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노 유키노부의 <블루홀>은 공룡을 소재로 한 비경탐험물입니다. 남아프리카 해저동굴에서 실러캔스를 잡은 것으로 시작하는 이 만화는 이 물고기가 사실은 과거 선사시대에서 왔다는 점에 주목하죠. 그리고 정체 모를 괴물이 출현해 끔찍한 참사가 벌어지고, 화석연구원들은 실러캔스 조사를 왔다가 참사의 원인을 밝혀내기로 합니다. 알고 보니 바다 밑에 있는 동굴은 다른 바다로 이어지고, 그게 마침 중생대의 바다였더라 하는 이야기. 허나 연구원 규모가 작았기에 이를 비밀로 둔 채 대원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더 큰 탐사대를 꾸려 공룡 시대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해 돌아오는데, 사실 이 탐사대의 지휘자는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공룡 생태를 밝히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전지구적으로 원대한 뜻을 품었죠. 허나 그 때문에 세상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합니다.

 

예전에 해적판으로도 나왔다고 하는 작품인데, 저는 이번에 정식 번역본으로 처음 보는 거네요. 하드 SF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이며, <블루홀>은 이후 <블루월드>로 이어지는 시발점이라고도 합니다. 음, 그런데 의외로 화제가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번역본으로 이만한 공룡 만화 보기가 쉽지 않은데, 작품성에 비해 입소문이 좀 적은 기분이네요. 아니면 요즘 사람들은 공룡에 관한 관심이 많이 떨어진 것인지도. 2005년에 <킹콩>이 개봉했을 때도 공룡 열풍이 분다거나 하진 않았죠. 공룡이 주인공은 아니었으나 주연급이긴 했는데도요. 돌이켜보면, 90년대 중반에 <쥬라기 공원>이 개봉했을 때만큼 공룡이 화제가 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벨로시랩터를 알지만, 공룡을 소재로 했다는 게 확 흥미를 끄는 시대는 아니라고 할까나. 좀 섭섭하기도 하네요.

 

 

이후부터는 약간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 언뜻 보면 공룡 시대를 배경으로 한 뻔한 비경탐험으로 보이지만, 작품의 핵심은 전혀 다른 곳에서 튀어나옵니다. 해저동굴을 이용해 현재 지구의 오염을 정화하겠다는 것. 따라서 이 만화는 공룡을 소재로 놓긴 하지만, 오염에 찌든 세계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도 비중이 큽니다. 한쪽엔 공룡, 다른 한쪽엔 환경 문제가 있다고 할까요. 오히려 공룡에 관한 묘사는 예전부터 이어오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공룡에 관한 색다른 해석을 기대했다면 약간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여전히 머리 크고 난폭한 육식공룡이고, 트리세라톱스는 전차 같은 박진감을 보여주며, 마이아사우러는 무리 지어 새끼를 보살피는 따뜻함이 있습니다. 약삭빠른 벨로시랩터 역시 다른 작품에서의 명성을 이어갑니다. 스피노사우루스나 카르노타우루스 등을 보여준 여타 작품을 생각하면 약간 아쉽기도 하죠.

 

• 하지만 공룡에서 눈을 돌려 바다를 보면 또 달라집니다. 해저동굴이 연결점이라는 아이디어답게 이 작품의 진짜 크리쳐들은 수장룡입니다. 비경탐험이 대개는 육지를 여행하는 것이기에 바다 파충류들은 출현 기회를 뺏길 때가 많지만, 이 작품에선 얼굴 마담입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괴물도 사실은 수장룡이고, 중반부에 위기를 장식하는 것도 그렇고, 마지막까지 주연급의 자리를 놓치지 않더군요. 탐사대가 내내 해안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공룡들만큼 코빼기라도 내밀 기회가 많은 편. 수장룡만이 아니라 물에서 살던 고대의 동물들은 조금씩이라도 나온다고 보면 좋습니다.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에서도 그러더니, 작가는 바다 괴물에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해저 세계로 현대와 과거가 만난다는 발상은 저 작품에서도 한 번 응용한 바가 있고요. 허구한 날 밀림만 헤쳐나가는 비경탐험이 질렸다면 이 작품은 선사시대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 작중에서 제시하는 환경문제 해법은 좀 이해가 안 가는 게… 과연 그렇게 해서 현대와 과거의 환경을 교차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지구의 규모를 생각하면 고작 해저동굴 몇 개에 그런 장비를 설치한다고 바뀌지 않을 텐데요. 오랜 세월이 흐르면 효과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사이에 정화하는 것보다 오염시키는 면적이 더 클 겁니다. 여러 가지로 다른 현대와 과거 환경을 함부로 연결한다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고. 정작 오염 지역은 멀찍이 떨어졌는데, 해저동굴에서 그 곳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모를 일이고요. 가령, 아무리 새로운 세계가 옆에 있다고 해도 대기를 복구하거나 오염 지역의 방사능을 씻을 수는 없잖아요. 거기다 다른 해저동굴들이 모두 같은 백악기 말기로 통하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몰고 오지 않을까요. 이 블루홀 계획’이란 게 작품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건데, 제가 보기엔 별 효력이 없을 것 같아 몰입감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해를 못 하는 걸까요.

 

• 인간과 자연을 별개로 보는 시각이 미약하게 존재합니다. 자연이 인간보다 아름답다니, 인간은 자연을 해할 권리가 없다느니 하는 대사가 좀 있네요.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의 목적은 당연히 사람 잘 사는 세상인데, 왜 저런 대사를 주인공에게 시키는 건지. 다행히도 작가가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거기서 멈춥니다. 인간이 지구에 기생한다, 자연에게 인간은 바이러스와 같다 등등 아이들이 폼 잡으면서 할 법한 대사는 안 나오네요. 주인공 이름이 가이아인 건 작품 주제를 부각시킨 거니까 이해하겠는데, 중반에 자연이 어쩐지 말을 거는 듯한 묘사는 아리송했습니다. 설득력 있는 상상 과학을 펼치다가 갑자기 그런 식으로 전개하니까 SF에 난데없이 판타지가 끼어드는 느낌이랄까요. SF와 판타지의 조화를 그린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 어쩐지 가이아 이론을 진짜로 적용시킨 기분이 들었습니다. 결국 주인공 혼자 착각했다는 식으로 처리해놓아서 판타지로 흘러가진 않더군요.

 

• 세상이 멸망할 거니까 공룡을 구해서 현실로 데려온다는 계획도 고개를 갸웃할 부분. 어차피 백악기 말에 멸종하는 동물을 현실로 데려오는 게 과연 구출일지? 태고 적의 동물을 현대로 데려오는 게 오히려 생태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까요. 이건 <쥬라기 공원>, <멸종> 같은 작품에서도 한 번쯤 논하는 문제이긴 합니다. 아마 가이아 일행은 공룡들을 전부 현대로 옮겨 생태 보호 구역에 데려다 놓을 생각이었을 겁니다. (설마 이대로 야생에 풀어놓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러다가 빠져나가는 놈들이 생기면 현재 생태계는 큰 영향을 받겠지요. 그리고 살아남은 공룡들이 번식을 한다 하더라도 현대 생태계와 섞이지는 못할 테고. 공룡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식물이나 곤충은 어쩔 건지. 고대 식물이 만일 현대 자연계에서 번성했다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쩌려고요. 차라리 순수하게 연구 목적이라고 하면 좋았을 것을 정의감에 넘치는 용사마냥 구출 운운한 건 실수였다고 봅니다.

 

• 작중 설정을 따지자면, 만화에 나오는 중생대는 엄연히 다른 행성입니다. 즉, 지구에 잔존한 태고 시대가 아니라 완전히 딴 세상. 따라서 공룡 행성이라 할 법한데, 일부 구역도 아니고 별 하나를 완전히 공룡 시대로 뒤덮은 발상이 참 좋았습니다. 보통 비경탐험이라고 하면 격리된 지역이나 땅속을 파고 들어가죠. 혹은 공룡을 보러 시간여행을 하기도 하고, 유전공학으로 멸종한 짐승을 되살리기도 합니다. 이 만화는 처음에 지저 여행을 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나중에 가면 이것이 서로 별개의 세계라는 점을 강조하기에 꽤 인상 깊었습니다. 거기다 ‘공룡 행성’이란 어감은 왠지 진화한 공룡들이 우주선 타고 다니는 느낌을 주는데, 여긴 순수한 중생대잖아요. 음, 100% 순수한 건 아니지만요. 평행세계인지 뭔지 어떻게 두 행성이 이어지는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만. 발상 자체가 좋아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도 같습니다.

 

• 공룡 멸종에 관한 새로운 가설을 설명하는 것도 같지만, 사실 설명한 건 없습니다. 이 시대가 멸종하는 방식은 현재 지구의 과거와는 전혀 다르니까요. 처음에는 운석 충돌설을 지지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 가서는 그게 또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 그 운석이 현재 지구의 과거에 충돌했던 것과 똑같은 거라면, 전지구적인 멸종을 불러오기엔 충격이 미약할 텐데요. 도대체 현재 지구의 중생대는 어떻게 끝나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이것까지 굳이 이 작품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작가의 발상이 엄청난 만큼 설명을 못하고 넘어간 부분도 조금 있는 편이에요. 물론 작품 감상에 방해되거나 이야기에 흠을 낼 정도로 크진 않습니다. 만화를 서너 번 다시 읽어보면 찾을 수 있는 작은 오류 정도. 그것도 작가가 설명을 안 한 것일 뿐 사실 오류도 아니고요.

 

• 두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작품 내내 진행하던 여러 계획과 실수라고 할만한 행위들이 뒤섞여 세상을 바꾼다고 할까요. 백악기 멸망까지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개도 일품이고, 설정도 나름 하드하기에 SF 특유의 뒤집기로 통쾌하게 끝을 맺습니다. 공룡 멸종을 새로운 시각으로 본다고 할까요. 주인공들이 끝까지 공룡을 구한답시고 허둥대거나 악당들이 막판까지 궁상 떠는 부분은 약간 간지럽기도 했습니다만, 사소한 거니까요. 그런데 만일 이런 식으로 결말이 나면, 앞으로도 인간들은 밥 먹듯이 해저동굴을 드나들 테고, 블루홀 계획이 지속적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전혀 해피 엔딩이 아니잖아요. 작가가 어떤 결말을 원한 건지 파악이 안 되지만, 일단 전개 자체만 놓고 보면 이후에 벌어질 엄청난 디스토피아가….

 

• 위에서도 언급한 구출이 사실 구출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마지막 장면이 꽤나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아니, 같은 지구에서 외래종도 함부로 못 옮기게 하는 이 마당에 그렇게 많은 동물을 그 지경으로. 이후 뒤바뀔 생태계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가이아 일행이 삽질했다는 결론 밖에 안 나오기도 하고. 이건 세상이 바뀌든 말든 자기 좋아하는 것만 지키겠다는 사상이랑 똑같잖아요. 보는 내내, 그리고 책장을 덮고 나서도 주인공들을 동조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 헛갈립니다. 가이아가 아무리 애타는 목소리로 공룡을 지키자고 해도 결국 드는 생각은 어차피 호크나 가이아나 다를 거 없는 군상이라는 것. 호크는 현대 문제를 해결해 자기 이름을 날리려는 거고, 가이아는 그저 공룡이 좋으니까 지킨다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자기 바람에 상관없이 두 명 다 현대 생태계를 바꿔놓을 건 뻔하거든요. 그런데 작중에서 워낙 가이아 일행을 긍정적으로 그리기 때문에 인물들의 행동과 작품 주제가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결과가 발생.

 

• 작가는 가이아와 호크를 모두 비판하려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가이아를 깔만한 분위기가 도저히 아니라서.)

 

• 그림체는 괜찮습니다. 독특하거나 섬세한 풍미를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설정에 걸맞는 장대함을 보여주는 데 일가견이 있더군요. 큼지막한 잠수정부터 거대한 해저까지 무리 없이 표현하기도 하고.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에서도 그러더니, 작가가 잠수함을 참 좋아하는 듯합니다. 어차피 바다를 주제로 하니까 잠수함이 나올 수밖에 없지만요. 설정도, 이야기 전개도, 그림도 통이 참 큽니다. 아물러 가이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수영복으로 나오는데 나름대로 서비스 장면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어차피 물가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긴 하지만, 남들 다 옷 입고 다니는데 혼자만 수영복…. (워낙 애먼 짓을 많이 해놔서 별로 예뻐 보이진 않습니다. 어흑.) 거기다 왜 이렇게 잘 찢어지는 건지. 흑인 여성이 주인공이라 신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컬러 그림으로 보면, 피부색도 노랗고, 눈도 파랗고 별로 흑인다운 구석이 없기도?

 

• 안 좋은 소리를 좀 하긴 했지만, 비경탐험으로 시작해 공룡 멸종을 가지고 두 행성을 바꿔놓는 필력에는 혀를 내둘렀습니다. 저 같은 경우엔 국내에 번역해 들어오는 공룡 작품이 별로 없는지라 <멸종>과 비교하면서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공룡과 상상 과학의 조합을 원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학자 몇 명이 공룡들이나 관찰하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갈수록 무대를 넓혀 현재와 과거가 서로 융합하게 만드는 솜씨가 놀랍습니다. 모사사우루스가 잠수함과 마주하는 장면을 그렇게 흔히 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작가의 시각이 어떠하든 간에 여러 생각을 하게끔 하는 만화입니다.

 

※ 그리고 이런 작품을 계속 기획하고 출간하는 애니북스 출판사에게 오래도록 복이 있기를. 후속작에 해당하는 <블루월드>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