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필드 3>의 병과 중 정찰병(recon)은 흔히 말하는 저격수 포지션입니다. 주무장이 드라구노프나 M40 같은 반자동 저격소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찰병은 비단 저격만 하는 게 아니라 상대편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모션 센서가 있어서 동선을 확인할 수도 있고, 마이크로 항공기를 띄워서 몰래 감시할 수도 있죠. 저는 처음에 정찰병에게 이런 기능이 있는 걸 보고 의아했으나 현실의 저격수도 정찰 능력이 뛰어난 편입니다. 효과적인 위장으로 적에게서 모습을 감출 뿐만 아니라 최첨단 광학장치로 먼 거리에서도 자세히 적 내부를 관측하니까요. 게임 속 정찰병은 저격수의 이런 정찰능력을 더욱 확대한 병과일 테고, 그래서 스나이퍼나 샤프 슈터가 아니라 정찰병이라고 이름 지었나 봅니다.

 

저격수의 정찰 능력이 돋보이는 창작물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태양의 눈물>이 퍽 인상 깊었습니다. 나이지리아 반군이 마을에서 인종학살을 벌이는데, 이를 네이비 실이 막는 전개였죠. 네이비 실의 숫자가 적은 이상, 적의 위치를 확실하게 파악해서 정확히 제압해야 했습니다. 이때 저격수(지정사수)들이 마을 외곽에서 몸을 숨기고 망원경으로 마을 상황을 관측하는 동시에 위험 요소를 제거했죠. 단순히 장거리 사격만 하는 게 아니라 진압팀에게 상황 보고하는 역할이 컸던 터라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 이 영화의 배경이 정글이라 저격수가 다른 전투에서 활약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는 것도 한 몫 했지만요. 하나 더 추가하면, 마크 왈버그가 주연한 <더블 타겟> 역시 2 1조의 저격팀 중 관측병의 역할을 잘 살린 작품이었고요.

 

다만, 대중적인 저격수의 이미지는 정찰 및 관측보다 장거리 사격에 치우친 면이 있습니다. 멀리서 총을 쏴 목표물을 한 방에 제거하는 일이 저격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죠. 실제 작전이나 훈련에서는 망원경으로 관측만 하다 방아쇠 한 번 안 당기고 끝나는 경우도 있는데도요. 또한 목표를 저격하는 것만큼 위장 능력도 중요해 최적의 타이밍이 올 때까지 인내하는 지구력도 필수적입니다. 사격술만 탁월하고 제대로 위장하지 못한다면 반쪽 짜리 저격수가 될 우려도 있죠. 요즘 저격 소총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결국 목표를 맞추기 위해서는 1km 안으로 접근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흔한 저격수 이미지는 관측이나 위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찰은 전투나 암살만큼 극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중세 판타지 역시 이런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판타지에서는 저격수 역할을 주로 궁사, 사냥꾼, (사격 위주의) 레인저 계열에게 맡깁니다. 저격수는 장거리 사격을 하므로 이들 클래스에 잘 어울린다는 거죠. 마법사도 장거리 캐스팅이 가능합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주문을 외우는 거지 무기를 발사하는 게 아니라 저격수로 안 쳐주는 듯합니다. 그래서 판타지의 궁사(레인저) = SF/밀리터리의 저격수란 공식이 굳어졌고, 여러 매체나 창작물에서 그렇게 묘사하곤 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레골라스가 초장거리 궁술을 보여줬을 때도 그런 말이 나왔고, (중세 판타지는 아니지만) <최종병기 활>의 남이를 저격수에 비유하는 프로그램도 있었죠. 로빈 후드나 빌헬름 텔이야 이런 쪽에서 독보적인 캐릭터이고요.

 

허나 이런 캐릭터들에게는 2% 부족한 게 있으니 관측이 안 된다는 겁니다. 장거리 사격 하나만 놓고 보면 궁사나 레인저를 저격수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관측까지 따지면 좀 미묘합니다. 관측을 하려면 뭔가 장비가 필요한데, 판타지의 궁사는 그냥 맨눈으로 보고 쏩니다. 눈이 다른 이들에 비해 밝을 수는 있겠죠. 그렇다고 먼 거리의 물체를 눈 앞에서 보는 것처럼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반지전쟁>에 나온 레골라스는 인간의 시야가 미치기엔 너무 먼 곳도 본다고 합니다만. 이는 엘프라는 종족 특성 덕분이죠. 저격수라서 관측을 하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눈이 밝기에 활을 잘 쏘는 겁니다. 레골라스가 아니라 칼이나 도끼를 쓰는 엘프가 오더라도 관측은 똑같이 하겠죠. 그렇다고 활에 조준경을 달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드워프 기술로 만든 조준경 같은 게 있다 치더라도 애초에 활이 조준경 보고 쏘는 물건도 아니잖아요.

 

사냥꾼이나 레인저는 마법으로 먼 거리를 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따지면 관측은 성직자나 마법사가 훨씬 유리하죠. 신탁이나 예언으로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상으로도 더 멀리 볼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사냥꾼이나 레인저를 저격수로 쳐주는 것도 사격무기를 이용하기 때문인데, 이왕이면 관측도 무기(장비)를 활용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혹은 동물을 이용해 관측하기도 합니다. 독수리를 하늘에 띄워서 정찰시키는 건데, 마이크로 항공기를 띄워서 정찰하는 <배틀필드 3>랑 어찌 보면 유사해 보이긴 합니다. 문제는 독수리가 관찰한 결과를 인간에게 전달할 매개체가 없다는 거죠. 마이크로 항공기야 카메라가 있지만, 독수리는 그게 없으니. 이것도 뭐, 마법으로 인간과 독수리의 시야가 공유된다고 하면 됩니다. 판타지에서 과학은 마법이 대체하니까요. 마법 위주로만 흘러가는 게 아쉽지만.

 

설사 장거리 관측이 가능하다 해도 관측거리를 사정거리가 못 따라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궁사나 사냥꾼의 무기는 아무리 좋아야 활이나 십자궁인데, 이것들의 사정거리야 뻔합니다. 몇 백 미터는 고사하고 몇 십 미터라도 제대로 날아간다면 다행이죠. 심지어는 인간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의 목표도 사정거리가 안 되어 맞추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는 관측과 동시에 목표 제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격수의 관측이 용이한 이유는 위기 상황이나 돌발 상황에서 즉시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병과라면 망원경으로 관측하다 사격 타이밍이 늦거나 아예 사격을 못하는 일도 생기겠죠. 허나 저격수는 항시 망원경으로 목표를 주시하다 명령만 떨어지면 그 즉시 목표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궁사나 사냥꾼은 이게 안 되죠.

 

위장 역시 그러한데, 궁사나 사냥꾼이 항상 모습을 감추는 건 아닙니다. 그나마 레인저 계열은 은신을 자주 하고,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도 은신이 특기라고 하죠. 하지만 모든 레인저가 이 특징을 따라가는 건 아니고, 그 중에는 무조건 장거리 사격만 하는 레인저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냥꾼 역시 숲에서 활동한다는 점 때문인지 몸을 숨기는 데 일가견이 있긴 합니다. 허나 이름만 사냥꾼이고 하는 짓은 그냥 사격 레인저와 다를 바 없는 캐릭터도 많아요. 게다가 해당 세계관에서 사냥꾼보다 더 뛰어난 은신 능력을 자랑하는 클래스가 많다는 것도 문제. 가량, 암살자/도적 클래스와 사냥꾼 클래스가 잠복하면, 사냥꾼의 은신 능력은 암살자/도적에 훨씬 못 미치죠. 궁사는 아예 은신할 거리가 없는 클래스입니다. 저격수가 길리 슈트로 대표되는 위장 능력을 자랑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죠.

 

물론 SF/밀리터리의 저격수와 중세 판타지의 궁사/사냥꾼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건 무리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궁사나 사냥꾼, 레인저 계열은 장거리 사격만 가능할 뿐 적진을 탐색하는 게 어렵다는 겁니다. 그럴 만한 장비도, 능력도 없습니다. 애초에 주 무대가 좁디 좁은 던전이기도 하고요. 차라리 저격수의 역할과 비슷한 쪽이라면 암살자나 도적/로그, (사격이 아니라) 은신 위주의 레인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들은 몸을 감출 수 있으므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내부를 염탐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히 알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일격에 목표를 처치할 수도 있어요. 이런 캐릭터의 좋은 사례로 <포가튼 렐름>에 나오는 암살자 아르테미스 엔트레리가 있습니다. 관측, 위장 그리고 막강한 일격까지 아르테미스의 활동은 저격수와 상당히 흡사합니다.

 

뒷통수를 치는 암살자와 초장거리 사격을 하는 저격수는 언뜻 보기에 닮은 점이 없습니다. 칼은 최단거리에서 찔러야 하는 무기이고, 저격소총은 몇 백 미터 밖에서도 맞출 수 있는 장비니까요. 하지만 각 세계관의 위치나 역할에서만 보자면, 둘은 닮은꼴이라 할만 합니다. 저는 이게 게임에 아주 잘 나타난다고 보는데, 실제로 유저들은 판타지 게임에서는 암살자를, SF/밀리터리 게임에서는 저격수를 많이 고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 다 모습을 숨긴 채 적의 동태를 가만히 주시하죠. 그러다 적당한 기회가 오면 뒷통수를 치거나 헤드샷을 날립니다. 일격필사로 목표를 처치하고 도주하죠. 또한 전장에서 상대편의 상황을 살피는 것 역시 암살자와 저격수의 몫이기도 하고요. 둘 다 은신의 달인이기도 합니다. 총격전 게임에서 암살자를 구현한 것도 있는데, <팀 포트리스 2>에서 스파이(암살자)와 스나이퍼(저격수)가 서로 상극인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일 테죠.

 

이렇듯 흔히 SF/밀리터리의 저격수는 궁사나 (사격 위주의) 레인저가 아니라 암살자나 (은신 위주의) 레인저와 비교해야 옳다고 봅니다. 장거리 사격이 중요하긴 합니다만, 관측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저격수의 역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