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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습
삼안족의 대장 바데이치는 헤젤 발리츠 사건 이후 사수족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동료는 사수족 주변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카루스의 클론 파들과 사수족 사이에서 싸이키메탈을 둘러싼 분쟁이 시작된 후로 마을 근처에 다가오는 무인기들은 눈에 띄는 대로 격추해 버렸다. 그 후로 무인기는 사수족 마을 가까이 오지 못했다.
바데이치는 그날도 마을 경계에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 한 대의 무인기가 다가왔다. 사정거리에 다다르면 격추할 생각으로 활의 시위를 점검하고 있는데 여느 때와는 다르게 특이한 동작을 무인기가 하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약간 뒤뚱거리더니 착륙용 다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착륙용 다리에는 흰 수건이 매달려 펄럭이고 있었다. 바데이치는 격추하려다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거의 마을까지 다다른 것을 보고 있는데 다른 화살이 날아가 무인기를 격추해버렸다. 또 다른 부대원들이 쏜 것 같았다. 바데이치는 본능적으로 무인기를 살펴보고 싶어졌다. 재빨리 떨어진 곳으로 뛰어가 잔해를 찾기 시작했다. 가벼운 소재로 만들어진 무인기는 땅에 떨어지며 속이 드러나게 찢겨 있었고 그 속에서 끈으로 뭉쳐 말아놓은 종잇조각이 나왔다.
이이테가는 바데이치와 종잇조각을 펼쳐놓고 보고 또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뮤턴트인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적혀있었다. 그것은 고대에서 비롯된 표음문자로 어떤 말이라도 적을 수가 있었다. 모리아니는 바데이치와도 안면이 있던 삼안족에서도 이름 있는 여전사였다. 파멜리드와 경계지역에서 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이렇게 편지를 보내오다니…. 바데이치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놈들은 대체….’, 적지에 영문도 모른 체 붙잡혀 있었을 동료를 생각하니 바데이치는 마음속으로 깊은 분노가 솟구쳤다.
이이테가는 분노와 함께 또 다른 걱정이 눈 앞을 가렸다. ‘3개월….’, ‘무엇을 준비하던 오래 걸리지 않는구나. 한번을 넘기면 또 다른 게 오겠지.’, ‘모든 상황을 퀀턱에 알려야겠다. 확실히 멈추는 방법이 필요해.’ 여기까지 생각한 이이테가는 한편으로는 막막한 마음에 먼 곳에서 희망을 가져보려는 것뿐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카루스를 누구보다 오래 겪은 것은 자신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떤 해답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 이이테가는 불현듯 리스 발리츠가 떠올랐다. ‘그는 희망이 되거나 적이 될 수도 있다. 이 소식과 함께 그를 여왕에게 보내야겠다. 그가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 적어도 가장 큰 위험을 피할 수는 있을 테니까….’
이이테가는 즉시 카미야를 부르기로 했다. 바데이치는 이이테가의 계획을 듣더니 말없이 눈빛으로 동의를 보냈다.
이이테가는 카미야에게 모리아니가 보내온 편지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편지는 다시 말아서 카미야에게 주었다. 삼안족과 사수족이 있는 삼안반도에서 퀀턱의 수도 퀸덱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길은 해안을 따라서 퀀턱의 영토까지 간 다음 다시 퀸덱으로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퀀턱의 영토가 동남쪽 아래를 중심으로 해안가를 따라 길게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수도인 퀸덱의 위치는 거의 대륙 중앙에 가깝게 파멜리드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파멜리드와 퀀턱의 국경 사이에는 크고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일부 구간은 바다처럼 보일 정도로 장대한 강이었다. 이 강이 서로의 국경이자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었다. 파멜리드에서 통칭 되는 이 강의 이름은 ‘왕의 강'이었지만. 퀀턱인들은 ‘여왕의 강’이라고 불렀다. 이런 퀸덱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삼안반도에서 퀸덱에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파멜리드 영토를 가로질러서 ‘여왕의 강’을 건너는 길이었다. 때문에 카미야는 예전에도 몇차례 퀸덱과 사수족을 오가는 전령 역할을 수행하곤 했었다. 자주 연락을 취하지는 못하기에 매번 중요한 임무였고 목숨을 건 여정이었으나 그 비장함이나 임무의 중요함에서 이번에 비길만한 것은 없었다. 이이테가는 몇 번이나 안전과 임무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카미야에게 당부하고 있었다.
“국경에서 존을 찾아가라. 그가 여왕의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카미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이테가는 귓속말과 함께 모리아니의 편지가 아닌 다른 주머니를 카미야에게 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나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예측을 넘어서는 존재들이야.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크라인 그로스는 상황실에서 무인기가 격추되었다는 보고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삼안족과 사이가 틀어진 이후 무인기가 격추되는 일은 종종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려던 찰나 무인기의 경로를 수정한 후로는 그런 일이 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즉시 오퍼레이터를 불러 격추된 무인기의 마지막 위치를 물었다. 오퍼레이터가 알려준 위치는 사수족 마을에 거의 다다른 지점이었다. 크라인 그로스는 오퍼레이터에게 지시했다.
“무인기가 전송한 영상 모두 확보해서 보고 하세요!"
리스 발리츠는 사수검의 묘미를 알듯 말듯 익혀가고 있었다. 그의 주 연습 상대는 카미야와 대럴 주니어였다. 이이테가에게 배운 것을 카미야나 대럴에게 연습해보는 식이었다. 리스의 숙소는 마을보다 싸이키메탈 광산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가 처음 치료를 받았던 곳은 이이테가의 집이었다. 지금 있는 곳은 크기가 조금 작았지만 구조나 장식이 많이 다르지는 않았다. 이들은 계급이나 그에 따른 겉치레가 거의 없었다. 이이테가도 족장으로서 어떤 일을 지시하는 것보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들어주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었다. 그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각자 원하는 바를 오해나 편견 없이 전달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필요한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게 그들이 가진 지도자에 대한 믿음이었다.
리스의 숙소가 싸이키메탈 광산과 가까운 곳에 마련된 것은 이카루스인들이 사용하는 ESP 측정기가 광산 근처에서는 오작동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ESP 에너지를 오직 싸이키메탈과 ESP 에너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피드백 작용으로 측정하고 사용하였기에 직접 감각적으로 ESP를 느끼는 능력자들의 감지능력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리스는 자신의 생존 사실을 이카루스로부터 숨길 수 있었다.
크라인 그로스는 영상을 보고 또 보고 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믿을 수 없다는 몸짓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상을 정지시켰다. 거기에는 아무리 보아도 아크만 클론인듯한 얼굴과 덩치를 한 사내가 뮤턴트들의 옷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쪽엔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리스 발리츠가 멀쩡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검을 들고 무언가를 연습하는 듯 보였다.
‘황당하군. 클론에게 검술이라니.’ 크라인 그로스는 무인기에 찍힌 영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한참을 생각했다. ‘리스 발리츠는 배틀 로더가 없으면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뮤턴트 옷을 입은 아크만 클론이라….’, ‘클론들이 자의식을 찾는 경우가 있다더니 이런 일까지 생기는 군, 보고되지 않은 사건이 더 있는 건가?’
한동안 생각의 꼬리를 잇던 크라인 그로스는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빅화이트?! 헤젤 발리츠와 함께 고스란히 실종된 빅화이트를 리스가 얻게 되면….’ 크라인 그로스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에게 당장 뉴클론 프로젝트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리스 발리츠를 반드시 제거해야만 한다. 리스와 빅화이트의 조합은 가장 강력한 위험이자 변수였다. 그에게 리스의 생명은 그런 불안감을 감내할만큼 소중하지 않았다. 긴 생각의 꼬리물기 끝에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명제만 남겨졌다.
‘리스 발리츠는 죽어야 한다.’
여장은 간단했다. 카미야는 말에 올랐다. 리스가 익숙하게 알던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한번에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럴 주니어는 두 마리의 물소가 끄는 수레를 몰았다. 수레에는 여행에 필요한 음식과 장비들을 간소하게 실었다. 그리고 대럴 주니어는 클론의 배틀 슈트를 한 벌 챙겨두었다. 이 슈트는 싸이키메탈 광산에서 전투 중 얻은 전리품에서 비교적 상태가 좋은 것을 추려서 만든 것이었다. 슈트는 클론의 체격에 맞춰져 있어서 리스는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수레에 들어간 마지막 짐은 리스였다. 리스의 외모는 백인보다는 동양인에 가까웠다. 이런 모습으로는 파멜리드 지역에서는 누구에게든 공격받기 십상이었다. 같은 이유로 아주 특별한 보호자와 함께하지 않는 한 다른 종족인이 파멜리드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였다. 그래서 대럴이 끄는 수레에는 둥근 천막을 쳐서 안이 보이지 않게 꾸몄다.
세 사람은 마을의 가장자리에서 이이테가와 바데이치의 조용한 배웅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되도록 이카루스인들에게 특별한 낌새를 주고 싶지 않았다. 몇몇 알고 지내던 이들과는 미리 조용히 인사를 나눈 뒤였다. 이이테가는 리스를 불렀다.
“리스, 이 여행은 우리 사수족의 위기를 구하는 목적만 있는 게 아냐. 특히, 너에게는 그 흐릿한 과거에 대한 열쇠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 그리고 이걸 가지고 가라.”
이이테가는 리스에게 한 자루의 검을 건넸다. 그 검은 손잡이에서 검 끝까지 옅은 푸른빛이 느껴지는 투박한 모양의 검이었다. 손잡이에 아주 얇은 가죽을 덧대었을 뿐 특별한 장식도 없었다.
“우리 부족 인은 특별히 검에 이름을 붙이거나 하는 취미는 없지만. 이 칼은 이름이 있지 ‘제테'라고 한다. 언젠가 파이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지? 그 파이가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이야. 이 검은 끝에서 손잡이까지 모두 한 조각으로 만들어졌어. 그리고 파이가가 직접 갈아서 모양을 다듬었다고 해. 사실 훌륭한 검이라고 하기엔 길이도 어중간하고 모양도 투박하지만. 이걸로 파이가가 자기 능력을 각성할 수 있었다고 하지.”
리스는 검을 받아 들어보았다. 길이는 장검보다는 짧고 단검이라 하기에는 길었다. 외형으로는 특별함을 찾기 힘들었지만 파이가가 사용하던 검이라는 설명 때문인지 범상한 기운이 서린 듯 느껴졌다. 리스는 이이테가에게 눈빛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두 손으로 칼을 들고 고개를 숙여 마음을 전했다. 어쩐 일인이 입 밖으로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입술은 굳게 다물고 눈빛으로 마음을 나눴다.
카미야를 선두로 대럴 주니어의 수레가 따랐다. 대럴은 마차를 몰듯 두 마리의 물소들 뒤로 판자를 받치고 그 가운데 걸터앉았다. 자기들보다 작아 보이지 않는 큰 덩치의 대럴을 태운 물소들은 첫걸음이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터덕터덕 걸음을 옮겼다. 마을 앞의 모퉁이를 돌 때쯤엔 카미야의 말과 두 마리의 물소는 경쾌한 리듬을 만들며 가볍게 움직여갔다.
이이테가와 바데이치는 그들이 모퉁이를 돌 때까지만 바라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광산 쪽 경계에서 긴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바데이치가 등을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서너 대의 셔틀이 눈앞으로 급속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이카루스와 분쟁이 있었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이테가와 바데이치는 긴장으로 호흡이 빨라졌다. 바데이치는 짧은 휘파람을 나눠서 세 번, 그리고 또 세 번 불어 동료들을 불렀다. 이이테가도 아래턱을 당기고 볼을 올리며 산짐승의 괴성 같은 소리를 지르며 부족에게 경고를 전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빨랐던 것은 이카루스의 셔틀이었다. 이카루스의 셔틀은 정확히 리스의 일행이 사라진 곳을 향해 레이저를 퍼부었다. 폭음이 울리고 연기가 숲을 구름처럼 뒤덮었다. 네 대의 셔틀은 주변에 정확히 나눠서 신속하게 착륙했다. 연기가 자욱한 사이에서는 벌써 레이저의 불빛이 오가고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공연 준비 관계로 다음 연재는 21일 이후에 업로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