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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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할 것 없이 곧장 스페이스 왈츠에 접속하였다.
판단만큼 빠른 행동.
눈을 뜨자 아이리스를 만났던 예의 그 공간이었다.
그녀가 반갑게 김진을 맞이했다.
“스페이스 왈츠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파일럿님.”
그녀의 환영인사에 김진 또한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또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젓번 대면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김진의 행동.
전처럼 단순히 고개를 까딱이는 것에 지나지 않고 제대로 인사를 했다는 것 자체가 상대의 가치를 상향 조정했다는 것을 뜻했다.
단순한 튜토리얼 전용 NPC가 아님을 이번 만남으로 확신한 것이다.
그저 그런 단역이었다면 저번 테스트를 마지막으로 그 이상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을 터.
그러나 두 번째 접속에서도 여전히 등장함으로써, 앞으로도 계속 자신과 만나게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란 것을 증명한 셈이다.
그렇다면 우호도를 생각해서라도 정중함을 보여야 했다.
어찌 됐든 간에 지속적으로 마주할 상대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보상을 결정하는 결정권자.
짐작이지만 아이리스는 임무보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재량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즉,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보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
그렇다면 더욱 친절하게 대해야 했다.
상대가 NPC인지, 실제 개발진인지는 김진에게 상관없었다.
현실적으로 보상을 내리는 클라이언트가 그녀라는 것만이 중요할 뿐.
사실, 그녀의 행동으로 유추해 보자면 NPC보다는 유저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지레짐작일 뿐이었다.
그녀가 직접 밝히지 않는 이상 김진이 알 방법은 전무했으니 말이다.
묻지 않고, 캐내지 않는다.
자신은 그저 프로젝트 W 때처럼 행동하면 될 뿐이었다.
논터치의 원칙대로 말이다.
김진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아이리스가 싱긋 웃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김진님. 튜토리얼 테스트 완료 후 처음 접속이시네요.”
그러고 보니 이틀만의 접속인가.
튜토리얼 보상 확인한답시고 접속을 안 하긴 했지.
“제가 언제 접속했는지도 다 관리합니까?”
“당연하죠. 파일럿님께서 한 달 동안 접속기록이 없으시다면 테스트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사측에서 베타테스터 자격을 회수하니까요. 이점 꼭 유의하세요.”
손가락을 세우며 당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라.
길다면 한없이 길고, 짧다면 퍽이나 짧은 기간이로군.
뭐, 한 번이라도 접속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주의하도록 하죠.”
김진의 담백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리스가 다소 밝은 어조로 말하였다.
“그럼 김진님은 튜토리얼 완료 후 처음 접속이신 만큼 이후의 진행루트를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딱!
아이리스가 공중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스파크가 파지직 튀기더니 거대한 홀로그램 지도가 생성되었다.
우주를 그대로 본뜬 듯한 고차원의 홀로그램 지도.
작디작은 별 무리부터 시작하여, 우주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개의 행성과 그 주위를 수줍게 맴돌고 있는 저마다의 위성들, 저 스스로 등대가 되어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 항성들과 그 우주를 바탕삼아 구름처럼 유유히 노니는 성운들. 그러한 것들이 운집된 은하들과 곳곳에 지뢰처럼 박혀있는 블랙홀등이 홀로그램 상에 나타났다.
눈에 익은 지도의 모습에 김진이 반문했다.
“국부 은하군입니까?”
프로젝트W의 진성 덕후인 김진은 한눈에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이 지도가 바로 게임상의 지도라는 것을 말이다.
“과연 A급 파일럿다운 눈썰미시네요. 맞습니다. 이건 스페이스 왈츠 내의 국부은하군 지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파일럿님이 활동하실 무대이기도 하죠.”
그러면서 그녀가 손가락을 가리켜 몇 개의 행성을 찍었다.
“그리고 이곳들이 바로 김진님이 배치되실 장소지요.”
“메텔, 미아, 모덴시아. 모두 알카르 안나의 중요 행성들이군요.”
그러나 그녀가 설명하기도 전에 김진이 먼저 말을 꺼내자 아이리스가 이채를 띄웠다.
“행성들의 위치도 모두 기억하시나 보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네요. 그렇담 이들의 공통점도 어느 정도 추측하고 계실 테죠?”
제자의 곤란함을 즐기는 교수처럼 아이리스가 은근히 질문을 던졌다.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묻겠다는 그 강요에 찬 눈빛.
모범적인 제자가 될 생각은 추어도 없던 김진은 단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었고 말이다.
“본위 행성인 알카르의 방어 거점이란 것 빼고는 모르겠군요.”
그러나 무심코 던진 그 말이 아이리스가 가장 원했던 대답이었는지, 크게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
“과연 명석하시군요. 즉, 이 행성들은 모두 군사훈련이 가능한 후방 지역이란 거죠.”
그 말인즉, 초보자를 위한 훈련소라는 건가.
김진이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군사 훈련소라니…….
김진에겐 영 탐탁치 않은 선택지였다.
“튜토리얼에 이어서 기초 훈련과정입니까?”
“맞아요. 파일럿님은 앞으로 메텔, 미아, 모덴시아 중 한 곳을 거점으로 삼아 차근차근 성장하시게 될 겁니다. 지정된 루트를 통해 엘리트 코스를 밟으시는 것이죠.”
이 흐름, 좋지 않았다.
아이리스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김진의 미간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남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 눈에 훤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빈 헬름을 추격하는 것도 더욱 요원한 일이 될 테지.
“다른 베타테스터들도 모두 똑같습니까?”
“예. 다들 세 곳 중 하나를 거쳐 갔죠.”
그녀의 말에 확신이 들었다.
결정했어.
김진은 자세를 잡고 고개를 삐딱하게 모로 세웠다.
“그렇담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예?”
“다른 이들과 똑같은 길을 가긴 싫습니다.”
대놓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아이리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김진을 바라봤다.
“정형화된 길을 거부하겠다는 말입니다.”
김진의 단호한 땡깡에 아이리스가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한 대치 상황이 몇 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그녀는 아이를 달래듯 김진을 향해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하였다.
“죄송하지만 그걸 파일럿님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어요.”
흠. 역시 단순한 생떼는 통하지 않는 건가.
뭐, 이 정도 반발은 예상한 바였으니 이번엔 설득으로 나서야겠다.
“어차피 베타테스트입니다. 허락된 시험의 장이죠. 여러 가지를 시험해도 모자를 판에 똑같은 루트를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의미상으로 그렇긴 하지만 사측에서 요구하는 테스트는 어디까지나 저희가 예상 가능한 범주 내에서입니다. 예측 못 할 데이터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죠. 고려는 해봄 직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정보가 되지는 않습니다. 데이터베이스란 결국 지금까지 쌓아올린 정보를 토대로 구축하여 논리적으로 연결한 집합체니까요. 단 한 번의 임시적인 일탈이 정보가 될 가능성은 아주 낮습니다.”
조근조근 따지는 아이리스의 반박에 김진이 순간 움찔하였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선다면 애초에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터.
김진이 아이리스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럼 제가 한 가지 제안토록 하겠습니다. 일단 들어보시겠습니까?”
“제안이요? 무슨 제안이죠?”
아이리스가 머리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러나 김진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그녀에게 한 가지를 당부코자 했다.
“다시 말하지만 전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을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추어도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그럼 대체 무얼 원하시는 거죠?”
답답함에 아이리스가 재촉하자 김진이 은근히 다가와 물었다.
“테스트라곤 하더라도 파일럿의 수요가 부족해서 미처 테스트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파일럿들의 숙련도가 부족한 탓에 투입하지 못했던 임무도 있겠지요. 그런 게 전혀 없다고 하진 않으시겠지요?”
김진이 지근거리로 접근하자 아이리스가 되려 움찔하였다.
“그야, 있기는 합니다만…….”
그녀의 반응에 눈빛을 빛낸 김진은 그 틈을 노리고 더욱 파고들었다.
“파일럿들의 참여도는 또 어떻습니까? 그들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테스트에 참여하던가요? 꾸준히, 일정하게 접속하고 있습니까? 베타테스터 본분에 맞는 역할을 과연 충실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는 아니더라고 몇 명 정도는 성실히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머뭇머뭇.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김진이 실눈을 떴다.
“만족할 만큼은 아니라는 거군요?”
“…….”
역시, 속 시원히 대답하진 못하는군.
김진은 아이리스에게서 떨어지며 말을 이었다.
“제 제안은 간단합니다. 제가 대신 그걸 해드리겠다는 거죠. 성실하고, 꾸준하게. 미처 테스트하지 못했던 것들, 아직 파일럿들이 답사하지 못했던 장소, 도저히 시도하지 못했던 임무 등. 모두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진이 물러서자 아이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무엇이죠?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
그녀의 물음에 김진이 씨익 웃었다.
비로소 원하는 내용을 말할 기회가 온 것이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단 둘뿐입니다. 일단 물질적인 보상. 지금까지 제시한 이 모든 조건은 엔터즈 측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해 준다는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대가성 제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빈 헬름이 지나간 전철을 똑같이 밟지 않겠다는 것. 그러기엔 제가 너무 아깝기도 하고요.”
김진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주장하자 아이리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김진님의 요구는 너무나도 일방적이로군요.”
“하지만 전에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테스터들을 지원하는 이유는 보다 더 확실한 베타테스트를 위해서 라고요. 기왕 그렇다면 크게 한번 배팅해 보시죠. 적절히 보상만 해주신다면 엔터즈 측은 확실한 우군을 확보하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어려운 임무라도 충실하게 뛰어드는 베타테스터를 말이죠.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파일럿 능력이라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합니다.”
김진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아이리스.
그녀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한마디로 김진님은 정상적인 루트를 다소 벗어난다 하더라도 위험성 있는 임무에 뛰어드시겠다는 그런 말이시지요? ‘적절한 보상’을 대가로?”
“그렇습니다.”
김진의 단호한 대답에 아이리스가 눈을 감고 입을 우물거렸다.
그녀는 머뭇거리는가 싶더니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승낙하도록 하겠습니다. 때마침 파일럿이 필요하지만 않았더라도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참 공교롭게도 되었네요.”
그녀의 결정에 김진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현명한 선택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후방인 메텔, 미아, 모덴시아는 선택지에서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튜토리얼밖에 클리어하지 못한, 입증되지 않은 파일럿을 무턱대고 최전방에 배치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아이리스가 김진을 바라보며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이곳. 메이 행성으로 배치토록 하겠습니다. 전선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도 있으면서, 때마침 인원 부족으로 곤란한 실정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모르지크의 병력도 새로 관측 보고된 만큼 데이터 수집을 해야 하기도 하고요. 서로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의 수락에 김진의 입꼬리는 연신 올라가기 바빴다.
일단 초보자용 루트를 벗어난 것부터 반쯤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 일.
상대가 말이 통하는 인물이라서 다행이었다.
역시. 김진이 예상한 대로 아이리스는 단순한 튜토리얼 도우미가 아니었다. 다소 무리한 김진과의 거래에도 고민 없이 즉답하는 것을 보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높은 직급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정도의 재량과 권한을 무리 없이 사용할 정도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