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이틀 뒤 일요일에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나간 나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은 그녀를 20분 동안 기다려 만났다. 정각이 지난 후부터 초조해졌지만 핸드폰으로 확인 전화를 하면 화낼까봐 참았다. 무릎까지 오는 청스커트에 하늘색 스웨이드 단화를 신은 그녀는 보라색 블라우스로 새파랗게 통일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처럼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하얀 피부는 손대지 않아도 매끄러워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매끄러움을 확인하려 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주지는 않았지만 외면하지도 않았다.
“배고프지?”
“밥 먹을 때니까.”
“종로 쪽으로 나가자 괜찮지?”
“마음대로.”
퉁명스러웠지만 2주 만에 만나는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왼손을 잡은 나는 오른팔을 살짝 그녀의 가슴이 닿도록 스쳤다.
“하지 마.”
“그래. 그 표정. 그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니까.”
나는 킥킥거리며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밝게 웃는 것을 보기 힘든 그녀에게 쓴웃음이나마 볼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았다. 봄의 공기는 이유 없이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쉬며, 잠실철교를 건너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바라보았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부부, 봄나들이를 나서는 노인, 데이트를 하는 커플 등 다양했다. 나도 커플에 들어가겠지 하는 생각에 흐뭇했다. 지금 내 옆에는 그녀가 있고 그걸로 충분하다.
을지로 4가에서 지하철 5호선으로 갈아탄 다음 종로 3가에 내려 인사동으로 향했다. 차 없는 거리가 되어 인사동은 보행자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스파게티 전문점에 들어가 뻬스카토레와 오리엔탈 치킨 샐러드를 시켰다.
“이제 시험이 얼마 남았지?”
“다음 주부터. 시험 들어가면 만나기 힘들 거야.”
벌써부터 초치는 소리. 기분이 상했지만 참아야 한다. 샐러드가 먼저 나왔다. 하지만 샐러드를 맛보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녀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샐러드 볼을 포크로 헤집었지만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져 살짝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왼손으로 입을 가린 채 통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밝은 미소를 보였고 나는 눈이 마주칠까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오는 것보다 뻬스카토레가 먼저 나와 식어버리고 있었다. 기분이 상한 나는 아무 말 없이 샐러드와 베스카토레와 먹었고 그녀도 말없이 식사했다. 내가 계산을 하고 나오며 그녀의 왼손을 잡으려 하자 그녀는 손을 뺐다. 걸려온 전화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묻게 될까봐 나는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원은 갤러리와 골동품 샵을 그대로 지나치더니 디자이너 샵으로 들어갔다. 나는 말없이 뒤따랐다. 그녀는 미리 생각해 둔 물건이 있었는지 샵 안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곧바로 검은 바지 정장을 입은 30대 후반의 여성 지배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녀의 왼쪽 어깨로 고개를 내밀며 그녀의 뺨에 내 뺨을 대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피했다. 똑 떨어지는 라인의 원 버튼 재킷을 입은 지배인은 세 종류의 넥타이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지배인은 넥타이가 모두 디자이너 제품이기 때문에 단 하나 밖에 생산되지 않는 한정품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당연히 가격이 비쌌다.
“난 넥타이 필요 없는데.”
나의 말에는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기는커녕 싸늘한 무표정으로 일관하였다. 넥타이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오늘 자신이 입고 나온 옷 색깔과 비슷한, 짙은 파란색의 니트 넥타이를 골랐다. 넥타이에는 파란 색 바탕에 붉은 색으로 기하학적 무늬가 반복되고 있었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녀는 이걸로 할게요, 하고 말하고서는 신용 카드로 계산하며 포장을 기다렸다. 나는 샵의 벽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계산하고 있는 그녀 쪽을 애써 외면했다.
“나 가야 돼.”
샵을 나오자마자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메뉴를 주문할 때 이후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넨 것이, 만난 지 두 시간도 못되어 가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입을 열면 가시 돋친 말이 나올 것 같아 입술에 입을 주며 입이 열리는 것을 애써 참고 혼자 팔짱을 끼며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1분 동안 그녀와 나는 마주선 채 침묵하며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간다.”
그녀는 등을 보이며 가버렸다. 금방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는 자리가 없었다. 상쾌했던 마음은 단 두 시간 만에 비참한 기분에 완패했다. 그녀와 함께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PSP를 챙기지 않아 시간은 더욱 느릿느릿 흘렀다. 어두운 터널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지하철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마 왼쪽부터 시작된 두통은 온몸으로 퍼져 사지의 힘을 빼고 있었다. 지하철안에서 서있을 때에 양손은 PSP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양발로만 중심을 잡고 있는 게 보통이었지만 머리가 아프고 피곤해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기댔다. 꼴사나운 자세였다. 대낮이라 취객으로 보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집 앞 슈퍼마켓에서 초콜릿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서 들어왔다. 번호를 입력하는 디지털 도어록의 여섯 자리 번호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원래 머리로 생각해내는 번호가 아니라 자전거를 타듯이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해 여섯 자리 번호를 입력하고 집에 들어와 양말과 겉옷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타이레놀 두 알을 삼키고는 가죽소파에 드러누웠다. DVD 플레이어에 걸고 ‘용쟁호투’를 걸고는 멍하니 보며 티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커피나 차를 마시지 않기 때문에 티스푼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와 베일리스 칵테일 만들 때를 제외하고는 쓸모가 없다.
랄로 쉬프린이 만든 1970년대 디스코 풍의 메인 테마를 배경으로, 엑스트라로 출연한 홍금보와 싸운 이소룡은 배를 타고 석견이 주최하는 무도장으로 향한다. 이소룡이 지하로 잠입해, 역시 엑스트라로 출연한 성룡을 두들기자 700ml 아이스크림 통은 바닥을 드러냈다. 오손 웰스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에서 차용한 거울방에서의 석견과의 결투는 그보다 앞서 등장하는 쌍절곤 장면보다 재미가 없다. 석견의 액션이 너무 어설프기 때문이다. 석견은 그로부터 16년 후에 출연한 ‘영웅본색 3’의 고집 센 늙은이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나는 이소룡이 거울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DVD 플레이어의 작동을 멈추고 소니의 패널과 야마하의 리시버의 전원도 껐다. 리모콘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서른이 되기 전에 죽으면 이소룡처럼 전설이 될 수 있을까. ‘용쟁호투’의 메인 테마를 우스꽝스럽게 주절거리는 ‘괴짜가족’의 이소룡 패러디 하루마키 료우 선생이 떠올라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가글도 하지 않은 채 잠이 들면 충치가 생길지 모르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잠이 커튼처럼 내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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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말야.”
제이는 왼손에는 던힐을, 오른손으로 생맥주 잔을 쥐고 있었다. 막 녀석의 식도를 거쳐 위로 차가운 생맥주가 들어가고 있었다.
“레이먼드 챈들러야.”
나는 대꾸를 하지 않고 생맥주를 들이켰다. 대학로의 노천 카페에 죽치고 앉아 제이와 나는 대학생처럼 맥주와 마른안주를 먹고 있었다. 벚꽃이 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밤 제이는 나를 불러냈다. 여느 때처럼 제이의 수다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주로 제이가 수다를 떨고 나는 듣기만 했다. 이 일을 시작한 뒤로 나는 점점 더 과묵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읽어 본 적 있어?”
“하루키? 아니면 챈들러?”
“이런, 나는 원류를 묻고 있는 거라고.”
제이는 가볍게 나무라며 절반쯤 남은 던힐 밸런스를 재떨이에 짓눌러 비벼 껐다.
“‘빅 슬립’은 읽어 본 적 있어.”
“호오. 읽어 봤군.”
제이는 감탄했다.
“그래, 어땠는데?”
“글쎄, 난 잘 모르겠던데.”
“뭘 말야?”
“범행 동기도 불분명하고. 사건 해결 과정은 애매하기 짝이 없어. 뭐랄까, 문체는 재기발랄한 데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염세적이야.”
“아직 한 번 밖에 읽지 않아 진수를 모르는 것이겠지.”
“두 번 읽었어. 그런데도 잘 모르겠더라고.”
“흠.”
제이는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손을 떼고 입에 문 채 깊숙이 빨아들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담배 연기가 폐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것을 음미하고 있는 것이리라.
“챈들러의 장편들이 제대로 번역 출간된 게 얼마 되지 않아. 우리나라에는 ‘빅 슬립’, ‘하이 윈도’, ‘안녕 내 사랑’,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 ‘기나긴 이별’의 순서로 출간되었지. 하지만 챈들러가 발표한 순서는 ‘안녕 내 사랑’이 먼저이고 ‘하이 원도’가 그 다음이지. 두 작품의 순서만 유의한다면 나머지 작품은 출간 순서대로 읽으면 돼.”
“나는 차라리 홈즈가 낫던 걸. 코난 도일의 홈즈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명확하다는 것이야. ‘바스커빌 가문의 개’를 봐. 얼마나 인과관계가 치밀한데.”
“홈즈는 한 번만 읽어도 감탄이 나오지만 두 번 이상은 안 읽혀. 하지만 챈들러의 작품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진국이 우러나와.”
세 번째 생맥주 조끼가 바닥나자 제이는 테이블의 벨을 눌러 웨이터를 불러 한 잔을 더 시켰다.
“요즘 얼굴이 엉망이야.”
“그런가?”
“음. 까칠해졌어. 눈가에 피곤이 역력해.”
“요즘은 한동안 일이 없었는데. 집에서 잘 쉬었고 말이지.”
“그렇다면 여자 문제군.”
나는 대답하지 않고 커피땅콩을 입에 넣었다. 이렇게 신기한 물건을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이봐,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버거킹에서 잠시 만났던 노인이 떠올랐다.
“최근 비슷한 질문을 두 번이나 받는군.”
제이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맥주를 홀짝거렸다.
“똑같은 대답을 하자면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난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라고.”
“혹시 이 일을 즐겁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쉽게 생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 난 네가 쉽게 돈을 번다고 하지 않았어. 워커홀릭 말야. 이 일 자체에 재미를 느끼지 않느냐 말이지.”
“재미라... 그런 걸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 난 이런 일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지만 사실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여자가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나?”
“아마도. 하지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흠.”
제이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며 혀를 끌끌거렸다.
“회사에서는 말이지. 네가 조금 더 이 일에 대해 자부심이나 즐거움을 느껴주기를 바라고 있어.”
“자부심을 느낄 만큼 잘나지 않았고 즐거움을 느낄 만큼 뻔뻔하지 못해.”
“그게 네가 최고가 될 수 없는 이유야. 넌 너무 정확해. 이성적이지. 하지만 이 일을 즐기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어. 폭력이 자신과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잖아.”
“난 실수하지 않고 완벽한 게 좋아. 그러면 회사에서 최고는 이 일을 즐기고 있는 뻔뻔스런 타입의 녀석이라는 말이군.”
제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돌리지 말고 꺼내 놓으시지.”
“하하. 네 눈치에는 못 당해. 알았어. 알았어.”
제이는 메모리 스틱을 꺼내 놓고 웃으며 일말의 경계심도 없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펍의 손님들을 살펴보니 혼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들 둘 이상의 일행들이었다. 한 쪽 벽에는 대형 스크린으로 한국 프로야구 경기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걸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각자 자신의 술친구들과 큰 목소리로 떠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어웨이 경기가 비로 취소되었나보다.
“이번 일은 네가 즐겼으면 좋겠어.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이거든.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아. 그냥 영화 찍거나 게임한다고 생각해줘.”
“배고프지?”
“밥 먹을 때니까.”
“종로 쪽으로 나가자 괜찮지?”
“마음대로.”
퉁명스러웠지만 2주 만에 만나는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왼손을 잡은 나는 오른팔을 살짝 그녀의 가슴이 닿도록 스쳤다.
“하지 마.”
“그래. 그 표정. 그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니까.”
나는 킥킥거리며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밝게 웃는 것을 보기 힘든 그녀에게 쓴웃음이나마 볼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았다. 봄의 공기는 이유 없이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쉬며, 잠실철교를 건너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바라보았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부부, 봄나들이를 나서는 노인, 데이트를 하는 커플 등 다양했다. 나도 커플에 들어가겠지 하는 생각에 흐뭇했다. 지금 내 옆에는 그녀가 있고 그걸로 충분하다.
을지로 4가에서 지하철 5호선으로 갈아탄 다음 종로 3가에 내려 인사동으로 향했다. 차 없는 거리가 되어 인사동은 보행자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스파게티 전문점에 들어가 뻬스카토레와 오리엔탈 치킨 샐러드를 시켰다.
“이제 시험이 얼마 남았지?”
“다음 주부터. 시험 들어가면 만나기 힘들 거야.”
벌써부터 초치는 소리. 기분이 상했지만 참아야 한다. 샐러드가 먼저 나왔다. 하지만 샐러드를 맛보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녀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샐러드 볼을 포크로 헤집었지만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져 살짝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왼손으로 입을 가린 채 통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밝은 미소를 보였고 나는 눈이 마주칠까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오는 것보다 뻬스카토레가 먼저 나와 식어버리고 있었다. 기분이 상한 나는 아무 말 없이 샐러드와 베스카토레와 먹었고 그녀도 말없이 식사했다. 내가 계산을 하고 나오며 그녀의 왼손을 잡으려 하자 그녀는 손을 뺐다. 걸려온 전화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묻게 될까봐 나는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원은 갤러리와 골동품 샵을 그대로 지나치더니 디자이너 샵으로 들어갔다. 나는 말없이 뒤따랐다. 그녀는 미리 생각해 둔 물건이 있었는지 샵 안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곧바로 검은 바지 정장을 입은 30대 후반의 여성 지배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녀의 왼쪽 어깨로 고개를 내밀며 그녀의 뺨에 내 뺨을 대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피했다. 똑 떨어지는 라인의 원 버튼 재킷을 입은 지배인은 세 종류의 넥타이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지배인은 넥타이가 모두 디자이너 제품이기 때문에 단 하나 밖에 생산되지 않는 한정품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당연히 가격이 비쌌다.
“난 넥타이 필요 없는데.”
나의 말에는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기는커녕 싸늘한 무표정으로 일관하였다. 넥타이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오늘 자신이 입고 나온 옷 색깔과 비슷한, 짙은 파란색의 니트 넥타이를 골랐다. 넥타이에는 파란 색 바탕에 붉은 색으로 기하학적 무늬가 반복되고 있었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녀는 이걸로 할게요, 하고 말하고서는 신용 카드로 계산하며 포장을 기다렸다. 나는 샵의 벽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계산하고 있는 그녀 쪽을 애써 외면했다.
“나 가야 돼.”
샵을 나오자마자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메뉴를 주문할 때 이후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넨 것이, 만난 지 두 시간도 못되어 가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입을 열면 가시 돋친 말이 나올 것 같아 입술에 입을 주며 입이 열리는 것을 애써 참고 혼자 팔짱을 끼며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1분 동안 그녀와 나는 마주선 채 침묵하며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간다.”
그녀는 등을 보이며 가버렸다. 금방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는 자리가 없었다. 상쾌했던 마음은 단 두 시간 만에 비참한 기분에 완패했다. 그녀와 함께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PSP를 챙기지 않아 시간은 더욱 느릿느릿 흘렀다. 어두운 터널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지하철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마 왼쪽부터 시작된 두통은 온몸으로 퍼져 사지의 힘을 빼고 있었다. 지하철안에서 서있을 때에 양손은 PSP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양발로만 중심을 잡고 있는 게 보통이었지만 머리가 아프고 피곤해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기댔다. 꼴사나운 자세였다. 대낮이라 취객으로 보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집 앞 슈퍼마켓에서 초콜릿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서 들어왔다. 번호를 입력하는 디지털 도어록의 여섯 자리 번호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원래 머리로 생각해내는 번호가 아니라 자전거를 타듯이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해 여섯 자리 번호를 입력하고 집에 들어와 양말과 겉옷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타이레놀 두 알을 삼키고는 가죽소파에 드러누웠다. DVD 플레이어에 걸고 ‘용쟁호투’를 걸고는 멍하니 보며 티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커피나 차를 마시지 않기 때문에 티스푼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와 베일리스 칵테일 만들 때를 제외하고는 쓸모가 없다.
랄로 쉬프린이 만든 1970년대 디스코 풍의 메인 테마를 배경으로, 엑스트라로 출연한 홍금보와 싸운 이소룡은 배를 타고 석견이 주최하는 무도장으로 향한다. 이소룡이 지하로 잠입해, 역시 엑스트라로 출연한 성룡을 두들기자 700ml 아이스크림 통은 바닥을 드러냈다. 오손 웰스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에서 차용한 거울방에서의 석견과의 결투는 그보다 앞서 등장하는 쌍절곤 장면보다 재미가 없다. 석견의 액션이 너무 어설프기 때문이다. 석견은 그로부터 16년 후에 출연한 ‘영웅본색 3’의 고집 센 늙은이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나는 이소룡이 거울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DVD 플레이어의 작동을 멈추고 소니의 패널과 야마하의 리시버의 전원도 껐다. 리모콘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서른이 되기 전에 죽으면 이소룡처럼 전설이 될 수 있을까. ‘용쟁호투’의 메인 테마를 우스꽝스럽게 주절거리는 ‘괴짜가족’의 이소룡 패러디 하루마키 료우 선생이 떠올라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가글도 하지 않은 채 잠이 들면 충치가 생길지 모르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잠이 커튼처럼 내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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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말야.”
제이는 왼손에는 던힐을, 오른손으로 생맥주 잔을 쥐고 있었다. 막 녀석의 식도를 거쳐 위로 차가운 생맥주가 들어가고 있었다.
“레이먼드 챈들러야.”
나는 대꾸를 하지 않고 생맥주를 들이켰다. 대학로의 노천 카페에 죽치고 앉아 제이와 나는 대학생처럼 맥주와 마른안주를 먹고 있었다. 벚꽃이 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밤 제이는 나를 불러냈다. 여느 때처럼 제이의 수다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주로 제이가 수다를 떨고 나는 듣기만 했다. 이 일을 시작한 뒤로 나는 점점 더 과묵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읽어 본 적 있어?”
“하루키? 아니면 챈들러?”
“이런, 나는 원류를 묻고 있는 거라고.”
제이는 가볍게 나무라며 절반쯤 남은 던힐 밸런스를 재떨이에 짓눌러 비벼 껐다.
“‘빅 슬립’은 읽어 본 적 있어.”
“호오. 읽어 봤군.”
제이는 감탄했다.
“그래, 어땠는데?”
“글쎄, 난 잘 모르겠던데.”
“뭘 말야?”
“범행 동기도 불분명하고. 사건 해결 과정은 애매하기 짝이 없어. 뭐랄까, 문체는 재기발랄한 데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염세적이야.”
“아직 한 번 밖에 읽지 않아 진수를 모르는 것이겠지.”
“두 번 읽었어. 그런데도 잘 모르겠더라고.”
“흠.”
제이는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손을 떼고 입에 문 채 깊숙이 빨아들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담배 연기가 폐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것을 음미하고 있는 것이리라.
“챈들러의 장편들이 제대로 번역 출간된 게 얼마 되지 않아. 우리나라에는 ‘빅 슬립’, ‘하이 윈도’, ‘안녕 내 사랑’,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 ‘기나긴 이별’의 순서로 출간되었지. 하지만 챈들러가 발표한 순서는 ‘안녕 내 사랑’이 먼저이고 ‘하이 원도’가 그 다음이지. 두 작품의 순서만 유의한다면 나머지 작품은 출간 순서대로 읽으면 돼.”
“나는 차라리 홈즈가 낫던 걸. 코난 도일의 홈즈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명확하다는 것이야. ‘바스커빌 가문의 개’를 봐. 얼마나 인과관계가 치밀한데.”
“홈즈는 한 번만 읽어도 감탄이 나오지만 두 번 이상은 안 읽혀. 하지만 챈들러의 작품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진국이 우러나와.”
세 번째 생맥주 조끼가 바닥나자 제이는 테이블의 벨을 눌러 웨이터를 불러 한 잔을 더 시켰다.
“요즘 얼굴이 엉망이야.”
“그런가?”
“음. 까칠해졌어. 눈가에 피곤이 역력해.”
“요즘은 한동안 일이 없었는데. 집에서 잘 쉬었고 말이지.”
“그렇다면 여자 문제군.”
나는 대답하지 않고 커피땅콩을 입에 넣었다. 이렇게 신기한 물건을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이봐,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버거킹에서 잠시 만났던 노인이 떠올랐다.
“최근 비슷한 질문을 두 번이나 받는군.”
제이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맥주를 홀짝거렸다.
“똑같은 대답을 하자면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난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라고.”
“혹시 이 일을 즐겁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쉽게 생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 난 네가 쉽게 돈을 번다고 하지 않았어. 워커홀릭 말야. 이 일 자체에 재미를 느끼지 않느냐 말이지.”
“재미라... 그런 걸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 난 이런 일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지만 사실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여자가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나?”
“아마도. 하지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흠.”
제이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며 혀를 끌끌거렸다.
“회사에서는 말이지. 네가 조금 더 이 일에 대해 자부심이나 즐거움을 느껴주기를 바라고 있어.”
“자부심을 느낄 만큼 잘나지 않았고 즐거움을 느낄 만큼 뻔뻔하지 못해.”
“그게 네가 최고가 될 수 없는 이유야. 넌 너무 정확해. 이성적이지. 하지만 이 일을 즐기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어. 폭력이 자신과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잖아.”
“난 실수하지 않고 완벽한 게 좋아. 그러면 회사에서 최고는 이 일을 즐기고 있는 뻔뻔스런 타입의 녀석이라는 말이군.”
제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돌리지 말고 꺼내 놓으시지.”
“하하. 네 눈치에는 못 당해. 알았어. 알았어.”
제이는 메모리 스틱을 꺼내 놓고 웃으며 일말의 경계심도 없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펍의 손님들을 살펴보니 혼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들 둘 이상의 일행들이었다. 한 쪽 벽에는 대형 스크린으로 한국 프로야구 경기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걸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각자 자신의 술친구들과 큰 목소리로 떠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어웨이 경기가 비로 취소되었나보다.
“이번 일은 네가 즐겼으면 좋겠어.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이거든.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아. 그냥 영화 찍거나 게임한다고 생각해줘.”
안녕하십니까? SF 소설을 즐겨 읽고 습작으로 쓰고 있는 연재할 곳을 찾아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문과의 느낌이군요.
그.. 동경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시각. 그것이 주는
미묘한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