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덜그럭 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를 들으며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가 달리고 있는 곳은 거친 벌판 같은 곳이었다. 드문드문 솟아 있는 나무들은 생기를 잃은 채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땅은 탁한 갈색을 띠고 있었고, 땅 못지않게 갈색 빛이 도는 풀숲들은 길가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파리를 내뻗고 있었다. 이따금 반쯤 무너진 농가들이 마차 옆을 스쳐 지나갔다. 버려진 밭은 이미 건조한 흙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 광경은 삶의 헛됨, 부활의 무가치함을 상징하는 것 같아 마음이 찜찜했다. 그렇지만 그 광경은 동시에 놀랄 만큼 매혹적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토록 황폐한 땅을 본 적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 일어날 일은 먼 꿈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창밖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자 옆자리에 앉아있는 하워드가 헛기침을 했다.

“곧 도착할 겁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연방 기침을 해댔다. 하워드는 체격이 홀쭉했고, 납작한 중산모자를 머리에 눌러쓰고 있었다. 그는 하나뿐인 외알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조부가 물려준 것이었다. 그의 집사 복만 아니었다면 전문 회계사처럼 보였을 것이다. 불쌍한 하워드. 그는 아마 나 못지않게 괴로울 것이 뻔했다. 부모가 내 사촌만 아니었다면 이런 곳에 올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천식 환자에게 이런 환경은 독약이나 다름없다. 나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 땅을 사들인 자가 누구든 그자는 단단히 돌았음이 틀림없다. 그게 내 조상이라는 사실이 조금 슬프긴 하지만.

리처드 노먼은 키가 크고 풍채가 당당한 사내로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그 이름을 떨쳤다. 유명한 가문의 후손인 그는 특히 예술을 잘 후원해 주기로 유명했다. 이름난 예술 협회에서부터 객지의 은둔 예술가까지,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는 성격이 괴팍했는데, 때때로 충동적인 행동을 저지르기도 했다. 오하이오 주에 있는 낡은 저택을 구입한 것도 그런 충동적인 행동의 일환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한동안 그 저택은 버려졌는데, 제일 큰 이유는 주위의 땅이 매우 척박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잡초조차 보기 힘들었다. 그러던 도중 어떤 사람이 기가 막힌 발상을 해냈다. 노먼 가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을 그곳에 보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어차피 가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었고, 굳이 묵혀두기도 뭐했으므로 그 의견은 단박에 수용되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낡아빠진 마차 안에서. 도대체 이런 척박한 땅으로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아해하면서.

마차가 돌멩이를 밟아 덜그럭 소리를 내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옆에서는 하워드가 손짓으로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검은색 형체가 아른거리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뚜렷해졌다. 까마득한 황무지 한가운데 거대한 저택이 유령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는 조그만 섬처럼 저택은 금방이라도 주위의 물결에 휩쓸릴 것 같이 위태해 보였다. 마차는 오르막을 올라 짧지만 평탄한 일직선 도로에 들어섰다. 지금까지 지나온 도로와는 달리 이 도로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분명했다. 저택 주위에는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는데 담쟁이덩쿨 사이로 무너진 담벼락이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정문으로부터 일직선으로 나 있는 길은 저택의 대문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찌르릉거리는 풀벌레 소리가 마당 구석구석에서 들려왔다. 아담한 정원에는 손질된 전정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관리를 소홀히 한 탓인지 마치 성긴 머리카락처럼 보였다.

마차가 멈추자, 하워드가 문을 열고 뛰어내리더니, 나를 거들어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짐을 꺼내 내 옆의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멍하니 서 있는 우리를 내버려두고 마차는 흙먼지를 휘날리며 부리나케 멀어져갔다.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하워드였다. 그는 대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문이 뒤로 확 열렸다.

문 뒤에는 키가 작은 부인이 서 있었는데, 그녀는 상당히 억세 보였다. 잿빛 머리카락을 한데 묶어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뺨은 파리하고 주름살이 져 있었다. 제일 눈에 띄는 부분은 그녀의 양손이었다. 나는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손을, 손가락이 세 개 밖에 달려 있지 않은 독수리 발톱 같은 손을 자꾸만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부인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손을 슬그머니 등 뒤로 감추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먼저 말을 건넨 쪽은 부인이었다.

“저는 메이슨 부인입니다. 이 저택의 가정부지요. 실례지만 잭 노먼 씨와 하워드 씨가 맞으신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잭 노먼이고 옆에 있는 불쌍한 사람이 하워드입니다. 오면서 보아하니 이곳을 꾸준히 관리하시는 모양이군요.”

“물론이지요. 충직한 하인 세 명이 열심히 일해주고 있답니다. 긴 여행을 하느라 시장하셨을 텐데 이쪽으로 오시지요. 응접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넓은 복도를 지나 우리를 데려갔다. 복도 양옆에는 화려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는데, 숙련되지 않은 눈으로도 그것들이 진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선 계단을 타고 올라가 두꺼운 문 하나를 확 열어젖혔다. 문 안쪽에는 커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는데 식탁 위에는 음식이 수북이 차려져 있었다. 메이슨 부인이 손수 음식 그릇의 뚜껑을 열어 주었고 우리는 곧바로 먹기 시작했다. 훌륭한 고기 파이에 백포도주 한 병이 곁들어지자 분위기는 금세 부드러워졌다. 나는 걸신들린 듯이 음식을 먹어치웠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하워드가 메이슨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되면 뒤뜰에 한번 가보세요. 저택의 뒤뜰에 비하면 앞마당은 조그만 잔디밭에 불과하답니다. 리처드 노먼이 그곳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소문도 있어요.”

후식으로는 달콤한 포도와 당밀 타르트가 등장했다. 훌륭했다. 그릇이 바닥을 보일 무렵 메이슨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여러분께 침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부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침실은 2층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침실 중앙에는 커다란 침대 두 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반대쪽 벽에는 벽난로가 기분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창가 쪽 벽에는 고풍스러운 시계가 매달려 있었는데 오래된 탓인지 시침이 그대로 멎어 있었다. 시계나 침대 외에 별다른 가구는 보이지 않았다. 부인이 방문을 닫자 하워드가 말을 꺼냈다.

“좋은 분이시군요. 조금 무뚝뚝한 감이 있긴 하지만.”

“자네 말이 맞아, 하워드. 하지만 이런 곳에서 살다 보면 누구든 무뚝뚝해지기 마련이지. 부인의 손을 보았나? 그런 손은 난생처음 보더군.”

“이런 오지에서는 잦은 근친상간으로 인해 퇴행성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변 지역에서는 그렇게 해서 태어난 기형아들이 제법 많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부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꺼내지 말게. 저택은 어땠던가?”

하워드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멋지더군요. 주위 풍경만 달랐어도 더욱 멋져 보였을 겁니다.”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한들 이 마의 황무지를 좋게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엄하게 대답했다.

“투덜대지 말게. 당분간 우리는 여기서 살 수 밖에 없어. 해가 떠 있는 동안 저택을 조금 둘러보는 것이 어떻겠나? 산책도 되고 좋을 걸세.”

“아닙니다.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그는 뚱하게 대답했다. 억지로 데려갈 수도 없었기에 나는 그를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이리저리 길고 짧은 복도가 있었고, 수많은 계단들이 있었다. 창문에 커튼을 쳐 놓아서인지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나는 보이는 창문마다 커튼을 활짝 젖혔다. 그러자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먼지 나는 어둠을 몰아냈다. 사위가 밝아지자 어렴풋한 윤곽으로 밖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벽면에는 수많은 액자들과 박제된 동물의 머리통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커다란 물소 머리가 제일 눈에 띄었다.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야 했다. 며칠 전에 잡아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비현실적인 감각에 사로잡혔다. 자세히 보니 물소의 콧잔등이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 눈동자가 방금 움직였던가? 나는 눈을 벅벅 문질렀다. 희끄무레한 유리알 같은 눈은 허공을 향해 멍하니 풀려 있었다. 긴 여행으로 인해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 때 까지 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나는 한 방문 앞에 걸음을 멈췄다. 이 문은 다른 문들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상감 장식이 되어 있어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졌다. 문손잡이를 돌려보니 잠겨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높디높은 서가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서재에 온 모양이었다. 공기 중에 오래된 책 냄새가 물씬 풍겼다. 반대쪽 벽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줄줄이 박혀 있었는데,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계세요?” 나는 혹시 모를 선객을 향해 소리쳤다.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책꽂이 사이는 비좁았다. 덩치가 좋은 사람이라면 몸을 옆으로 뉘어야 했으리라. 장서가 족히 일만 권은 되는 듯 싶었다. 나는 책 한 권을 골라 집었다. 빛바랜 표지는 반쯤 떨어져 있었고, 책장이 너덜너덜한 것이 싸구려 신문 같았다. 한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하늘색 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첫 번째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매시브산 대위. 1825년 6월 21일.’ 나는 묘한 흥분을 느끼며 책장을 넘겼다.

‘우리는 오늘 산 족 인디언들을 추격해 놈들의 대부분을 해치웠다. 씹어 삼켜도 시원찮은 녀석들 같으니라고. 놈들은 지난 한 달 간 세 대의 마차를 약탈했다. 우리가 놈들의 본거지에 도달했을 때 놈들은 이미 피난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덕에서 내가 부른 나팔 소리를 신호 삼아 공격을 개시했을 때는 이미 달이 뜨고 있었다. 용맹한 우리 장병들은 순식간에 놈들을 포위하고 무릎을 꿇렸다. 놈들의 마차에서 동양의 도자기(아마 약탈품인 것 같았다)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을 때 우리가 얼마나 당혹했었는지! 이런 재물을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으므로 도자기들은 부하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우리는 놈들을 잡아다가 무릎을 꿇렸고, 처형은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나머지 녀석들을 해치우고 나서 추장만이 남았을 때, 그놈은 이렇게 소리쳤다. “흰 피부를 가진 녀석들에게 저주가 서리기를!” 글쎄, 내 생각에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다음 페이지는 그 다음 페이지와 마찬가지로 새하얀 백지였다. 이 일기의 주인은 쓰는 것을 지독히 싫어했거나 심각한 건망증을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80년 전의 잔혹한 비극이라. 물론 예전에는 이 땅도 인디언들의 차지였을 것이다. 이 책이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책을 주머니에 넣다가 뒤에서 무슨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 뒤를 돌아보자 놀란 표정의 하녀 한명이 빗자루를 든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잭 노먼 씨 맞으시죠? 제 이름은 앨리스라고 해요. 메이슨 부인이 노먼 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착하고 친절하신 분이라면서요?”

그녀는 숲속의 종달새마냥 계속 지저귀었다.

“방금 전에 무례하게 군건 죄송해요. 다른 사람하고 이렇게 길게 말한 건 정말 오래간만이거든요. 부인은 엄격하고 무뚝뚝하신 데다, 다른 하인들도 어찌나 부인을 쏙 빼닮았는지 한 번에 열 마디 이상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진저리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오지에 있기에는 너무나 활발한 아가씨였다.

“대단히 과묵한 사람들인가 보군요. 그러고 보니 복도에 물소 머리가 걸려 있던데 최근에 구입한 것인가요?”

“아니에요. 최소한 오 년 전부터 저기 있었어요. 제가 오기 전부터 계속 저기 걸려있었으니까요. 정말 야만적이에요. 부인이 왜 저걸 진작 치워버리지 않는지 의아할 뿐이죠. 저게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니까요. 한 번은 저게 숨을 쉬는 것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콧등이 부풀어 오르다 내려앉더군요. 정말이지 미친 소리 같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이유 없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녀의 경험이 나와 비슷하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거 아세요? 이십 년 전만 해도 이 주위에 마을이 있었대요. 작은 마을이었지만 나름대로 활기찼죠. 원인불명의 사고만 아니었더라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을 거에요. 이제는 그저 돌무더기로 변해 버렸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마을 하나가 폐허로 변할 수가 있답니까?”

이런 변경 지역에서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 많을 터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사람들이 한 명 한 명씩 없어졌대요. 처음에는 남자들이 없어졌고, 두 번째에는 여자들이, 마지막에는 아이들까지 모조리 사라졌죠. 어디 땅 속이라도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에요. 아마 하느님만이 아시겠죠. 메이슨 부인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이곳에서 큰 전투가 있었대요...”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 탓이었다. 어떤 사건이 회색 장막으로 가로막힌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여름날의 꿈처럼 모호하고 뜻 없는 것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주제를 잘못 골랐나요?”

“아닙니다. 잠깐 두통이 도져서.” 나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어디 이 근처에 산책할 만한 곳이 있나요?”

“그렇다면 뒤뜰에 한번 가보세요. 흘낏 보기만 해도 절대로 잊을 수 없답니다.”

“메이슨 부인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산책하기 딱 좋은 곳이라고 말입니다. 뒤뜰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나요?”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답니다. 저는 이만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요. 부인이 알면 크게 야단치실 거에요.”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문을 열고 서재 밖으로 나갔다. 나는 책장에 기대 생각에 잠겼다. 머리가 아파 왔다. 그녀가 했던 말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책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재 바깥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뜰을 직접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가파른 계단을 타고 내려가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무슨 저장고 같은 곳에 있었는데, 벽면에는 오크나무 통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반대편에는 조그만 뒷문이 나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순간적으로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 나라로 향하는 문이 떠올랐다. 그 문은 어서 자신을 열어 보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경첩이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렸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고, 숨겨진 비밀의 화원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뒷마당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넓었다. 십자 모양의 길이 뒷문에서부터 시작되어 마당의 모퉁이를 향해 뻗어 있었다. 길 가장자리에는 뾰족한 철제 울타리가 꼿꼿이 서 있었는데 마치 땅 속에서 솟아 나온 것 같았다. 구릿빛을 띈 초목은 바람의 흐름에 따라 힘없이 흔들렸다. 나는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된 전정 나무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가 급하게 손가락을 뗐다. 손끝을 타고 뭔가가 빨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만졌던 부분이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로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새로운 종일지도 몰라.’ 식물들은 말라 죽어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생생해보였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먼지 낀 천사 조각상이 분수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팔을 치켜들고 있었다. 공허한 조각상의 눈은 이 세상의 모든 끔찍한 비극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와 동시에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저귀는 새 소리도, 어디에서나 들릴 법한 풀벌레 소리도, 볼을 간질이는 한 줄기의 미풍 또한 없었다. 뒷마당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때 나는 그것을 보았다. 여름 하늘에 느닷없이 치는 번개처럼, 그것은 갑자기 시야에 들어왔다. 뒷마당 동쪽 끝부터 서쪽 끝까지,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거대한 가시덤불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그것을 무시하기란 불가능했다. 담장을 휘감고 넘어 능선 너머로까지 줄달음치는 초록색 가시덤불.... 나는 묘한 마력에 이끌려 가시덤불을 향해 다가갔다. 발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고, 침샘은 바짝 말라갔다. 가까이에서 본 가시덤불은 해안을 향해 몰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연상케 했다. 넝쿨들은 위협적으로 치켜든 손처럼 보였다.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금방이라도 내려칠 것처럼. 덤불 속은 꿰뚫어 볼 수 없는 암흑으로 채워져 있었고, 수백, 수천 겹으로 얽힌 줄기들에는 하나같이 뾰족한 가시가 달려 있었다. 희미한 풀내음이 풍겼다. 나는 잔뜩 웅크리고 앉아 불운한 희생자를 기다리는 거대한 짐승을 떠올렸다. 미끼를 던져 먹잇감이 제 발로 다가올 때까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무해한 척을 하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이것 봐, 여기, 하나도 안 위험하지? 하지만 먹잇감이 일단 제 발로 걸어 들어오면, 그것은 돌변할 터였다. 아주 돌변할 터였다.

손가락에 날카로운 통증이 내달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정 나무를 만졌던 그 손가락이었다. 피가 방울방울 맺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은 가시에는 똑같이 붉은 색 피가 묻어 있었다. 가시가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산들바람조차 불지 않았는데 덤불이 파도치듯 흔들렸다. 바다가 폭풍우를 만난 것처럼 거세게 파도쳤다. 당장이라도 팔다리를 붙잡고 끌고 들어갈 것 같았다. 재미를 보러. 영원히.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덤불은 그대로 있었다. 손가락에서는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어서 빨리 손가락을 지혈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복도에서 청소하던 하녀와 마주친 것은 행운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출처가 불분명한 헝겊 조각으로 상처 부위를 대충 감싸주면서 저택은 수리가 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일렀다. 그녀는 또한 사람은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본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말하지 않는 쪽이 현명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워드는 여전히 침실에 있었다. 내가 방 안에 들어왔을 때 그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는 읽던 책을 덮었다.

“이런! 손가락은 어떻게 된 건가요?”

“어디에 긁힌 것 같아.” 나는 내가 생각해도 신빙성이 없는 거짓말을 지어내며 말했다. “못이나 뭐 그런데 찔렸겠지. 이런 곳에는 한두 군데 있을 법 하잖아.”

그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나리가 없는 동안 저도 한 번 저택을 돌아다녀 봤습니다. 박제된 동물에, 아프리카 가면, 희귀한 예술품까지 있더군요. 전에 살던 사람이 누군지 궁금할 지경입니다.”

“리처드 노먼이 이 저택을 별장으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네. 그때는 작긴 해도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정원도 잘 손질되어 있었다고 하더군. 여기의 하인들은 텅 빈 저택을 청소하고 있었을 뿐이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텅 비어 있었지.”

“그 말이 맞습니다.” 하워드가 웃으며 말했다. 메마른 웃음이었다. “우리도 이곳에 차차 적응해 가야겠지요. 이 말이 실례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이 저택에는 무언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나는 재촉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시계를 좀 보세요. 자야 할 시간입니다.”

“하워드.” 나는 엄하게 말했다. “괜히 말꼬리를 돌리지 말게. 우리 사이에 감출 것이 무엇 있겠나? 이야기해 보게. 어서.”

하워드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체념한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세 시간 전의 일입니다. 당시에 저는 복도 벽에 걸린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의 수두룩하더군요. 특히 제 눈길을 사로잡은 건 아름다운 중국식 도자기였습니다. 흰색 바탕에 푸른 용이 그러져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도자기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더군요. 입을 꾹 닫은 용은 도발적으로 앞발을 뻗고 있었는데, 먹잇감을 붙잡아 곧바로 삼켜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실컷 감상한 다음 저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해도 지고 있어서 방에 들어가 책이나 읽을 심산이었죠. 그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워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참기 힘든 정적이 흘렀다.

“그 소리....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입니다. 도자기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나 다른 누군가의 발소리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제가 들은 건 어느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들은 건 빠드득 거리는 이빨 가는 소리, 거대한 짐승이 먹잇감을 보고 군침을 다시는 소리였습니다. 저는 얼어붙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감히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죠. 곧이어 무언가 길고 나긋나긋한 것이 매끄러운 바닥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있는 힘껏 달렸지만 누군가가 복도의 공간을 무한대로 잡아 늘린 것처럼 좀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뒤에 있는 무언가는 쉭쉭거리고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리를 좁히고 있었습니다.”

하워드는 말을 멈추고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제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맙소사, 도대체 제가 어떻게 거기서 살아 나왔는지 의아할 지경입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보았습니다. 중국 도자기에 새겨진 푸른색 용을 말입니다. 용의 입은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었고, 앞발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습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자 용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와 있더군요.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것만은 확실해요.”

“그래.” 내가 말했다. “나도 아네.”

 

달은 찼다 기울었고, 꽃은 피었다가 시들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가시덩쿨은 암녹색으로 물들었다. 오래도록 울리던 풀벌레 소리도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저택 전체가 영원한 안식에 접어든 듯 했다. 그리고 저택의 새 거주자들은 그런 생활에 서서히 익숙해졌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저택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더니, 완전히 끊겨져 버렸다. 첫 싸라기 눈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근처의 언덕 위에서 굽어본 저택은 고요한 평화에 물들어 있었다. 공기는 포근했고,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회색은 고요와 안정, 평화를 상징했다. 그리고 회색은 검은색의 바로 전 단계이기도 했다.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불길한 달이 뜨는 밤. 탄식의 날이, 고통과 죽음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곧 시작될 터였다.

 

 

눈을 찌르는 햇빛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자 다시 손을 내렸다. 얼음을 통째로 삼킨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나는 가까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하워드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성실한 친구 같으니. 지난 삼개월 동안 으레 그래왔듯이 지금쯤이면 저택을 한 바퀴는 돌고 있을 것이었다. 천식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는 별다른 통증을 호소한 적이 없었다. 이 황무지의 고요함이 그를 치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저나 밤중에 희미한 고함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하인들끼리 싸움이라도 벌어졌는지 궁금했다. 나는 옷을 찾아 주위를 더듬거리다가 침대 모서리에 발가락을 찧어 넘어졌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난 뒤 문을 열고 탐험에 나섰다. 성에가 낀 창문을 통해 본 마당은, 밤새 내린 싸라기눈으로 뒤덮혀 갈색 땅이 군데군데 드러나 보였다. 정말로 멋진 날이었고, 왜 아무도 이런 날을 축하하려 들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저택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복도에는 하인이나 하녀 한명 보이지 않았다. 식당은 1층에 있었기 때문에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만 했다.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갑자기 시야가 둘로 갈라지더니, 한순간 내 발은 허공에 떠 있었다. 다음 날 신문이 환히 보였다. ‘부유한 가문의 자손,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목숨을 잃다.’ 그러나 내 눈앞에 떠오른 불길한 예감과는 달리, 가까스로 난간을 붙잡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배는 이제 자명종처럼 울려댔고, 그에 맞춰 내 머리 또한 쩡쩡 울려댔다. 식당에 들어서자 나는 곧바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본래대로라면 식탁에는 커피와 빵을 비롯한 식사가 차려져 있어야 하건만, 눈에 보이는 식탁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화가 치밀어 오르자 머리가 몽롱해졌다.

하염없는 적막 속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울려 펴졌다. 오늘따라 복도는 유난히 길어 보였고, 문들은 복도를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문 뒤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도자기, 박제된 물소, 혹은 가시덤불... 그런 것들이 문 뒤에 도사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덮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던가? 저택에는 어디든지 유령들이 도사리고 있지 않던가? 그리고 맙소사, 리처드 노먼의 별장에는 유령 소굴이 몇 개쯤은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상들은 더 집요해지고 뚜렷해졌다. 복도 양 옆에 늘어서 있는 문들은 위압적일 정도로 커져 있는 것 같았고, 나를 향해 찌푸린 표졍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걸리버가 이런 기분을 느꼈을 지도 몰랐으리라. 몽마가 재주를 부리듯 환상은 또다시 바뀌었고, 문들은 이열 종대로 서 있는 잘 훈련된 군인들로 변했다. 문지방은 흙이 묻은 신발이었고, 문틀은 잘 차려입은 군복이었으며, 그리고 그 병정들은 한손에는 기다란 소총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큰 칼을 들고 있을 터였다. 차렷. 경례! 연대장님이 지나가신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고, 배를 부여잡지 않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킬킬거리는 웃음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굶주림 속에서 뇌리에 떠오른 이미지들은 이제 선명해졌으며, 세세한 부분까지 알아 볼 수 있었다. 군인들은 이열 종대로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서 있는 장교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으며, 허리춤에 뿔나팔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목이 잘린 인디언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고, 검붉은 피가 풀밭에 넘쳐흘렀다.

이 끔찍하지만 짧은 환상은 눈 녹듯 사라졌고, 나는 다시 복도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메이슨 부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도대체 부인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를 버려 놓고 혼자서 여행이라도 떠났단 말인가? 정작 그녀 자신이 챙겨줘야 할 당사자는 배고픔으로 인한 환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문 한가운데에는 ‘메이슨 부인의 방’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것을 보니 폭발 직전의 증기기관처럼 분노가 증폭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문을 거세게 두들겼다. 반응은 없었다.

바로 그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숨이 딱 멈추었다. 맹렬히 끓어오르던 분노는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었다. 그것은 도자기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 납골당처럼 무거운 정적 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복도 건너편에 푸른 용이 그려진 중국식 도자기가 매끄러운 광택을 뽐내며 탁자 위에 서 있었다. 하워드가 한 말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짐승이 먹잇감을 보고....빠드득 거리는 이빨 가는 소리....쉭쉭거리고 으르렁거리며....’

그러나 도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탁자 위에 멀뚱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공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안도감이 들었다. 하워드는 창자처럼 꼬여있는 복도를 헤메다 환상에 빠졌거나 거짓말을 한 것이다. 도자기와 그 안에 든 것이 완벽히 무해하며, 등을 돌리고 있는 와중에도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 몸을 돌렸다. 그러나 정작 마음은 다른 데로 가 있었다. 도자기 속의 무언가가 빤히 노려보고 있다는 생각, 뒷마당의 가시덤불처럼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떤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문은 안에서 단단히 잠가 놓은 것 같았고, 도끼를 가져오지 않는 이상 열릴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나는 하워드를 찾아보기 위해 등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나는 도자기가 그대로 있기를, 원래 자리에 얌전히 웅크려 있기를 기도했다. 도자기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지만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온몸의 혈관이 얼어붙고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도자기는 달라져 있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짐승은 더 이상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다. 묘비처럼 거대한 발톱은 금방이라도 도자기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고,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쉭쉭거리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영원한 것 같은 시간이 흐르고, 푸른색 용은 온몸을 꿈틀거리더니 도자기 밖으로 뛰쳐나왔다.

용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눈은 쟁반만큼이나 커져 있었고, 입은 떡 벌어져 있었다. 반쯤 광란 상태에 빠져 복도를 질주하면서 나는 두 손을 허공에 휘저어댔고, 다리는 피스톤처럼 움직였다. 시야 가장자리가 늘어나는 느낌이 들더니 복도의 다음 모퉁이가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그리고 뒤쪽에서 기다란 것이 바닥을 미끄러져 움직이는 소리, 짐승의 쉭쉭거리는 숨소리가, 복도 전체를 가득 메운 광란의 하모니에 맞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복도를 가로지르고, 계단을 두 칸 씩 뛰어 올라갔다. 달리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많은 모퉁이와 문들이 휙휙 지나갔다.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길고 육중한 몸뚱어리를 바닥에 늘어뜨리며, 아가리를 활짝 연 채로. 순간적으로 발이 꼬이더니 달리는 자세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쩍 벌린 동굴 같은 입을 기대하며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도자기도 없었다.

용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텅 빈 복도와 창문을 통해 환하게 내려쬐는 햇살 뿐이었다. 나는 황망히 서 있다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처한 상황이 굉장히 우스웠기 때문인데... 피에 젖은 손바닥과 욱신거리는 등은 그것이 단지 웃음으로 넘길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꾸르륵 거리며 다시 배가 고파왔다.

공복은 이제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나는 벽을 짚으며 계속 걸어갔다. 머리는 빙빙 도는 것 같았고, 입은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머릿속에 길고 가느다란 끈이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이 곧 제정신이며, 곧 끊어질 것 같이 위태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갈라지고 터진 입술 사이에서 노래 하나가 튀어나왔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나아아알 장미 벌판 위이에 굴려주오오! 그곳의 장미들은 피이처럼 붉겠죠. 피잇빛 장미가 피어 있는 곳에서. 고요한 바다아는 이제 가아고, 거센 폭풍이 모올아치네. 그때가 오면, 그으때가 오면. 모두 떠어다니이리라!’

노랫소리는 기괴한 성악처럼 복도에 멤돌았고, 내게는 그것이 여느 합창단의 합창보다도 더 좋게 들렸다. 노랫소리에서 슬픔과 분노가 느껴졌다. 공복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공복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었다. 내 정신은 꼭두각시 인형의 줄이었고, 꼭두각시 인형은 나 자신이었으며, 보이지 않는 조종자는 뒤편에서 잔혹하게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그때 뭔가 일어났는데, 억눌린 정신으로는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복도의 세 번째 문 뒤편에서 여자의 비통한 울음소리와 남자의 타이르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당시에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공복이 순식간에 가시는 것 같았다. 마음은 온통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다. 나는 소리가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이 반쯤 닫힌 탓인지 방 안은 어두침침했다. 비통한 울음소리는 이제 소리 죽여 우는 흐느낌 소리가 되어 있었다. 왼쪽 벽면에 두 명 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 그림자의 주인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눈이 어둡다 한들 하워드의 그림자 정도는 쉽게 알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은 긴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는데다, 침대에 앉아 머리를 무릎에 파묻고 있어 구별이 쉽지 않았다. 내 생각을 알아챈 것인지 하워드가 귀띔했다.

“앨리스입니다.”

“뭐라고?”

“저택을 관리하는 하녀 중 하나인데... 구면이 아니셨나요?”

물론 그녀와 나는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것을 따져 물을 때가 아니네. 메이슨 부인이 없어졌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가기 전에 아침 식사를 차려주는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여주지 않더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저 역시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없어진 사람은 부인만이 아닙니다.”

“부인만이 아니라니. 또 누가 없어졌단 말인가?”

내 질문에 하워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인들과 하녀들이 모조리 없어졌습니다. 짐이랑 옷가지까지 전부요.”

이 엄청난 사실에 나는 두뇌가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하워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뭐, 적어도 한 명은 남아 있군요. 통 울어대던 탓에 아직까지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나는 앨리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이제 훌쩍이던 것을 멈추고 질척하게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그녀는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초췌해 보였다. 나는 무슨 말이든지 하려 했지만 목구멍이 흙으로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앨리스.” 나는 이 단어를 간신히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당신은 메이슨 부인이나 다른 하인들, 하녀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요?”

그녀는 내 말에 뭐라고 웅얼거렸는데,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뒷마당에 있는 가시덤불이 사람들을 데려갔어요....물소가 뿔나팔을.... 오래전에 이곳에 울려 퍼진 뿔나팔을 불자 모든 것이 시작되었지요....소리도 없이 자정에 들이닥쳐서...줄기와 가시로 된 뱀들이....고함과 비명이 난무하고....이파리와 피와 살인이....저는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어요....그것들은 이제 갔나요?”

앨리스의 횡설수설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워드를 돌아보고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 무릎이 꺾이더니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온 몸이 노곤했다.

“괜찮으세요?” 하워드가 말했다.

“그럭저럭. 자네는 참 팔팔해 보이는군. 어디서 뭐라도 먹은 건가?”

“빵을 좀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찾으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도중 발견한 겁니다. 조금 드릴까요?”

“그래 주면 정말 고맙겠네.”

하워드는 내게 빵 한 조각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게걸스럽게 삼켰다. 배고픔이 가시자 머리가 활발히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하워드, 자네 잘 때 무슨 소리라도 들은 적이 있었나? 자네는 나보다 귀가 밝으니 말이네.”

“앨리스의 말을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제가 듣기로는 그저 헛소리에 불과한데요.”

“자네는 용을 보았잖아.” 하워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짚이는 것이 있으면 말 좀 해보게.”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밤중에 수천 마리의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뒤로는 사람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마 잘못 들은 거겠죠.”

하워드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잘 알겠네.” 나는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머리를 흔들고, 앨리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앨리스, 우리는 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가시덤불? 용?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다면 알려주지 않겠습니까?”

앨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의 눈물은 말라붙어 있었지만, 두 눈에서 여태껏 찾아 볼 수 없었던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하워드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

“앨리스를 너무 다그치지 말게. 보게나. 그녀도 한계에 몰려 있어.”

하워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반대쪽 벽으로 물러났다.

나는 앨리스가 띄엄띄엄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건 여기 들어온지 이 년째 되던 날이었어요.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죠. 당시에 저는 뒷마당을 쓸고 있었고...여기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요. 땅에 떨어진 나뭇잎을 한 곳에 주워 담다 고개를 들었지요. 뱀 한 마리가 가시덤불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어요. 뱀이 가시덤불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일이 벌어졌어요. 초록색 덩굴이 스프링처럼 뱀을 향해 튀어나가더니 몸부림치는 그 불쌍한 동물을 붙잡고는, 그만... 그 이후로 가시덤불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그 불쌍한 뱀을 제외한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요. 한번은 새 떼가 덩굴 위에 내려앉은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덩굴이 움직이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요.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자. 자.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이었던 겁니다. 당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다시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어떤 위화감에 사로잡혔는데, 어떤 물건이 똑같이 생긴 다른 물건으로 바뀐 것만 같았다.

“저택 주위의 황무지에는 힘이 흐르고 있어요. 느끼지 않으셨나요? 말라붙어 갈라진 땅에서, 담쟁이덩쿨에서, 뒷마당의 식물에서, 그리고 그 가시덤불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무겁고 쉰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가시덤불은 힘의 중심지에요. 그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잡아먹죠. 아주 말끔히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어요. 폭풍 전의 고요처럼 조용하기만 했죠. 이제 잔물결이 일고 있고, 산더미 같은 파도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폭풍이 몰려오면...”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잠시 생각하다 문간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하워드에게 말했다.

“내 생각엔...” 나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는데, 그 순간 지옥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힘이 모여들고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공기 중에서, 가구에게서, 그리고 문 쪽에서. 바람과 비슷한 무언가가 피부 위를 채찍처럼 훑고 지나갔고, 온몸이 전율했다. 이곳은 폭풍의 중심부였고, 망망대해 속의 작은 섬이었으며, 산더미 같은 파도가, 이제 그 위력을 여실히 드러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워드가 뭐라 소리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귀찮은 왱알거림만 들릴 뿐이었다. 도대체 왜 하워드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 걸까? 지금 상황만 하더라도 충분히 정신이 없는데 말이다.

그때 나팔 소리가, 우리의 정신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법한 나팔 소리가 울려퍼졌다. 팔십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천지를 진동시켰던 바로 그 소리였다. 인디언들에게 그 나팔 소리는 파멸을 뜻했다. 그렇지 않던가? 뿔나팔 소리, 혹은 물소의 절규는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귀를 틀어막았지만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탁자에 놓여 있던 물병이 비틀거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창에 금이 쩍쩍 갈라지더니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굉음은 귀 속으로 파고들어 뇌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고 굉음 사이로 수천마리의 뱀들이 미끄러져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힘겹게 눈을 떠 주위를 보니 두 사람 모두 대 자로 쓰러져 있었다. ‘안 돼!’ 나는 생각했다. ‘정신을 잃으면 안 돼.’ 힘이 몰려오고 있었다. 폭풍이 부는 날. 가시덤불.

그리고 폭풍이 당도했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나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깨진 유리조각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창틀은 기묘한 빛을 띄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물병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 있었다. 도자기 파편들은 멍하니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파편 하나에 내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는데, 두 눈은 악귀의 눈 같았고, 입술은 뒤로 당겨져 있었다. 그 히죽히죽 웃는 것 같은 모양새에 나는 파편을 걷어찼다. 나는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넘어 창문으로 향했다. 머리는 압착기에 짓눌린 것 같았고, 귓가에는 끊임없이 속삭임 아닌 속삭임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속삭임은 창문을 보고 겉껍데기를 넘어 진실을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속삭이고 있었다.

깨진 창문을 통해 본 바깥은 기이한 어스름이 져 있었다. 보라색 양탄자 같은 하늘이 짙게 깔려 있었고 어스름 속의 사물들은 푸른 인광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서쪽 하늘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용광로 같았다. 비틀리고 갈라진 나무들은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것처럼 보였고... 그리고 달이 있었다. 핏빛 달이. 불길한 달이. 보랏빛 신의 하나뿐인 눈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라.” 달이 말했다.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알고 있습니다.”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저택에 도착하기 전부터? 도대체 무엇을? 나는 바닥에 쓰러진 두 명을 흔들어 깨웠다. 앨리스와 하워드는 비척비척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씩 웃었다. 두 눈은 악귀의 눈이었고, 입꼬리는 뒤로 당겨져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목구멍이 거짓말처럼 닫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날 보며 씩 웃었다. 나도 똑같이 화답했다. 머리가 몽롱했다. 우리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문은 저절로 열렸다.

복도는 어스름 속에 잠겨 있었고 주위에 보이는 모든 사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