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과 마법 판타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 1위는 뭐니뭐니해도 힐링 포션. 그러니까 치유 물약입니다. 각 작품마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대개 병에 액체가 들었고, 그걸 마시면 상처가 낫는다는 식입니다. 제조 방법도 다양해 재생 능력이 있는 트롤의 혈액을 쓴다든가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축복을 내린다든가 약초를 섞어 우린다든가 하는 식이죠. 문자 그대로 만병통치약이라서 나이와 성별, 인종 심지어 종족을 불문하고 잘 듣는 명약입니다.

 

희한한 건 이걸 마시는 그 어떤 주인공도 치유 물약이 무슨 맛인지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시를 들어보죠. 대개 판타지 모험물에서 주인공은 모험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초보 전사일 겁니다. 뭐, 개중에는 전설적인 검사나 대마법사도 있긴 하지만, 이런 부류의 이야기는 초보 전사가 마음을 두근거리며 고향을 떠나는 게 다반사죠. 주인공 전사는 근처 숲 속을 어슬렁거리던 고블린과 몇 번 싸우다 부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치유 물약을 마시고 상처가 씻은 듯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놈의 주인공이 상처가 낫다고 신기해하기만 할 뿐 물약이 무슨 맛인지 말을 안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음식에 호기심을 보이고,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면 그 맛을 기억에 남기려고 합니다. 깊게 파고들자면, 이 음식이 다음 번에 먹어도 괜찮은지, 생존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판별하기 위해서죠. 아무튼 간에 대부분은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면 목구멍으로 삼키고 난 다음에 본능적으로 소감을 한마디 정도 내뱉기 마련입니다. 맛있다거나 쓰다거나 아무 맛도 안 난다거나 등등. 그런데 모험물의 주인공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치유 물약을 마시는 건데도, 그것도 마법적인 식품인데도 마시고 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저런 장면을 보고서 치유 물약이 무미/무취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만. 어쩌면 물약에 마취 성분이 있어서 맛을 못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는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낫는 와중에도 세균을 죽이거나 죽었던 세포가 자라나거나 새로운 피부가 자라면서 생긴 암을 제거하거나 등등의 과정을 거치죠. 그 속도가 빠르든 늦든 간에요. 치유 물약은 그런 고통도 막아줘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마취 성분을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가 0.5초만에 낫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복용자가 마취 상태에 빠진다는 겁니다. 어느 부위가 다치든 무조건 치료해야 하므로 부분 마취가 아닌 전신 마취를 시킬 수밖에 없고, 결국 혀도 굳어서 목구멍으로 뭐가 넘어갔는지 모르는 거죠.

 

, 여하튼 무미라서 그렇든, 마취가 되어서 그렇든, 주인공은 시식 소감에 별로 관대하지 않습니다. 하긴 허구한 날 던전에서 뒹굴며 비상식량만 먹어대다 보니까 입맛이 둔감해진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맛있는 식사가 병사들의 사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보면 주인공 일행은 꽤 불쌍하죠. 맛이라곤 기대할 수 없는 비상식량과 무슨 맛인지도 모를 치유 물약만 믿고 강행군을 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