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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혁명적인 밤에! 2026
제주지방법원 종합민원실 복도에 걸린 TV에서 『특별 취재: 유전공학의 퀀텀 점프』라는 타이틀의 르포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현수는 특별히 어떤 생각을 이어가려고 노력하지 않고 멍하니 먹통이 되어버린 업무용 컴퓨터 화면을 지켜보았다. 마우스가 멈춰 있는데, 그는 차분하게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러 강제로 전원을 내렸다. 재부팅하며 잠깐 나는 틈에 그 TV 프로그램 화면에 뜬 자막을 살펴보았다. 진행자의 입 모양으로 보아 그가 하는 인터뷰 질문을 자막으로 그대로 띄우는 듯싶었다. 그의 민원창구를 방문하는 유리 칸막이 너머 복도의 민원인들 중 누구 하나 TV프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Q. 마치 유전자 편집 기술의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수님은 유전자 조작의 한계는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수는 최근 새로 개편된 가족관계등록시스템 프로그램을 내심 욕하다가 그 자막을 읽자 부팅 패스워드 입력 창이 뜬 컴퓨터는 그냥 내버려 둔 채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TV화면에서 시선을 빼앗겼다.
근위축증으로 앉은뱅이 생활을 한 이를 다시 걷게 만들고, 유전자 결함으로 맹인이 된 사람이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유전자가위 기술은 최근 더 세밀하고 복잡한 편집이 가능해지며 사회 각 분야에 파급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생물학에 관한 지식이 없는 일반인인 현수로서는 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처럼 여겨져 어떤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머리가 정수리까지 벗어진 60대의 미국 주립대 한인교수는 기자의 질문에 학자다운 원론적인 답변을 했다.
「A. 사람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것은 유전자 편집이 아닙니다. 원형은 그대로 보존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자녀를 친생자로 바꾸는 수준으로 기술이 발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교수의 차분한 답변에 이어 곧 예정된 행정재판이 도마에 올랐다.
국회에서는 기술발전에 발맞추기 위하여 ‘중대범죄자의 유전자 조작 치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해당 법이 시행된 이래 처음 있는 재판이다. 이미 여론은 강력하게 새로운 법의 추진을 지지하고 있으며 입법 과정에서 큰 반대 목소리는 없었다. 강력범, 특히 성범죄자들의 높은 재범률에 대한 통계적인 증명이 있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교정시스템의 한계에 대한 공론화가 이루어져 2026년 현재에 이르러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법의 명칭에서 치료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반발이 적은 이유 중 하나였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강하게 공감하고, 성적인 지향성을 조작하는 행위가 단순히 사회의 안정을 위해 한 사람에게 고통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회에 건강한 일원으로 다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의료행위라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지만 그 최초의 치료대상자는 행정법원에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연쇄 강간 살인마였고 감옥 속에 복역 중인 가운데 추가 범죄가 밝혀져 이 법의 적용을 받았다. 르포 방송은 이런 재판의 배경을 간략하게 자막으로 설명하고 한 장의 손글씨를 담은 메모지를 보여줬다. 현수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 종이였다.
‘저는 사람을 해칠 때 희열과 흥분을 느끼기 때문에, 유전자가위로 그와 같은 희열을 느낄 수 없게 막는다면 헌법상 행복추구권이 침해됩니다.’
그가 자필로 적은 글이 공개되기 무섭게 여론은 들끓어 사형집행 국민청원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현수는 인터넷 SNS에 공개된 수감자의 자필 탄원서를 보았을 때 자신이 느낀 환멸감과, 마치 같은 사람이 아닌 다른 생물종의 언어를 읽은 것만 같은 의아했던 느낌을 잊지 못한다. 그는 이 소송을 헌법재판소에도 끌고 갈 작정인 것 같은데, 어째서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행복추구권이라고 적었을까.
그 외계행성을 거니는 이상했던 느낌을 배제한다면 법원공무원 현수에게는 생각보다는 흔하게 접하는 이야기였다. 할 일이 없는 수감자들이 이런 소송을 벌인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진행에 따른 직접적인 비용만큼만 혈세가 낭비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투입 가능한 인적 자원인 판검사 및 변호사 등 유능한 노동력도 허비되는 것이다. 어둡고 엄숙하고 케케묵은 곰팡이 내가 나는 오래된 법정의 엄숙함, 피곤한 판사님의 얼굴, 앳된 공판검사의 긴장한 목소리, 이마를 감싸고 한숨을 내쉬는 국선변호인, 그 곁에서 청원경찰과 현수의 동료들이 재판 절차를 보조한다.
그런 재판은 정의와 불의의 다툼이 아니며, 영웅적인 서사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지리멸렬한 문답과 사실관계 확인, 절차적 하자에 유무에 매몰된 냉정한 땅따먹기 게임 속에서는 참가자들은 하나처럼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현수의 주변에서 30분째 업무를 중단하고 멍하니 혼자의 망상에 빠진 현수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그의 동료들처럼 말이다.
현수가 반시간 가까이 자리를 정돈하며 재부팅된 컴퓨터 앞에 앉아 TV를 보며 멍하니 있을 때 그의 후배인 유지환 주무관이 걱정되어 현수에게 말을 걸려고 하자, 간경화 합병증으로 투석을 받는 팀장, 제주도 토박이인 부원재 주사가 뒤에서 이야기했다.
“좀 그냥 두라 게. 저 친구가 그 친구라.”
“아, 그... 몰랐습니다.”
현수는 무덤덤하게 못 들은 것처럼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고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6시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밖을 보자 해가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오늘도 없는 의욕을 끌어모아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끌어 사무실에 출근했다. 그는 잡히지 않는 서류들을 집어 들어 간신히 한 사람 분량만큼의 일을 해냈다. 아니 그가 보기에는 한 사람분의 일이지만 동료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소장이나 청구서 등 민감한 자료를 대충 캐비닛에 넣고 잠갔다.
“팀장님, 아이 데리러 가봐야 해서, 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게매, 오늘도 수고핸, 이.”
현수는 외투를 챙겨입은 뒤 그러곤 상사에게 목례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공간과 복도를 구분한 유리벽을 지나치자 민원인들 속에 녹아든 그는 더 이상 국가의 부속품인 공무원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이었다.
법원 출구의 처마를 지나자 한 명의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감이 처마가 저녁에 길게 늘어뜨린 그늘처럼 어깨 위로 드리워졌다. 매서운 장대비였다. 그에게는 우산이 없었지만 젖을 소지품도 없으니, 그냥 늦가을 비를 맞으며 아침에 차를 댄 법원 북측 공영주차장까지 뛰었다.
오늘따라 숨이 찼고 자기 발소리가 벽면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것이 마치 누군가 뒤를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금세 바지 밑단이 물을 머금어 무거워졌다. 단화 내부로 물이 들어와 둘째인 아영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다 집에 가면 양말을 세탁기에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모든 것은 그가 첫째 아이에 대한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를 제기하기 전까지 법적으로, 아니 그가 유전자 검사를 의뢰하기 전까지 과학적으로 무결했다.
현수가 떠난 사무실에 남겨진 그의 팀 동료들도 슬슬 짐을 챙겨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원재 주사는 탄식하듯 옆자리의 차석 이혜진 주무관에게 이야기했다.
“법은 액화질소보다 차갑고 과학은 면도날보다 날카롭다고 여겨져. 무서운 거라. 기술과 사회발전이 고도화되어서 현대인들은 영원히 법과 과학을 무서워할 수밖에 어신, 그런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인 거라.”
“무서운 단어를 쓰시네요. 계장님, 제주대 야간대학원 다니실 적에 너무 이런저런 논문에 심취하셨던 거 아니에요?”
평소 아버지와 친밀하게 전화하는 이혜진 주무관은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에 은퇴를 앞둔 팀장이 안쓰럽게 여겨져 그의 넋두리를 들어주곤 했다. 그 덕에 나머지 팀원들은 어느 정도 퇴직을 앞둔 팀장의 끝없이 이어지는 하소연과 과거 회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혜진 주무관에게 미안한 마음도 갖고 있었다.
육지로 시집가버려 없는 딸내미와 자주 보기 힘든 손주들 생각에 해소할 길 없는 적적함을 느끼는 부원재 주사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아직 업무용 컴퓨터도 끄지 않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돌려 현수의 빈자리를 지켜보며 말을 이어갔다.
“백신반대론자들이나 지구가 평평하다는 사람들, 약 없이 아이를 기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아둔하다고 함부로 비난하기만 할 게 아니야. 우리가 다를까? 동화 속에서 왕관을 쓴 생쥐가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여기고 과학이라는 무자비한 고양이는 그에게 살금살금 다가온다면 우리들의 운명도 꼭 그런 모양이거든. 봐, 창밖의 지랄맞은 빗줄기를. 문명인의 운명이라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팀장님, 저도 사실 내면에 저만의 이론이 있어요. 관점의 문제가 아닐까요. 제가 볼 때 과학은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미남이에요.“
“미남? 그래 혜진 씨 요즘 남자친구가 해외 장기출장을 가서 힘든가 보구나. 용현이가 얼마나 성실한 친구인데. 아, 아니 뭐 그래도 다음 인사 때 키 크고 잘생긴 남자 공무원이 제주지법에 발령 나면 우리 팀으로 끌고 와 볼까.”
“아니요. 말 끊지 말고 들어보세요. 팀장님, 그런 게 아니라 미남처럼 우리 삶을 되돌릴 수 없이 뒤흔들어 버리고 냉정하게 떠나 버리잖아요. 그게 과학이에요. 저도 가볼게요. 안녕히 들어가세요!”
원재 주사와 혜진 주무관이 농담을 주고받는 그 시각 현수는 차에서 클래식 음악 방송을 틀고 잠시 슈베르트 즉흥곡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딱 10분 만이다. 삶은 결국 끔찍하게 외로운 것이다. 최선은 하루하루 그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쳐 다른 주제로 관심을 돌리는 건지 모른다.
그의 아내, 아니지 이제 전 아내인 성연은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주말에 각자 홀로 찾았던 인상파 그림 전시회장에서 둘은 처음 만났다. 인상파 화가 모네의 수련 연작을 감상하는 가벼운 밤색 머리의 염색을 한 단발머리의 여인이 있었는데, 첫눈에 그녀의 뒤에서 후광이 비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옆모습에 홀리듯 말을 걸었고, 둘은 곧 둘 다 혼자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전시회에 들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는 수줍고 내성적이어서 여자에게 말을 못 붙이는 성격인 현수는 그답지 않게 성연의 번호를 물어 받아내었다.
“성연 씨, 평소에 전시회에 자주 오시나요?”
“잘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그림을 좋아해서 자주 와요. 다른 전시회에선 화가의 생애라던가 작품 활동 시기별로 구분해서 전시해줘서 감상하기 좋은데, 이번 전시는 조금 불친절하게 구성되어 있네요.”
“음, 그렇게 볼 수도 있네요.”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고 둘은 5분 동안 가만히 모네의 수련(水蓮) 연작을 감상했다. 모네가 말년에 남긴 대작이었다.
“그거 아세요? 성연 씨, 베토벤이 말년에 그의 청력을 잃었듯이 모네는 말년에 시력을 잃게 되었지요. 이 수련들을 그리던 무렵부터였을 거에요. 다행히 인상주의 화풍은 엄밀한 사실묘사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악화되어 가는 시각을 가지고도 모네는 예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지요. 이 평화로워 보이는 수련 연작은 그 비극적인 시기에 그려졌어요.”
“정말요? 그건 몰랐어요.”
“그렇다면 이 그림을 볼 때 제게 드는 궁금증은 이런 거예요. 젊은 시절 인정을 받지 못하고 비주류로 소외되어 가난하게 그림을 그리다 자살 시도까지 했던 젊은 예술가 모네와 나이가 들어 명성과 부와 명예를 얻고 두루 존경받지만, 화가에게 사형선고보다 가혹한 시각장애를 얻은 나이 든 모네. 모네는 언제 덜 불행했을까요?”
초면에 호감이 있는 여성에게 던질 잘못된 작업멘트를 고르자면 교과서의 표본으로 쓰여도 좋을 물음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성연은 진지하게 고민에 잠기더니 현수를 돌아보고 주말에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아영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도착한 현수는 어깨 바로 밑까지 오는, 정성스레 쌓인 아담한 현무암 돌담 앞에 차를 대고 입구로 걸어갔다. 현수의 귀로 돌담 너머에 먼저 도착해 있는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다른 학부모들의 잡담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내가 어제 와이프랑 같이 영어회화스터디에 갔는데 말야. 미시건에서 태어난 미국인 친구가 영어 토론은 안 하고, 한 시간 동안 조카 이야기를 하더라고. 하긴 원어민 친구가 영어를 배우러 스터디에 오는 건 아니니까 잡담하고 사람 만나고 하소연하러 오는 거긴 하지.”
“그쵸, 형 영어스터디에 원어민이 나올 이유가 뭐요. 사람들이 득달같이 영어 가르쳐달라고 무료봉사나 요청해서 피곤하기만 할 텐데.”
“그렇지. 생각해보니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무튼 그 리즈라는 친구 말이 조카가 태어나서 기뻐했는데 조카가 아주 새파란 눈에 금발이었다는 거야. 예쁘고 귀여운데 자기 남동생은 짙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졌고, 올케는 멕시코 계열 히스패닉이라 역시 검은 눈과 머리카락을 가졌다고 하더라. 그냥 그거 참 신기하다 하고 말았어.”
“형, 그거 격세유전인가 그럴 수도 있지 않나요? 미국은 워낙 다인종 국가라서 불가능한 게 아니라고 하던데요.”
30대로 보이는 두 남자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현수는 그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두 남자가 자신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으며, 현수의 발소리를 듣자 이내 고개를 돌려 살갑게 손을 흔들어 주기까지 하는 모습까지 보고 오해를 풀고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아영이를 데리러 왔다고 말하자 아영이 이름을 부르며 선생님이 들어갔다. 아영이가 나올 때까지 현수는 무엇이 그렇게 초조한지 팔짱을 끼고 애꿎은 바닥의 보도블록을 단화의 앞굽으로 차며 입술을 씹었다.
현수에게 관심을 거둔 현수 또래의 두 남자 학부모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 가능하기는 하다고 보여. 어머니와 아버지도 갈색 눈과 눈동자를 가졌데. 유일하게 아일랜드계인 할머니만 금발에 푸른 눈이었다는데 조카에게는 증조할머니가 되겠지. 히스패닉 쪽은 말할 것도 없어. 야 그거참 신기한 일이구나 감탄했지.”
“격세유전도 아니고 격격세유전이겠네요.”
“가능성 낮지만 불가능한 건 또 아니니까. 하지만 로또를 하나 사라는 농담은 하지 못했어. 거기서 어색하게 각자 집으로 헤어졌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상한 저녁이잖아. 아니, 그 주말이 통째로 이상한 일투성이였어. 다른 사람은 전날 수학문제 풀이 모임에 참석해서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세 시간 동안 카페에 마주 앉아 각자 수학문제를 풀었다는 거야. 그러면 불안도 사라지고 마음도 평화를 얻는대. 세상은 넓어. 태블릿을 보여주는데 수학책 이북만 한가득했다니까.”
“그 미국인 친구네 가족들에게는 잠든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닌 꿈들이 의심과 불안의 형상으로 폭풍처럼 집안에 몰아쳤겠네요.”
“그래! 그렇겠지 뭐. 근데 뭐 어쩌겠어.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변덕이 와서... 또 뭐 그렇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살아가다가 이웃 누구네 안 좋은 일 이야기를 듣고 그렇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럽대. 우리는 모두 같은 머리카락 색에 같은 눈동자 색이니까.”
그때 어린이집 선생님들의 손을 야무지게 잡은 아영이와 앞의 두 다른 학부모들의 자녀들이 어린이집에서 나왔다. 졸린 듯 눈곱이 내려앉은 눈을 비비며 아빠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아영이를 보자 현수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걸렸다. 현수를 알아본 아영이가 아빠라고 외치며 아장아장 달려오자 현수는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영이를 앉아 그대로 일어났다. 비행기 타기처럼 재미있는지 아영이가 때 묻음 없는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내일 그 이 모 씨 재판은 어떻게 될까요? 판사가 또 범죄자 편에 붙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다른 학부모들의 잡담을 뒤로하고 현수는 아영이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그와 아영이 외에 다른 누구도 살지 않아 허전한 집으로.
근무 시간에 스테이플러철심을 담은 종이상자가 떨어지자 현수는 기원 모를 서글픔을 느꼈다. 눈가에 물기가 맺히는 것은 히터 때문에 눈이 건조해서 그럴 것이다. 현수는 무엇이 죄송한지도 모른 채 앞에 앉은 일흔은 족히 넘으셨을 할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몸을 숙여 바닥에서 스테이플러철심 상자를 집어 들더니 심을 빼 스테이플러에 채워 넣었다.
“할아버지 여기 방금 주신 신분증하고, 요청하신 후견등기사항증명서 나왔습니다. 수수료는 1,200원 주시면 됩니다.”
배우자인 할머니의 성년후견인인 할아버지는 본인도 몸이 성치는 않으신 듯 손을 덜덜 떨면서 수수료가 얼마인지 재차 물어본 뒤 지갑에서 2천 원을 꺼내 현수에게 주었다. 현수는 거스름돈 800원과 신분증을 할아버지가 지갑에 넣어 주머니에 잘 넣는 모습을 확인한 뒤, 후견등기사항전부증명서를 흰색 봉투에 담아 건네드렸다.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웃더니 지팡이를 짚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의 뒤에서 자못 밝은 상기된 얼굴로 서서 대화를 나누던 30대 젊은 남녀가 뒤따라 민원인 의자에 앉았다. 여자가 먼저 앉자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현수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미성년자녀의 개명을 신청하기 위해 방문한 젊은 부부였다. 아이의 이름은 철학관에서 받아온 ‘근봉’이었는데, 초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금붕어라는 별명이 생겨 속상해한다고 현수가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털어놓았다.
현수의 첫째 딸 소영이의 성명도 바뀌었다.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 소송결과가 확정되면서, 김현수의 성을 따른 김소영에서 어머니 주성연의 성 씨를 따른 주소영으로 변경되었다. 소영이가 그의 딸이었다는 기록은 본적지 구청에서 가족관계등록부를 폐쇄하고 다시 창설하는 과정에서, 이도2동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번호를 원인무효로 말소시키고 새로운 주민번호를 부여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와 소영이를 이어주는 것은 하나둘 냉정한 과학과 법의 심판 앞에 지워져 갔다.
젊은 부부가 넘겨준 서류 중에 인지세와 송달료 영수증이 빠져있어 법원 내 은행창구에 가서 얼마를 납입하고 영수증을 받아오라고 안내해 주었다. 현금으로만 납부 가능하다고 했는데 다행히 젊은 부부는 전에 자녀를 개명 해봤던 지인에게 안내받아 현금을 챙겨왔다. 그 덕에 번거롭게 두 번 걸음 하는 상황에 놓이지는 않았다.
성연을 두 번째로 보았던 것은 그 주말 토요일 저녁에 둘이 만나 밥을 먹는 자리였다. 성연은 자신이 지난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법무법인에 들어가 신입변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현수는 깜짝 놀라고 자신은 법원 말단사무직이라고 말했다. 언제 일하다가 마주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저녁은 그녀가 사주었고, 현수는 식사 후에 간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 값을 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문화생활을 하지 못해서 갈증을 느껴 전시회에 오게 되었고 현수와 이야기하며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고 말했다.
“저는 독서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흥미가 생기지 않아요. 그 사람은 제 앞에서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있기는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아니지 죽을 때까지도 지금 내가 보는 그 모습에서 더 발전하거나 나아지지 않을 테니까요.”
“어? 저도 자주 그런 생각을 합니다.”
현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맞장구를 쳤다. 생각해보면 그도 독서를 하지 않는 지인과 가까운 친구로 발전해 본 적이 없었다.
“현수 씨도 저에게 질문을 했으니 저도 질문을 하나 던져 볼게요. 과연 그 상태를 '살아있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글쎄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둘은 모두 음주를 하지 않았다. 와인으로 유명한 식당에 와서 스테이크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고 이런 어려운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니 기이하지만 또 그 기이함만큼 매혹적인 상대방에게 빠져들었다.
“독서 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있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아닌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지 못하는 무의미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질문의 핵심일 수 있지요. 어떻게 보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여유가 있는 식자층과 그럴 여유 없이 반복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말단 노동자들의 차이를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차별주의적 사고는 아닌가 무서워요. 글을 모르거나 책을 읽지 않으신다고 해서, 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온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인생에 존경받을 부분이 없다고 말하는 건 가혹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노동자들이나 농촌의 어르신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선입견이에요.”
성연은 현수의 대답을 곱씹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그녀는 대형 로펌에 가기보다는 법률구조공단에 들어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 했다.
성년후견인 할아버지와 금붕어라는 별명으로 고민하는 자녀를 위해 준성으로 개명을 신청한 젊은 부부가 민원실에 다녀갔던 날 저녁 쌓이지 않는 첫눈이 내렸다. 제주도에서는 좀처럼 11월에 눈이 오지 않는데 평년보다 빠른 강설이었다. 물론 한라산 위는 진작부터 하얀빛으로 덮여 있었지만, 산 아랫마을에 싸락눈이 내리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아영이는 첫눈을 보러 밖에 나가고 싶다고 떼를 썼으나 결국 아버지와 소꿉놀이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인터넷 SNS동영상 시청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 현수는 저녁에 아영이와 소꿉놀이를 하거나 아영이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소꿉놀이가 끝나자 아영이는 9시에 잠이 들었다.
그때부터가 하루 중에 유일하게 허락된 그의 시간이었다. 그는 치친 몸을 끌고 거실 소파에 누워 TV를 틀었다. TV의 소리에 아영이가 깨지 않도록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음성출력 장치를 설정하기 무섭게 시사토론 프로그램에서 오늘 있었던 재판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유전자 조작 치료명령 취소소송이다. 반쯤 잠들 듯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그는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귀를 기울였다.
사회자가 치료명령에 대한 취소소송에 타당한 근거가 있다는 측의 패널과 이야기했다.
“결국 오늘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적인 오해가 충분히 소명되었다는 거로군요.”
“그렇지요. 세상 어디에도 범죄 행위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법조항으로 소급해서 처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자 취소소송의 취소를 구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보는 변호사 측에서 사회자의 허가 없이 끼어들어 반론을 폈다.
“교수님, 소급해서 불이익을 가하는지, 치료적 조치인지 관점 차가 있습니다. 형을 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경하게 만드는 경우에는 그런 소급적용도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존에 징역형의 길이가 10년 이상이었으나 이제 3년 이상으로 감경하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이 재판에서도 새로운 처벌조항은 무기징역을 5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감형하면서 유전자조작치료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유전자 조작 치료명령이 더해진 것입니다. 굳이 불소급 원칙을 적용하신다면 이건 범죄자에게 더 유리한 신법의 적용이 아닐까 합니다.”
반박하려는 모 국립대학교 교수에게 양해를 구한 사회자는 잠시 치료거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경찰 출신 변호사의 주장을 요약해 재확인했다.
“그러니까 차 변호사님의 주장은 유전자 조작 ‘치료’는 어떤 경우에도 범죄자에게 불이익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하도록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이는 수감으로 인해 인생을 허비하고 재범에 빠지는 악순환의 개인적, 사회적비용을 줄여주며 2026년 현재 명백히 검증된 과학적 방법입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교도소에 사람을 가둬 자유를 박탈시키는 행위를 언제까지 이어갈 것입니까? 지금은 21세기이고 야만의 시대가 아닙니다. 이들을 교정하는 교정시설 역시 다 세금으로 돌아가는 기관입니다. 그 세금을 더 유용한 분야인 사회복지나 일자리 창출에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히려 이 유전자 치료의 적용 범위를 지금처럼 살인과 아동성폭력 등 특정 범죄만이 아니라 징역 10년 이상의 모든 확정된 형에 적용해야 된다고 봅니다. 물론 이땐 결정권을 유전자조작치료위원회만 아니라 범죄자 본인에게도 어느 정도 주어야겠지만 말입니다. 말하자면 국가는 지금 유전자 조작 치료로 개인을 희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해 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변호사님, 그건 이상적인 해석입니다. 이게 예전에 자행된 극악무도한 국가의 폭력인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강제 낙태 시술과 다를 게 뭡니까.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은 채 유전자라는 매우 민감한 신체의 핵심 중의 핵심을 임의로 바꿔버린다는 것 아닙니까.”
“필요 최소한으로, 타인의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유전자를 제거하고 고통받는 타인을 보면 그 자신도 그 이상으로 괴로워하는 공감과 연민의 유전자를 심는 것입니다.”
맥주를 반 캔 정도 마시자 술이 약한 현수는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모르긴 몰라도 저 교수의 SNS에는 수 없는 욕설이 올라갈 것이고, 내일 아침이면 인터넷 뉴스 댓글창은 그에게 인격모독을 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당최 학자의 양심이 무엇이기에 그를 이런 공개토론회에 나오도록 한 것일까. 그리고 저 변호사는 영악한 사람일 것이다. 돈이 되는 것,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줄 방향이 어디인지 감지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어떤 전직 경찰공무원으로서 가진 소명 의식과 일선에서 직접 범죄자 및 범죄피해자들과 부대끼며 받은 인상이 더 큰 이유겠지만 말이다.
시사토론에는 시청자 의견을 청취하는 때가 있었다. 사회자가 TV방송과 함께 진행하는 인터넷 영상 SNS 라이브 방송에서 접수된 시청자 의견을 읽었다.
“여기, 강원도 원주시에 살고 계신 송지은 씨께서 보내주신 의견입니다. ‘우리의 손에는 악마를 천사로 만들 수 있는 신의 도구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악마가 갱생을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지 않는다는 사유만으로 그 도구를 버릴까?’”
“교수님은 이 시청자분의 의견에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예, 무척 좋은 질문입니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이 반론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그 논의는 시공간에 따라 바뀌고 문화에 따라,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에 의하여 규정되는 문제입니다. 저는 악마를 악마라고 규정하는 자가 누구이며 야경꾼을 감시하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전제 정권이 반정부 시위대의 그 민주적이고 평화적이면서도 양심적인 신념이 반국가적이며 적국을 이롭게 하는 내란선동의 죄에 해당한다고 선고하고 유전자 조작으로 체제에 순응하는 성격으로 개조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변호사가 교수의 말에 첨언했다.
“하지만 교수님,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고 아시다시피 연쇄살인과 아동성폭력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으로, ‘통문화권’적으로 언제나 악한 행위입니다.”
눈먼 시계공이 갑자기 시력을 되찾는다면 그는 어떤 시계를 만들 것인가? 그야 당연히 전에 만들지 못했던, 그가 죽기 전에 완성하기를 소망해왔으나 도전할 수 없었던 역작일 것이다. 재벌들 사이 단순히 지능을 높이고 체중을 감량하거나 더 큰 신장을 갖게 하기 위해 태평양 및 중남미 국가로 자제들을 보내 원정 유전자 주사를 맞고 오게 하는 시술이 암암리에 유행한다는 사실이 탐사보도에 나오며 아동학대 논란이 일기도 했다. 불치병으로 여겨졌던 조현병 및 우울증 등 정신질환의 치료에 현저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개방적인 나라들에서 이루어진 임상실험 결과로 유전자 치료는 중범죄자들의 재범률을 눈에 띄게 낮춘다는 부정하기 어려운 학술적 근거들이 축적되고 있다.
현수는 젊은 시절 대학생 때 유럽문화의 이해 교양 수업에서 공부했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세뇌 장면이 떠올랐다. 이어지는 줄거리가 뭐였지? 그러다 무거워지는 눈꺼풀 때문에 더는 토론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소파 위에 내던져져 있던 담요를 끌어 몸을 덮어 그대로 새우잠을 청했다. 밤은 고요했고, 그가 깨뜨리기 전까지 고요는 이어질 것이다. 그는 밤의 고요를 깨뜨리기보다 그 일부가 되기를 택했다.
현수는 악몽을 꿨다. 꿈속에는 수십 명의 목숨을 살리고, 그 환자들의 가족과 지인까지 더 하며 백 명의 인생을 바꾼 존경받는 흉부외과 의사가 더 이상 메스를 집도하지 못해 환자가 수술 중 사망하는 사건이 나타났다. 참여주사인 현수는 열심히 의료과실에 대한 심리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의사는 수술이 있기 전주 또 다른 의사의 과실로 불면증의 원인이 된 유전자를 제거하는 유전자 치료가 아닌 타인의 고통에 강렬하게 공감하는 연민 유전자를 주입 받았던 것이다. 이 의료사고는 다시 흉부의과 의사가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메스를 집어 드는 것만으로 공포증에 시달리게 하였고 결국 수술 중 메스를 손에서 놓치는 상황으로 내몰았다.
현수는 의사가 참으로 안쓰럽다고 여겨졌는데, 곧 그 의사의 얼굴이 연쇄살인마 이 모 씨의 얼굴로 변경되자 비명을 지르며 법정을 뛰쳐나왔다.
잠에서 깨나자 아침이었다. 맥주 캔이 거실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출근길에 잠시 멈춰서 아파트 입구 놀이터에 있는 그네를 지켜보았다. 성연은 첫 아이 소영이를 혼전 임신했다. 결혼 후 세상에 나온 소영이를 그는 저 나무 그네에 앉혀 밀어주고는 했다. 현수가 그네를 밀어주면 성연은 아영이가 잠든 유모차 옆에서 아버지와 딸의 한 때를 핸드폰에 담아주었다. 동영상은 아직도 현수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고 그는 이따금 영상을 틀어 본다.
햇살이 내려오고, 먼지가 내려앉은 밀짚색 페인트가 칠해진 오래된 허름한 아파트 맞은편 동의 벽이 빛난다. 성연은 결혼식 전에 마무리했던 치아교정으로 이빨이 정렬되어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다만 낮 동안,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 유지장치를 껴야 하는 게 불편하다고 출산 전후 신혼 기간에 투정 부렸다.
그들의 신혼집은 단지 내 공원에 철쭉이 심어진, 지은 지 10년이 지난 소박한 아파트였다. 지금은 현수와 아영이만 둘이서 같은 집에 살고 있다. 그의 명의로 된 집을 팔고 떠나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서려 있는 추억들이 떠올라 팔고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년에는 기필코 모든 것을 과거에 남겨두고 홀가분하게 떠날 것이다.
성연은 임신 중에도 현수와 손을 잡고 함께 미술관과 전시회를 다녔다. 성연은 소묘에 대해 조예가 깊었으며 쾌활하고 독립적이었다. 둘째 아영이가 태어나 자라기 전까지 현수와 성연의 가정은 누가 봐도 천생연분이고 화목했다.
‘아영이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는데, 소영이는 잘 모르겠다. 어머니를 닮기는 했네.’
설과 추석마다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르신들이 갸우뚱하는 모습에 현수는 너스레를 떨며 그래서 첫째는 확실히 아내를 닮아 좀 더 예쁘게 될 것 같다고 농담을 던졌다.
잠든 소영이의 얼굴을 보며 잠에서 깨지 않게 그 곁에 가만히 누워 들여다보는 것이 퇴근 후 삶의 낙이었다.
추억에 잠겨 아파트 놀이터를 보다 지각할 뻔한 그는 9시 정각에 부랴부랴 사무실에 도착해 업무 준비를 시작했다. 소영이가 그네를 타는 영상을 봐서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사무실에서 동료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었다.
근무를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휴대폰 화면에 뜬 연락처를 보니 성연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영이를 볼 권리가 있었고 서로에게 이렇다 할 악감정 없이 좋은 친구 사이로 남아 번호를 저장해두지 않았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냐고 물으면, 그는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사무실이라 다른 직원들이 들을까 잠시 고민되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짤막한 안부 인사를 남긴 뒤 잠시 뜸을 들인 성연이 이야기했다.
“다시 합칠 수는 없을까요? 오빠, 다시 시작해볼 기회는 아주 사라진 건가요?”
아마 지난 몇 주간 고민하다 어렵게 꺼낸 이야기일 것이다. 현수는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성연아, 우리가 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었던 기회가 한때 있었는데 우리 인생에서 그 시절은 지났다고 보여. 이제 돌아오지 않아.”
그는 성연과 대화할 때는 거짓말을 하는 데 능숙했다. 연애 시절부터 그래왔다. 그리고 그의 거짓말은 둘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말하자면 내가 너에게 갖는 감정은 이제 우정이 될 거야. 그리고 다시 합친다고 해도 관계는 육체적인 충동만 서로 해소하는 관계가 되겠지.”
“그러면 우리 애들은 어쩌라는 거예요.”
우리 애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현수는 도로 말을 삼켰다.
그래 유전자 검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고, 그런 잘 감춰진 진실이 모두의 행복으로 이어졌을 거라고 현수는 생각했다. 성연도 그에게 친절했고, 그 또한 그녀에게 진실하였으며 소영이를 그의 친생자로 여겼으니까. 아니, 차라리 성연이 처음에 진실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현수는 그녀를 용서하고 소영이를 그의 자식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전화는 10여 초간의 침묵 끝에 끊겼다.
여기서 복잡하게, 감성적으로 이야기할 것 없었다. 과학적 증명과 법이란 결국 삼단논법이니까. 저기 출입구 앞으로 법원 앞 공터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며 뛰노는 핑크빛 우비를 입은 아이가 보였다. 무척 귀여운 그 아이는 아직 유치원도 안 들어갔을 것이다. 틀림없이 부모님들의 아낌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터인데, 어린아이가 혼자 뛰어놀다가 넘어져 울기 시작하자 현수는 안타까움에 속으로 탄식했다.
자세히 보니 성연의 이름에서 자음을 따와 그대로 붙여 주었던 그의 첫째 아이 소영이의 나이인 6살 정도 되는 아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엉엉 우는 아이를 달래주러 가고 싶었지만 무언가가 그를 붙들어 의자에 못 박히게 만들기라도 한 듯 일어설 수 없었다.
단순하게 아이의 아픔과 서러움에 공감하는 건 우리의 감성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아이는 단 한 명의 아버지만 갖는다. 저 아이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다. 결론, 저 아이는 나의 아이가 아니다.
그래서 저기 아이가 넘어져서 무릎에 피를 흘리며 울어도 현수, 그는 사무실을 나가 법원의 출입구를 지나 뛰어가서 괜찮은지 묻고 상처를 소독해주지 않는 것이다. 벌써 깜짝 놀란 아이의 부모들이 달려와 법원 공터의 아이를 살뜰하게 다독이고, 핑크빛 우의를 입은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 씩씩한 아이라고 현수는 감탄했다. 그는 조용히 혼잣말했다.
“엉망이야.”
눈가에서 눈물이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저도 모르게 갑자기 일어나 자기 테이블 위의 모든 것을 한 동작에 밀어 바닥으로 내버렸다. 요란스러운 텅 빈 금속 볼펜통이 떨어지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키보드와 마우스, 두꺼운 가족관계등록실무편람이 바닥에 내던져졌다. 놀란 얼굴로 부원재 팀장과 차석 이혜진 주무관, 옆 부서 직원 지환 등 여러 동료가 현수를 말없이 돌아보았다.
“염병할 엉망이야!”
가압류에 항의해 법원 공무원에게 소리를 지르던 중년 남성을 비롯해 칸막이 너머 분주하던 민원인들조차 하던 일을 멈추고 정적에 잠겨, 고함을 내지른 현수를 바라보았다.
현수는 두 팔로 머리를 보호하듯 감싸 안고 책상 위에 상체를 붙이고 엎어졌다.
바닥에는 쏟아진 아이스커피와 얼음이 흥건했다. 그것은 마치 부정할 수 없는 유전정보를 담은 혈흔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나갔다.
피곤 때문에 어제 아영이에게 저녁을 먹이고 설거지를 못 했다. 어젯밤 혼자 대충 아영이를 씻기고 재운 다음 그도 곯아떨어졌다. 오래도록 세탁하지 못한 식탁보는 더럽고 파리가 날렸다.
야근을 하는 날이면 아영이는 그를 기다리다 어린이집에서 또는 그를 대신해 아이를 돌봐준 아이 고모의 집에서 지쳐 잠들어 있었고,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차로 데려가 유아용 카시트에 앉혀 주었다.
잠이 든 자신의 아이를 안쓰럽게 여기는 건 감성이다.
“모든 것이 빌어먹을 유전공학처럼 엉망이야!”
그가 흐느끼자 부원재 팀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아버지처럼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현수는 눈물을 닦고 괜찮다고 대답한 뒤, 바닥에 쏟아진 재판기록물과 텀블러, 키보드와 마우스 등을 테이블 위로 올려 정리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주지법 민원실의 오전 업무가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