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과 버터 - 역사의 전쟁(Guns&Butter - War of History) 

  인간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 말한다. 그만큼, 인간이라는 종이 태어난 이래 이제까지 모든 종류의 역사는 전쟁과 더불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전쟁은, 어떤 때는 역사를 낳았고, 어떤 때는 영웅을 낳으며 이제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하여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전쟁. 역사를 이해하고, 보다 친숙하게 게임을 진행하기 위하여, pc 플레이어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수많은 전투와 전장의 이야기를 연재하고자 한다. 전투나 전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요소-무기와 식량(총과 버터)-를 더하여...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다채로운 차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 이것은 PC Player에서 연재 중인 내용입니다.)


제 1 회 알렉산더의 위대한 원정

 

  ‘전쟁이란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종의 폭력 행동으로, 정치의 연장이다.’(클라우제비츠, 전쟁론)


그의 원정로는 멀리 인도에까지 이르렀다.

  로마의 사령관이었던 스키피오가 ‘로마의 숙적’ 한니발에게 물었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요.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소.”라고...


  카르타고의 한니발이라고 하면 아이들에게조차 ‘한니발이 있다.’는 말로 겁을 주었다는 공포의 대상이다. 에스파니아에서 이끌고 출발한 얼마 안 되는 병사로 알프스를 넘고, 로마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에서 자그마치 13년간 휩쓸었던 괴물. 그런 그가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이라고까지 말하는 알렉산더의 전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동아시아를 제외한 문명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정벌한 알렉산더의 원정. 총과 버터 제 1회에서는, 바로 그의 원정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피로 점철된 출발

 

위대한 현자 밑에서 알렉산더는 지혜를 배웠다.  그리스가 낳은 위대한 왕, 알렉산더의 출신은 마케도니아 왕국. 지금은 발칸 반도 중부에 있는 작은 나라이지만, 기원전 당시의 ‘마케도니아’는 매우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한때 페르시아의 편에 가담하여 그리스와 대립했던 이 나라는, 필리포스 2세의 시기에 이르러 그리스 전체의 패자로 자리 잡았다. 기원전 338년. 강대한 마케도니아군을 이끌고 진격한 필리포스 군은 카이로네이아 근교에서 그리스의 3만 대군과 마주쳤고, 적의 허를 치르는 유인 작전으로 격파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승리로 코린트 동맹을 결성하여 그리스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필리포스 2세 왕은 이듬해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기로 계획한다.


  그러나, 역사는 필리포스 2세를 배신하였고 그는 한때 자신의 연인이라 불리었던 이에게 암살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자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를 동경하고, 아버지로부터 ‘마케도니아는 네게 너무 좁다.’는 말을 들었던 젊은 영웅의 원정은 그 첫발을 내딛게 된다.


위대한 첫걸음

 

그에게 있어 그리스의 내란은 2년의 세월도 필요치 않았다.  그의 출발은 피로 물든 채였으나, 20세의 알렉산드로스는 그것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바로, 필리포스 2세의 죽음으로 촉발된 반란 사건들이 각지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트라키아인의 반란이 일어나자, 알렉산드로스는 혼란스런 전투의 한가운데 뛰어들어 최초의 알렉산드로스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도나우 강 조차 넘어선 그는 결국 반란군을 모두 물리치고 코린트 동맹을 부활시켰으며, 자신의 왕위를 확고하게 굳히는데 성공했다.



*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

  코린토스에 도착했을 무렵, 알렉산드로스는 통 속에 살펴 지상의 재산을 경멸하는 견유학자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방문했다. 그에게 소원을 묻자 그는 “햇볕을 가리지 마십시오.”라고 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나는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유명한 철학자와의 이러한 문답은 알렉산드로스의 이미지를 충실하게 포장하고 그의 명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역사는 말한다. ‘어떤 왕이 위대한가 아닌가는 그의 결과로 입증된다고.’

  그런 면에서, 알렉산더는 20세 초의 젊은 나이에 이미 위대한 왕으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선언한 테베에 대해서, 알렉산드로스는 오랜 고민 끝에 공격을 내렸고, 교만한 도시 테베는 초토화되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1만명이 있으면 1만명의 의견이 나온다.’는 그리스의 여론을 하나로 굳히는데 기여하였다.


위대한 여정은 군대 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동방을 향한 원정을 위하여 알렉산드로스는 철저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오늘날의 병참 학자들조차 감탄을 금치 못하는 치밀하고 체계적인 그의 전쟁 준비에는, 3만 5천에 달하는 첫 번째 군대 외에도 이들 군대가 충실하게 운용될 수 있도록 막대한 양의 물자와 수송대가 포함되어 있었고, 행정 관리나 측량 기사 등의 기술자, 그리고 사관 같은 수행 인원까지 준비하는 철저함이 더해졌다.(알렉산드로스왕의 군대는 3만 5천  뿐이었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가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첫 번째 군대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군대가 움직이기 위해서 그는 그 몇 배에 이르는 수송대와 수행인원을 필요로 했다.)


 

바다를 너머서, 풍요로운 땅으로 향하는 마케도니아군  마케도니아를 떠난 그는 바다를 건넌 후 아시아의 땅을 향해 창을 내리 꽂았다. ‘창을 부르는 땅’이라는 관습에 따라 그는 그 땅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바로 아시아의 지배자로서 군림할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기원전 334년 5월 페르시아는 그라니코스 강 부근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처음 공격을 가했다. 대국답게 엄청난 인원과 물자를 투입했지만 조직은 허술했다.

혼전의 시간, 위기는 끝없이 찾아왔다.  5만이 넘는 인원으로 강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던 페르시아군을 향하여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진격을 시작했고, 용감무쌍한 알렉산드로스는 강을 건너 적과 백병전을 벌이다 죽을 뻔 했으나, 심복 클레이토스의 손에 구출됨으로서 구사일생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개인의 위험과는 달리,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115명 만 전사했으며, 그에 반해 페르시아군은 보병 2만과 기병 2500을 잃는 대패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이 결과로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일대의 그리스 식민지를 거의 싸움 없이 손에 넣는 쾌거를 이룩하게 된다.


 

이수스, 운명의 반전

 

강적 페르시아를 향하여, 그의 원정은 계속되었다.

  계속해서 동방을 향하는 알렉산드로스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대국 페르시아. 아무리 긁어모아도 10만의 군세를 모으기 어려운 알렉산드로스와는 달리, 당시 페르시아는 왕의 말 한마디에 수십만 대군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엄청난 저력을 자랑하는 국가였다. 물론, 시민병 중심의 그리스와는 달리 페르시아의 군대는 용병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막대한 병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첫 전초전인 그라니코스 전투에서도 알렉산드로스의 전 병력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였던 페르시아는 이번에는 보다 강대한 전력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정복의 시대.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당초의 철저한 병참 계획을 유지하며 진군해나갔다. 4만 8000으로 불어난 병사를 포함하여 수행자를 제외하고도 7만 가까운 인원이 그의 휘하에서 움직였기에,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물자가 소비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물자의 양은 대략 계산해도 물 40만 리터에 곡식 13만 킬로그램. 이러한 물자를 얻고 유지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로스는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그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물론, 전쟁에 있어 필요한 선전 정책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고르디온에 입성한 그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수 있는 사람이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내려오는 고르디우스왕의 오래된 전차를 방문하여, 그 매듭을 간단히 칼로 잘라서 처리해 보는 위용을 보인 것이다. 그의 행동은 아시아를 지배하겠다는 뜻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예언을 신봉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물론, 그런 모든 행동은 그의 적수인 다리우스 왕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그러한 수많은 노력은 첫 번째 대전이었던 이수스 전투에서 극적인 가능성을 확립시켰다. 바로, 다리우스 왕이 도망쳐 버린 것이다! 페르시아와 그리스(아니 알렉산드로스). 병력의 규모는 5만 대 12만. 자그마치 2배를 넘는 전력으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은 전투에 나섰다.


격전의 순간. 대규모 병력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놀랍게도 이 전투에서는 양쪽의 정보망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합쳐서 16만이 넘는 대군은 불과 몇km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스쳐 지나가 버리고 말았고, 다리우스왕은 어제까지 그들이 주둔했던 곳에 마케도니아군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게 된 것이다. 부대를 돌려 추격에 나선 다리우스왕은 마케도니아의 낙오병을 발견하고, 그 분노를 이들에게 표출하였지만 길을 돌려 돌아온 알렉산드로스의 주력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의 계획과는 달리, 혼전이 펼쳐진 가운데 그는 용맹하게 적을 찾아 나섰다. 그는 페르시아식으로 군대의 한 가운데에서 지휘하고 있던 다리우스를 찾아 칼을 휘둘렀으며, 유명한 모자이크에서처럼 다리우스왕은 알렉산드로스의 시선에 제압되고 말았다. 그는 전차를 돌려 달아나 버렸고, 페르시아군은 서둘러 왕의 뒤를 쫓았다. 마케도니아인들이 일방적으로 적을 도살하는 가운데 다리우스왕은 이길 수도 있던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도망치는 다리우스. 역사는 이 순간 결정되고 말았다.

 

가우가멜라, 페르시아의 종막

코끼리와 대결하는 알렉산드로스  이수스 전투의 승전 이후, 이집트를 들른 알렉산드로스는 그곳에서 자그마치 1년을 소비함으로서, 다리우스에게 군대를 정비할 시간을 주고 말았다. 그는 20만이 넘는 군대를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가우가멜라라고 불리는 지역(이라크 북쪽의 텔 고멜)을 자신에게 유리한 전쟁터로 다듬고 있었다. 주력인 전차를 활용하기 위하여 그는 이 평원을 가능한 고르게 다듬어 전장으로 준비하였다.


  보병 20만, 말 3만. 거의 25만에 가까운 전력에 대해서 알렉산드로스의 부대는 보병이 4만, 기병 7천. 게다가 페르시아군의 중앙에는 15마리의 코끼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난생 처음 접하는 괴물 같은 모습은 마케도니아군에 불안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이들 코끼리를 잘 활용했다면,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들에게 큰 위협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이들을 배치하긴 했지만, 제대로 활용하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정말로 제우스신이 뜻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선동의 명수이기도 했다.  동이 트고 잠에서 깨어난 후 한참 동안 막사를 나서지 않은 그는, 말을 타고 팔랑스 사이를 순시하면서 연설했다. 그는 자신을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승리를 다짐했다. 예언자는 하늘의 독수리(제우스신의 상징)을 바라보며 신탁을 알렸다.

 

전투에 앞서 병사들을 격려하는 것도 필요한법.  정오에 이를 때까지, 양군은 서로의 포진을 살펴보며 대기하고 있었다. 5만대 25만. 5배의 병력이었으나 알렉산드로스 측이 베테랑 병사들로 이루어진 반면, 다리우스의 군대는 충분한 훈련을 할 여유를 갖고 있지 못했다. 자그마치 24개국에서 끌어 모은 25만의 대군은 안정성을 갖고 있지 못했고 오직 숫자가 많다는 것 만을 이점으로 가질 뿐이었다. 다리우스는 또한, 오랫동안 활용하지 않았던 낫이 달린 전차 부대(Scythed Chariot, 바퀴 양쪽에 칼날이 달려서 옆의 상대를 베어내는 전차 부대.)를 군에 복귀시켰지만, 전차 기수에게 충분한 훈련을 시킬만한 여유는 갖지 못했다.

가우가멜라, 그 격전의 시작

팔랑스가 시동한다.

  그는 수적 우위를 이용해 강력한 기병대 둘을 좌우에 포진한 기다란 전열을 앞에 내세웠다. 전투의 시작과 동시에 기병대를 급파하여 후방에서 마케도니아군을 포위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중앙에서 1000명의 기마 호위병과 인도, 카리아인 기마병 뒤에서 몸소 지휘를 했다. 또한, 훈련이 충실한 보병 부대 역시 그의 주변에 포진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대기하도록 했다.

다리우스는 충실한 병력을 갖추었지만, 그 자신은 준비가 부실했다.

  정오가 되어 마케도니아군의 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전투 전날 밤새워 무장하고 서 있던 적들과는 달리, 베테랑인 그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대기할 수 있었다. 적의 전차 부대 앞에 아군 기병대가 있는 것을 관찰한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부대를 앞세웠다.


  전투가 시작되자, 다리우스의 명령에 의해 출동한 전차 부대는 알렉산드로스의 중앙군에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들은 팔랑스의 강력한 방어선에 부딪쳤으며 수m에 이르는 칼날의 벽을 뚫지 못하고 제대로 접근하기도 전에 전멸하고 말았다.

 


* 팔랑스와 새릿사 전술

마케도니아군의 새릿사. 이정도로 길이에 차이가 있다.  당대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겨울에도 쉬지 않고 쉬지 않고 훈련을 반복하고 있던 마케도니아군은, 전술에서도 다채로운 혁신적인 기술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력 군대는 말할 것도 없이 기병이지만, 필리포스 왕은 이 기병을 충실히 활용하기 위하여 새릿사라 불린 결전 병기를 개발하여 보병을 훈련시켰던 것이다. 그 전술은 바로 팔랑스(Phalanx)라고 불리는 밀집 방진이었다.


  길이 5.8m에 이르는 엄청난 길이를 가진 장대에 30cm에 달하는 칼날을 부착한 새릿사를 사용하는 이 집단 전술은 몇 줄로 나누어진 중장기병들이 제각기 정해진 방식에 따라 창을 들고 전진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이 대형은 앞에서부터 4번째까지는 허리 높이로, 그 다음 줄은 앞 병사의 어깨 높이로 드는 형태로, 그리고 그 다음줄부터 계속 각도를 높여서 이루어지는데, 정면에서 보았을 때 가히 바늘의 벽을 보는 듯한 모습으로, 고작 2~3m에 불과한 창을 들고 있는 적수로선 결코 뚫을 수 없는 철벽과도 같은 진형이기도 했다.


  이 진형은 또한, 전방의 방어력이 매우 강하다는 이점을 활용하여, 후방의 병사들이 경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이점을 주었다. 이를 통해 비용을 절감함으로서 더 많은 병사를 고용하고 더욱 오랫동안 훈련시킬 수 있었다.


  팔랑스의 목적은 바로 적의 진영에 구멍을 뚫는 것이었다. 적의 진영에 구멍이 뚫리면 바로 이 틈으로 기병이 돌격하고 적의 측면이나 배후를 공격하여 포위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필리포스가 창안했고, 알렉산드로스가 주로 활용한 집단 전술이자, 후일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그리스 중장 보병이 주력으로 사용한 전술이었다.


  이 밀집 대형은 측면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고, 대열을 이루어 이동해야 하기에 철저한 훈련이 필요했지만, 항상 전투에 임하는 마케도니아군에게 있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 이러한 팔랑스 전술은, 중세 말기에 이르러 파이크(Pike)라는 장창 전술로 계승되었고, 파이크와 머스킷총의 조합으로 기사들의 시대는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페르시아군의 좌우익이 진격을 시작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좌, 우익의 기병대가 그들과 맞서는 한편, 중앙의 팔랑스는 적의 중군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적의 포위망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에 강력한 보병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특명 부대를 좌, 우익에 가담시켰고 페르시아군과는 달리 전 군대를 유기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제어하였다.


  페르시아군의 공격은 특히 마케도니아의 좌익이 집중되었고, 이로 인하여 마케도니아군의 진격은 주춤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좌익의 상황을 좌시하고 우익과 중앙을 계속 전진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마케도니아군의 좌익과 나머지 부대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페르시아군이 이 틈을 뚫고 좌익에 대한 맹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이 선전하는 가운데, 페르시아의 강력한 기병에게 포위되어가는 마케도니아의 좌익은 점차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에 다리우스는 적을 포위한 것으로 오판하여 모든 기병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목표는 적의 포위. 그리하여 그들은 정면으로 돌입하는 팔랑스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마케도니아의 좌익 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절묘한 기습의 찬스. 돌격 명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착오로 인하여 페르시아의 선두 대열에는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빈틈을 향해 전열을 선회시켰고 페르시아의 중군과 격돌하였다. 페르시아는 다수의 궁병을 동원할 수 있었으나, 얇은 방어선으로 인해 곧 혼전이 벌어졌고, 궁병은 무력화되고 말았다. 한편, 페르시아군의 우익에 위치한 보병은 팔랑스의 맹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멈추어 섰다.


  적이 중군에 밀려들고 주변에서 호위병이 쓰러져가자, 다리우스는 공포에 질려 도망쳐 버렸다.(놀라운 것은, 이 시점에서 후방에는 상당 수의 병력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다리우스왕은 이를 활용하지 않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알렉산드로스군은 마지막 예비대까지 충실하게 활용함으로서 승리를 이끌어 냈다.)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대. 그의 진정한 주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수스와는 달리 이곳의 전투는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기병의 뒤를 따라 팔랑스 4개 부대가 진격함으로서, 그리스 진영에도 틈이 생겼고, 마자이우스의 페르시아 기병대가 이 틈을 파고 든 것이다. 그러나, 마자이우스는 어리석게도 계속 말을 달려 후방의 수송로를 약탈했다.

종반의 전개. 좌익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한편, 그리스 좌익의 페르메니온 부대는 포위되었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 시점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마케도니아군 우익의 전진은 계속되고 있었고 다리우스왕은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에 대한 추격을 멈추고 부대를 돌리는 냉철한 결단력을 발휘하였다.

과감히 말을 돌리는 알렉산드로스. 그의 결단이 승리를 결정했다.

  이로 인하여, 마케도니아의 좌익 지역에서는 기병대간의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오래지 않아 다리우스 도주의 소식이 전군에 알려짐으로서 적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졌으며 일제히 도망을 시작했다.


  전투는 사실상 종결되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진군은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적이 군대를 재건할 여유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부하들을 페르시아군을 추격하여 아르벨리까지 56km를 행군했으며, 자정에만 잠시 휴식을 취했다.


  결과적으로 다리우스왕은 계속해서 달아나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점에서 그는 페르시아의 왕이었지만, 더 이상 왕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전투로 인하여 알렉산드로스는 모든 것을 얻었다. 바빌론,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한 그는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손에 넣었고, 그리스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원정에 있어 이수스 전투가 그 분기점이었다면, 가우가멜라는 사실상의 종착점으로 귀결될 수 있다. 두 전투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용맹과 철저한 전술을 보여주었던 반면, 다리우스 왕의 무능함은 어쩌면 승리했을지도 모르는 전투를 놓쳐 버리는 불운을 가져왔다.

바빌로니아에 입성하는 알렉산드로스. 그러나, 그의 원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 중 하나로서, 그리고 대국 페르시아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로서 가우가멜라는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다리우스의 무능에 덕을 보았다고 하나, 이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위대한 업적을 빛내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명승부의 현장이기도 했다.

  ‘전투는 역동적이기에, 이 상황을 좌우할 수 있는 자만이 승리를 거둔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결전이라고 할까?

페르세폴리스. 페르시아의 심장인 이곳에 대해 알렉산더는 보복을 감행했다.

 

세계의 끝을 향하여

이스칸데르라 불리는 알렉산더의 전설은 동방에도 살아 있다.  가우가멜라 전투를 마침으로서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얻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전진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그는 험난한 페르시아의 산악 지방과 사막을 전전하였고, 게릴라 부대와 대항하며 아프카니스탄을 넘었다.

  기원전 326년 인더스강을 건너 인도에까지 이른 그는 비록 병사들의 파업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지만, 이른바 당시 그리스인에게 있어 세계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을 넘어서는 대위업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로 돌아온 그는 모든 것을 얻은 지배자의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 동방의 끝이 아닌 서방의 끝을 향한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에...  32세의 젊은 나이로 쓰러진 인물이었지만, 그는 그 짧은 생애 동안 후세의 정복자들이 감히 꿈꿀 수도 없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화려한 전투의 역사. 위대한 명장, 알렉산드로스의 이름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 게임으로 보는 알렉산더

알렉산더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를 연상케 한다.

  얼마 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알렉산더 영화도 개봉되었고, 앞으로 또 다른 알렉산더 영화가 나올 것이라고 하지만, 이와 함께 알렉산더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게임도 제작되었다. UBI에서 출시한 이 게임은,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알렉산더를 기초로 한 작품으로, 실제의 영화 장면들을 다수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

  전략 게임으로 개발된 이 작품은 물론, 알렉산더의 화려한 전투들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서, 영화의 장면들 만이 아니라, 성우들을 동원하여 대사들까지 충실하게 준비하고 있기도. 얼마 전 출시된 로마 토탈 워에 비해 눈길을 끌고 있지는 못하지만, 영화를 통해 알렉산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한번 쯤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넓은 범위에서 전개되는 대규모 전투.

  설사 알렉산더를 주역으로 등장시킨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알렉산더는 전략/전술 게임에서 소재로서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 자체로 하나의 게임은 되지 않더라도 시나리오 하나 정도는 충분한, 감초 같은 역할이랄까?


  오래 전에 제작되었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이하 AOE)를 필두로,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12개 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엠파이어 어스」, 그리고 작년 봄에 출시된 「라이즈 오브 네이션」(이하 RON)에 이르기까지, 알렉산더를 하나의 캠페인으로 등장시킨 작품은 매우 다채롭다.(물론, 「문명」같은 작품에서도, -비록 시나리오로 준비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정복자의 캐릭터로서 반드시 빠짐없이 등장하는 캐릭터이기도...)


  이러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물론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서,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수많은 지역.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건설해 나가야 한다. 마케도니아의 팔랑스와 기마 부대를 이끌고 진격하는 이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그리스의 내란을 시작으로, 강대한 페르시아 제국, 아프칸의 게릴라 부대, 그리고 인도의 코끼리 등과 대결을 벌이게 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 알렉산더의 원정은 시작된다.

  이집트와 그리스(그리고 어째선지 일본) 등의 문명세계를 무대로 한 「AOE」에서 플레이어는 그리스의 역사를 배워나갈 수 있으며, 마지막의 미션이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원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정복보다는 위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으로 종료되는 이 미션은, 어떤 면에서 ‘겨우 넣어주었다.’는 느낌이지만, 「AOE」의 느낌을 계승한 시에라의 작품, 「엠파이어 어스」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등장시켜 후반의 정복 미션을 진행하게 해 주었다.


  삼국지 스타일로 다채로운 국가의 정벌을 시작하는 「RON」은, 확장팩인 「스론 앤 패트리어트」에서 처음으로 알렉산드로스와 마케도니아가 등장한다. 물론, 이 게임에서는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되어 페르시아를 비롯한 주변의 나라들에 대한 원정을 나서게 된다. 당연히 병에 걸려 죽을 걱정은 할 필요가 없고, 부하들의 파업을 고민할 것도 없이 페르시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도로부터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자유롭게 공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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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