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의 바에 앉은 진은 위스키를 거푸 세 잔을 마시고는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가죽 재킷 주머니에서 할리 데이비슨의 로고가 양각된 지포 라이터를 꺼내 양손을 바르르 떨며 간신히 말보로에 불을 붙였다. 겁에 질린 파리한 얼굴이 나름대로 귀여웠다.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하죠?”

그녀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놀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터질 듯한 가슴이 도드라진 진의 새빨간 티셔츠를 보며 갈증이 치밀어 올랐다. 위스키나 물로는 해결되지 않는 갈증 말이다.

“그런데 당신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진은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았다. 대단하다는 말은 칭찬이나 감탄 이외에 냉소적인 의미가 더욱 강했다. 자신의 새 바이크를 산산조각으로 만든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냐는 힐난조였다. 내가 그녀의 목숨을 구했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나 역시 위험한 부류의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알려줄 정보도 있지만 궁금한 게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기자님이라면 기사 이외에 알고 있는 정보가 더 많을 것 같아서요.”

“기자님이라고 하니까 불편한데요.”

“계획 말입니다. 기존의 무기와 전략 개념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었습니다, 라... 당신도 잘 알고 있는 건 아니군요? 하지만 당신도 정부에서 일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제가 알 수 있는 정보는 대단히 제한적인 것입니다. 조직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게 명령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일하고 있어요. 제 밑으로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 신세도 저와 비슷하군요. 데스크에 기사 올리면 뜨는 기사보다 잘리는 기사가 더 많으니. 우리 회사는 데일리 플래닛이 아니거든요.”

“그 잘리는 기사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혹시 당신도 제 입을 막거나 죽이기 위해 제게 접근한 것 아닌가요?”

“그럴 바에는 어제 그 사람들을 죽이는 낭비를 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제가 나타나지 않는 편이 당신을 죽이는 쉬운 길이었죠. 당신과 제가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죽을 뻔 한 걸요.”

그녀는 나의 대답에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최근의 전쟁은 대규모라기보다는 국지전이 위주이죠.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확전을 원하는 나라는 아무도 없고요. 이미 한국 전쟁 때도 맥아더를 제외하면 누구도 확전을 원하지 않았어요.”

맥아더는 줄기차게 핵공격을 주장하다 좌천되었다. 진은 독한 위스키를 야금야금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보다 술을 더 잘 마시는 것 같았다.

“어차피 한국은 비핵화 선언을 한 상태여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어요. 게다가 현 정부는 남북 관계에서 미국을 배제한 독자 노선을 추진했기 때문에 미국의 눈 밖에 난 상태였죠. 그렇다고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핵무기를 뛰어넘는, 그러니까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죠.”

“그래서 생화학 병기를 개발한 거군요?”

“맞아요. 죽음의 폭탄, B4가 되는 거죠. BOMB 死(사). 이 놈을 터뜨리면 노출된 사람들은 한 시간 후에 죽어요. 문제는 그 한 시간 전까지는 멀쩡히 살아 있다가 갑자기 죽는다는 거죠.”

“녹아내립니다. 아이스크림이 땡볕에 이지러지듯 머리에서부터 액체가 되어 녹아버리죠.”

“세상에... 그랬군요. 저는 어떻게 죽는지는 이제껏 몰랐어요. 그럼 그 모습을...?”

“사람 죽는 모습을 여럿 봤지만 그렇게 죽는 건 처음 봤습니다.”

“흐음...”

진은 사람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고 눈동자도 올린 채 나초를 씹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로 유쾌할 것 같지 않는 상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의외로 귀여웠다. 어른의 몸매에 어린 아이의 얼굴을 한 여자였다.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B4 말이에요. 그건 가스가 호흡기를 통해 체내에 흡수되면 혈액의 특정 성분과 결합해 체온을 급상승시켜 인체가 견디지 못하게 만들죠. 과학적인 지식이 짧아서 잘 모르겠지만 세계 최초의 의학 기술이 투입된 것임에는 틀림없어요.”

“이런 이야기를 기사화하려 한 적이 있습니까?”

“아뇨. 박문기 의원 건부터 데스크에서는 기사화할 수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포털에 먼저 올려버렸고 조회수가 올라간 덕분에 기사는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덕분에 편집장은 노발대발했죠. 하지만 이건 박문기 의원 건보다 더 심하군요. 사람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려 죽는다는 기사... 드러지 리포트에나 어울릴 법하군요.”

그녀는 쓸쓸하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내게 건배를 권했고 긴장이 풀린 나는 서서히 취기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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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리며 간신히 정신을 수습해 핸드폰을 열었다.

“잘들어갔어요?그럼쉬세요.”

띄어쓰기를 무시한 진의 메시지였다. 이외에도 제이와 류로부터 부재중 전화 한 통, 그리고 놀랍게도 원으로부터 두 통의 부재중 전화가 걸려 있었다. 원은 어젯밤에 한 번, 오늘 오전에 한 번 걸었다. 나는 전화는커녕 문자 메시지를 보낼 정신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가죽 소파에 드러누워 옆에 깔끔히 개둔 담요를 펼쳐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안방의 침대까지 갈 힘조차 없었다. 쏟아지는 잠을 이제서 한껏 받아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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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의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깼다. 5월에 거실 창문을 꼭 닫고 담요를 뒤집어써서 인지 등에는 땀이 척척했다. 재빨리 일어나 잠자다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최선을 다해 생기 있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야, 지금이 몇 신데 자고 있는 거야?”

비음 섞인 목소리의 류였다. 어제 부재중 전화가 걸렸던 사람들 중에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전화를 해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놀고 있는 왼손으로 잠이 덜 깬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숙녀와 통화하며 하품 소리를 내다니...”

“미안해. 몸이 엉망이야. 술 마시고 토한 것도 대학 졸업 이후 처음인 것 같아.”

“아니, 그렇게 다치고도 과음을 했단 말야?”

“글쎄 말야. 요즘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와라. 감자탕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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