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시 주위를 둘러본 김진.
이내 자신의 집인 걸 깨닫곤 캡슐 내부에 점멸하는 버튼을 눌렀다.
LCL액체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산소호흡기를 떼고 메가FX에서 나온 김진이 기지개를 쫙 켰다.
남아있던 액체가 아지랑이처럼 공중으로 기화되어 사라졌다.

“상쾌하다.”

막 샤워라도 한 듯 뽀송뽀송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본래 BM 시리즈였다면 플레이 직후 땀으로 흠뻑 적셔있었을 상황.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사용자에게 불쾌함을 강요하더니만, 메가 FX는 비싼 만큼 제값을 하는지 오히려 사용 직후를 더욱 신경 쓴 모습이었다.
사용자를 배려했음이 확실히 느껴지는 기기.

“국산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제값을 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이 사회에서, 외국산이라 함은 오히려 확실한 보증수표가 되었다.
만약 이것이 국산에서 만들어졌다면…….

“상상도 싫다.”

분명 대부분의 개발자금이 리베이트 명목으로 자취를 감추고 코딱지만 한 운영비로 BM시리즈에서 약간만 개선된 짝퉁을 만들어 특허청에 등록하겠지.
김진은 진저리치며 몸을 떨었다.

“자칫 감전사할지도 몰라.”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음이 무척이나 슬펐다.
김진은 공복을 해결하기 위해 X-5를 꿀떡 삼키고 동영상 중개 사이트에 접속하였다.
어차피 엔터즈 게임단에서 제공한다는 카드가 바로 올 리는 없을 테니 목돈마련으로 중개 사이트에 올려놓은 동영상 값을 먼저 정산하기 위해서였다.

각종 공략집과 공략 영상이 서로 순위를 매기며 엎치락뒤치락 다투는 사이트.
플레이 고고.
그중 프로젝트W 항목을 확인한 김진이 내심 미소를 지었다.
동영상 랭크에서 자신의 동영상이 금빛왕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다소 한물간 게임이라고는 하나, 전 세계적으로는 꾸준한 동접자수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가상현실계에서는 여전히 무시 못 할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프로젝트W였다.

1위 조회수가 기본적으로 3천만은 가뿐히 뛰어넘는 게임이었으니 1000 조회수당 3달러라고 치면 9만 달러는 그저 꽁으로 얻는 셈이었다.
물론 이것저것 세금을 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약 8만 달러 언저리로 수중에 떨어지지만 말이다.
그렇다곤 해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금액.
이것 또한 중요한 수입원인 김진에겐 게임 플레이 자체가 직업이라 할 수 있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정산하기 버튼을 누른 김진이 수백만 건에 이르는 리플 목록들을 보다가 유난히 눈에 띄는 리플을 발견하였다.
그건 바로 자신과 빈 헬름을 비교하는 리플들이었다.

Head shot : 미친. 이게 가능해? 단신으로 레이드라니?
└我受苦 : 마스터 진이라면 가능하지. 그는 세계 최고 파일럿이니까.
└Milchstraße : 마이스터 진이 탑이라고? 농담이 심하네. 차라리 영국음식이 세계에서 제일 맛있다고 하지그래?
└Fish and Chips : 영국음식이 얼마나 맛있는데!
└つらら : 그거 참 전형적인 영국 농담이로군. 누가 뭐래도 최고 파일럿은 블루 블러드인 빈 헬름이야. 그는 가장 먼저 A급 파일럿을 달성했다고.
└我受苦 : 그 고릿짝 같은 푸른 혈통이 대수야? 그건 어디까지나 현질로 이뤄낸 성과라고!
└Milchstraße : 자금력도 실력인 법이야. 결과적으로 빈 헬름은 에어스트 파일럿이 되었고, 마이스터 진은 순위권에도 없는 19번째 파일럿이 되었지.
└쌍둥이자리 : 나도 6등급 기체만 있었으면 1등 했을 듯.
└つらら : 그럼 네가 한번 해보지 그러셔?
└쌍둥이자리 : 네가 줄 것임? 준다면 리틀보이나 팻맨을 부탁해.
└つらら : 이 개새끼가! 죽고 싶냐!
└Head shot : 워- 워. 진정하라고 친구들.
└Milchstraße : 미국인인 네가 말하니까 더 웃기네.
└我受苦 :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무리 6등급 기체라도 마스터 진처럼 혼자서 클리어는 무리야. 이건 빈 헬름도 못할 것이라 확실해. 솔직히 빈 헬름이 A급 입무를 달성한 것도 파티플레이로 이룬 거였잖아?
└Milchstraße : 팀플게임에서 협력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왜 그걸 치졸하다고 여기는 거지? 그리고 빈 헬름은 그것 말고도 이룬 업적이 많아.
└Head shot : 소문엔 빈 헬름이 7등급 기체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러면 최초 7티어 아닌가? 그걸로 레이드도 가능할 듯.
└つらら : 나도 그 이야기 들었어. 하지만 재료가 부족하다고 하던걸? 높은 등급의 크리스탈 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Milchstraße : 이번 달 안으로 완성해서 빈 헬름이 일인 레이드한다에 내 가운대를 걸지.
└쌍둥이자리 : 그딴 거 내걸어도 아무도 안 받아 갈 텐데?
└Fish and Chips : 나에게 줘! 그걸로 영국 음식 만들면 좋을 듯!
└쌍둥이자리 : 상한 고추 튀김??
└つらら : 끔찍하네.
└我受苦 : 상상만 해도 소름 돋아.
└Milchstraße : 내 소중이로 그딴 거 만들지 마!
└Head shot : 오! 이번만큼은 세계인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군. 나도 동의해. 영국음식은 최악이지. 재료가 삭은 고추라면 더더욱.
└Milchstraße : 대체 누가 삭았다는거야!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신상품이라고!
└Head shot : 그렇다면 더욱 안타깝군.
└쌍둥이자리 : 아멘.

리플을 본 김진이 피식 웃었다.
인터넷상에서 매번 일어나는 흔하디흔한 기승전병의 흐름.
그러나 단순히 의미 없는 문답은 아니었다.
빈 헬름이 다음 티어의 기체를 만든다는 정보는 큰 수확이었으니까.

“그래서 조용했던 건가.”

역시 프로젝트W의 이슈메이커라 할 만한 행보였다.
7단계 기체라니. 게임 내에서 최강의 파일럿이라 불리는 김진조차도 쉬이 도전치 못할 시도였다.
사실상 현 파일럿들이 클리어 할 수 있는 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의 몬스터가 5등급 자일리언 카잣두르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 녀석을 100번 넘게 잡아야 할 정도로 많은 양의 사이오닉 크리스탈이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그것도 단순계산일 뿐이지, 5등급 사이오닉을 100개 모은다고 완전한 7등급 크리스탈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이오닉을 모아 크리스탈로 변환할 때에 소멸하는 에너지 손실률도 만만찮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기타 특수 재료까지 합산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일.

100만 달러는 우습게 볼 정도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었다.
환산하며 무려 12억이나 되는 돈.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한평생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 돈을 이 빈 헬름이란 작자는 단순히 최초란 타이틀을 갖기 위해서 무식하게 때려 박고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자금력.
예전의 김진이었다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7티어 기체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분명 손만 빨면서 있다가 크리스탈 시세가 낮아질 때쯤에야 제작했을 터.

“그러나 길은 있는 법이지.”

김진이 씨익 웃으며 아이리스가 설명했었던 기능지원 항목을 떠올렸다.
분명 프로젝트W와 계약할 시 거래불가 아이템에 한하여 파일럿에게 제공해 준다고 했었다. 물론 베타테스트 기여도에 따라서 주는 것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즉, 반대로 말하자면 스페이스 왈츠에서 열심히 베타테스트에 참가한다면 7등급 사이오닉 크리스탈도 요구할 수 있다는 것!

예전처럼 하늘만 바라보고 멍하니 땅만 긁던 시절이 아니었다.
확실히 이번만 해도 사이오닉 전이 장치인 PMD 테스트 참가 대가로 6등급 사이오닉 크리스탈을 받지 않았던가. 그것도 무려 거래가 가능한 걸로 말이다.
물론 억지인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하나씩 모으다 보면 7등급 재료들도 금방일 것으로 생각했다.

“문제는 빈 헬름 녀석도 이미 이걸 알고 있을 거라는 거지.”

분명 그 코쟁이 귀족도 이러한 조건을 알았기에 7티어 기체에 착수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소문이 돈다는 건 거의 완성단계라는 건대…….”

흔히들 말하지 않던가.
소문이란 것은 애초에 그걸 이용하려는 자들이 퍼트린 정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한번 퍼트려진 정보는 더이상 가치 있는 정보가 아닌, 단물 빠진 껌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보자면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김진은 이번 소문 또한 빈 헬름이 큰 이슈를 만들기 위한 떡밥이라고 보았다.
아니, 어쩌면 빈 헬름은 이미 다음 티어 기체를 만들어 놓고 발표 시기만 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자신보다 훨씬 전에 A급 파일럿이 된 만큼 준비기간 또한 길었을 테니 말이다.

“가령, 평소에도 눈엣가시였던 라이벌 파일럿이 A급 업적인 일인 레이드를 성공하자. 그 파문을 무마, 진화하기 위해 지금껏 숨겨뒀던 7티어 기체를 공개한다든가…….”

확실히, 돌이켜 봐도 상당히 신빙성 있는 가설이었다.
자신이라고 해도 그렇게 했을 것이리라 생각했으니까.
라이벌의 인지도가 높아지는 건 그다지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최강, 최고란 칭호는 홀로 유일하기에 의미 있는 것이니까.
이슈메이커인 빈 헬름 입장에서는 자꾸만 비교 대상으로 언급되는 김진이란 존재가 영 탐탁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기왕 돈 들여 발표하는 거, 라이벌을 발판삼아 이슈화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