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인트 잇 블랙 >>
                       Paint  It  Black




                                    1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더이상 옛날의 푸르고 아름다운 별이 아니었다.
행성 전체의 모든 표면을 검푸른 점액질의 바다가 뒤덮고 있었다! 살아남은 소
수의 사람들은 사용 가능한  우주선을 타고 어떻게든 탈출했지만, 뒤에 남은 사
람들, 그리고 생물들은 무자비한 검은 콜타르의 물결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뼈만
남은 채 화석처럼  변하더니 급기야는 먼지로 분해되어버렸다. 아비규환, 연옥,
나락, 야마의 왕국, 앙페르, 인페르노, 헬, 하데스의 나라 - 그 어느 것에도 해
당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지옥이 거기에 펼쳐지고 있었다.
탈출한 이들은 최후의 결의를 내렸다.
-----------더 늦기 전에, 지구 전체에 불을 놓자고!
다행히도(?) 지구궤도에는  군비경쟁 때 비축해 둔  수많은 군사위성들이 줄을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탑재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전략·전술 핵탄
두, 통상탄두, 스페이스 네이펌,  신호탄, 예광탄, 훈련탄, 급기야는 태양면 폭
발 반응 실험에 쓰려고 달기지에 배치된 Bk42 항성관통탄까지 동원되었다.
그 옛날 예산 낭비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억지로 배치되었던 반사위성포와 대공
요격용 펄스 레이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신중한 계산을 거쳐 지구의 모든 표면적 위에 고른 비율로 각종 미사일
과 레이저를 쏟아부었고,  이곳저곳에서 엄청나게 큰 규모의 폭발이 동시다발적
으로 일어났다. 그 연쇄반응이 엄청난 기세로 행성 전체에 퍼져 나간다.
그리고 지구는-
태양도 울고 갈 불의  행성이 되었다. 사실은 겉표면만 타오르는 거니까, 속까
지 활활 타는 태양과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인류는 지난 수십년간 개척해  둔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아예 과거와의 인연을  끊고 다른 행성계로 옮겨가기로 결심, 준비를 추
진한다. 오직 향수에 사로잡힌  몇 사람만이 지구궤도의 스테이션에 남아, 더이
상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지구를 바라보며 코넬리아 콘웨이의 마지막 히트
곡 <The Greatest Fireball of  All>을 아날로그 레코드로 질릴 때까지 듣는 것
이었다.
"어어?"
"왜 그래?"
"저 황도면 위의 불꽃...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어."
"그럴리가... 눈의 착각이겠..."
그러나 아니었다.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꽃들 중  한 가닥이 마치 의지를
가진 누군가의 손처럼 중력을  거스르며 위로, 위로,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엄청난 홍염[紅炎]의 촉수는 대기의  마찰과 반 알렌 대의 자기반응을 견뎌내고
마침내 지구궤도 위로 뛰어올라, 스테이션을 한입에 삼켜 버린다!
"이봐! 브룩클린-5! 응답하라! 어떻게 된 거야!"
"달기지, 달기지, 이쪽의 상황이 이상하다. 그쪽 망원경에 뭐가 잡히나?"
지구의 속박을 벗어나 넓은 우주공간으로 뻗어나온 촉수는 순식간에 우주의 극
저온에 노출되어  꽁꽁 얼어버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음기둥은
마치 생명에의 의지로 가득한 것처럼 꿈틀거리며 우주의 심연을 건너, 달로, 화
성으로, 목성으로, 토성으로, 그리고 그보다도 먼 곳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며
그 끔찍한 검은 점액질의 바다를 각 행성에 심어놓는다.
외행성에 피신하여 한숨 돌리고 있던 인간들은 자기들을 향해 뻗어오는 장대한
촉수를 투시광선으로 관측한 결과,  얼음의 겉껍질 속에 불타는 얼음이, 그리고
그 아래에 끊임없이  맥동[脈動]하는 시커먼 젤라틴의 생명질[生命質]이 자리하
고 있는 것을 알고 경악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정녕 이 우주에 도망칠 곳
은 없단 말인가?
태양계가, 또 다른 행성계가, 그리고 은하 전체가,
검게- 검게- 새카맣게-
암흑의 저편으로-
두 번 다시-
영원히-


                                    2


딩동!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 친절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동시에 불이 켜진다.
"놀라셨죠? 물론 위 영화의  마지막은 픽션입니다. 실제로는 그 '괴물 콜타르'
는 - 미안해요, 아직도 정식명칭을 결정짓지 못한 모양이에요 - 30년 전 자랑스
런 아메리고의 과학팀이 발명해 낸 미생물탄에 의해 완전히 일소되었답니다! 그
덕분에 우리들도 여기에 앉아  흥미진진한 영화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다
시 한 번 그때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해결을 위해 힘쓰신 분들의 노고
에 감사드리며, 이로써 초  스펙터클 신작 3D피처 「Forever Dark」의 시사회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제공에 딕센  유나이티드 엔터테인먼트, 딕센 오일 코퍼레이션, 알레
그리시모 네트웍  사, 스튜디오 핀치필드, 교육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라슈펠
장학재단, 그리고  광고대행의 메카  파워슈트라우스 에이전시였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여러분 - 저는 오늘 사회를 맡은 플로라 폭스였습니다!"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잦아들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불도  다 켜지고 미화원이 들어와서 청소를 시작한 그
공간에, 한 사람의 동양계 중년부인과 그녀를 따라온 소녀가 남아 있었다.
오십대에서 육십대 사이로 보이는  그 부인은 엄청나게 도수가 높은 안경을 끼
고 하얗게 센 백발을 끄트머리만 보라색으로 멋드러지게 염색하고 있었으며, 몸
에 맞는 수수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소녀는 열아홉쯤 되어보였는데 머리를
소년처럼 짧게 깎고  꽤 요란스런 귀걸이와 탄생석이  달린 목걸이로 치장을 했
다. 일부러 찢은 자국을 낸 쫄청바지와 활동적인 배꼽티 차림이 옆의 부인과 묘
한 대조를 이루었다.
"-끝났네요."
"음."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로 보고  있던 소녀가 하품을 하며 봄날 고양이처럼 활짝
기지개를 켰다. 부인은 그녀의 교양없는 행동에 질책의 눈길을 보냈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녀가 그녀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 이모, 대체 이 영화가  뭐가 그리 재미있어서 보러 가자고 하신 거죠?
이모 취향은 이런 것보다는 좀더 현실적인..."
"나도 특별히 재미있어서 보러 온 건 아니다."
"그러면요?"
"저놈들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지어낼지 궁금해서 왔단다."
"엔딩의 미래 장면 말인가요?"
"아니,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거짓말이지."
"에에?"
"일단 여기서 나가자꾸나. 어디 조용한 카페라도 가서 이야기해 주마."
부인이 발밑에 내려놓았던 소포를 집어들며 말했다.
그들은 극장을 나와서 몇분동안 헤맨 뒤 적당한 노천 카페를 찾아서 자리를 잡
았다. 8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민트향 아이스티와 시트론 쿨라타로 더위를
식힌 뒤, 호기심이 동한 조카가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그 영화에 나왔던 다큐멘터리 부분이 다 거짓이라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을 한데  모아서 자기네한테 유리한 부분만 들춰내고 나
머지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꼴이지. 그리고 남은 사실들도 입맛대로 순서를 바
꾸거나 적당히 각색해서 아주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려고 애 좀 썼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그 중년부인은 시계를 잠깐 들여다보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도 약속이 있고 나도 우체국에 들러야 하니 짧게 끝내마. 그러니까 그건 대
충 30년 전, 내가 고만해[高 漫駭] 교수님과 대판 싸우고 달무리 연구소에서 쫓
겨난 직후에..."
"잠깐만요! 누구하고 싸우다 쫓겨나요? 이모가요?"
"그때는 아직 철이 없었지."
부인은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꼭 너만한 나이였다. 너처럼 외모에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진짜로 상상이 안 가네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죠?"
"그 얘기를 하자면 우리  모국의 바닷가에서 딕센의 흉물스런 유조선이 조난당
한 것부터 시작해야겠구나."
"영화하고 다르네요.  그 사건은 육지와는 멀리  떨어진 공해상에서 일어났고,
지나가던 물새 두 마리가 죽은 정도였다고 했잖아요?"
그 부인의 안경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았니."


                                    3


바다는 온통 새까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맑고 푸른 바닷물 속에 온갖 생명
들이 뛰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