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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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결심
작은 컨테이너 공간 같은 방, 한쪽 벽에는 통신 장치를 겸하는 넓은 모니터가 여러 가지 풍경을 천천히 바꿔가며 보여주고 있었다. 창문이라고는 복도 쪽으로 난 문 위의 작고 동그란 유리창뿐 그나마도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인테리어는 오직 기능적으로만 설계되어 있었다. 한두 명의 손님을 앉힐 수 있을까 말까 한 작은 테이블이 사치품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침대에 맞닿은 책상에는 고든 섬너가 몇 시간째 앉아 있었다. 팔꿈치는 책상에 올리고 손은 깍지를 껴서 그의 이마를 받치고 있었다. 곱슬 거리는 짧은 머리카락은 힘없이 머리 위에 붙어 있었다. 정수리 쪽으로 깊게 팬 넓은 이마는 가끔 깊은 주름을 만들며 움찔거렸다.
‘우리는 지구를 떠나야 했을까?’
‘문명?’
‘이 땅에 기차를 놓고 비행기를 다니게 하고 다시 우주를 꿈꾸는 것? 가치 있는 일일까?’
‘누군가 죽는다....’
‘그리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고든은 책상에서 점점 굳어갔다. 그리고 조그마한 미동도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생각은 더욱 치열해졌다. 갑자기 전진기지에서 보았던 몇몇 클론들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분명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했던 그 눈동자들….
‘숫자를 입력하고 오븐에 굽듯이 만들어지는 사람? 로봇? 군인? 일꾼?’
‘노예?….’
‘리스 발리츠’
‘헤젤’
‘모리아니’
아... 모리아니, 고든의 생각이 모리아니에 미치자 그의 머릿속은 진동이 오듯 아찔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어디에 선가부터 이카루스는 비정상의 항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나도 있었다.’
헤젤 발리츠의 폭주 사건 이후 이카루스에는 배틀 로더를 움직일만한 ESP를 가진 파일럿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앤슨 클라크와 고든 섬너는 클론 기술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대신 아주 소수만, 가능하다면 단 한 명. 그들은 강력한 ESP를 가진 유전자 샘플이 필요했다.
목적이 정해지자 수단의 잔혹성은 쉽게 외면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변명을 만들고 그것을 용인했다. 인간의 영혼이란 원래 그런 일을 쉽게 일으키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이성은 빠르게 고민의 과정에서 도망쳐 버렸다.
“왜 오신 거죠?”
“사과하고 싶어서요.”
“뭐를요? 저를 납치하신 걸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여기 가둬두신 걸 말하는 건가요?”
“당신은 이카루스 어디든 다닐 수 있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 사람들은 훌륭한 매너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사람을 갑자기 납치하는 매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파멜리드와 경계를 이루는 삼안족은 종종 크고 작은 전투를 국경에서 벌이곤 했다. 고든 섬너는 그곳에서 삼안족 전사 한 명을 추적했다. 정확히는 요청된 그 작전을 승인했다. 어쨌든 책임은 그의 몫이었다.
모리아니는 삼안족의 여전사였다. 그녀는 이카루스 내에 납치되어 있었다. 이카루스의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거나 구속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을 제외하고 늘 바닷속에 있는 이카루스는 그녀에게는 완벽한 수중 감옥일 뿐이었다.
그녀의 유전자는 샘플링되어 연구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이카루스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제야 뭔가 잘못됐다는걸 알게 됐습니다.”
고든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파멜리드 대륙이 문명퇴행의 결과물이 아니라 문명퇴행의 결과물은 바로 이카루스라는 것을. 파멜리드와 뮤턴트로부터 이카루스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카루스로부터 파멜리드와 뮤턴트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모리아니는 침대가 아닌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삼안족 사람들은 세 개의 눈을 동시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든을 바라보던 두 눈을 잠시 감았다. 그리고 세 번째 눈을 떴다. 고든은 싸늘한 소름을 느꼈다. 오늘따라 유난히 얼음 같은 소름이 일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거죠?”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나요? 우리가 원망스럽지 않나요?”
“그러니까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 거죠? 나는 지금은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곳에서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느껴요. 당신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곳에는 내 손을 빌어 끝내야 할 무언가가 있어요. 당신은 그것도 도울 수 있나요?”
고든은 식은땀이 흘렀다.
“내게 부탁할 일이 뭐죠?”
자신의 머릿속을 헤매고 있던 고든에게 모리아니가 재차 물었다. 그제야 고든은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 힘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퍼져가고 있어요. 막연한 공포가 잘못된 길을 만들었어요. 그 흐름은 누구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누구에 의해서도 아니게 거대한 흐름이 되고 있어요.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불행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요?”
“이 일을 알려야 해요!
3개월 뒤 이카루스는 뮤턴트의 땅으로 진격할 겁니다. 협상이라고 얘기하겠지만, 그들은 협상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항하면 공격할 겁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강한 무기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