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200X년 5월 12일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다행히 앞으로 건너야 할 징검다리가 건너온 징검다리보다 적게 남았다. 일단 리듬을 타면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오른발을 뻗고 왼발이 그 뒤를 따르며 간격을 유지하면 된다.

하지만 징검다리의 간격이 달라지거나 징검다리를 밟는 리듬을 잃는다면 나는 물에 빠지고 말 것이다. 단순히 몸이 젖어 옷을 버리는 수준이 아니라 급류에 휘말려 죽거나 재기불능의 정신적 공황에 빠질 지도 모른다.

함께 지내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상대하기 편한 것은 사실 고참 녀석이다. 단순무식한 바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 그만이다.

제이는 분명 내게 호의를 지니고 있다. 내가 모르는 배려를 뒤에서 해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호의와 배려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불러오는 것만은 아니다.

팀장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이 계통에 오래 몸담아서 그런지 무색무취한 사람이다. 어떤 배경에도 어울릴 법한 사람이다. 천 만 원 짜리 정장을 입고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도 무방하겠지만 반대로 넝마를 입고 노숙자들 틈에 끼어도 어울릴 사람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류를 만났다.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다시 일기를 보게 된다면 찢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 것 같다. 단지 이렇게만 적어 놓지만 오늘의 우울함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I]]

전역 반년여를 남기고, 아껴둔 상병 휴가를 나온 조는 간신히 류와 만났다. 사무실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지면 류의 새로운 학교, 학과, 핸드폰 번호를 알 수 있었겠지만 팀장이나 정이 이를 알고 문제 삼을까 두려웠다. 파랑새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다. 동기 녀석 황을 통해 그녀가 다니는 학교를 알아냈다. 류는 지방의 의대에 다니고 있었다. 의대 학생회실로 전화하니 의외로 류의 새 핸드폰 번호를 쉽게 알 수 있었다. 통화했을 때 류의 목소리는 밝았고 먼저 만나자고 한 것도 류였다.

조는 이번 기회에 류를 만나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고백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분명히 해두는 것이 애매한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비 내리는 토요일 오전 그녀의 집에서 가까운 신천의 커피샵에서 만났다. 조는 2층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형형색색의 우산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는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혹시라도 문자나 전화를 놓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약속 시간보다 13분 늦게 류는 도착했다.

류는 1년 반 전 단과대 건물에서 핸드폰으로 전화하며 만났을 때의 미소 그대로였다. 아니, 조금 달라져 있었다. 하늘거리는 짙푸른 색 원피스에 칠부 소매의 흰색 니트 카디건을 입은 류의 모습은 이전과는 다르게 여성적인 느낌이었다. 조는 재빨리 손과 목을 보고 반지나 목걸이는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그런 것은 없었다. 하지만 반지와 목걸이를 확인하며 왜 선물 같은 것이라고 준비하지 못했는지 자책했다. 그녀가 커피샵 입구에서 조가 앉아 있는 자리에 오기까지는 채 몇 초가 되지 않았지만 조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많은 것을 관찰했다.

“와, 예뻐졌네.”

“오랜만에 만나는데 아부부터 하는 거야?”

“아냐, 정말이야. 느낌이 달라졌어. 표정도 밝아지고.”

“정말? 나 괜찮아? 무슨 냄새나지 않아? 병원 냄새 같은 거 말야. 소독약 냄새.”

“포르말린 냄새? 전혀 나지 않아.”

조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어차피 조는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류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럼 다행이네. 병원에서 당직서고 바로 나왔는데.”

그녀의 웃음과 말투에는 구김살 하나 없이 한없이 맑아 보였다.

“너도 군인 같지 않아. 머리도 기네.”

“그렇게 되었네. 말하자면 사정이 긴데, 나는 제복을 혐오해서 교복도 싫었는데 다행히 군복은 입지 않은 채 군 생활을 하고 있어.”

“후후후, 넌 자유로운 영혼이야.”

“설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 내가 소심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런가. 벌써 2년 전 이야기야.”

“기억하고 있었네?”

“물론이지. 재작년까지 몇 년 동안은 내 인생 최악의 기간이었어. 그중에 알게 된 사람 중에 지금도 만나는 사람은 너 뿐이야.”

조는 그녀의 말에 조금 용기가 생겼다. 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원래 의대에 가고 싶었던 거야?”

“사실 나보다 부모님이 원했어. 특히 엄마가. 너희 학교에 갔을 때에는 나보고 사시를 보라고 했는데 그것보다는 의대에 가는 게 쉬울 것 같았어.”

의사라면 남을 살리는 사람이 아닌가. 지금은 예과 2학년에 지나지 않지만 그녀는 언젠가 의사가 될 텐데 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돕고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에 조는 날씨처럼 갑자기 우울해졌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류의 하얀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금방 기분이 달라졌다.

“예뻐졌어.”

“입바른 말 좀 그만해. 벌써 두 번째야.”

“뭐랄까, 여성적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조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탐색을 위해 애드벌룬을 띄웠다. 마지막 고비였다.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뭐야? 남자친구라도 생긴 거야?”

그녀는 조의 질문에 쿡쿡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보이나봐. 다들 그러네. 맞아, 나 결혼해.”

정이 조에게 어린애를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보다 조는 더욱 극심하게 놀랐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억지 미소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어... 그래. 우와, 추, 축하해.”

류가 먼저 만나자고 했던 이유를 조는 깨달았다. 류는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냈다. 스물 넷 조의 인생에서 난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청첩장이었다. 공교롭게도 처음으로 여자에게 고백하려 한 날 그녀에게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받게 되다니. 조는 스스로에게 비웃음이 났다. 스물넷이라는 나이가 결혼에 이른 나이만은 아니었다.

“신랑 이름이 멋진데? 누구야?”

“우리과 선배이자 교수님. 아마 죽을 때까지 이보다 훌륭하고 멋진 남자는 만날 수 없을 거야.”

나이가 많은 남자와 스물 네 살짜리 여자 결혼. 팔려가는 것,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때 조는 스스로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
  
휴가 복귀하고 나서 조는 한참 동안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제이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마침 팀장과 정은 퇴근한 뒤였다. 전역 이후에도 자원하여 회사에 남아 있기로 했기 때문에 정은 팀장처럼 출퇴근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조와 제이만 남아 있는 일이 잦았다. 제이는 데스크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조를 보며 말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은 무슨...”

제이는 위스키를 잔뜩 섞은 아이리쉬 커피를 홀짝거리며 물었지만 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커피를 마시고도 잘만 자더라?”

“화제 돌리지 말고. 없는 게 아니라 있군. 도대체 뭐야? 짝사랑하던 여자가 시집이라도 간대?”

의표를 찔린 의외로 조는 웃음이 비어졌다. 자신의 유치한 구석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씨구, 얼굴 시뻘개진 것 좀 보게. 너 그 여자랑 잤냐? 아니, 키스라도 해봤어? 했을 리 없지. 깔끔으로 유난 떠는 네 녀석이.”

“됐어. 알았어. 그만해.”

“그럼 뭐가 고민이야?”

“공교롭게도 말야. 결혼을 여기서 하네.”

“이 방일 리는 없고... 아하, 이 호텔에서 하는군.”

제이는 두 잔째의 커피를 커피메이커에서 따랐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야.”

“네가 현장에 투입되지 않아서 생명 수당은 안나온다지만 넉넉하게 월급을 받으니 축의금이 없을 리 없을 테고...”

“갈까?”

“궁상이긴 하지만. 그래, 가는 것도 좋지. 그러면 눈곱만치라도 남은 미련이 완전히 떠내려갈 테니.”

“그래... 그렇지...”

조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제이는 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커피잔을 개수대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
  
결혼식 날은 유난히 더웠다. 4층 호텔 객실에서 10층의 홀로 엘리베이터만 타고 올라가면 되기 때문에 냉방이 잘된 호텔 안에서 더위를 느끼지 않아야 정상이었겠지만 이상하게 땀이 났고 숨이 가빠왔다. 손수건 따위는 들고 다니지 않는데 곤란해, 그런데 손수건은 이별의 상징이지, 라고 생각이 미치자 상념에 빠지는 것을 그만 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조는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 봉투를 신부 측 데스크에 내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데스크의 남자들은 하객이 많이 조에게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신부 쪽 하객은 신랑 쪽에 비해 눈에 띄게 적었는데, 신랑 쪽 하객으로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신랑 쪽 하객들 중에서는 TV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인이나 연예인도 있었다. 조는 그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모습이 류의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검정색 정장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류가 알아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결혼식장에 올 거라고 알리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부터 신랑 백유석 군과 신부...”

하객들은 일제히 동시에 입장하는 신랑과 신부에 시선이 쏠렸다. 키가 큰 신부가 웨딩드레스에 하이힐을 신고 있었지만 신랑이 신부보다 한 뼘 이상 키가 컸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호남 형이었다. 누구에게든 호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조의 시선은 곧 신부에게 향했다. 결혼식 날 우는 신부도 많다던데 류의 얼굴은 해맑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중 가장 밝은 표정을 지었던 두 달 전 신천에서 만났을 때의 얼굴에 비해서도 훨씬 더 밝았다. 그렇게 행복해보일 수 없었다. 됐어, 이제 된 거야. 책의 한 챕터가 끝났다구. 조는 뇌까렸다. 우울했다. 하지만 한 구석으로 홀가분함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만들어 지었던 무거운 짐을 벗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 달 쯤 지난 뒤였다. (3부 끝)
안녕하십니까? SF 소설을 즐겨 읽고 습작으로 쓰고 있는 연재할 곳을 찾아 가입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