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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그때 2차 창작물이 작품 설정을 잘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글을 썼죠. 나중에 생각해 봤지만 그건 역시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저도 납득하지
못하는 생각을 과격한 말투로 게시판에 올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닉네임을 바꿨습니
다. 마라파순이란 닉네임으로 이 게시판에 검색하시면 예전 글이 나옵니다)
사실 2차 창작물이 꼭 원작의 설정을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고, 오히려 거기에 집착하다
작품과 팬덤을 망치는 일도 많았죠. 당연한 일인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돌아보았습니
다... 씁쓸한 진실이 보이더군요.
그것은 제가 그때(그리고 평소에) 비난한 사람들이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더란 것이었
습니다. 원래 [새로 유입된 팬들이 작품을 망친다], [뉴비가 작품 설정을 무시한다]
이런 주장이 많이 나오던 게 동방쪽 팬덤입니다. 2차 창작물이 주목을 많이 받다 보니
작품 자체보다 2차 창작물 때문에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인데요, 기존의 팬들
은 이런 분위기에 상당히 거세게 반응했습니다. 새로운 팬들이 그만큼 좋지 않은 태도
를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만.
여기서 다른 팬덤하고 좀 다른 상황이 일어나는데... 기존의 팬과 새로운 팬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면 대개 성향에 따라 팬덤이 나뉘곤 하죠. 그런데 여기서는 기존 팬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집니다. 대립을 하다 한쪽이 이긴 겁니다. 그럼 어떤 주장이 받아들여
졌는가? [작품에 대한 예의를 지켜라]는 거죠.
얼핏 듣기에 그럴 듯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파고 들면 얘기가 이렇습니다.
"이 정도는 해야 작품의 팬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 팬덤의 규범으로 자리
잡은 겁니다. 예를 들어 작품 자체가 아니라 2차 창작물로 인해서 작품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 설정을 알고 작품을 직접 플레이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
지게 되었습니다. 작품이 재밌다거나 흥미로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니고요.
...그래서 이 기준에 안 따르는 사람은 상당히 욕을 먹습니다. 간접적으로 그런 성향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용서받기 어렵죠. 부끄럽지만 저도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
습니다. 때문에 이전 같은 글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상하게 느꼈던 점은 기존의 팬들도 작품에 썩 관심이 많아 보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작품에 대한 팬덤의 이해도가 꽤 낮아요. 위에서
말한 규범에도 작품에 대한 흥미의 가능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죠. 작품을 즐기는 고참
팬들의 생각이라기엔 뭔가 어색하지 않습니까?
이런 모순점 때문에 팬덤 안의 분위기를 한참 동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당황스러운
사실을 몇 가지 발견했는데, 그 중 하나는 2차 창작물에 대한 팬들의 모순된 태도였습니다.
작품의 설정 등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새로 유입된 팬들과 2차 창작자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자기가 설정 등을 무시하는 부분이 있으면 "자유롭게 즐길 권리가 있다"고 대꾸한다는 것이
었죠. 그 근거로 작품의 제작자가 설정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즐기라고 했던 말을 드는
데... 제작자가 했던 말에는 당연히 2차 창작물에만 관심이 있던 뉴비들도 포함됐겠죠. 자기
들이 배척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또 하나는 정말 괴상한 부분인데, 본인들은 설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2차 창작을 하며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설정이 공개되면 어떻게 하는가? 제작자가 자기
들의 2차 창작을 부정한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하죠. 게다가 그 부정한다는 부분도 따지고
보면 작품의 맥락에 부합되는 내용일 뿐더러,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부분인 경우가 대
부분입니다. 이런 경우는 특히 볼 때마다 당황스럽더군요. 설정이 없을 때만 구애받지 않는
다는 걸까요?
그들이 말하는 예의? 그런 건 자의적인 기준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큼 대립이 심한
팬덤에서도 그런 기준으로 남한테 행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주세기 건담 팬들이 밀레니엄
건담 팬들에게 예의를 앞세워 고전 작품을 보라고 한다거나, 워해머의 미니어처 게임 플레이어
가 PC 게임 플레이어에게 미니어처 게임을 강요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마치 동방의 팬들은, 제재받아야 할 건 상대방이고 자기들은 이미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자기가 자기 기준에 부합되는지도 의심스러운데 말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면, 본인
도 그 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이 팬들이 그 점을 의식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 사실이 영구한 독소가 될 것 같군요.
어쩌면 특정한 즐거움을 위해서 이 팬들은 하나의 작품을 존중하는 척 하며 박제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에 대해 잘 모르던 때에도, 팬들이 작품을 존중하라고 외치지만
정작 작품이 어떻게 좋은가 설명하지 않는 모습에 의문을 느꼈죠.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은 원래 별 거 없으니 맘대로 해도 된다고 하지만... 자기가 모르는
건 없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예전에 잘못 썼던 글을 돌이키는 겸, 이런 문화도 있다는 의미에서 글을 써봤습니다. 긍정적이
든 부정적이든 사이트 취지에 맞는 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딱히 팬덤에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닐거에요...
이중잣대...혹은 그 이상으로 갈라진, 모순된 행동을 보이는건.. 한 개인 내에서도 이미 충분히 발생하는데 집단에서야....흔하게 보이는 일이죠.
이중잣대와 자기 합리화 인지부조화 같은 것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향이겠죠.
우리는 어떤 기준에 맞춰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인다고 믿지만
사실 그건 우리 의식 저 아래 깔려 있는 무언가 충동적인 지침에 근거한 것일지도요.
인간은 그런 존재인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에 맞춰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인다고 믿지만
사실 그건 우리 의식 저 아래 깔려 있는 무언가 충동적인 지침에 근거한 것일지도요.
인간은 그런 존재인 거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래도 동호인들끼리는 태도가 일관되니까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거든요. 근데 그 동호인들이 요상한 이중잣대를 계속해서
애용한다면? 아주 미칩니다. 이것 때문에 몇 년이나 골치를 썩었는지. 으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