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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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징후가 처음 나타난 곳은 북미였다.

처음에는 사소한 사건이었다.

산호세 인근의 한 농장 주인을 당혹하게 만든 이 사건은
그저 사소한 재해, 혹은 농장 주인의 부주의쯤으로 여겨졌다.

수십 에이커의 밀들이 일제히 말라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신문에서조차 이 사건을 자그만 이단기사로 싣는데 그쳤다. 이후 1년 동안 농장의 앞을 지나는 국도를 따라 무수한 차들이 오고 갔고 흙과 먼지와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실어 날랐다.

마침내 이듬해가 되자 재난은 물밑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파종기가 지나 밀들이 자라날 무렵이 되자 저 가련한 농부의 밭에 나타났던 것과 유사한 증상이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동부 버지니아에 이르기까지 일제히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밀 뿐만 아니라 벼, 밀, 보리, 옥수수, 수수, 기장, 호밀, 조와 같은 대부분의 식량 작물들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말라죽었다. 그것은 전염병이었다.
연방정부의 신속한 검역에도 불구하고 역병은 북미 전체에서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밀과 벼. 옥수수, 보리. 이들은 모두 벼목 화본과의 식물들로 유전자의 99퍼센트 이상을 공유한다. FDA는 이 외떡잎식물 무리의 생장에 관여하는 신종 질병이 출현했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 재난을 해결할 기적 같은 치료법을 내놓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역병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퍼져나가 유럽을 거쳐 아시아를 향해 맹렬히 진격하고 있었다. 재난은 지나치게 빠르지도, 지나치게 느리지도 않게 찾아왔다.


국제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가장 먼저 깨달은 나라는 역시 미국이었다.
미국은 대륙 전체에서 이 재난이 들끓던 바로 그 해에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범정부적인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몇몇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부들은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사실 식량문제로 칼을 쥔 쪽은 언제나 미국이었고 이 기회에 그들이 곤경?당하는 것은 그런 오만함에 대한 천벌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마저 적지 않았다. 문짝에 양의 피를 바르는 천진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들은 항구와 도로와 인간들의 흐름을 막으면 저 역병을 막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재난의 검은 그림자가 점점 발을 넓혀가자 열국의 민족들과 지도자들은 차례로 이 악마적인 장난에 무릎을 꿇었다. 유럽에서 최초로 변종이 발견된 이듬해에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 작물들이 고사했다. 그리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극동의 일본과 중국, 한국에까지 병이 번져나갔다.


간신히 열린 국제회의는 온통 책임을 전가하는 난투장이 되었다.

가장 열을 올린 것은 러시아 대표였다.

“우리는 지난 냉전시기에 미국이 식량을 무기화할 계획을 갖고 있었음을 알고 있소. 그리고 그 일환으로 식량작물을 공격하는 생물학 병기의 제조에 손을 댔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소! 미국은 즉시 그 생물학 시설들을 공개하고 국제 사찰을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중상모략이오! 우리 미국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생화학 병기의 제조에서 손을 땠으며 해당 시설들은 완벽한 감시 하에 폐기되거나 봉인되었소. 오히려 당신네 러시아야말로 그런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소. 당신들은 구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수많은 생화학 시설들의 소재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질 않소!”

“그렇다면 최초의 상황이 터진 것이 당신들 나라의 한복판이라는 건 어떻게 설명하시겠소!”

“우리 중국은 국제적인 책임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범국제적인 조사단을 발족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그 어느 국가의 주도적인 입김도 작용해서는 안 될 것이오.”

욕설이 난무하지 않을 뿐, 뒷골목 패싸움이나 다를 바 없는 수차례의 국제회의가 내놓은 결론이라고는 고작 국제기구에 의한 본격적인 식량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에 합의한 것뿐이었다. 유럽 국가들의 주도에 의해 발족된 국제기구는 식량 생산 국가들의 식량 수입국에 대한 식량수출의 쿼터를 제시했고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에 합의했다. 대부분의 민주정부들은 긴급조치에 의해 식량, 특히 밀, 벼, 보리와 같은 문제가 되는 작물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예산을 투입하여 그나마 생산되는 모든 작물들을 사들였다. 그 이후의 대책 같은 것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역병이 발발한지 단 5년 만에 세계 식량 보유고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지구상의 식량소출은 10퍼센트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생산량은 점점 더 빠르게 감소하고 있었다. 식량 비축량이 충분한 나라들조차 폭동에 버금가는 식량사태로 골머리를 앓았으며 전통적인 식량부족국가들은 굶주림으로 죽는 인구가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를 압도했다.


혼합농업이 이루어지는 유럽과 미주의 상황은 그래도 나았다. 물론 대규모 목축에 필요한 옥수수와 보리, 귀리 같은 사료작물이 절멸함에 따라 이런 축복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최소한 굶어죽는 사람이 거리에 쌓일 지경은 아니었다.

인구부양을 전적으로 쌀에 의존하는 아시아에 있어서 벼를 절멸시키는 이 질병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의 손수레와 정부의 트럭들이 거리의 시체를 운반하는 모습이 연일 국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람들은 TV를 보면서 그것이 언제 자신들이 사는 곳의 모습이 될지 모른다는 두좆趾?떨었다.



각계각층의 학자들은 이 전무후무한 질병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다각적인 연구를 개시했다.
일부는 외계로부터 유입된 바이러스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고 일부는 농작물에 대해 사용하는 화학물질에 의해 기존의 질병이 변이를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그 어느 주장이나 완벽한 설명이 되지는 못했다.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바이러스의 공격 양태였다. 그 어떤 바이러스도 숙주를 완전히 죽이지는 않는다. 숙주를 죽이는 것은 생태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바이러스들뿐이며 그런 바이러스들은 대부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거나 약화되어 생태계에 적응을 해나간다. 감기와 같은 경우가 좋은 예다. 감기는 숙주를 죽이지 않는다. 감기가 번성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숙주를 말라죽게 만드는 이 바이러스는 곧 수그러들거나 그 양상이 변화할 것이므로 충분한 시간만이 해결책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질병이 최초 출현한지 8년 만에 플로리다의 한 늪지에서 다른 형태의 바이러스가 발견되면서 그런 낙관론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 바이러스는 부들이나 강아지풀과 같은 벼나 밀과 유사한 식물들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는데 인간에게는 단지 잡초에 불과한 이 풀들은 바이러스에 의해 거의 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숙주를 죽이고 바이러스도 함께 사라지는 경우는 단일한 숙주만을 기생대상으로 삼는 바이러스의 경우이다.

학자들은 침울한 발표를 내놓았다. 세상의 모든 쌀과 밀과 보리와 옥수수가 사라져도 이 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 바이러스의 치료를 위해서는 최소한 20년 이상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물학계의 공식적인 의견에 나오면서 상황은 더욱 더 암울해졌다.


생물학자들과 화학자들이 획기적인 약품의 개발을 꿈꾸는 동안 사회학자들은 식량작물의 절멸 이후에 나타날 공포와 혼돈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고대의 인류는 현재에 비해 훨씬 다양한 식량들을 섭취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회조직이 거대해지고 인류 스스로 품종을 개량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게 되자 인류는 이른바 편식을 시작했다.

한 인류학자가 끔찍한 계산결과를 내놓았다. 현재 지구의 식량생산능력은 대략 3000년을 퇴보한 상태이며 그 결과 부양 가능한 인구 역시 3000년 전의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열명 가운데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아니, 어쩌면 열명 가운데 하나조차도 살아남기 힘들지도 모른다. 오직 종교만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씨는 아내가 내놓은 밥상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공기그릇에 가득 하얀 쌀밥이 담겨있었다. 하얀 공기밥이 왠지 낯설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아내는 물끄러미 남편을 바라보았다.

“여보. 정부에서요. 앞으로는 쌀하고 밀가루를 사고파는 걸 금지한데요.”

“음. 나도 들었어.”

“이게 마지막 쌀밥이에요.”

그러면서 김씨의 아내 정씨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어릴 적 생각나요?”

“무슨 생각?”

김씨는 그릇에 수저를 꽂으며 되물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이런 하얀 쌀밥을 먹는다는 게 참 힘들었잖아요. 왜. 기억 안나요?”

“흥.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냐.”

김씨는 아내의 실없는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감자도 삶아먹고 그랬었죠.”

“대체 언제적 얘기를 하고 그래?”

“사람도 참. 지금 상황이 꼭 그렇게 됐잖아요.”

정씨는 그러면서 김치줄기를 찢어주었다.

“우리야 살아봤자 얼마나 더 살겠어. 다만 어린 것들이 걱정이지.”

“예. 우리야 뭐 굶기도 많이 굶어보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언제 굶어본 적이 있기나 한가요.”

김씨는 물끄러미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먹어볼 수 있는 밥이라면...

그렇다. 더욱 맛있게 먹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김씨는 한 숟갈 가득 밥을 퍼서 입안에 넣고 씹었다. 그리고 그 달콤하고 고소한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 아내와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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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