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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이든 때로는 조연이 주연보다 인상 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연보다 오히려 조연이 더 오래 머릿속에 남기도 하죠. 저한테는 게임 <모던 워페어>에 나오는 맥밀란 대위가 그런 조연 중 하나입니다. 작품 속에서 맥밀란 대위의 위치는 대략 스승을 가르친 스승 정도 됩니다. 주인공인 소프 맥타비쉬 병장은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상사인 프라이스 대위를 파트너이자 선배로 여기고 행동합니다. 이 프라이스 대위와 함께 과거에 움직였던 인물이 맥밀란 대위. 게임에선 All Ghillied UpOne Shot, One Kill 미션에서 등장합니다. 미션 이름부터가 벌써 멋스럽지 않나요. 우크라이나 프리비야트에서 핵 거래 상인을 저격하는 임무로써 맥밀란과 프라이스는 적들이 가득한 사지에서 온갖 위험을 헤치고 상인을 저격한 후 빠져 나와야 합니다.

 

첫 등장이 참으로 인상 깊은데,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풀밭에서 길리 슈트를 입고 불쑥 일어섭니다. 이건 진짜 프레데터가 따로 없군요. 게임이긴 하지만, 잠복 연출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로도 종종 풀밭에서 갑자기 나타나 알면서도 깜짝 놀라게 합니다. 미션은 프라이스 중위의 시점으로 맥밀란의 지시를 받아가며 이어집니다. 노련한 고참답게 맥밀란이 앞장 서서 방향을 잡고, 전술을 짜고, 작전을 지시하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프로 중의 프로. SAS 소속인데, 특히, 스코틀랜드 출신이라서 발성이 꽤 멋집니다. 톡톡 튀는 스코틀랜드 억양과 은밀한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는데, 상당히 매력적이죠. 영국 악센트야 독특하기로 이름이 높지만, 무전으로, 그것도 낮게 깐 목소리로 들으니 기묘하군요. 길리 슈트를 온통 뒤집어쓰고 얼굴에 마스크까지 감춰서 어떻게 생겼는지 알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점이 오히려 상상력을 부추겨 인물의 개성을 한껏 높입니다. 신비주의 컨셉으로 밀고 나가네요.

 

, 이게 인간이 움직이는 건지, 무슨 잡초 더미가 움직이는 건지 구분은 안 가지만. 코스츔 플레이 재현은 쉽지 않을까요.

 

무장은 M21 저격소총. 자신과 마찬가지로 위장용 도구를 둘둘 말아 언뜻 보면 총으로 안 보입니다. 다른 무장도 있을 텐데, 미션 내내 이거 하나만 씁니다. 두 명으로 이루어진 저격수 분대의 지휘관으로 당연히 저격 실력은 출중합니다. 물론 게임 진행상 프라이스 중위(플레이어)가 중요한 건 다 해먹긴 합니다만. 그래도 둘이서 번갈아 가며 정찰병을 처치하거나 호흡을 맞춰 적들을 쓰러뜨리거나 때로 혼자 앞서 나가 목을 따는 등 전투적인 면모도 많이 보입니다. 허나 전투보다 임무 자체가 저격이기에 위장/은폐를 무엇보다 중요시합니다. 만일 플레이어가 돌격소총으로 싸우거나 지나치게 많은 적을 죽인다면 위험하다며 잔소리도 하죠. 덕분에 대사 중 상당수가 포복, 은폐, 대기, 정지, 정찰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전차와 보병 부대가 바싹 지나가는데도 풀숲에서 꼼짝도 않고, Nice and Slow.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감탄사가 절로 나오네요. 오오, 위장의 달인.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명대사는 Stay in the shadows. 은폐에 살고 엄폐에 죽습니다. (발음도 멋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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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전문가 스타일이지만, 가끔 재미있는 구석도 있습니다. 프라이스 중위가 시킨 대로 안 할 때 비꼰다든가, 지역을 통과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고, 잔소리도 듣다 보면 좀 찔러대는 편이고. 말수가 그리 많지 않고, 주연에서 벗어난 인물이기 때문에 대화를 하는 장면도 없긴 합니다만. 프로답게 할 말만 딱딱 하기에 오히려 더 멋있네요. 마지막엔 저격 임무를 완수하고 탈출하는데, 하인드 헬기와 교전하다 깔리는 바람에 다리를 다칩니다. 이후로는 프라이스 중위가 들쳐 업고서 뛰느라 민폐를 좀 끼치기도. 그래도 워낙 실력이 출중해 대기 중인 상태에서도 끝없이 몰려오는 병력을 모두 처치합니다. 일당백으로 저격무쌍을 찍는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마침내 델타 부대 항공기에 탑승해 무사히 빠져나갑니다. 지원 요청을 할 때 호출명을 들어보니 알파 식스인 듯.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상투적인 저격수. 그런데 흔히 이런 유형의 총잡이들은 온갖 폼을 잡고 멋 부리기에만 바쁘거나 인간적으로 보인답시고 괜히 고민이나 하기 급급하죠. 제 할 일만 우직하게 해내는 맥밀란 대위가 오히려 믿음직합니다. 프로 정신으로 중무장했죠. 팍팍 튀는 억양으로 할 말만 한다거나 잡초 더미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길리 슈트를 입고 뛴다든가 하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개그?) 아쉽게도 조연인 만큼 저 두 미션을 끝으로 길리 슈트를 뒤집어 쓴 이 인물은 더 볼 수가 없습니다. 1편은 물론이고 2편에도 안 나와요. 그러니 우크라이나에서 빠져 나온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만한 부상을 당했으니 전선에 다시 투입되긴 어려울 테고, 아무래도 제대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혹은 기적처럼 치료를 해서 그 이후로도 계속 싸웠다거나. 좋게 말하자면 열린 결말이고, 나쁘게 보자면 제작진이 신경을 안 쓰는 거고.

 

희한하게 팬들은 맥밀란 대위가 먼치킨이라고 생각했는지 척 노리스 개그를 하더군요. ‘맥밀란 대위는 헬기와 부딪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헬기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뭐, 이런 식. 프로 저격수로 인상 깊은 활약을 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척 노리스처럼 먼치킨으로 굴진 않았건만 왜 그러는 건지…. 거기다 미션 중반에 들개 떼가 우르르 몰려나와 덮칠 때 손도 못 쓰고 당하기까지 하죠. (개한테 당하는 건 거의 시리즈 전통인 듯하니 제아무리 맥밀란 대위라도 어쩔 수 없겠지만, 희한하게 오직 개떼한테만 손을 못 씁니다.) 아무튼 이 인물이 미션 두 개에만 달랑 나왔음에도 인기가 많다는 반증이겠습니다.

 

호불호야 갈리겠지만, 개성 만점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듯. 걸어 다니는 잡초 무더기가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말하는 게 신기하긴 신기하니까.

 

※ <모던 워페어>는 캐쥬얼하고 롤러 코스터와 비슷한 작품이라고들 하던데…. 아마 맥밀란 대위처럼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서 그냥 내다버리는 행위 때문에 그런 비판을 드는 것 같습니다. 모 회사의 다른 게임들 같았으면 여기다 또 온갖 설정이랑 뒷이야기를 갖다 붙였을 텐데. 뭐, 설정이 주렁주렁 달려오는 게 항상 좋다고만 볼 수는 없지만요. 하지만 맥밀란 대위는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한두 마디 말해줄 법도 한데요. 연출 말고 시나리오는 기대를 안 하는 게 좋은 게임이란 뉘앙스의 비평도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