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자네와 이렇게 술 한 잔 하는 것은 처음이지?”
“예.”
팀장이 조와 술자리를 갖자고 한 것은 3일 전이었다. 평소 과묵한 팀장은 팀 회의 시간에 최근 감시 대상에 오른 시민 단체의 변호사와, 그 변호사가 비리를 폭로하기 일보 직전인 고위 판사의 동향을 동시에 감시할 것을 지시했다. 제이와 정이 현장을 전담하고 조가 데스크 워크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현장 일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의 도청이나 녹취를 비롯한 감시 업무는 팀원 모두의 일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팀장은 조를 자신의 사무실에 남겼다. 제이와 정은 밖으로 나갔다. 정은 의아하다는 듯 뒤를 두리번거렸다. 둘만 남자 팀장은 조에게 3일 뒤 저녁 때 술자리를 하자고 제안했다. 팀장은 선약이 있다면 날짜를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세심하게 배려했다. 조는 괜찮다며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팀장은 퇴근하며 조를 데리고 나갔다. 바와 레스토랑을 겸한 고급스런 펍이었다. 라이브 연주자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대학가 술집의 라이브 연주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노래를 잘 했고 그 소리도 지나치게 크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떤가? 회사 일은? 마음에 드나?”
“외람되게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 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자네는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내 궁금했네.”
웨이터가 차갑게 식힌 잔에 이 집의 자랑거리인 하우스 맥주를 담아 왔다. 팀장은 저녁을 겸하는 거라며 안주도 푸짐하게 시켰다. 그릴에 구운 독일식 소시지와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신선한 시저 드레싱의 새우 샐러드였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굳이 이런 걸 묻지 않았던 건 자네가 의무병이었지 때문일세. 복무 기간이 끝나면 전역할 사람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
팀장은 조에게 건배를 권했다. 조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건배했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뭐랄까. 밴드로 따지자면 베이스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은 보컬이나 기타, 혹은 가장 격정적이고 원초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드럼에만 집중하기 마련이지. 사실 베이스 소리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아. 하지만 음악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심장 고동 소리와 같은 베이스가 빠지면 밴드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언제나 불평불만 없이 성실하게 데스크 워크를 해주고 있는 것에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아아, 이런, 이런. 또 나만 말하고 있군. 어서 들게. 배고플 텐데.”
팀장은 오늘 따라 다른 그 어느 때보다 말을 많이 하고 자상하며 친절했다. 조는 이럴 때 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조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와 함께 있으면 불편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기 위래 노력했다. 팀장의 권유 때문에 조는 샐러드에서 새우를 건져 먹었다. 껍데기를 깨끗이 바르고 알맞게 구워져 쫄깃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자네의 성실함이나 빈틈없는 정보 처리 능력에 감탄하고 있었어. 그래서 전역 이후에도 남아주었으면 하고 내심 바라고 있었지. 하지만 솔직히 피 비린내 진동하는 이 일에 남아달라고 말하는 것은 전도유망한 젊은이에게 죄스런 일이라 그러지 못했지. 그런데도 자네는 남아 주었고. 뭐, 자네 동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고맙네. 자.”
팀장은 다시 건배를 권유했고 조는 다시 두 손으로 공손히 건배했다. 팀장은 자신만 말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운 듯 잠시 말을 멈춘 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후 물었다.
“이제 자네도 후임이 필요하지 않나?”
“예?”
“그러니까 우리 팀에서 동기 둘이 막내인 셈인데 전역한지 반년이 넘었고 슬슬 고참이 될 때도 되었으니 회사에 신입 요원의 배치를 건의해볼까 싶네만.”
“현재 우리 팀의 인원이 부족한 셈입니까? 아니면 저나 제 동기가 부족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냐. 나는 운이 좋은 팀장일세. 속 썩이는 요원 하나 없으니. 자네처럼 진중해서 데스크 워크에 어울리는 요원도 있고 정처럼 민첩한 요원도 있고. 정이 경박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현장에 어울려. 상황 판단이 빠르고 본능에 충실하지. 쾌락주의자인 것 같지만 공사를 흐리는 적은 없어. 우리 팀 요원들이 임무 실패나 기밀 누설을 범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어. 아버지도 우리 팀을 아끼고 있지.”
“그렇다면...?”
“데스크 워크를 혼자 담당하는 자네의 부담이 너무 크지 않나 싶어서 말야. 아무리 회사에 속한 요원이라지만 자넨 대학생이 아닌가. 자네 동기가 도와주기는 하지만 꼼꼼한 데스크 워크와는 거리가 먼 타입이지. 그래서 야근은 자네 혼자의 몫이 되어버리고 말잖아. 현역병 한 명 정도의 충원을 아버지에게 요청할 생각이네.”
“저는 괜찮습니다. 현장에 투입되지 않도록 배려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팀장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네. 그 이상은 없어. 자네와 자네 동기를 보고 있으면 젊은 시절 나하고 내 친구 사이 같아. 아버지 말일세. 하하. 그냥 여기 분위기가 좋고 술과 안주도 맛있으니 그냥 즐기세. 일이야기 따위, 밖에 나와서 하는 건 나도 질색이야.”
조가 긴 맥주잔의 절반을 채 비우기도 전에 팀장은 두 잔째를 주문했다.
“참, 하나만 더 이야기 하자면 정에 대해서는 나도 조심하고 있네. 오버스런 면이 있지만 분명히 팀에는 필요한 친구야. 재작년 11월 2일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둘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도 정도 모두 잘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상황이 악인을 만드는 일이 종종 있지. 정을 너무 원망하지 말게. 참, 대학 생활은 재미있나?”
팀장은 조가 현장에 투입되었다가 아이를 처리하라는 정의 지시를 거부했던 날짜를 정확하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팀장은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냥 그렇습니다.”
조는 대답하며 팀장의 엄청난 기억력에 놀라 경계심이 일었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생에서 가장 재미있어야 하는 시기인데...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조는 일부러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흐음, 자넨 좀 여자 취향이 까다로울 것 같아. 좀 독특하다고 해야 하나.”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여자 친구가 생기면 회사 차를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자네가 쓰게. 전날 미리 나에게 귀띔만 해주게. 일이 있어서 차를 못 쓰는 날이야 우리 팀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자네가 더 잘 알 테니 개념 없는 부탁은 절대 하지 않겠지. 이건 나이든 사람의 노파심인데, 자네 동기는 친구를, 자네는 여자를 조심해야 할 것 같아.”
팀장의 충고는 뜬금없지만 어쩐지 진심이 느껴졌다. 조가 팀장을 바라보았을 때 중년 남자답지 않은 가지런하고 긴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손톱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조는 팀장이 혹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은 사자가 그려진 성냥갑을 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천장에 붙은 TV의 메이저 리그 중계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를 불편해하는 조의 기분을 알았는지 팀장은 가볍게 배를 채운 후 조와 헤어졌다. 팀장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 좋은 미소까지 보였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제이는 시가를 피우며 음울한 재즈를 듣고 있었다. 조는 애시드나 퓨전 계열을 좋아했지만 제이는 이미 죽은 아티스트들의 정통 재즈를 더 좋아했다.
“재미있었냐? 팀장이랑?”
“그냥 그랬어.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와 있으면 불편해.”
“겉으로는 표정 안 드러내면서 잘만 버티더구만.”
“그러니까 속으로는 더 힘든 거지.”
“그러면 여자와 있는 건 편해?”
제이의 물음에 조는 여자들과 어울려 본 적도 거의 없음을 깨닫고는 스스로의 취향이 우습다고 느꼈다.
“아마 내 안의 여성성은 다른 남자들보다 더 강할지도 몰라. 어릴 적 삼국지를 잃으면 가장 멋지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제갈량이었어. 심모원려. 스무 살이 더 많은 유비가 마흔 여덟에 와서 삼고초려해 데려갔던 스물여덟의 제갈량. 새하얀 얼굴에 백우선을 펼친 도도하고 깨끗한 이미지... 삼국지를 잃으면서 내가 제갈량처럼만 될 수 있으면 요절해도 좋다는 상상을 하곤 했었어.”
“넌 마초이즘을 혐오하는군. 하긴 어지간한 여자들보다 더 깔끔 떨고 꼼꼼한 네 녀석이니.”
“삼국지 읽어 봤냐?”
“아니, 별로 당기지 않아. 중국 고전을 읽으면 인간이란 권모술수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아 환멸을 느끼게 돼.”
“그런가.”
“팀장이 뭐 다른 말은 없었어?”
“후임병을 들일까 묻더군.”
“그래서 뭐라고 했어?”
“난 괜찮다고 했어. 사실 다른 사람에게 일시키는 거 싫어. 차라리 내가 다 하는 편이 낫지.”
“데스크 워크에, 전역하고서도 여전히 막내인 네 처지를 보며 팀장이 당연한 생각을 했군. 나야 널 돕고 싶어도 능력 부족이잖아. 데스크 워크는 체질에 안 맞아.”
“그게 너와 정의 공통점이지.”
“뭐야? 그 녀석과 나를 비교하다니.”
제이는 버럭 화를 냈다. 조는 씨익 웃으며 제이를 무마시켰다.
“농담이야. 농담. 내가 싫다고 한 건 인간을 믿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이겠지.”
제이는 조의 말허리를 자르며 덧붙었다.
“맞아.”
“그게 너와 나의 공통점이지.”
“뭐야? 너와 나를 비교하다니?”
조는 정색을 하며 제이를 보고 방금 전 제이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정말 조가 화를 내는 것인가, 하고 아연했던 제이는, 잠시 후 조가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자 따라 웃었다. 조도 큰 소리로 웃었다.
“예.”
팀장이 조와 술자리를 갖자고 한 것은 3일 전이었다. 평소 과묵한 팀장은 팀 회의 시간에 최근 감시 대상에 오른 시민 단체의 변호사와, 그 변호사가 비리를 폭로하기 일보 직전인 고위 판사의 동향을 동시에 감시할 것을 지시했다. 제이와 정이 현장을 전담하고 조가 데스크 워크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현장 일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의 도청이나 녹취를 비롯한 감시 업무는 팀원 모두의 일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팀장은 조를 자신의 사무실에 남겼다. 제이와 정은 밖으로 나갔다. 정은 의아하다는 듯 뒤를 두리번거렸다. 둘만 남자 팀장은 조에게 3일 뒤 저녁 때 술자리를 하자고 제안했다. 팀장은 선약이 있다면 날짜를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세심하게 배려했다. 조는 괜찮다며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팀장은 퇴근하며 조를 데리고 나갔다. 바와 레스토랑을 겸한 고급스런 펍이었다. 라이브 연주자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대학가 술집의 라이브 연주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노래를 잘 했고 그 소리도 지나치게 크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떤가? 회사 일은? 마음에 드나?”
“외람되게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 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자네는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내 궁금했네.”
웨이터가 차갑게 식힌 잔에 이 집의 자랑거리인 하우스 맥주를 담아 왔다. 팀장은 저녁을 겸하는 거라며 안주도 푸짐하게 시켰다. 그릴에 구운 독일식 소시지와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신선한 시저 드레싱의 새우 샐러드였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굳이 이런 걸 묻지 않았던 건 자네가 의무병이었지 때문일세. 복무 기간이 끝나면 전역할 사람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
팀장은 조에게 건배를 권했다. 조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건배했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뭐랄까. 밴드로 따지자면 베이스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은 보컬이나 기타, 혹은 가장 격정적이고 원초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드럼에만 집중하기 마련이지. 사실 베이스 소리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아. 하지만 음악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심장 고동 소리와 같은 베이스가 빠지면 밴드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언제나 불평불만 없이 성실하게 데스크 워크를 해주고 있는 것에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아아, 이런, 이런. 또 나만 말하고 있군. 어서 들게. 배고플 텐데.”
팀장은 오늘 따라 다른 그 어느 때보다 말을 많이 하고 자상하며 친절했다. 조는 이럴 때 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조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와 함께 있으면 불편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기 위래 노력했다. 팀장의 권유 때문에 조는 샐러드에서 새우를 건져 먹었다. 껍데기를 깨끗이 바르고 알맞게 구워져 쫄깃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자네의 성실함이나 빈틈없는 정보 처리 능력에 감탄하고 있었어. 그래서 전역 이후에도 남아주었으면 하고 내심 바라고 있었지. 하지만 솔직히 피 비린내 진동하는 이 일에 남아달라고 말하는 것은 전도유망한 젊은이에게 죄스런 일이라 그러지 못했지. 그런데도 자네는 남아 주었고. 뭐, 자네 동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고맙네. 자.”
팀장은 다시 건배를 권유했고 조는 다시 두 손으로 공손히 건배했다. 팀장은 자신만 말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운 듯 잠시 말을 멈춘 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후 물었다.
“이제 자네도 후임이 필요하지 않나?”
“예?”
“그러니까 우리 팀에서 동기 둘이 막내인 셈인데 전역한지 반년이 넘었고 슬슬 고참이 될 때도 되었으니 회사에 신입 요원의 배치를 건의해볼까 싶네만.”
“현재 우리 팀의 인원이 부족한 셈입니까? 아니면 저나 제 동기가 부족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냐. 나는 운이 좋은 팀장일세. 속 썩이는 요원 하나 없으니. 자네처럼 진중해서 데스크 워크에 어울리는 요원도 있고 정처럼 민첩한 요원도 있고. 정이 경박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현장에 어울려. 상황 판단이 빠르고 본능에 충실하지. 쾌락주의자인 것 같지만 공사를 흐리는 적은 없어. 우리 팀 요원들이 임무 실패나 기밀 누설을 범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어. 아버지도 우리 팀을 아끼고 있지.”
“그렇다면...?”
“데스크 워크를 혼자 담당하는 자네의 부담이 너무 크지 않나 싶어서 말야. 아무리 회사에 속한 요원이라지만 자넨 대학생이 아닌가. 자네 동기가 도와주기는 하지만 꼼꼼한 데스크 워크와는 거리가 먼 타입이지. 그래서 야근은 자네 혼자의 몫이 되어버리고 말잖아. 현역병 한 명 정도의 충원을 아버지에게 요청할 생각이네.”
“저는 괜찮습니다. 현장에 투입되지 않도록 배려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팀장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네. 그 이상은 없어. 자네와 자네 동기를 보고 있으면 젊은 시절 나하고 내 친구 사이 같아. 아버지 말일세. 하하. 그냥 여기 분위기가 좋고 술과 안주도 맛있으니 그냥 즐기세. 일이야기 따위, 밖에 나와서 하는 건 나도 질색이야.”
조가 긴 맥주잔의 절반을 채 비우기도 전에 팀장은 두 잔째를 주문했다.
“참, 하나만 더 이야기 하자면 정에 대해서는 나도 조심하고 있네. 오버스런 면이 있지만 분명히 팀에는 필요한 친구야. 재작년 11월 2일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둘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도 정도 모두 잘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상황이 악인을 만드는 일이 종종 있지. 정을 너무 원망하지 말게. 참, 대학 생활은 재미있나?”
팀장은 조가 현장에 투입되었다가 아이를 처리하라는 정의 지시를 거부했던 날짜를 정확하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팀장은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냥 그렇습니다.”
조는 대답하며 팀장의 엄청난 기억력에 놀라 경계심이 일었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생에서 가장 재미있어야 하는 시기인데...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조는 일부러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흐음, 자넨 좀 여자 취향이 까다로울 것 같아. 좀 독특하다고 해야 하나.”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여자 친구가 생기면 회사 차를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자네가 쓰게. 전날 미리 나에게 귀띔만 해주게. 일이 있어서 차를 못 쓰는 날이야 우리 팀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자네가 더 잘 알 테니 개념 없는 부탁은 절대 하지 않겠지. 이건 나이든 사람의 노파심인데, 자네 동기는 친구를, 자네는 여자를 조심해야 할 것 같아.”
팀장의 충고는 뜬금없지만 어쩐지 진심이 느껴졌다. 조가 팀장을 바라보았을 때 중년 남자답지 않은 가지런하고 긴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손톱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조는 팀장이 혹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은 사자가 그려진 성냥갑을 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천장에 붙은 TV의 메이저 리그 중계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를 불편해하는 조의 기분을 알았는지 팀장은 가볍게 배를 채운 후 조와 헤어졌다. 팀장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 좋은 미소까지 보였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제이는 시가를 피우며 음울한 재즈를 듣고 있었다. 조는 애시드나 퓨전 계열을 좋아했지만 제이는 이미 죽은 아티스트들의 정통 재즈를 더 좋아했다.
“재미있었냐? 팀장이랑?”
“그냥 그랬어.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와 있으면 불편해.”
“겉으로는 표정 안 드러내면서 잘만 버티더구만.”
“그러니까 속으로는 더 힘든 거지.”
“그러면 여자와 있는 건 편해?”
제이의 물음에 조는 여자들과 어울려 본 적도 거의 없음을 깨닫고는 스스로의 취향이 우습다고 느꼈다.
“아마 내 안의 여성성은 다른 남자들보다 더 강할지도 몰라. 어릴 적 삼국지를 잃으면 가장 멋지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제갈량이었어. 심모원려. 스무 살이 더 많은 유비가 마흔 여덟에 와서 삼고초려해 데려갔던 스물여덟의 제갈량. 새하얀 얼굴에 백우선을 펼친 도도하고 깨끗한 이미지... 삼국지를 잃으면서 내가 제갈량처럼만 될 수 있으면 요절해도 좋다는 상상을 하곤 했었어.”
“넌 마초이즘을 혐오하는군. 하긴 어지간한 여자들보다 더 깔끔 떨고 꼼꼼한 네 녀석이니.”
“삼국지 읽어 봤냐?”
“아니, 별로 당기지 않아. 중국 고전을 읽으면 인간이란 권모술수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아 환멸을 느끼게 돼.”
“그런가.”
“팀장이 뭐 다른 말은 없었어?”
“후임병을 들일까 묻더군.”
“그래서 뭐라고 했어?”
“난 괜찮다고 했어. 사실 다른 사람에게 일시키는 거 싫어. 차라리 내가 다 하는 편이 낫지.”
“데스크 워크에, 전역하고서도 여전히 막내인 네 처지를 보며 팀장이 당연한 생각을 했군. 나야 널 돕고 싶어도 능력 부족이잖아. 데스크 워크는 체질에 안 맞아.”
“그게 너와 정의 공통점이지.”
“뭐야? 그 녀석과 나를 비교하다니.”
제이는 버럭 화를 냈다. 조는 씨익 웃으며 제이를 무마시켰다.
“농담이야. 농담. 내가 싫다고 한 건 인간을 믿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이겠지.”
제이는 조의 말허리를 자르며 덧붙었다.
“맞아.”
“그게 너와 나의 공통점이지.”
“뭐야? 너와 나를 비교하다니?”
조는 정색을 하며 제이를 보고 방금 전 제이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정말 조가 화를 내는 것인가, 하고 아연했던 제이는, 잠시 후 조가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자 따라 웃었다. 조도 큰 소리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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