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그 표정은?”

스카라 극장 쪽을 바라보며 명보 극장 앞에서 서있던 제이는 조가 도착하자 힐난하듯 물었다.

“왜?”

“행복에 겨워 죽겠다는 표정이잖아. 여자라도 생긴 거야?”

“그랬으면 좋겠군.”

“상관없어. 들어가자.”

제이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꽁초를 아스팔트 바닥에 내던지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지하의 1관이었는데 영화는 이미 시작한지 10분이나 지나있었다. 조는 제이가 정한 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킨 것이었는데 그것이 영화 시작 10분 후 였던 것이다. 게다가 한 달에 10편 이상 개봉관에서 관람하는 조조차 볼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은 시시한 한국 영화였는데 개봉 첫 주인데도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았다. 제이는 일부러 눈을 피하기 위해 영화가 시작된 이후로 약속을 잡고 관객도 드문 영화를 고른 듯 했다.

제이는 1관 입구의 매점에서 느긋하게 커다란 팝콘과 콜라 두 컵을 샀다. 아직 더운 날씨에 급하게 오느라 목이 말랐지만 김빠진 거대한 콜라를 보니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원래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에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조였지만 오늘의 용건은 영화 관람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어두컴컴한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는 표에 찍힌 자리도 확인하지 않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조도 옆에 앉았다.

“우리가 한현철 일당을 처리한 것이 언제였지?”

제이는 입 속에 팝콘을 잔뜩 집어넣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정확히 6일전이야. 지난 주 목요일.”

“그날 뭐 이상한 거 없었어?”

“정이 너를 쏘려고 했던 거 외에는... 글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나야 죽을 때가 되면 죽겠지.”

“그럼 그것보다 더 이상한 일이 있었단 말야?”

“그날 우리가 처리한 녀석이 총 몇 명이지?”

조는 모니터를 통해 보았던 영상을 떠올렸다.

“팀장이 한현철까지 열, 너하고 정이 아홉... 도합 열아홉이야.”

“강남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깍두기 오야가 고작 열여덟의 똘마니하고만 같이 있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았다. 제이는 한현철이 강남에서 가장 잘 나간다고 했지만 사실 강남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조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고작 스무 명도 안되는 부하와 함께 있다 최후를 맞다니.

“그럼 나머지 똘마니는 어디 있었던 거야?”

“권중호에게.”

권중호는 한현철의 최대 라이벌이었다. 한현철이 목포에서 시작해 밑바닥부터 잔뼈가 굵은 타입이라면 권중호는 기반이 취약한 부산 출신으로 야당과 손잡은 후 급성장했다. 한현철이 잔꾀를 부리지 않는 우직한 타입이라고 한다면 권중호는 정치권력을 등에 지고 상대를 위협하는 야비한 스타일이었다. 제이는 스트로를 소리 내며 빨았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나머지 관객들은 모두 졸고 있는 것 같았다.

“권중호가 이미 한현철의 똘마니들을 접수했지.”

“어떻게?”

“바로 그거야. 권중호는 한현철의 똘마니들에게 너희 오야가 제껴질 테니 내 밑으로 와라, 안 오면 너희도 같은 신세가 된다고 위협한 거야. 덩치만 컸지 머리가 빈 깍두기 녀석들의 판단이야 뻔하잖아.”

조는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언젠가 정이 밤중에 사무실로 술에 취한 채 들어왔을 때 조폭과 술을 마셨다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정이 조의 이불에 토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팀장이 권중호와 연결되어 있다는 거야?”

“연결된 정도가 아냐. 최근에 노인네를 만날 일이 있었어. 노인네 사무실에서였는데 노인네의 비서실장이 내게 묻더군. 도대체 한현철 건은 어떻게 된 거냐고. 노인네 지시가 아니었느냐고 내가 되묻자, 비서 왈, 아니었다는 거야. 결국 강 팀장은 사문회로 호출되었는데 해명하길 자의적으로 저지른 일은 맞지만 그냥 두면 여당에 부담이 될까봐 결행한 것이니 자신의 충심을 이해해달라고 했다는 거야.”

제이는 걸지게 트림했다. 앞쪽에 혀를 들락거리며 진한 키스를 주고받던 커플 중 남자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며 의자 등받이 속으로 파묻혔다. 하던 일을 마저 하려는 것 같았다.

“노인네 방에 들어갔을 때 노인네와 나는 한현철 건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도 노인네가 의심스러워한다는 걸 알았어...”

잘 지내냐는 둥 일상적인 대화가 몇 마디 오가고 제이가 일어나려 하자 아버지가 말했다.

“나를 밟고 올라서고 싶은 거냐?”

“그건 어릴 적부터 소망이었습니다.”

“흠, 그래?”

“하지만 당신을 밟는다면 절대 변죽을 울리지 않고 앞에서 앞통수를 칠 겁니다.”

아버지는 제이의 호언장담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제이가 팀장과 손을 잡고 아버지를 제거하려는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다시 트림했다. 방금 전보다 더욱 큰소리였지만 진한 키스를 주고받던 커플은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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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에도 여전히 원은 김과 어울리지 않았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조는 학교에서는 좀처럼 보인 적이 없는 미소를 띠며 인사하려 했지만 원은 조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아마 어제 교회 앞에 앉아 이야기한 것에 문제가 되었나 싶어 수업 시간에 시계로 원을 보며 깊이 생각했지만 딱히 실수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조는 답답했지만 오히려 원을 다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원은 조에게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조도 원에게 부담 주는 것이 싫어 억지로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초조한 조는 이대로 상황을 내버려두기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면서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조의 의문은 군을 면제 받고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황을 만났을 때 해소되었다. 복학하고 처음 황을 만났을 때에는 류의 얼굴이 스쳐지나가곤 했지만 이제 조도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고 마음속은 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조에게 황은 과에 소문이 좍 퍼졌다고 말했다. 조가 원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고.

“흑심?”

“그래. 학교를 유령처럼 떠돌며 학점 사냥하는 녀석이 후배에게 흑심을 품고 꼬시기 시작했다고 말야.”

지난 주 교회 앞에서 원과 둘이 앉아 대화를 했던 것을 누군가 보았고 뒤에서 수군거리며 퍼져나가다 원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의 원이 그런 것을 견디기 쉬울 리 없었다.

“야, 그건 그렇고 동기들한테 얼굴 좀 보여라. 나 오늘 생일이거든. 꼭 와라.”

그날 조는 황의 생일 술자리에 얼굴을 내밀었다. 동기들은 평소 술자리에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 조를 보며 다들 반가운 척 했다. 조는 일부러 급하게 술을 마시는 척했고 금방 취한 것처럼 보였다. 술이 오르자 당연히 황을 비롯한 동기들은 조에게 원을 꼬시는 것이냐고 물었고 조는 일부러 혀 꼬부라진 말투로 전혀 아니다, 내 타입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제이가 놀라물었다.

“얼씨구, 밖에서 술을 마시고 올 때도 있네?”

“연극 좀 했어. 아, 정말 이런 짓까지 해야 되나?”

“요즘 조라는 인간이 확실히 변하고 있어. 후후.”

“술이 이제서 오른다. 피곤해. 나 잘게.”

조는 어질거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옷을 벗고 샤워한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