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집을 뒤집듯이 청소했다. 필터를 깨끗이 비워 흡입이 잘되는 진공청소기로 구석구석의 먼지와 머리카락을 빨아들였다. 책장과 dvd장, 소파와 마룻바닥을 일일이 무릎을 꿇고 손으로 걸레질했다. 청소를 시작하기 전 세탁기에 넣어둔 속옷 빨래를 꺼내 베란다에 널고, 걸레를 빠는 동안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한동안 머리에 찬물을 맞으며 가만히 서있었다. 뭔가 좋은 생각이 나든가, 최소한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소파에 앉아 ‘중경삼림’ dvd를 플레이어에 넣고 걸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아무리 우울하고 머릿속에 복잡해도 ‘중경삼림’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양조위와 왕정문의 러브 스토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브루스 윌리스를 죽여버리겠다’며 금성무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장면만 봐도 웃음이 터져 나오곤 했다. 임청하가 떼로 달려드는 똘마니들을 피해 구룡의 밤거리를 달리다 지하철에 올라타는 장면은 언제나 통쾌했다. 침대에서 밤새 뒤척이는 임청하를 두고 경극을 보며 샐러드를 먹어치우는 금성무를 보며 쿨하다는 것은 저런 것이라고 늘 감탄했다.

하지만 재생한 지 10분도 못되어 dvd를 정지시켰다. 도저히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왱왱거리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 않아 박스 채 보관중이던 조니 워커 블루를 열고 마셨다. 하지만 마실수록 취하기는커녕 맹물을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갈증만 심해졌다.

혹시나 싶어 기다리고 있는 제이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제이가 내 일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연락이 없다는 것은 제이가 도울 수 없는 상황이거나 아니면 도울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제이 쪽은 일찌감치 단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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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말에 노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의 침묵 속에서 노인은 뭔가 계산하는 것 같았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노인의 핸드폰 너머에서는 루빈스타인이 연주한 쇼팽의 녹턴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했지만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한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노인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약속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노인을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버거킹 2층에서 노인은 커피를 앞에 둔 채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나는 그의 사색을 깨는 것이 미안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아도 노인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앞에 앉았지만 나를 보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창밖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내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군.”

“사람 일이란 한치 앞도 못 보는 것이니까요.”

“스물아홉에는 어울리지 않는 대사군.”

“그런 가변성을 즐기고 있습니다. 어릴 적 학교 앞 문방구에서 뽑기를 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좋은 패가 들어올 때도 있고 나쁜 패가 들어올 때도 있지. 그런데 자네는 나쁜 패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나쁜 패가 들어오고 나서 생각할 시간이라도 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노인은 그제야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노인은 연노랑색의 폴로 셔츠와 카키색 치노 바지에 회색 스웨이드 로퍼를 신고 있었다. 셔츠와 바지에는 주름살 하나 없었는데 도대체 누가 다림질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다림질이 싫어서 다려야 하는 옷은 절대 입지 않는다.

“말해보게. 자네가 필요한 것을.”

“사람 하나 살리고 싶습니다.”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아 다행이군. 자네가 원하는 것은 알고 있어. 여의사 말이겠지.”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노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살리고 싶어 하는데 그쯤 못 들어 주겠나.”

노인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들고 마시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 살리는 김에 하나 더 살리세.”

“네?”

“백유석을 살려오게.”

나는 흠칫 놀랐다. 어느 정도 무리한 요구를 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라고 요구해도 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인이 내게 원하는 것이 내 일을 스스로 포기하고 회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거부의 입장을 표하는 것이 될 줄은 몰랐다.

“왜?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취할 생각이었나? 어린 딸의 양부가 될 수 있겠나?”

“...!”

나는 분노한 표정으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원래 대상은 백유석 뿐이지만 어차피 류를 살리기 위해서는 백유석을 살려야 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류의 딸도 살려야 했다. 백유석이 죽으면 류와 아이도 죽으니, 백유석을 살려야만 류와 아이도 살 수 있었다. 따라서 류를 살리기 위해서 백유석을 살려야 한다. 백유석만 죽고 류가 살아남아 내가 어쩔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정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군. 알겠네.”

노인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나에게 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백유석과 B4 계획은 어떤 관계입니까?”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목례를 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서류봉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것으로 과연 류를 살릴 수 있을까, 라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다.  

종로 거리로 나왔을 때 나는 선글라스를 썼다. 이미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선글라스를 낀 사람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발걸음을 지하철역으로 옮기다 핸드폰이 울려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상대는 말이 없었지만 나는 숨결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내 품에서 쌔근쌔근 잠들었을 때의 원의 숨결을 잊을 리 없었다.

“말해. 듣고 있으니.”

“.....”

“기껏 전화해 놓고 말이 없어. 나한테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어?”

“있잖아... 나...”

“알아.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것이겠지.”

“......”

“그래서 나랑 관두고 싶다는 것일 테고. 바보가 아닌 이상 내가 모를 리 있겠어?”

원은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익숙한 그녀의 습관을 비추어보면 내 말에 대한 침묵은 항상 나쁜 쪽으로 들어맞았다.

“도대체 뭐하는 자식이야? 같은 학원에서 일하는 자식인가? 그 자식 얼굴 한 번 보자. 얼마나 잘 난 인간인지 궁금한데. 아, 아니다. 관둬.”

나는 종로 2가에서 종각역 쪽으로 걸으며 주변의 시선이 두려워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종각역 앞에 도달했을 때에는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자연스레 목소리가 커져 있었다. 원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커져버린 내 목소리에 그녀의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분명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사랑을 효율적으로 하려 하지마.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한 포인트만 움직여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좋아. 나도 지겹다고! 때려치우자.”

그녀는 일방적으로 뚝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광대뼈를 한껏 눈 쪽으로 치켜 올리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내가 쓴 입맛을 다시기도 전에 다시 전화가 울렸다.

“뭐야? 그만해! 그만 좀 하라니까!”

“미안하군요. 번지수가 틀렸어요.”

진의 나긋나긋한 낮은 목소리에는 미소가 실려 있었다. 나는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었지만 김빠지는 느낌과 함께 멋쩍게 되어버렸다.

“자꾸 신용카드에 가입하라고 전화가 와서요. 죄송합니다.”

“그런 것에 화내실 분이 아니죠.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대신 술 한 잔 사세요.”

나는 될 대로 되라는 기분에 장난기가 겹쳤다.

“좋습니다. 제가 한 잔 사죠.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진은 잠시 망설였다.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네 시 반이었다. 아직 그녀의 퇴근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이 남아 있었고 칼퇴근이 어려운 기자라는 직업의 속성상 실제 퇴근 시간은 그보다 늦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승낙했다.

“좋아요. 지금 나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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