문을 무료로 지급해주는

마음 넓고, 배려심 있고, 그런 착실한 청년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어쩌나? 현실은 네가 하루 동안 어떤 짓을 했는지 뭘 가지고 혼자

좋아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왔었을 뿐인 너의 다른 하나인 것 인 걸?”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힘겹게 연 입에서는 쉰 소리만 나올 뿐 이었다.

무언가 목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와 다르게 목에서는 희미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냐… 이건… 이건…”

“뭐가 아니라는 거지? 나? 이 상황? 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둘 다 맞아.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어. 바로 이게 꿈이라는 거야.”

무형의 망치가 머리를 세게 강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뭔가에 억눌려 있던 생각들이 끝도 없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이 모든 게 꿈일지라도…

- 이상 했었어… 모든 것이.

- 4년만인가? 너 만의 환상에 빠져 있던 기간 말이야.

흡사 누군가가 내 주위를 돌며 나를 옥죄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한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생각은 점점 더 빠르게 나올 뿐 이었다.

“이건… 현실이야…”

웅얼거리는 듯한 내 목소리에 그는 ‘풋’하고 짧게 조소를 터트리곤 몸을 숙여 안면을 내 앞에 가져왔다.

“그만 괴롭히지? 네 머릿속에 들려오는 생각, 앞으로 절대 멈추지 않을 거다. 절대로. 괴롭지 않아?

네가 이곳이 현실이라고 믿을수록 그건 가중되어갈 뿐이다. 그리고 너, 이곳이 지금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이미?”

“아냐… 이건 꿈이 아니야…”

괴로웠다. 내면의 소리가 나를 향해 질타를 날렸다.

피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뱉어진 말은 끝없이 가슴을 파헤치고 있었다.

나는 순간 다시 들려온 소리에 숨소리를 멈추었다.

‘넌 애당초 가족 따위 없잖아?’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손을 뻗어서 집으로 연결되는 문의 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누군가에 품에 안기고 싶었다.

누워있었던 상태라서 반쯤 열리다 말 뿐 이었다.

분명 이 안에는 가족들이 식사를 하며 내가 언제쯤 배달부를 데리고 들어올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예상, 아니 희망은 무참히 부서졌다.

열린 문안으로 보이는 것은 죽은 듯 누워있는 부모와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였다.

- 스르륵

문고리를 잡은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코를 나와 맞대며 천천히 말을 꺼내었다.

“저것이 현실이잖아. 안 그래? 다, 그 모든 것은 네가 현실에서 원했던 것이 이루어진, 철저한 너 만의 허상의 세계이지. 멋지지 않아?

2살도 안되었을 때 죽은 엄마가 살아있고, 의뢰인 2명중 한명은 아내고 또 한명은 딸이고, 사업동료는 절친한 친구라…

아주 훌륭한 도피처로군 그래?”

그는 말을 마치고 굳게 닫혀있는 대문을 검지로 가리키며 짧게 내뱉었다.

“저 문으로 나가라. 너의 세계는 깨졌어. 이제는 여기 남을수록 미쳐갈 거야. 나도 또 다른 내가 그런 꼴 당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일단 나가면, 모든 건 다 사라질 거야. 그리곤 잊게 되겠지. 아아, 뭔가 더러운 꿈을 꾼 것 같아 라고 중얼거리긴 하겠지만.”

“……”

“그리고는 침대 위에서 눈을 뜨게 되는 거야. 현실로 돌아가.”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팔 근육에 힘을 주었다.

- 퍽

타격음과 함께 무언가의 형상이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그였다.

그는 나에게 맞은 왼쪽 볼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뭔 짓 이지?”

“꿈을 깨도록 해준 대가다. 그럼 꺼져 이제.”

그는 한차례 피식 웃고는 날 올려다봤다.

“이제야 정신 차리셨군. 얼간이. 그럼, 문으로 나가. 나도 곧 따라 나가지.

난 대답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검은 색 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몸을 열자 검은 형상이 방사형 원을 그리며 공간을 왜곡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걸 포탈이라고 하던가.

내가 드림 리더였을 때 만들 던 것이겠지.

바로 발을 검은 형상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했으나 이내 멈칫하고는 뒤를 돌아봤다.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열려진 문 사이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 트리니티, 그리고 루시아였다.

한결 같이 다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저들사이에서 행복하게 지냈다.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행복이었다.

이제는 가짜 행복이 되어버렸지만 그것 만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행복…했었어.”

그 말을 마친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검은 형상 안으로 몸을 던졌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빈혈이라도 있는 듯 머리가 어질 거리고 또한 아려왔다.

젠장할, 자기 전에 한 잔이라도 했나. 왜 이리 머리가 아프지?

나는 신경질적인 투로 고개를 돌려 왼쪽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분명 누군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차가운 공기만 그곳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앗! 그러고 보니!”

서둘러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내 침대 위였다.

자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이상하리만큼 똑같았다.

새하얀 2인용 침대를 찬찬히 뜯어보던 나는 이내 이상한 자국을 발견하고는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거… 눈물이잖아…”

그 투명한 자국은 분명 눈물이었다.

잘 때 흘린 것 같았다.

지독한 꿈을 꾼 것 같다.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 나는 내 발등 위에 떨어진 무언가에 깜짝 놀라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 이건… 대체…”

- 투둑

내 눈에서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용히 흘러내리던 눈물은 점차 흐느낌으로 번져가더니 이내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어… 어째서…”

열린 문, 비어있는 집, 2인용 침대, 치워져있는 식탁… 그 모든 것이 눈물의 거름이 되어 끝없이 피어올랐다.

애써 울음을 감추려고는 하지 않았다. 어쩐지 지금만큼은 울어도 될 것 같았다.

 

 

“어이, 요즘 좀 괜찮나? 보드 마카.”

“잘 돼간다. 왜, 빵 쪼가리.”

언제나 같은 아침이다.

옛날이랑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마크랑 친해졌다는 것.

더 이상은 동료로 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마크는 나와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이며, 조언자이다.

뭐, 마크를 보드 마카로 부르거나 크러스트를 빵 쪼가리로 부르는 것을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갈 것이다.

정말이지 옛날 같으면 ‘교대해’라던지 ‘간다’같은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만 내뱉었을 것이,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럴 것이었지만,

이제 휴식시간마다 농담 따먹기를 하며 히히덕 거리는 것은 이제 일상의 한 켠에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아아, 갑자기 목마르네. 시원한 게 당긴다. 시원한 거라…

“마크.”

“왜 불러?”

한참 어디서 굴러들어온 건지 모를 기계에다 납땜질을 하고 있던 마크는 얼굴 가득 피어오르던 땀을 소매를 닦고 대꾸하였다.

보기만 해도 온몸이 더워지는 듯한 모습이다.

이것도 민폐라면 민폐다.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각적 폐해를 준 달까.

마크가 헥헥 거리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것이 더 당겼다.

“오늘 일 끝나고, 맥주 한잔 어때? 시원하게.”

‘맥주’라는 말이 나오자 마크는 구미가 당긴 다는 듯이 한차례 입맛을 다시고는 씨익 웃었다.

“좋지. 이번에도 그 술집이야? 그 뭐더라…”

“카베사. 술맛 하나는 끝내주지. 시원하고 말이야.”

카베사.

익숙한 이름이지만 딱히 가본 적은 없던 술집이다.

어렴풋이 바람 흘러가는 대로 운전을 하다 보니 발견한 것이었다.

촌스러운 빨간색 간판임에도 무턱대고 알 수 없는 기운에 사로 잡혀 술집에 들어간 뒤, 그 후로 계속 그 술집에 갔던 것이었다.

그 술집에만 있으면 어쩐지 마음 한켠이 편안해 지고, 술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만, 행복에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에 이끌려 이후로 계속 카베사에 들락날락 하다가 내 친구인 마크를 섭외, 최초의 술자리를 그곳에서 치룬 것이다.

아무래도 건전치 못한 주제이니 술 이야기는 그만해야겠다.

내가 이야깃거리를 술 말고 다른 것으로 정하기 위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중, 마크가 갑자기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 퍽

“악! 뭐해 임마!”

녀석은 소리 지르는 내 모습에도 얄미울 정도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엄지로 내 뒤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 손짓에 문득 시계를 바라봤다.

시침은 정확히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대면 설마…

“아빠!”

“루시아,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는데도…”

내 뒤에서 있는 아이는 다름 아닌 내 양녀, 루시아였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니 서있는 것이 도리어 귀여워보였다.

루시아는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

“그래도,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까 마중 나온 거야. 그리고 또 나오면 좋아하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입양을 한 후에 바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너무 자기 고집이 세다.

아, 이야기를 여기서 풀어나가면 안되나 역시?

자 그럼 간단히 설명을 해볼까.

정확히 6개월 전, 아직까지도 흐릿하게나마 기억이 안 나는 꿈에서 깨어난 후, 내가 한 일은 식사를 하는 것도, 출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로, 옷도 자기 전에 입은 것을 걸쳐 입고는 잠자기 전 바래다주었던 의뢰인, 루시아의 집에 찾아간 것이었다.

목적은 위에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입양이었다.

나는 자식이 없고-23살의 청년이 자식이 있다면 그건 또 큰 문제지만- 루시아는 아빠가 없으니, 협상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물론 지금 생각해봐도 다짜고짜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숨을 내쉬며 어법도 안 맞추어 횡설수설 늘어놓았던 말은 이해가 안가지만,

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냥 갑자기 무언가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그런 것과 비슷한 거였다.

단지 이상한 점이라고는 그 느낌이 보통 때와는 조금 달랐다는 것이지만.

뭔가 머릿속 깊은 것에서부터 나의 그런 행동을 원했던 것 같았다.

어쨌든 나의 부탁을 루시아는 생글 생글 웃으며 승낙했고, 내 양녀가 되었다.

놀랍지 않은가?

23살 아빠에 15살 딸이라니.

부녀간의 나이차이가 8살인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극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니.

아니 그보다 여기 온 목적을 빤한 데… 보나마나 같이 집에 가자고 하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나는 일이 끝난 후 카베사에 가야 할 몸.

그렇다고 루시아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 그랬던가,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마크를 불렀다.

“마크. 아무래도 술 약속은 뒤로 미뤄야겠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마크는 나를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아가씨 고집 꺾을 사람이 있을라나 몰라. 내일 마시면 되니까 뭐.”

“그럼, 뒤에 일처리는 부탁한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어차피 곧 가니까 걱정 마셔.”

나는 뒤를 돌아‘미뤄야겠다’라는 말을 듣고는 방긋 방긋 웃고 있는 루시아를 바라봤다.

얄밉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밉지는 않다.

그냥 귀여운 행동쯤으로 뇌에서 인식해버리니까.

루시아는 내게 손을 건네었다.

손잡고 걸어가자는 사인이었다.

루시아는, 대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을 잡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런데 문제는, 손을 잡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8살 차이의 남녀가 손을 잡고 있다라… 나는 ‘좋겠어요’하는 눈길로 우리를 훑어보는 인간들을 볼 때 마다 ‘부녀라고!’하며

소리치고는 싶지만 어쩐지 그러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았기 때문에 대신 차선책으로 손을 잡는 것을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결국 어느 날 루시아가 길거리에서 소리 지르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잡고 다니지만.

나는 떨리는 손을 루시아의 손으로 가져갔다.

이 동작을 하는 순간 나의 뇌는 바쁘게 사람들이 거의 없을 법한 경로를 선정하고 있었다.

“헤헤헤.”

역시 나는 웃음에 약한 것 같다.

루시아의 웃음소리 한번에 다른 마음들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으니.

마크에게 턱짓으로 루시아를 가리키며 왼쪽 눈을 찡긋인 뒤에 나는 건물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때에 맞지 않는 황혼과 같은 보랏빛의 신비함이 감도는 햇살이 먼 곳으로 퍼져 나왔다.

비록 아무것도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마음속이 나른해지며 피곤함이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한숨도 그 무엇도 아닌 감탄과 회상이었다.

그간 바쁘게 달려온 6개월을 돌아보니 지금과는 놀라울 정도로 다른 내 모습이 그려졌다.

마크와 둘도 없을 정도로 친해졌으며, 나에게 드림 리딩을 부탁했던 의뢰인 두 명은 각각 내 아내와, 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50세쯤 되는 중년 여성의 양자가 되었다.

정신없이 달려왔다.

대체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것은 내면의 내가 그리하라고 한 것일 뿐이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잡소리쯤으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결국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딘가에서, 아니, 전생에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익숙한 일이었다.

모두가 내 청을 받아들였고, 내 평생의 소원이자 바람이던, ‘행복한 삶’과 ‘평범한 삶’을 둘 다 이루어 내었다.

그건 몇 주 전 내가 ‘당신은 트리니티에요’라고 속였던 여성과 결혼을 하면서 성취되었고, 마지막 남은 퍼즐 하나까지 빈틈없이 짜 맞추어졌다.

분명 나는 행복하다. 그런데 어쩐지 모르게 불안했다.

막연한 불안감 이었다 분명.

정상의 올라간 사람은 결코 그 위에 머무를 수 없다.

그 정상은 밟아본 자는 결국 다시 밑으로 내려와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끝없이 내 심기를 괴롭혀 온 것이다.

“풋”

힘없는 웃음이 입가에 흘러내렸다.

완벽한 조각품을 전시해놓고는 누군가 파괴할까봐 불안해하는 소심한 조각사 같아서, 내 자신이 한심해보였다.

그냥 기우일 뿐인 것을.

나는 이미 내 삶의 한 조각이 된, 루시아의 머리에 내 손을 걸쳐놓았다.

그러자 루시아는 기분이 좋은 듯 헤헤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헤헤. 왜요? 어디 가려구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가로지른 뒤, 나는 입을 살짝 떼어 말을 꺼내었다.

“루시아. 너는 가장 허무한 순간이 뭐라고 생각해?”

역시 질문이 급작스러웠던 것일까, 루시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으응. 그건 갑자기 왜요?”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최근 부쩍 그런 일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냥 내면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한참을 곤란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얼굴을 풀었다.

“사람들은 살면서 적어도 한번쯤은, 아니 정말 수도 없이 ‘허무’라는 감정을 느끼게 돼. 아마 루시아 너도 있지 않을까?”

내 물음에 루시아는 잠깐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심통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빠가 나랑 손 안 잡을 때!”

“…루시아. 그런 게 아니라…”

“나한테는 중요하다구!”

으음. 루시아에게 바람직한 답변을 듣기는 포기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트리니티나 어머니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더 나아보이니까.

하긴, 자기보다 어린 아이에게 조언을 구하는 바보는 없겠지만.

그것도 정신연령은 한참이나 더 어린.

“아빠는 그럼 가장 허무한 순간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답해줬으니까 아빠도 해줘!”

안 그래도 말하려던 바다.

어차피 누군가에겐 꼭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니까.

게다가 어쩐지 루시아에게 더 말해주고 싶었었다.

나는 고개를 나직히 끄덕이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순간은 꿈에서 깬 직후야. 내가 꿈꾼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순간이니까…”

스스로에게 하는 듯한 나의 말에는 뭔지 모를 그리움 같은 것이 배어있었다.

마치 천국에 갔던 꿈을 꾼 것처럼… 그런 꿈을 꾸고는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기분을 언젠가 느껴본 것 같았다.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막연한 느낌일 뿐 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루시아를 바라보던 고개를 들어 사그러들어가는 보랏빛 황혼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던 형체가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눈가에는 물기가 가득해 있었다.

하지만, 흘려서는 안 된다.

다시는 나의 불행, 행복… 그 어떤 것을 위해서도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겠다고, 6개월 전에 약속이었다.

우수에 젖은 황혼의 영롱한 빛도 나를 흔들어 놓을 수는 없다.

눈에 맺힌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젖혀 약간 보랏빛을 띠고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조차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를 속삭였다.

“…그래도 꿈은… 꿈에서라도 행복하면 되잖아… 비록 깨어나서 죽을 만큼 허무해 하더라도… 행복했으면 되잖아…”

‘꿈은… 우리의 삶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일 뿐이니까… 괜히 상처받을 필요 없잖아… 환상 따위에…

그리고… 그리고…’

난 지금 행복하니까.

보랏빛 황혼이 지평선 너머로 그 자취를 감추었다.

 

 

 

 

 

 

 

 

 

 

 

 

 

 

 

 

 

 

 

 

 

 

 

 

 

 

 

 

 

 

 

 

 

 

 

 

 

 

 

 

 

 

 

 

 

 

 

 

Click the Picture to Play BGM

 

 

[ Exodus - 영광의 탈출 ]

 

 

그렇게 루시아와 손을 잡고 황혼이 진 곳을 향해 걷기를 10, 이미 집은 시야에 찰 정도로 가까워져있었다.

이제, 트리니티가 우릴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갑자기 다리를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나를 엄습해왔다.

다시는 이들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루시아가 부르는 소리도 무시하고는 끝없이 달렸다.

곧 어떤 여자가 집 앞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젠장오늘 내가 왜 이러는 거지한낱 기우일 뿐인데 자꾸

시덥지 않은 예감 따위에 휘둘려서 날뛰는 꼴이라니, 한심했다, 내 자신이.

나는 피식 웃으며 루시아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기위해 고개를 돌렸다.

분명 그 자리에는 루시아가 있어야 했다.

그래, 있어야만 했다.

어째서

텅 빈 공간에는 차가운 밤기운만 감돌고 있을 뿐, 마치 애당초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루시아는 없었다.

- 뚜벅 뚜벅

루시아가 갑자기 사라진 것 때문에 정신을 쏟아 부었던 나는 발소리가 너무나 또렷이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여자의 기척에 몸을 굳혔다.

분명 트리니티 일거야내가 돌아보면나를 안아줄 거라고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떨리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된 것 같았다.

트리니티?”

가엾을 정도로 떨리는 내 목소리에 여자는 냉소를 터트렸다.

푸후후. 트리니티?”

아니었다. 트리니티가, 이런 웃음 따위를 낼 리가 없었다.

그래, 분명 뭔가 잘못 되었다.

이런 것이 현실일 리가 없잖아.

분명 맛있는 스테이크가 저녁으로 나오고, 다같이 원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웃음을 나누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루시아가 사라졌고내 뒤에 있는 여자는 트리니티가 아니다

여자는 다시 한 번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몸을 돌려. 나를 봐.”

- 안 돼. 저 골목사이로 도망쳐. 절대 뒤 돌아보면 안 돼.

내면의 가 소리쳤다. 아니, 이번에는 그런 것 따위 경청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트리니티의 장난일 것이 분명했다.

날 골탕 먹이는 걸 좋아했으니까, 그럴 것이었다.

내 눈으로 그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나는 마른침을 한차례 삼키고 서서히 몸을 돌려 내 뒤에 서있던 여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는몸의 신경이 모두 마비된 것처럼, 거짓말처럼 몸이 멈추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안녕히가십시오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그보다, 이 여자는 전에 우연찮게 본 적이 있었다.

전에 루시아를 집에 바래다주었을 때, 길거리에서 나와 머리를 맞부딪힌, 그 여자였다.

너는왜 여기

마중 나왔습니다.”

힘겹게 떨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무슨 말을 하는 거지대체

여자는 여전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당신은 드림 리더입니다.”

대체 왜 나한테

드림 리더는, 꿈을 훔치는 사람입니다. 그건 드림 리더들끼리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알렌 크러스트, 드림 리더 협회장입니다.”

그래분명 그래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뭐가

헛소리하든 내뱉는 나의 말에도 여자의 안색에는 금하나 가지 않았다.

그 다음 들려온 육성은 그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나의 가슴에 꽂혀왔다.

드림 리더들은 꿈을 꾸지 못합니다. 꿈을 꾸는 것은, 당신이 말했다시피 꿈에서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나는 아까보다 힘없는 몸짓으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 였다.

나는 이제야 현실로 와서꿈을 이루었다고꿈속에서의 삶을이제야 현실로 만들어놓았는데이제야

이 모든 것은 꿈입니다. 그건 당신과 내가 부딪힐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그걸 자각하지 못한 것은 자각몽이라는 것을 꿔본 적이 없기 때문일 뿐입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을 이어가던 여자는 드물게 숨을 깊게 고르며 마지막 말을 이어갔다.

저쪽에, 출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나가십시오. 당신의 환상은 이제 끝입니다.”

아니야

다만 당신이 진짜 현실에서도 당신의 바람대로 꿈을 이루어나갈지는 모르겠군요. 당신이 한 모든 행동, 결국 내가 그렇게 짜놓은 것뿐이니.”

아니야

내 발은 점차 여자가 가리킨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자의 말을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닫혀있는 저 문을 열어, 보란 듯이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집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 문을 열지 마. 열면 안 돼. 저런 여자의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 돼.

아니. 이건 현실이야. 그러니까 저 문을 보란 듯이 열고는 단지 형편없는 공중화장실의 문이었을 뿐이라는 걸 보여줄 거니까. 걱정 마.’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다가온 문 앞에는 누군가 스프레이로 장난질을 한 듯, 'Exit'이라고 적혀있었다.

화장실이 출구라말도 안 되는 장난질을

나는 이미 힘 따위 다 빠져버린 손을 화장실문의 문고리위에 가져갔다.

어느새 여자가 다가와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더 내뱉었다.

여세요. 그리고는 검은 형상으로 몸을 던지세요. 그러면 현실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문고리 위에서 손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마치 내면의 누군가가 나의 이런 행동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휘젓고는 문고리를 오른쪽으로 강하게 꺾었다.

- 끼이익

그 안에는내가 그렇게도 바라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검은 형상에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트리며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꿈의 출구. 바로 그것이었다.

여자는 아까보다 더 다가와 내 옆에 바짝 붙어있었다.

그리고는 내 귀에 입을 대더니, 속삭였다.

들어가세요. 그리고는꿈 따위 꾸지 마세요.”

나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는 중얼거렸다.

이것은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현실은 그 꿈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마침내 한 조각까지 이루어낸 것, 그 모든 것이 다 꿈이었을 뿐이었다.

현실로는 찰나의 시간도 지나지 않은 하찮은 꿈

힘겹게 짜낸 목소리가 마치 시를 읊듯, 흘러나왔다.

우리가 가끔씩 꿈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려면현실로 돌아와야 돼그런데그걸 잘 아는데

애써 참았던 눈물이 떨어졌다.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가끔씩아주 가끔씩은꿈에서 깨는 것이 싫어그리고

내가 겪었던 모든 것이 단지 꿈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두려워너무나도

한 절의 시가 끝났다.

짧게 흐르던 눈물은 이미 그쳐있었다.

돌연 내 눈빛이 변했다.

이후 내가 한 행동은 나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에게 나직히 속삭이던 여자의 몸을 끌어당긴 뒤 검은 형상 속에 집어 던졌다.

여자의 형상은 검은 형상에 파묻혀 점점 사라져갔다.

나는 여자가 마지막에 속삭인 말을 그제야 알아듣고 사라져가는 여자의 형상을 바라봤다.

이미 여자의 형상 따위는 사라지고, 검은 형상만 그 주위를 서서히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이럴 것이라는 것. 처음부터 예상했었습니다. 그럼 꿈속에서 행복한 시간 보내십시오. 영원히

검은 형상은 점차 안내자가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다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바라던 바다. 꿈속에서영원히

 

다음날. 신문 1면을 장식한 것은 연예특보도, 이상기후도 아니었다. 단 한 줄의 굵은 글씨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드림 리더 협회장 알렌 크러스트, 코마 상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음. 이로서 343명의 드림 리더 피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