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Prologue ]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이미 살아있는 생명체의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잿빛 사막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두움에 가려 낯은 잘 볼 수 없었지만, 날렵한 실루엣을 따라 이어진 곡선은 충분히 남자의 몸과 복장을 짐작케 하였다.

상비약을 놓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카본인 듯 보이는 얇은 섬유로 코팅한 뉴트런 Neutron 방탄복, 팔 전체를 감싸는

묵빛 암가드 Arm Guard, 그리고 허리춤에 채워진 L자 은빛 권총은 이 자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민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단지 걷기만 하였다.

이따금 멀리서 터지는 섬광탄이 남자의 눈을 붉은색으로 수놓았다.

그때마다 남자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앞만 바라보고 조용히 걸을 뿐이었다.

- 사박 사박

한때는 수천 명이 넘는 사람이 살았을 듯한 넓은 일대였지만, 지금은 그 잔해가 풍파에 깎여 방대한 잿빛 사막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과거의 영광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곳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남자의 조용한 발놀림과 잿빛 모래가 부딪혀 내는 작은 마찰음 밖에 없었다.

-

남자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무심히 걷던 발을 멈추었다.

머리위로 섬광탄이 기괴한 소리를 내더니 곧 눈이 멀 듯 한 밝은 빛과 함께 터졌다.

그 불빛은 가로등이 되어 남자의 머리 아래로 내비쳤다.

그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들어 불빛의 진원지인 위를 바라보았다.

렇게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더없이 차가웠다.

전체적인 인상으로는 미남자 라고 평할 만 했지만,

감정이 메말라버린 듯한 딱딱한 표정과 기계 같은 몸놀림은 그의 인상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런 표정과는 반대로 남자의 눈은, 차갑지 않았다.

진한 칠흑의 눈동자는 바라보고만 있어도 빨려가 버릴 듯이 공허했다.

그렇게 멍하니 섬광탄의 밝은 불빛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움직여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았다.

살려줘

남자의 밑에는 검댕을 묻힌 청년이 주저앉아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남자는 청년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조용히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 찰칵

이것은 남자의 총소리가 아니었다.

구식권총이 부들부들 떨리는 청년의 손에 쥐어져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심장을 겨눈 그 총을 단지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당장요원들을 돌려보내안 그러면너는

-

- 타앙

아악!”

총소리와 타격음, 그리고 비명이 동시에 잿빛 사막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밑에 깔린 것은 남자가 아닌 청년이었다.

남자는 청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총이 들려있던 손을 가볍게 차서 날려버리고는 그대로 청년의 손을 밟아 으깨버렸다.

분명 총을 찰 때 충격으로 인해 발사된 총탄으로 인해 자신도 죽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남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였다.

마치 이미 맞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아아

조용한 신음소리가 배어나왔다.

남자가 밟고 있던 손은 이미 뼈가 다 조각나 흐물흐물해진 상태였다.

더 이상 고통을 줄 수 없었음에도 남자는 발을 치우지 않았다.

그리고는, 드디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그들은어디 있지

고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억양이 없는 듯한 목소리였다.

기계의 목소리에 가까운 차가운 남자의 말에 청년은 더 겁에 질려 벌벌 떨어대기만 하였다.

손에서는 고장난 댐처럼 피가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정도가 되면 고통 때문이라도 말을 할 수 없으리라.

남자는 대답을 듣지 못하였음에도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홀스터에서 은빛 총을 꺼내 장전 레버를 당겼다.

남자의 총은, 분명 청년의 구식권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뭔지 모르게 뿜어내는 분위기는

이 총의 위력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추측케 하였다.

오히려 외부 노출식 복좌 장치가 달린, 수백 년 전에 쓰였던 루거를 닮은 외관이 중후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청년은 이런 남자의 모습을 보고 밟히지 않았던 오른손을 날아간 총이 있는 곳으로 가져갔다.

다시 총을 손에 얻은 청년은 바로 총구를 남자에게 겨누며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

-

청년의 손에 들려있던 권총이 힘없이 떨어졌다.

너무나도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아

청년의 입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이번에도 신음소리의 주인은 남자가 아니라 청년이었다.

남자가 마치 서부시대의 총잡이처럼, 순식간에 총구를 돌려 청년의 심장에 정확히 총탄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이 순간에도 남자는 공허한 눈빛으로 청년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청년은 문득 저 남자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권총을 다루는 능력, 근력, 그리고 싸늘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일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공허한 눈빛.

아까 목숨을 걸고 도망가야 했었어야 하는 데, 하며 후회의 감정이 밀려왔다.

그랬다면 죽더라도 별다른 고통 없을 죽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그는 심장에 작은 구멍이 난 채로,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하이닉스

이 말을 막으로 힘겹게 들려있던 청년의 머리가 뒤로 쓰러졌다.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심장에 구멍이 난 채로 1분 이상 버틸 수 있는 생물은 흔치 않으니.

돌연 남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공허한 것은 전과 같았지만, 조금의 감정이 드러난 것 같았다.

측은함, 죄책감 따위가 아닌 의무감이었다.

그는 몸을 살짝 구부려 주인은 죽었지만 여전 뛰고는 있는 심장을 바라보았다.

곧 멈출 것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바쁘게 피를 외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는 아까 묻은 듯한 피 얼룩이 진손을 심장에 난 구멍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나직이 읊었다.

여기 가련한 영혼이 근원인 재로 돌아가고 있사옵니다.”

그는 숨을 고르려는 듯 잠시 말을 끊고 다시 기도문을 읊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망자를 위한 기도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영혼을 찢고 또 찢어 타락에 젖게 하소서. 생명의 굴레를 벗기소서. 그것이 죄악이 되어 다시 이 땅에 씨를 뿌릴 것이니

차라리 저주라 할 만한 기도문을 읊은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이미 이런 것은 이골이 나게 겪은 듯 보였다.

그는 발을 자신이 걸어온 쪽으로 움직였다.

다시 또 잿빛 사막에 조용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3분가량 지났을까, 소형 비행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크롬으로 도금된 듯 어두운 곳에서도 비행정은 자신의 형상을 밝게 발하고 있었다.

비행정은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듯 남자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 남자가 비행정의 주인인 듯싶었다.

- 위이잉

벌래가 날갯짓을 하는 듯 미세한 진동음이 울리며 인비지블 티타늄으로 제조된 차폐막이 열렸다.

중심제어 및 항로설정은 모두 내장 슈퍼컴퓨터가 처리를 하는지 조종석과 중력장 벨트, 기체 제어기만 소형 비행정 내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장전 레버가 이 비행정이 전투용으로 제작된 것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남자는 액체 젤을 가득 넣은 의자에 몸을 던지고는 좌석 왼편에 위치한 적색 버튼을 눌러 차폐막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의자가 남자의 탄탄한 실루엣을 따라 응고되어 자세를 고정시킨 뒤

중력장 벨트가 의자와 몸이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놓았다.

비행 준비를 마치자, 일말의 소음도 없이 비행정이 위로 떠올랐다.

어찌 보면 VTOL방식의 전투기라 할 만한 이륙방식이지만, 그 근본을 전혀 달랐다.

VTOL방식은 벌써 100년도 더 전에 쓰였던 구식제트엔진을 동력으로 한 것이고

이 비행정은 기체 내부에 위치한 반중력장 생성 장치로 떠오르는것이니.

어느새 기체는 상공 500m 정도까지 고도를 상승시켰다.

500m가 적정 고도인지 슈퍼컴퓨터는 그제야 전진 명령을 내렸다.

남자는 투명한 차폐막을 통해 잿빛 사막을 힐끗 바라 본 뒤 고개를 의자 뒤로 젖히었다.

그도 피곤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눈을 붙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조용히 손을 홀스터에 가져가 은빛 총을 꺼낼 뿐이었다.

붉은색 달, 레테아르의 은은한 빛이 기체 내부로 스며들어왔다.

은빛 총은 그 빛에 반사되어 살짝 붉은 빛을 띠었다.

잘 관리해온 듯 크롬제 권총의 외관에는 손상이 거의 없었다.

가끔 보이는 선홍빛 얼룩과 긁힌 자국들은 이 총이 실전에서 많이 쓰였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자신의 총을 훑어보던 남자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나직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과연 아까 청년의 피가 묻었던 것인지 그의 은빛 권총에 핏자국이 곳곳에 묻어있었다.

기지로 귀환하면 수리를 해주어야겠군.’

얇고 긴 총신, 엠보싱처리가 된 그립, 외부 노출식 복좌 장치

이제는 몇 백 년은 지난 과거의 역사, 세계대전이 한창일 즈음에 쓰였던 독일 제식권총 루거를 닮은 외관은

충분히 자신의 집에 전시해 둘 만한 장식용 권총쯤으로는 괜찮겠지만 확실히 화력으로는

현재 쓰이는 N.P.I.R 머신건이나 DX볼트건, 심지어는 소닉건 보다도 약하다.

그럼에도 가지고 다니면 꾸준히 관리를 해주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남자의 애총이었던 듯싶었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제는 줘도 갖지 않을 구식권총을 사용할 일은 없으리라.

남자가 권총을 다시 홀스터에 넣으려고 하는 순간, 기체 후미부에 달린 스피커가 소리를 내었다.

- 요원은 응답하라. 이름과 작전명을 대지 않을 시 발포 하겠다.

장거리 통신인 듯싶었지만, 음질은 노이즈하나 들리지 않고 깔끔했다.

아무리 옛 대비 진보한 과학 기술을 보유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반100km안에 있는 모든 물체를 감지해 내는 비행정 자체 레이더에

잡히지 않을 만큼 멀리 있는 곳에서 보낸 통신내용이 이리 깔끔할 정도면 분명 싸구려 장비는 아니었다.

홀스터에 권총을 다시 집어넣은 남자는 통신 내용에 일말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어투로 응답했다.

퍼펙터스 요원 에르카 밀란이다. 작전내용은 D890B123 로케이션에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하이닉스 가담 무리 척살.”

이 대답에 스피커는 몇 초간 삐이 하며 한차례 기계음을 내뱉더니 이내 재응답을 하였다.

신상정보 매칭 완료. 출입을 허가한다.”

출입허가명령이 떨어지자 자신을 에르카 밀란이라고 밝힌 남자는, 드물게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공허한 눈동자를 천천히 감았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앞으로도 300~500km가 남은 기지까지 가기 전까지 몇 십분은 쉴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