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어젯밤, 대학교 종강기념으로 친구들이 한데 뭉쳤다. 술집에 모여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어울려 쉴새 없이 소주와 맥주를 마셔댔고, 1차에서 여학생들과, 술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은 친구들을 먼저 보낸 뒤 2차 3차까지 술집에서 정말 미친 듯이 마셨다. 이 녀석들은 위장이 강철로 만들어졌는지 아무리 마셔도 끄떡없어 보였고, 술에 강하지 않은 나는 순간순간 기억이 사라졌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화장실 변기 앞에서 노란 토사물을 쏟아내고 있는 장면이, 영화를 보는듯한 시점에서 내가 토하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얼마나 마셨는지, 언제까지 마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고, 새벽에 정신을 차려보니 내 자취방에서 깨어났다. 술로 정신을 잃었어도 생존 본능만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어떻게든 내 방으로 들어와서 쓰러진 모양이다. 
새벽에 목이 타는듯한 갈증이 느껴져 잘 떠지지 않는 눈까풀을 억지로 떴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형체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한 소녀의 얼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술에 취해 헛것이 보였는가 싶어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니 익숙한 내 방의 풍경이 보였다. 여자친구도 없는 서글픈 인생은 술이 과하게 들어가면 없는 여자도 만드나 보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 마신 뒤 다시 쓰러졌는지 깨어나 보니 오전이 막 지나간 12시 01분. 뜨거운 햇볕이 방을 태우려는 듯이 이글이글 열기를 뿜어내고 있고 내 몸은 그 열기에 지쳐 흥건히 땀으로 젖어 있었다. 

으으 속 쓰려. 미친놈들 그렇게나 마시고 어떻게 그렇게 팔팔한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풍기의 버튼에 적혀 있는 '강' 버튼을 누른 뒤 다음으로 이어지는 행동은 의자에 앉기.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속이 제멋대로 울렁거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고, 오늘부터 방학이 시작되었기에 딱히 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고향이 멀리 있는 친구들은 오늘부터 고향으로 떠나기 시작했을 테지만,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 봐야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집의 자금 사정이 그리 넉넉한 편도 아니어서 방학 동안엔 여기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나 구해서 내 용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남아 있기로 했던 것이다.

노트북 컴퓨터가 부팅되면서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선풍기의 바람 소리와 합쳐서 시끄럽게 방 안을 울렸다. 아직도 멍하고 아픈 머리지만, 부팅되고 있는 상태에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것 외에 딱히 할 일도 없기에 머리를 조금 회전시키기 위해 어제 있었던 일을 회상해보았다.

어제 친구들과 어울려서 즐겁게 웃고 떠들고 했던 기억이 났지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고, 1차는 맥주. 2차는 소주. 3차는 소주였던가? 2차까지 멀쩡하게 기억이 났지만 2차가 어떻게 끝났는지 3차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들의 술자리 의리야 의식불명 된 친구를 길거리에 버려두고 떠나는 게 최고의 의리기에 어떻게든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자취방이 학교랑 멀지 않은 거리에 있기에 술집도 아마 근처였을 테고, 오는 동안에 별 사고는 없었을 테지만, 새벽에 내가 봤던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나도 모르게 헌팅을 해서 집으로 데리고 왔을 리는……없겠지. 아직 모니터는 활기차게 윈도의 로딩 바를 그려대고 있기에 방 안 구석구석을 눈으로 흩어보았다. 어제 수업을 받으려고 학교로 떠나기 전과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풍경. 작은 원룸으로 만약 누군가 몰래 들어왔다면 누군가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은 화장실 외엔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 내가 본 장면이 헛것이었다고 해도, 정말로 누군가 납치해왔다던가 했다면 범죄가 되어버린다. 화장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번 하고 문 손잡이에 손을 뻗어 손잡이를 회전시킨 후 한순간에 잡아당겼다. 
낯선 광경이 보일지도 몰라 긴장했지만, 화장실에는 그저 평소에 있어야 할 물건만 놓여 있고 특이한 사항은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새벽에 내가 잘못 본 것이었다. 이 방 안에는 나밖에 없다.





얼마나 게임을 했는지, 문뜩 정신을 차려보니 바깥이 어둑어둑해져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가 간단한 먹을 걸 사온 뒤 저녁을 먹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오늘은 방학 첫날이니까 이렇게 놀아도 괜찮겠지?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알아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웹사이트를 여는 순간 머리가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둔감한 편이었는데 어째서 이런 감각이 느껴졌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감각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내가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무시하고 계속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면? 어쩌면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그때 뒤를 돌아보았고, 나는 그 자리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근처 중학교의 교복을 입은 소녀가 조금 떨어진 내 뒤에 서 있었다. 새까만 색의 긴 머리카락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 큰 눈에 어울리는 까만색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깜짝 놀라 심장이 미쳐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근거렸다. 그 당시의 내 표정은 경악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귀여운 미소를 하고 있던 그 아이는 내가 놀라자 같이 깜짝 놀라 가슴에 손을 대고 나를 바라보았다. 입에서 말이 맴돌지만, 혀가 굳어버렸는지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고, 그 아이는 곧 원래대로의 표정으로 돌아와 나를 바라보았다. 키는 150이 조금 넘었고, 몸은 말라서 하얀 팔다리가 가늘어 보인다. 긴 속눈썹을 하고 있어 얼굴이 그늘져 보이고, 코는 오똑하게 서 있고 옅은 붉은색의 입술을 가진 무척이나 귀여운 소녀다. 하얀색의 블라우스에 갈색의 치마를 한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명찰에는 '한이솔'이라고 적힌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너, 너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어?!"
"몰래 들어왔지. 오빠는 여기 살아아?"

이 세상 사람이 아닌듯한 귀여운 얼굴로, 귀여운 표정을 한 채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나에게 물어본다. 저런 딸이 있는 아빠는 전생에 지구를 구했음이 틀림없다. 아니, 그것보다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인기척도 없이 내 뒤에 서 있었던 걸까? 

"혹시 너 이 건물 주인 딸이냐? 그래서 비밀통로를 알고 있었던 거냐?"

고개를 흔들자 길고 까만 생머리가 스르륵 스르륵 움직였다. 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가능성 하나를 - 유령, 귀신, 혼령 등 -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이런 귀여운 아이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오빠는 내가 보여?"

그 아이는 쾌활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보았다. 이건 뻔한 대사가 아니던가! 아니 아직도 나는 꿈에서 헤매는 게 아닐까? 손등을 꼬집어 보았지만 아픔이 그대로 느껴져서 꿈이 아니라는걸 다시 확인했고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이 하나 있었다. 뷰티풀 마인드 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정신병에 걸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가 정신병에 걸린 것이다. 그냥 무시하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일 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에 알코올의 영향력에 벗어나지 못한 내 머리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버렸고, 몸을 뒤로 돌려 다시 노트북의 화면에 정신을 집중했다. 게임을 실행시킬 아이콘을 찾기 위해 시작 버튼을 눌렀다. 무시하자. 무시하자. 게임이 어디에 있더라?

"오빠. 오빠! 내가 안 보이는 척하지 마!"

게임. 게임이 어디 있었더라. 마우스 클릭을 실수해서 아이콘이 사라졌다. 다시 시작 버튼을 눌렀다.

"오빠! 가슴 보여줄게! 옷 벗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 눈에 그 아이의 모습이 들어와 있었다. 이 지랄 맞은 본능 이어.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귀여운 얼굴을 보니 화날 마음도 나지 않았고, 오히려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따라 미소 짓는 내가 있었다. 예쁘고 귀여운 여자에 한없이 약한, 남자라는 생물이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속았지? 오빠 이름 알려줘. 나는 명찰이 있어 이름이 알려졌는데, 나는 모르면 손해잖아."
"뭐가 손해냐 이 꼬맹아. 남의 집에 무단침입을 해 놓고 왜 그리 당돌해?"
"무단침입은 나 같은 사람에겐 적용 안 돼."
"너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그 아이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벽으로 소리 없이 걸어가더니 팔을 벽으로 내밀었다. 당연히 팔이 벽에 닿았어야 했지만,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손이 통과했다. 벽에 원래 구멍이 있어 그 구멍 사이로 손을 넣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질감 없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순간 어땠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내 표정이 어떤 표정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지 않았을까? 내 표정에, 행동에 그 아이는 우울한 표정이 되어 한숨을 작게 내 쉬면서 나를 바라보며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놀랐지 오빠?"

그 표정이 너무 우울해 보여서, 무슨 말이라도 필사적으로 했어야만 했다. 정신을 수습하고 간신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었다.

"아, 아니 놀라지 않았어. 것 보다, 너 유령? 정말?"
"유령은 아니야. 아니, 유령일지도 몰라. 하지만, 난 완벽하게 죽지 않았어. 의학적으로 아직 살아 있어."
"하, 하지만, 지금 그건."
"뇌사상태. 그렇게 들었어. 내 몸은 살아 있지만 뇌는 죽어버렸다고."

내가 미친 게 아닐까? 그 아이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을 했다. 아니 어쩌면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을 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독백에 그 아이는 다시 미소 짓는 얼굴로 돌아와서 나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 안 해. 뭐, 내가 보이는 게 오빠가 정신병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네 모습이 안 보인다는 것?"
"오빠가 처음이야. 이런 떠돌이 유령 같은 내 모습을 본 사람이."
"그럼 내가 정말 미쳐버린 걸지도 모르겠구나."

한숨을 내 쉬었다.

"걱정하지 마. 그래도 난 여기에 존재하고 오빠의 꿈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하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빠른 속도로 걸어와서 내 바로 앞에 멈춰 서더니 손을 펼쳐서 내 볼을 양손으로 쓰다듬었다. 손의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너? 벽은 통과하면서 어떻게 손으로 날 만질 수가 있어?"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오빠가 나를 현실로 인정하는 순간 나는 현실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 같아. 평소와 다르게 벽에 팔을 넣을 때 미묘한 저항감 같은 게 느껴졌었으니까."
"지금 병원 같은 곳에 누워 있어?"

내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말하기 꺼림칙한 표정을 했지만, 그래도 말하려는 의지가 더 컸는지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여기서 별로 멀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조금 망설이는 표정을 했지만, 내가 입을 열지 않자 계속 말을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오빠는 나를 죽여줄 수 있어?"
"뭐 뭣?!"

놀라면서 대답했지만, 더는 내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무척이나 슬픈 얼굴을 한 채,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한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표정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감정이 풍부한 걸지도 모르겠다.
슬픈 얼굴을 빨리 바꾸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마터면 죽여줄 수 있다고 말할 뻔했지만, 간신히 이성이 자제해서 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할 수 없어. 그런 거. 난 그냥 평범한 대학생일 뿐인걸."
"그렇구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아이가 안돼 보이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무리 영혼이 분리되어 나와 있다 하더라도 심장이 뛰고 있다면 아직 죽지 않았을 테고, 내가 어떻게든 죽인다면 살인자가 될 뿐이다. 내가 그 아이를 죽인다고 하면 평생 죄책감을 가진 채 살아야 한다. 아니 그것보다 저 아이는 정말 유령이 맞는 걸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기에 공포영화를 보면서 무서워하기도 하고 유령을 실제로 보았다면 놀라서 심장이 멎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정말 현실에 존재하는 것처럼, 혼령 그 비슷한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실제로 내 앞에 한 여학생이 서 있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혀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미안해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해서. 나는 이만 돌아갈게."
그 말과 동시에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왜 죽여달라고 했는지 아직 묻지 못했다.

"자, 잠깐만!"
다급하게 외쳤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벽을 향해 걸어간다.
"알았어. 죽여줄 테니까 가지마."

왜 이런 거지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났던 걸까? 말도 안 되는, 실행할 수 없는 약속을 말해버렸다. 내 말에 그 아이는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뒷모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야? 죽여줄 거야?"
"일단 이야기부터 들어봐야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도움을 줄 테니까 다시 돌아와."

내 말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서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나도 컴퓨터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아 그 아이와 눈을 마주한다. 다시 봐도 정말 귀엽게 생긴 아이다.

"오빠 이름은?"
"하신우."
"듣기 좋은 이름이네."
"것보다, 죽여달라는 이유를 듣고 싶은데?"
"미안.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서, 너무 무리한 부탁까지 해버렸던 거 같아."

안도했다. 그 아이가 무리한 부탁이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방금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이 아이를 잡았던 게 옳은 일이었을까? 더는 관여하지 않아도 되었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겠지.

"그렇지만, 내 몸이 죽어야 해."

침묵. 
1분 정도 참을성 있게 그 아이 앞에 앉아 기다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에 포근하게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혼령이라 해도 성추행이 되어버리니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기다리자 마침내 그 아이가 입을 열었다.

"교통사고……. 내 몸이 날아가서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어. 관절인형처럼 아무렇게나 팔다리가 흔들리면서 바닥에 굴러가는 내 몸을 내가 보고 있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동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말하는 그 아이의 표정은 지금 그 장면을 보고 있다는 듯이 구역질을 참아내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뒤 다시 입을 열어 침묵을 소리의 울림으로 채워나갔다.

"그래서 지금 이 꼴인걸. 외동딸이라 부모님께서 넘칠 만큼 예뻐해 주셨는데. 내가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어떤 행동이라도 하실 분들……. "
"하지만, 이렇게 되었다는 걸 볼 때. 네가 되살아날 방법은 없는 게 되는 건가?"
"응. 내가 다시 살아난다면 의식이 이렇게 바깥에 나와 돌아다닐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러면, 왜 죽어야 한다는 거지?"
"우리 집은 돈이 많지 않은걸. 나를 살리기 위해 고생하시는 모습을 더는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병원에서 생명유지 장치를 달고 있는 채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즉 막대한 돈을 병원에 가져다주고 있다는 뜻이다. 집에 돈이 많지 않다면, 집을 팔았을 가능성도 있고 빚을 많이 졌을지도 모른다. 살려낼 수 없는 그 아이를 위해 모두가 불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말이다.

"알겠어. 이대로는 저승이 있다면 저승으로 떠날 수도 없겠군."
"정말로? 아직 다 말하지 않았는데."
"이런 말이지? 부모님께서 너를 살리기 위해 더더욱 불행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슬픈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이 아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한다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이외엔 없다. 그 말의 사실 여부는 확인해보면 알 수 있을 테고, 내 입으로 한 약속은 지켜주고 싶다. 내가 이 아이를 죽일 수는 없지만, 부모님을 포기시킬 방법은 있겠지. 지금 시각은 오후 7시 50분. 바깥은 어두워졌지만 큰 병원이라면 지금 찾아가도 면회할 수 있을 테고 이 아이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알았어. 내가 도와줄게. 나를 따라 같이 병원에 갈 수 있지?"
"응. 고마워. 떠다닐 순 없지만, 오빠랑 같이 걸어갈 순 있어."

이 아이의 말이 사실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미친 게 아닌, 실제로 그 아이가 병원에 누워 있는 걸 확인하고 부모님까지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었다. 당장 집에서 나왔다. 병원 위치를 확인한 뒤 곧장 걸어 병원에 도달했다. 8시 30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지만 병원 근처에 많은 사람이 보였다. 곧장 이 아이가 죽은 채 누워 있다는 방 호수를 확인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도착했다. 802호. 중환자실. 문 앞에 적혀 있는 명패에는 '한이솔'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순간 온몸이 소름이 돋아났고, 한기가 파고들었다. 그 아이는 내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어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굳게 닫혀 있는 문. 내가 이곳에 무슨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평소 알고 있던 사이도 아닌데 가족이라도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자네는 누군가?"

마른 몸에 안경을 쓰고 있는 키 큰 남자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낙담한 표정을 한 40대 중반의 남자로,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샐러리맨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묻자 갑자기 머리가 굳어버린 것처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억지로 머리를 써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여기 환자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딸과 아는 사이인가?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닐세. 일단 들어가세나."

별다른 의심하지 않고 나를 중환자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복도에 비해 어두운 방 안에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자그마한 몸이 하얀 천에 덥힌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얼굴을 살펴보았다. 옆에 서 있는 아이에 비해 훨씬 창백하고 여위어 보이는 얼굴. 하지만, 분명히 동일인물이었다. 정말로 이 아이는 죽어서 혼령이 되어버렸다. 순간 구토감이 몰려와 침대 모서리를 잡고 허리와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게 사실이었다. 생명유지를 위한 장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링거 병 두 개로부터 선이 이어져 얇은 손등 위로 연결되어 있었다.

"오빠는 정말로 나를 믿어준 거야. 나는, 나는 이렇게 죽어 있는데……."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빌어먹을 상황을 종료시켜야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치료를. 가족 모두가 짚 섬을 등에 지고 불구덩이로 달려가는 이 상황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무슨 당위성을 가지고 그럴 수 있을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찾아와주어서 이 아이도 기뻐할걸세. 말이라도 하면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 말이라도 해 주는 게 어떤가?"
"이솔양의 아버지 되십니까?"
"그렇다네.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한 아빠일 뿐이지만."

침대에 짚고 있던 손을 떼고 그 아버지라는 사람 앞으로 걸어갔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오늘 처음으로 이 아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말을 했다고?"

옆을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누워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지금은 생명이 가득 차 보이는 서 있는 아이가 보이는, 아주 기묘한 경험을 하고 있다.

"제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 아버님께선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제 눈에는 이 아이의 영혼이 보입니다. 그 아이의 말을 듣고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자네는 누군가? 헛소리하기 위해 찾아온 거라면 당장 나가게!"

고함을 치는 기세에 움찔해버렸다. 나를 때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난다면 평생 후회하고, 나를 미워하고 살지도 모른다. 

"확인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에 그 아이가 있습니다. 딸이 아니라면 절대로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누구라도 이런 말을 하면 믿지 않겠지. 나도 믿을 수 없는 이 일을 타인에게 설명할 방법은 많지 않다. 하지만, 딸의 걱정이 가득한 아버지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바로 내칠 수 없을 테니까.

"정말인가? 정말 딸이 여기 있다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울음을 그치고 진정된 아이는 자기 아빠에게 가까이 다가간 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내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뭐라고 대답하는지 물어봐 주게."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아빠. 그렇게 말하고 볼에 뽀뽀해 줘."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아빠. 그리고 볼에 뽀뽀해 준다고 합니다."

아저씨의 얼굴은 매우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볼에 뽀뽀는 언제까지 하기로 약속했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라고 합니다."
"그걸 즐겁게 해 주었지?"
'싫어하면서 해줬어. 하지만, 약속했으니까.'
"싫어하면서 해줬어. 하지만, 약속했으니까. 라고 합니다.
"내가 이솔이를 평소에 어떻게 불렀지?"
'꼬맹아. 우리 딸. 애기. 공주님. 아가씨. 천사.'
"꼬맹아. 우리 딸. 애기. 공주님. 아가씨. 천사. 라고 합니다."

침묵.
아저씨의 눈이 붉어졌다. 두리번거렸다.

"이솔이는. 이솔이는 지금 어디 있어!?"
"아저씨 바로 앞에 있습니다."
'아빠 나 여기 있어. 이솔이가 여기 있어!'

이솔이의 목소리가 아저씨에게 들리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지만 보이지 않았다. 서로 눈물을 흘리고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모습에 나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그 일이 나를 중심으로 일어났었을까? 어떤 신문기사를 봐도 이런 일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이 이후의 나의 삶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그 아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그 아이를 비현실로 인정했고 죽은 채 누워있는 이 아이를 현실로 인정했다. 그 아이를 비현실로 정의하는 순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보게. 이솔이가 여기 있어?"

아무리 불러보아도 대답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딸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저에게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딸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했어? 왜 여기까지 자네가 함께 온 거지?"

그 아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나 혼자 해 나가야 했다. 잘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아이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까? 어떻게든 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따님은 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미친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저도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는 아저씨의 딸을 분명히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질문하신 것에 대한 대답은 아마 딸이 아니면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을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부탁을 했었나?"
"죽여달라고 했습니다."

최대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얼굴은 지나치게 긴장해서 굳었다. 이래서야 정신병자가 지껄이는 꼴이 아닌가. 
내 대답에 아저씨는 자리에 주저앉아 침묵을 지켰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말을 이어나갔다.

"집에 돈이 많지 않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고생하시는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딸을 되살릴 수 있다면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네. 아니, 아니 되살릴 수 없다고 해도. 누워만 있더라도 계속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 이 아이를 내 손으로 묻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하지만, 뇌사상태라면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닙니까?"

내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가슴에 돌을 달고 있는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금이라도 심장이 뛰는 시간을 연장하고 싶은 아버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워 하는 딸.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저씨에게 무슨 자격으로 주장할 수 있을까? 무엇이 옳은 걸까? 뭐가 정답일까? 이대로 돌아가서 낮에 하던 게임이나 계속하면 그만이다. 이제 그만두자. 
아니다. 딸의 부탁을 말하기 위해 왔고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돌아간다면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버린 것과 다름없다. 안되더라도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아저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딸의 고통을 모른 체하실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난 그저……."
"이솔이가 처음 보는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할 정도라면. 처음 만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만들 만큼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이제 나가보게. 내가 판단하겠네."
"산소 호흡기 꽂아 놓고 이미 내사했는데도 그렇게 하는 거는 그건 산 사람들의 집착입니다. 집착 때문에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 괴로워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본인이 결정한 문제입니다."
"그래도 그건 딸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네. 어떻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아이를 위해서도 자연스럽게 정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제 혼령이 되어 떠나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보고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가족 모두가 떠나보내지 못해 집착하고 있으면 영혼이 떠나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됩니다."
"나 혼자 판단할 문제가 아니네. 이제 가보게나. 나중에 아이 엄마가 오면 그때 의논해보겠네."
"하지만……."
"내일 오전 10시에 다시 와줄 수 있겠나? 지금은 너무 혼란스러운 상태니까."
"알겠습니다. 주제넘은 말 죄송했습니다."

인사를 마친 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병원을 나와 집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꿈을 꾼 건 아니었을까? 그 아이를 만났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밤이지만 여전히 공기는 뜨거워 땀을 흘리며 집에 도착했다. 알 수 없는 피로감이 전신을 덮쳐와 간신히 옷을 갈아입고 잠에 빠져들었다.

'눈처럼 새하얀 손을 보았다.'

새벽 4시에 잠에서 깨어나니 하얀 손이 보였다. 전보다 훨씬 희미해진 모습으로. 
'이제야 겨우 내가 보이나 보네.'
"너…… 어떻게 다시 보이는 거지?"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오빠가 나를 봐주지도 않고 목소리도 듣지 않기에 일부로 무시하는 걸로 알았는데, 정말로 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정말 무서웠어.'

잠에서 깨어 멍한 머리를 한 채 자리를 털고 앉았다. 그 아이의 몸은 반투명한 상태로 되어 몸을 투과해 벽이 보였다. 안도하는 표정으로, 커다란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해. 부탁한 대로 잘 되진 않았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난 뒤에 말을 했다.

"으으응. 오빠 고마워. 잠깐이나마 아빠랑 얘기할 수 있었는걸."
"내일 다시 병원에 가 볼 생각인데, 그때도 같이 가줄 수 있지?"
"응. 오빠가 나를 아침에도 볼 수 있다면."
"네 실제 몸을 확인하고, 네 존재가 있을 수 없는 존재라고 깨닫자 사라져버렸어."
"오빠는, 이전에 이런 나와 비슷한 존재를 본 적이 있어?"

그 아이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있을 리가 없다. 있을 수가 없다. 눈앞에 있다고 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콜럼버스의 큰 배가 아메리카 대륙에 다가가고 있을 때 인디언들은 그 배를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인디언들의 주술사는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몇 날 며칠을 관찰한 결과 그 거대한 배의 존재가 눈에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주변의 다른 인디언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자 주술사를 믿고 있던 다른 인디언들도 비로소 그 배를 볼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앞에 어떤 존재가 있을 리가 없다고 믿어버리면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닐까? 없다고 믿었더니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게 되었었고, 저녁에 경험한 일이 희미해지자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원래부터 그대로 있던 존재를 내 뇌가 처리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18세기 이전에, 알프스가 가진 아름다움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던 무서운 산이었다. 높은 산에는 악마가 살고 있어 낙빙과 눈사태를 일으켜 사람을 해치는 존재였고, 교통을 방해하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알프스 산의 등반에 성공했고 그 이후로 알프스의 두려움이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졌다. 두려움이 사라진 사람들은 높은 산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제야 알프스 산의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알프스의 아름다움과 같이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해도 보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정말로 죽는 걸 원해?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어?"

내 말에 그 아이는 느릿느릿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표정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고 몸은 저녁에 봤던 것과 같이, 유령에서 벗어나 한 명의 사람과 같아 보였다.
"두렵지 않아?"
"오빠 같으면 어떨 거 같아?"
"두렵겠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을 테고, 어떻게든 다시 살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상태로 가능성에 매달리겠단 거야? 나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 모두가 고통에 빠져도?"

나 역시 죽음을 택하겠지. 희망고문. 불가능하지만 도전하자. 바보 같은 짓이다. 정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아니, 너와 같은 생각일 거다. 나 역시 불가능에 매달려 있을 만큼 어리석지 않을 테니까."

그 이후로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잠에 빠져들었고, 깨어보니 햇볕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일어나 씻고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어째서 보이지 않게 되었는지 스스로 질문을 해 보았지만, 부정적인 대답 외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명패는 때어졌고 병실은 정리되어 있었다. 텅 비어버린 방. 짐작 가는 곳이 있어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와 다시 달렸다. 

장례식장. 되살아나지 않았다면 갈 곳은 한 곳뿐이다. 오늘을 알리는 날짜 옆에 적혀 있는 '한이솔'이라는 글자. 죽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 아이를 위해 장례식장을 사흘 동안 지켰다. 발인은 차마 따라갈 수 없어, 떠나는 영구차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 역시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오늘 죽지 않았다는 것은 하루를 보너스로 받았다는 의미다. 내일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100%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오늘은 나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남이 시키는 대로, 남의 눈치만 보며 살면 결국 내가 주인으로 살 수 없고, 남의 종살이만 해야 한다. 
그 아이의 마지막 날에,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은 존중받아야 한다. 
마지막. 육체와 영혼이 이곳을 떠날 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고 떠나고 싶다.

지금도 가끔 그 아이가 생각나긴 하지만,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 영혼은 어디로 떠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