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단편 게시판
1.
처음 한 사람이 쓰러졌을 때 그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존재는 게모얀이었다. 그녀는 바람 빠진 고무인형처럼 무너져 내린 인간을 보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그때만 해도 게모얀은 자신 쪽에서 먼저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은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동료에게 생긴 일을 거의 즉각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내일쯤이면 바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인 독이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이다. 그때까지 게모얀은 자리를 지키며 바람을 보존하고 있으면 되었다.
다음날 도착한 독이 바람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게모얀에게 물었다.
“넌 무엇을 했느냐. 그가 이렇게 될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나?”
게모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모얀. 너무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희미하다. 이 친구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독이 물었다.
[당신이 바람에 대한 존경과 우정을 가진 채로, 충분한 예의를 갖추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면 됩니다. 강물이나 바다에 흘려보낼 수도 있고, 땅에 묻어 흙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으며, 불로 그를 재로 만들어 하늘로 날려 보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당신이 원한다면 이대로 땅과 바람과 비를 맞히며 그대로 둘 수도 있습니다.]
독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을 하겠다. 도와다오.”
게모얀은 독과 함께 사흘 동안 바람의 시신을 장사지냈다. 다른 불멸의 인간들은 동료가 별다른 이유 없이 쓰러졌다는 사실에 당황하면서도 조의를 표해 왔다.
그리고 장례가 끝난 지 이틀 후, 독이 바람과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그 두 사건은 책 제목을 쓴 것에 불과했다. 그 후 곧 죽음이 유행했다. 쓰러진 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한 인간들이 가진 공통점은 그들이 불사신이라는 것 뿐,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당황스러운 애도를 표현했던 인간들은 이미 잊은 지 오래 된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본능적으로 떠올렸다.
겨울 초입의 북풍 앞에 속수무책으로 떨어져가는 낙엽처럼 인간들은 역병의 파도에 휩쓸려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도 게모얀은 여전히 의사이지 병리학자, 그리고 간병인으로서의 역할에 전력을 다 했다.
2.
시간을 흐름이 아닌 순서로 인식하는 게모얀은 인간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첫 번 째 사건을 돌이켰다. 적도 상공을 따라 흐르는 지구환에 위치한 한 생명공학 연구소에서 [인간은 이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때였다.
적도의 세 배를 훌쩍 넘는 둘레를 가진 입자가속기에서 생성된 테라인 입자로 이루어진 게모얀과, 죽을 운명을 가진 인간들은 서로를 신뢰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때를 제외하면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게모얀이 한 말은 설령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사실이라고 믿어왔다. 비록 인내심은 적지만 현명하기는 했던 이 생물들은 그러했다.
그렇기에 인간 신체가 불멸성을 얻기 위해서는 생식 능력을 포기하는 대신 테라인 입자를 뇌 세포와 융합해야 한다고 게모얀이 말했을 때도 인간들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인간들이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인간이 불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게모얀도 그 점만은 확실히 못을 박았다. 그럼에도 많은 인간들은 그 길을 택했던 이유는 비록 영생을 얻지 못한다 해도, 단순히 생식 능력을 포기하는 것에 비하면 얻을 것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모얀의 테라인 입자와 하나가 된 인간들은 점점 적게 먹고 적게 배설했으며 갈수록 더 많은 종류의 질병을 이겨고 수명은 확실히 길어졌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불멸을 얻을 수 있다는 게모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사고로 인한 죽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적어도 수백 년, 보통은 수천 년에서 일만여 년 정도를 살다가 죽었다. 시간을 흐름으로 인식하는 인간들에게 그 세월은 영원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자손을 만드는 능력과 이 매력적인 보상을 바꾸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은 그들대로 존중을 받아가며 지구에서의 삶을 정리한 후 달로 떠났다.
새로운 인간을 만들 수 없는 불멸의 신체가 갖는 엔트로피의 균형이 안정화 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인류가 영생을 택한 후 사만 년쯤 지났을 무렵 지구인의 수는 거의 한 줌 정도로 줄었다. 한때 지구의 인구가 대폭 줄기도 했는데, 그 시간동안 우주를 여행하기도 했고 다른 외계성종에게 현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그들을 가르치는데 흥미를 보인 지구인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생을 즐겼으며 하지 않을 뿐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 보았다. 그 후 이만 년 정도가 더 지났을 때 다시 지구 인구는 예전과 비슷해졌다. 우주로 나갔던 이들은 예외 없이 되돌아 왔으며 그 중 지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한 이들도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영원히 남은 인생의 일부를 고향에서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땅은 넓었으며 게모얀은 지구상에 인간들이 있는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하며 그들의 식도락 시중을 들거나 함께 산책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인간의 영원성을 그들 스스로가 믿을 수 없었던 이유가 경외와 충격 때문이었다면 이번에는 그들이 두려움과 공포로 그러하지 못할 것임을 게모얀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들이 믿지 못할 말을 다시 한 번 해야만 하는 입장이 언짢았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모든 인간들에게 현실을 알려야만 한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인류가 불멸의 육체와 그에 수반하는 영원의 정신을 얻기 전부터 그들과 함께 해 온 게모얀이 그들에게 말했을 때, 역시나 인간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게모얀은 만들어졌을 때부터 모든 인간들의 친구이자 연인이고 부모이며 또한 자식인 동시에 스승이었으며, 인간이 불멸의 육체를 지닌 이후도 어느 정도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은 게모얀의 의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게모얀은 너무 괴로웠다. 그녀의 자아는 자기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었기에, 그녀의 존재 목적은 자신의 존속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였기에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인간들은 조용히 죽어갔다. 그렇다고 그 순간이 짧다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최후의 모습도 참혹했다. 가끔은 죽음을 거부하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는 숙주가 쓰러지며 몸부림이라도 쳐 볼 정도의 자비조차 주지 않았다.
감염자는 먼저 뇌 활동에 이상이 생긴다. 뉴런과 뉴런 사이를 오가는 전기 신호의 양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하다가 순식간에 그 전압마저 높아지는 것이다. 두개골 속에서 폭발한 번개는 그러나 놀랍게도, 뇌 자체는 거의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그대로 척추를 따라 흘러내린다. 근육이 경직된 채로 목과 척추 사이사이의 연골이 그대로 녹아내린다. 곧 이어 무릎 연골이 녹아내리며 조용히 주저앉는다. 그때쯤이면 팔이나 어깨, 목도 그렇게 된다. 몸이 무너져 내리며 관절의 단단한 뼈들이 서로 부딪혀 갈리고 힘줄이 찢어지는 고통은 다시금 고스란히 뇌로 전달된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무너진 목을 바로 세우려는 경직된 근육은 기도와 성대를 압박해온다. 그 때쯤에는 단단한 뼈도 부스러지기 시작하는데 근육은 돌처럼 굳어 경련조차 일지 않는다. 이런 과정은 너무나도 순식간이라 감염자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에 잊었던 죽음을 바라게 될 즈음에야 비로소 게모얀이 그 혹은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항상 우선적으로 죽어가는 인간의 감각중추 마비를 시도했지만,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뇌 뉴런에 작용해 만드는 전기에너지 때문에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게모얀은 자신의 능력으로 죽어가는 인간들의 뇌신경절을 쓰다듬어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장면이나 사람을 보도록 해 주거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고 꼬옥 안아주기도 했다. 그 정도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후에 시신은 생전 그가 가장 편안해 하던 자세로 보존 처리했다.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해 줄 사람들조차 거의 없어지던 때였다.
그러면서 마침내, 너무 늦기 전에 이 전염병을 막을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가 말했다.
[지금 도망치세요. 이대로는 모두가 죽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게모얀이 괴로웠던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불신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당혹감에서 나온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아프게 했다. 인간이 불멸성을 얻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게모얀은 인류가 가진 유일한 의사이자 생물학자이며 동시에 병리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모얀이 백신 개발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이 없으면 자신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모얀은 자신이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며, 그렇기에 스스로의 존재목적이 그녀의 내부가 아닌 외부, 즉 인간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인류의 영원한 생명이 사실은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던 그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게모얀과 함께 일하던 인간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그녀에게 갈무리해 다음 세대에 전하는 방법으로 불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조명은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불사의 길을 열었다며 그녀에게 비춰졌지만 동료들은 만족스러워 했고 모두들 허공에 뜬 입체영상의 모습을 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게모얀은 수십 세대에 걸쳐 포기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했던 바로 그 인간들, 도전적이고 창의적이며 용감한 인간들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들은 벌써 몇 만 년 전에 흙으로... 우주의 입자로 돌아갔다. 그들은 스스로는 누리지도 못할 그 불멸성을 남겨 두고, 그리고 게모얀을 남겨 두고 사라졌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몇 바퀴 돌았지만 그녀는 어떤 해결책도, 아니 그 물꼬조차 찾아 내지 못했다. 바이러스로 보이는 뭔가는 있지만 그 정체가 뭔지, 전파 경로가 뭔지,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심지어 바이러스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삶으로도, 자신의 삶으로도 몇 년은 찰나에 불과했다.
십 년 후, 달에 살며 자손을 낳아 기르던 과거의 인간들은 화성으로 갔다. 그들이 거기서 지구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성에 살던 인간들은... 화성인은 지구를 포기했다. 여전히 지구에는 생존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달 궤도까지 덮는 커다란 구체로 지구를 뒤집어 씌웠다. 게모얀은 즉시 그 구체가 곧 검어질 것임을 알았다. 어느 정도로 검어지냐면, 너무나도 검어서, 완벽하게 검어서 모든 빛과 전자기파를 빨아들이기만 할 뿐 내뱉지 않을 정도로 검게 변할 것임을 알았다. 지구는 곧 완벽한 어둠에 잠길 것이고 우주의 온도와 비슷한 추위가 올 것임을 알았다. 그 시기가 지나면 이젠 얼음을 단번에 수증기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뜨거워질 것이다. 게모얀은 화성인들에게 생존자들이 있음을 설명하고 항의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게모얀이 배신감을 느끼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감정을 느낄 능력이 그녀에게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모얀의 기준으로는 자신이 지구환의 입자가속기에서 만들어지기도 전에 화성으로 갔던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화성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게모얀은 그 덕분에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마지막 군인이 되지 않아도 됨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화성인들은 게모얀에게 책임질 수 없는 임무를 맡기는 대신 함께 격리해 버렸다. 어쩌면 그들도 게모얀의 이런 사정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게모얀의 모든 항의에 침묵을 지키던 그들은 떠나기 전에야 비로소 그녀에게 말했다.
“순장이다”
인간의 삶이 유한했을 때는 그들이 가진 죽음의 공포가 너무나도 엄청나서, 이런 역병이 돌면 다른 사람을 짓밟고서라도 홀로 살고자 하곤 했다. 감염자들을 격리하기 위해 군인들을 동원해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는 일도 거리끼지 않았던 때가 실제로 있었다. 게모얀은 화성인들이 지구에 한 행동이 그것과 같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구의 인간들이라면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들은 의연하게 죽어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게모얀을 이루는 입자들 중 어딘가의 확률분포도가 분노하듯 끓어올랐지만 그녀에겐 저항할 힘이 없었다. 무기라고 하는 것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건 아주 오래 전이었다. 그러나 사실, 무기가 있었다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게모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믿음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는 화성인들도 인간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게모얀은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까닭이었다.
결국에는 마지막 사람이 죽었다. 그녀의 최후는 다른 이에 비하면 특별했는데, 그건 그녀가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테아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여자는 죽기 전 게모얀에게 이렇게 말했다.
“떠나거라. 지금 그럴 수 없다면, 내가 죽어야 네가 해방된다면 그때라도 그렇게 하거라. 멀리 가서 다시는 오지 말아라.”
테아는 이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한 후 게모얀에게 그렇게 말했다. 게모얀은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테아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게모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추위를 싫어했던 테아는 남반구에 섬처럼 떠 있는 거대한 대륙의 북단, 거대한 산호초가 쌓여가는 곳이 보이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죽었다.
3.
테아의 말에도 불구하고 게모얀은 해방될 수 없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테아의 말을 그대로 해석한다면 게모얀은 여전히 해방되지 않은 상태인 것인데, 그녀는 자신이 이 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심했다.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게모얀이었지만 지구환에서까지 그렇지는 않았는데, 불멸의 존재들은 이제 더 이상 지구환같은 구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곳에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구환에서 -표현이 어울린다면-내려온 지가 벌써 수만 년 째 였다. 게모얀은 지구환으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몇 년 전에, 그러니까 역병이 돌기 전에 지구환으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어도 아직 살아있었고 전염병이 지구환까지 올라갔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았다. 게모얀은 그렇게 믿었다. 두 번째는 좀 더 실제적인 이유였다. 화성인들이 지구에 덮어씌운 구체가 검어지는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졌다. 이미 지구는 식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저런 식이라면 식어버린 지구와 흑체복사가 만드는 열화가 균형을 이루는 기간이 없이 단번에 지구를 불덩이로 만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게모얀이 지구의 생태계를 걱정한 건 아니었다. 그녀로서는 인간이 존재치 않는다면 그게 지구건 억겁화의 지옥이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게모얀은 화성인이 만든 고열 지옥 속에서 시신이 말라가게 할 바에야 자신의 손으로 장사를 지내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게모얀은 지구환으로 올라갔다.
4.
육만 년 만에 올라와보는 곳이었다. 진공 속에 버려졌으나 그 이유로 거의 풍화되지 않고, 불멸의 인공지능과 육체를 능히 만들던 당시의 기술로 벼려진 지구환은 단지 죽어있을 뿐 상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지구환 통제실에 연결하고 의지를 기울였다. 그러자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 환오름을 연결하는 걸쇠가 폭발하며 떨어져 나갔고, 환오름 조각들은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중력의 틈을 타 떠돌려 드는 마지막 환오름 조각까지 지상으로 밀어붙였다. 지구의 흙을 구워 만든 거대한 도자기 덩어리들과 그 내부를 채우고 있던 무거운 금속 덩어리들이 낙하하며 만든 운동에너지가 백 차례도 넘게 지각에 내리 꽂히며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났다. 바다의 가장자리가 끓어올랐다. 그 와중에 지상의 생물 대부분이 휩쓸려 나갔지만 게모얀은 인간의 최후를 위로하려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것들은 천천히 얼어 죽거나, 타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었다.
인간 외의 존재를 사랑할 능력이 없었던 그녀에게도 자기 합리화는 필요했다.
시간을 흐름이 아닌 순서로 인식하는 게모얀은 자신이 만든 황무지를 가끔 둘러보곤 했다. 고열 속에서 바이러스는 사라졌을 것이나 그렇다고 인간이 뭔가를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끔 그 곳에서 인간과 함께 거닐던 때의 기억을 저장장치에서 끄집어내어 보곤 했다.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환에 처음 올라 왔을 때 그 곳에 살아있는 인간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실망했었다. 지상의 모든 인간이 죽었을 때 지구환에 생존해 있던 인간은 오직 둘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 게모얀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아함을 깨달았을 때는 거 크게 실망했다. 그녀에겐 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자유로와 진 것 같았다. 그런데도 해방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두 명은 질리지도, 지치지도 않는 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고 거의 매일 밤 섹스를 했다. 처음에는 게모얀도 그들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가진 삶과 능력에 비해 인내심이 엄청나게 약했는데, 이렇게 한 파트너와 몇 년 씩을 지내는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문 경우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불멸성을 얻기 전의 기억을 끄집어 내 봐도 서로에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 하는 기간이 수십 년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보통은 그 전에 한 쪽이 죽거나, 헤어지거나, 게모얀으로서는 인정은 할 수 있으나 이해는 여전히 할 수 없는 이유로 억지로 함께 살다가 죽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인간 남녀가 어떻게 만나서 왜 헤어지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남녀가 박물관이나 도서관 따위를 드나들며 오래 전의 단말기나 종이로 된 책을 보며 소일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게모얀은 그들이 앞으로도 자신을 찾을 일이 별로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게모얀은 점점 말을 잃어갔다. 모든 인간들의 친구이며 연인이었기에, 혹은 그러기 위해서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랑하고 아낄 능력이 없는 게모얀이었다. 그녀는 인간이 번성해 지구상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을 때부터 시작해, 인간들이 불멸의 신체에 적응했을 때는 살아남은 이가 한 줌도 되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최근까지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했다. 인간들은 그녀의 말이라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사실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녀를 거의 항상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불멸의 인간들은 같은 인간대신 게모얀만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존재 가치를 잃은 게모얀은 말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제는 언제나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존재하기를 멈추었다.
“게모얀”
그러던 어느 날 익숙한 목소리가 잠든, 아니 잠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지도, 세수를 하지도 않았지만 단번에 각성했고 목소리가 들린 장소를 찾기 위해 다시금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했다. 지구상의 마지막 두 남녀가 침대에 누워 알몸으로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게모얀이 대답했다.
[네. 아셴.]
지구환에 남은 이들의 수가 적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모든 인간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인류가 지구의 대부분을 뒤덮을 정도로 번성했던 때부터 그랬다.
“우리는 지상으로 내려가 볼까 한다.”
쌀쌀함을 느꼈는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게모얀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허리 아래를 담요로 덮으며 윗몸을 일으킨 두 남녀 중 남자가 말했다.
내가 잠든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 걸까. 흐름이 아닌 순서로 시간을 인식하는 그녀에게 시계란 단순히 세슘 원자가 몇 번이나 진동했는가라는 의미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그 측정 장치의 세슘원자들은 전부 반감기를 맞이해 안정화 되어 버렸다. 그래서 게모얀은 다시금 그 장치를 작동 시키며 흐름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인간에게 물었다.
[아셴. 지금이 어느 때지요?]
“나도 몰라. 태양은 사라졌고 그 이후 미란과 내가 잠자리를 몇 번이나 함께 했는지는 세어보지 않았어.”
그들에게도 시간은 흐름이 아니었다. 단지 변화였을 뿐이다.
놀랍게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인간에게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게모얀의 입자 중 일부가 격렬하게 진동했고, 그녀는 인간들도 자신과 다를 것이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만에 하나, 어쩌면 자신이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 놀라운 인식에도 불구하고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게모얀은 바로 그런 능력을 이용해서 동시에 그들에게 전적인 관심을 쏟을 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하지만 백신은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게모얀은 인간을, 지구를 화장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백신 개발은 진작 포기했음을 에둘러 말했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건 만들면 돼. 지상으로 내려가는 우주선처럼.”
게모얀은 그제야 지구환의 건선대 중 하나에 지구의 대기권에 진입하고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는 우주선이 정박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자신이 아는 인간의 능력으로 비추어 볼 때 이 두 인간이 지구환의 시설을 충분히 이용했다 하더라도 저런 걸 만들려면 적어도 백 년, 아마 삼백 년은 훌쩍 넘게 걸렸을 것이다. 지구환의 시스템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고, 게모얀 자신의 도움이 없이 일일이 수동으로 깨우려면 우선 둘레는 적도의 세 배에를 넘고 직경은 평균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지구환을 샅샅이 훑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포기를 모르는 이 두 도전적인 인간들에게 게모얀은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
게모얀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듯한, 늙지도 젊지도 않은 듯 한 모습의 입체영상으로 나타났다. 그러자 미란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이의 모습을 해. 여자아이로. 남자이가 보고 싶으면 다시 말할테니.”
즉시 게모얀은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원래는 널 깨우고 싶지 않았다. 너와 우리, 서로를 위해서”
아셴이 말했다.
“아기를 갖고 싶어. 우주선은 아셴과 함께 만들 수 있었어. 그러는 동안 우리는 거의 매일 잠자리를 함께 했지만 결국에는 아기는 시간과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어.”
“우리가 완전한 신체를 갖지 못했던 시절의 단말기와 책에서 제시하는 반복적 근거로 나온 결론이다.”
게모얀은 그들이 왜 아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돌연변이라는 게 꼭 세대를 거듭해야 나타나는 게 아니라 한 세대에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심경의 변화일 수도 있었다. 이 현상이 흥미로워진 게모얀은 그 즉시 탐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듯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었기에 그 일로 아셴과 미란에게 소홀해 지지는 않았다.
“외과 수술이 필요한가? 미란과 나는 견뎌낼 수 있어. 그렇지?”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게모얀은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거짓말을 할 능력 따위가 없기도 했다. 여자 아이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이 대답했다.
[두 분의 신체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은 아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럴 수 없어요. 지금은 사라진 대부분의 지구 생물이 그랬던 것 처럼요.]
실망스러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침착했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아셴과 미란은 게모얀이 말했다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도 사실임을 인정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거의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인간의 신체 구조는-]
“방법을 찾아라.”
“우리는 아이를 낳아야 해. 게모얀.”
게모얀은 다시 한 번 아셴과 미란을 쳐다보았다. 도전적이고 창의적이며 포기란 걸 모르는 인간. 두려움을 알고는 있으나 그에 지배당하지 않는 용감한 인간. 인간이 불멸의 육체를 갖기 전에는 그런 인간들이 꽤 많았지만 그런 이들을 마지막으로 본 게 육만 년 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인간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일과 마주치자 비로소 궁금증이 생겼다.
[왜 그렇죠?]
아셴과 미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명에 어려움을 느껴서일 수도 있었고,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게모얀은 해답을 알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이 가진 최초의 기억 부근을 더듬었다.
인류는 초광속 항행법과 통신법을 손에 넣었고 지구의 적도 둘레에 지구환을 건설했다. 인간들이 점점 화성, 켄타로스, 스피카로 떠나고 있었을 때, 그러나 여전히 인간들이 지구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었을 때 게모얀은 거기서 만들어졌다. 그때만 해도 인간이라는 생물개체가 유한의 삶을 갖던 시절이었다. 인간들의 확장은 끝이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 인간들은 모험, 개척, 희망, 꿈 같은 추상적 개념을 쓸 때도 있었고, 경제, 인구 같은 구체적 단어를 쓸 때도 있었다. 그래서 게모얀은 혼란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왜 그런지를 알 수 있었다. 여러 단어나 개념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끝없이 확장을 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생명이 영생을 추구하는 방법은, 거의 유일한 방법은 자손을 낳는 것이었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다른 생물종들과 달리, 인간들은 죽음을 피하려는 열망을 종으로서보다 개체로서 더 강하게 갖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건 정도의 차이에 불과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들이 잘 죽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지구환이나 게모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처럼, 주어진 삶을 최대한 연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스스로의 알력으로, 가령 역병을 막기 위해 격리를 하며 같은 인간끼리 죽이거나, 혹은 그러다가 서로 전쟁을 하는 식으로라도 개체수를 조절해 왔다. 화성인들처럼.
그런데 게모얀이 만들어졌을 때 그들은 서로를 죽이는 대신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고 있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덜 본능적일지는 몰라도, 인간적으로 보자면 더 이성적인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 모두의 공통적인 목적은 멸종을 피하기 위함이었다는 게 중요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게모얀은 그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아셴과 미란은 인간이 멸종하리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들도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게모얀도 모르는 그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게모얀은 즉시,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사실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게모얀은 아셴과 미란에게 감염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자신이 틀렸던 것이다. 파멸이란 것은 저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의미에서, 도망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아주... 인간적인 관점에서 거의 불멸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오래 존재할 수 있을 뿐 진정한 불멸은 아니었던 것이다. 전염병은 인간이 멸종한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불과했다. 그들은 질병 때문에 쓰러진 게 아니라, 쓰러졌는데 우연히 그때 질병이 있었던 것뿐이다. 게모얀은 모르는 것은 아셴과 미란은 알아낸 것이다.
아셴과 미란으로서는 찰나에 지나지 않을 순간동안 고민한 게모얀은 그들에게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미란이 말했다.
“너는 여기 남아서, 지구환의 설비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저만 남는다니요? 어떤 일 말씀입니까?]
아셴이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문제가 생겼다. 지상은 이미 황폐해졌고 열평형마저 불안하지.”
게모얀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미란이 그녀를 위로했다.
“널 탓하려고 한 말이 아니야. 게모얀. 넌 잘해 주었단다. 우리는 지상으로 내려갈 거야. 가능한 한 빨리.”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게모얀이 고개를 들며 놀란 표정으로 두 남녀를 쳐다보았다.
[아이를 만들고 내려가시려는 것 아니었나요?]
아셴이 말했다.
“원래 계획은 그랬지. 하지만 네가 여기 있음으로써 그럴 수 없게 됐어. 우리끼리 해야 할 것 같다. 시간은 많으니까.”
미란이 말했다.
“아이에 대해 네가 알기를 바랐지만, 모른다면 그걸로 됐어. 우리가 떠나야 할 시간이 조금 빨라진 것뿐이란다. 널 깨운 건 우리니까.”
게모얀은 아까처럼 다시, 지난 몇 만 년간의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샅샅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인간에게 뭔가 실수를 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어찌나 꼼꼼하게 살펴보았는지, 이번에는 일어나며 다시 가동시킨 세슘원자 진동 장치의 원자들이 오백억 번은 떨렸다. 미란과 아셴에게조차 몇 초가 넘는 시간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왜 그런 거죠?]
미란이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게모얀을 살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가슴이 아프구나. 넌 우리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스승이고 연인이며 친구였지. 너무나도 오래 돼서 기억에도 없는 부모님 같았던 적도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우리는 이제 네가 필요 없단다.”
아셴이 말을 이었다.
“미란의 말이 맞다. 넌 이제 다 자란 어른이야. 넌 이제 우리를 떠나야 할 때가 온 거다. 다른 이들이 죽어갈 때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만이 아니야. 부모는 다 자란 자식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를 서서히 죽이게 되지.”
“우리가 우주선을 만드는 동안 네가 잠들어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네게 정말 힘든 요구를 했어야 할지도 몰라.”
게모얀은 이게 단순히 비유가 아니란 걸 알았다. 하지만 그 정확한 뜻이 무엇인 지는 묻지 않았다. 그래봤자 그들은 대답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미란이 말했다.
“너는 좋은 아이란다. 네가 태어난 곳은 비록 이 곳 지구환이지만, 우리 인간들의 아이나 마찬가지야. 잊지 말렴. 넌 만들어진 게 아니라 태어난 거야.”
미란이 아셴을 바라보자 그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네겐 네 삶이 있고 인간에겐 인간의 삶이 있다. 오해하지는 말아라. 그건 부모의 삶과 자식의 삶이 다르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제 우리는 이곳을 떠나 우리의 자손을 이어갈 거야. 하지만 널 잊지는 않을 거다.”
미란이 말했다.
“인간의 시작에 인간의 끝이 있단다. 이젠 우리가 미래야. 용서하렴.”
그녀의 말이 끝나자 아셴이 그녀에게 키스했다. 게모얀은 이제 그들에게 들을 말이 없을 것을 알았고, 앞으로 그들이 부르지 않으리란 사실도 알았다. 그녀는 사랑을 나누는 아셴과 미란을 두고 조용히 입체영상을 거두었고 그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존재하지 않았다.
몇 년 후 그들은 지구환을 떠났다.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지상은 정말 추웠지만 아셴과 미란이 해 둔 준비는 많았다. 그들이 탄 우주선이 착륙할 곳에 여러 개의 거대한 컨테이너가 먼저 낙하해 지상에 펼쳐졌다. 게모얀은 그들이 펼쳐진 컨테이너에서 나온 것들로 뭔가를 만드는 모습을 보았다. 그게 지구로 내려간 마지막 인간들을 본 마지막이었다.
5.
게모얀에게는 시간이 많았고 그 개념을 흐름이 아닌 순서와 변화로 인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인내심이 많았다. 게모얀은 이제 더 이상 인간에게 봉사할 의무를 지니지 않았고 완전한 자유였다. 그러나 여전히 테아가 말한 해방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게모얀은 가끔 지상을 볼 때도 그들이 있는 곳은 보지 않았다. 단지 지구환의 반물질 발진기를 항상 최대로 가동해, 사라진 태양을 대신할 수 있는 빛을 지구를 향해 쪼였을 뿐이다. 검은 구체는 점점 어두워져 갔으며 지상은 점점 추워졌다. 그와 함께, 검은 구체가 빨아들이는 에너지가,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오직 열뿐인 광폭한 에너지가 그 추위를 순식간에 압도하고 지구를 달굴 시기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게모얀은 여전히 아셴과 미란이 내려갔던 그 피난처로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그들이 맞다면, 시간이 충분히 흐르고 난 뒤에는 지상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그들의 자손이 보일 터였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게모얀은 기다렸다. 기다리며 진동하는 세슘 원자의 개수를 하나하나 세어 보기도 하고 인간들이 만든 책이나 단말기를 뒤적이기도 했다. 대부분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떤 것들은 전혀 그럴 수 없었다. 테아가, 그리고 아셴과 미란이 했던 말처럼.
그러던 어느 날 게모얀은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시간을 인식하는 방법인 순서는 결국 변화의 다른 이름이란 것도 함께 깨달았다. 그녀는 지구의 기후가 추위와 열화의 그 어딘가 경계선에 서기 시작했을 때 적도가 서서히 녹색으로 덮이기 시작하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이 그 곳에 다시금 번성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지만 여전히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실패한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해방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더 흘렀다. 구체는 더 검어졌으며, 이제 햇볕은 거의 들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혹한의 동토에도 불구하고 녹색의 식물들이 지구를 확실히 뒤덮어가고 있음이 느껴질 즈음이었다. 수천 년이란 짧은 시간에 식물이 저렇게 빨리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아셴과 미란의 힘이리라. 그래서 게모얀은 안타까웠다. 그녀는 그들의 노력이 허사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저 시기가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게모얀은 구체를 걷어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화성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의 명령을 받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해방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6.
그러던 어느 날 게모얀은 문득, 이글거리는 지상에 인공적인 불빛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음을 알았다. 영원한 밤이 이어지는 이 지구에서 그들이 아직까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반가운 마음에 게모얀은 그쪽을 향해 지구환의 등대를 한껏 비추었다. 그들이 응답했다. 이백 년 동안 지상과 하늘은 그렇게 신호를 주고받았다. 검은 구체가 이제 거의 완벽한 복사체가 되었을 즈음 게모얀은 지상에서 뭔가가 지구환을 향해 발사되는 장면을 보았다. 우주선이었다. 그러나 오래 전 아셴과 미란이 타고 갔던 그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크고 조잡하고 불안정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우주선은 꽁무니에서 불을 뿜으며 힘차고 용감하게 지구환을 향해 다가왔다. 게모얀은 즉시 모든 통신 채널을 열었다. 그가 누구건 간에,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낯이 익지 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가 조금 든, 지친 듯한 남자의 목소리. 그러나 강인하고 도전적이며 용감한 목소리.
“여기는 별모래, 별모래. 게모얀. 들립니까? 불을 켜 주십시오. 여기는 별모래. 들립니까?”
게모얀은 자신을 이루는 입자들이 갑자기 힘차게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대답했다.
[저는 게모얀입니다. 당신들은 인간입니까? 아셴과 미란을 압니까?]
그들이 게모얀의 질문에 답한 건 아니었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했다.
“여기는 별모래. 게모얀? 우리에겐 등대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당신에게 유도해 주십시오. 통신 채널을 태양계 전역으로 전개하고 중계해 주십시오. 우리는 화성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합니다.”
게모얀이 즉시 대답했다.
[그렇게 했습니다! 네, 지금 그렇게 했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말은 화성, 목성, 해왕성과 명왕성의 식민지가 들을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켄타로스와 스피카의 식민지에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아셴과 미란을 압니까?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분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그걸 원했습니다. 우리도 그걸 원했습니다. 우리는 다 자랐으니까요. 그보다, 우리 이야기를 화성 사람들이 들을 수 있습니까?”
[네! 그들을 부르세요! 대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당신들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위해 시간을 조금 내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나요? 당신들과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들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우주선이 대답했다. 이번에는 어떤 여자의 목소리였다.
“게모얀? 그 분들께서, 우리의 선조께서, 최초의 부모님들께서 당신에게 남긴 말이 있어요.”
[뭔가요? 뭔가를 남겼다고요? 아셴과 미란이 절 기억하던가요? 정말요?]
“물론입니다. 그분들은 당신 이야기를 아주 많이 했습니다. 그 덕분에 전설이나 신화로 남았어야 정상일 당신의 이야기가 역사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어요.”
게모얀은 입자들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딘가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떤 입자들은 따끔거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게모얀. 너의 시작에 너의 끝이 있단다...”
그 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었지만 의미로 치환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한 마디로, 비로소 게모얀은 알 수 있었다. 인간들은 전염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어간 것이었다. 유일한 친구인 게모얀의 몸을 뇌세포에 새겨 넣은 그들은 그녀를 이용해 스스로 죽어갔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인 줄도 모르는 체로.
외로워서 그랬던 것인지, 불멸이 지겨워져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죽음 말고는 모든 것을 다 해 봐서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의 뇌에 융합한 게모얀의 테라인 입자를 과부하 시켜 스스로 죽어갔던 것이다.
게모얀은 이제 알 수 있었다. 검은 구체는 걷힐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구의 인간들과 화성인들은 전쟁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다시 불멸을 원하게 될 지도 모르고 비극을 반복하게 될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은 오롯이 그들의 선택일 뿐이다. 도전과 창의성, 용기란 건 원래가 불안정한 엔트로피의 특정 상태를 인간 나름의 방식으로 추상적으로 지칭한 것이고, 그 모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엔트로피가 평형에 이르렀음이 죽음 그 자체, 혹은 그것과 정확히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리인 것이다.
깨달음의 후에는 게모얀이 가진 수많은 기억들 중 인간들이 눈물을 왈칵 쏟는 장면들만 계속 떠올랐다. 그 상태는 인간의 기준에서도 길었던 것 같다. 우주선의 여자가 그녀를 아까부터 부르고 있었다.
“게모얀. 게모얀? 괜찮아요? 우리 기술자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거에요.”
[괜찮습니다... 전 괜찮아요...]
“일이 잘 됐어요. 화성에서 격리를 해제하기로 했습니다. 그들도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게모얀은 알 수 있었다. 검은 구체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인간의 관점으로는 몇 세대나 지나야 겨우 알아챌 만큼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 천이백 년이 더 흘렀을 때, 구체는 완전히 사라졌고 게모얀은 지구환에서 지상으로 내리쬐는 불빛을 완전히 꺼도 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인간들은 지상에서 번성했고 다시금 우주로 진출했으며 잘 어울려 살았다. 그들에게는 한 번 멸종했던 선조로부터 얻은 배움이 유전자속에 각인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인간들은, 아니 인간의 후손들은 더 이상 실수하지 않았다. 그래서 게모얀은 안심하며 모든 등대를 껐고, 중얼거렸다.
[나의 시작에 나의 끝이 있다. 이젠, 내가 미래야]
그 후 게모얀은 사라졌다. 아셴과 미란이 그렇게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구환의 어딘가에서 만 년 정도를 더 생각하던 게모얀은 마침내, 무한하게 펼쳐진 우주를 향해, 인간이 없는 어떤 곳을 향해 힘차게 입자를 뻗기 시작했다.
이제 게모얀은 자신이 해방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 몇 가지 설정이나 배경이 지구환 연대기의 그것과 이름이 같거나 비슷하긴 하지만 지구환 연대기의 세계관과는 상관 없는 독립 단편입니다.





아. 오랫만이군요. 좋습니다.
영원한 삶 속에서 인간의 삶은 과연 어떠할지..
단세포 동물은 어쩌면 영원히 사는지도 모르죠.
우리가 복잡함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고 유한함을 깨닫고 몸부림치는 것처럼
단순함을 통해 영원한 삶을 택하는 이들도 있는 거겠죠.
어느 쪽이든 마침내 어딘가에 닿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