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기의 건설 현장
총과 버터 - 역사의 전쟁(Guns&Butter - War of History)

(* 이 글은 2006년도에 PC플레이어에 연재했던 글월로서,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다시 등록합니다. 불멸의 이순신은 물론 이미 끝났지만, 지도층에 불신을 가진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칠천량 전투도 종결되고, 인기리에 계속되었던 작품, 「불멸의 이순신」도 이제 종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자그마치 7년여에 걸쳐서 전개되었던 임진왜란.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그래도 이긴 전쟁’이라고 자위할 수 밖에 없는 그 참혹한 역사는, 수영으로도 건널 수 있다는 가까운 나라의 상황도 전혀 모르는 채, 오직 ‘왜놈’이라며 그들을 멸시하던 당대의 지도층, 그리고 변화하는 세월의 흐름을 모른 채 풍월을 읊는데 만 전념하던 양반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준비가 부족했다는 문제를 낳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지도층에 대한 불신을 불러옴으로서 더욱 더 큰 혼란을 가져왔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힘이나 기술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신뢰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처사였던 것이다.
최근 들어 지도층에 대한 신뢰감이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이 상황. 우리의 적수였던 나라에서 '불신'이라는 이름 아래 슬픈 운명을 맞이해야 했던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
풍림화산, 그 변경의 소국에서 시작된 경이
"나의 죽음을 3년간 알리지 말라."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전국 시대 말기의 일본에서 한 사람이 이런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피가 피를 부르던 전국 시대, 사람의 죽음은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한 당시였지만, 그의 죽음은 수많은 이들에게 절망을 불러오고 또 한편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바로, 그가 차지하고 있던 최강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거쳐, 토요토미에 의해 종식되기까지 일본의 역사를 주름잡았던 전국시대. 남북조를 거쳐 자그마치 수 백 년에 걸쳐 계속되었던 그 역사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별로 없겠지만, 적어도 그 당시 천하를 움켜쥐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이름 정도는 익히 들어보았으리라 생각된다.
그 업적 만이 아니라 출신이나 성격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됨으로서, 경영 철학론 등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이들이기에, 국내에서도 이들에 관련된 자료나 작품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에야스를 주역으로 한 「대망」같은 작품은 국내에서도 꽤 많이 판매되었다.)
하지만, 1573년 4월의 어느 날 숨을 거둔 그 사람이야 말로, 사실상 전국 시대 최강의 존재였다는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도,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그리고 전국의 패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저도 그의 이름에 벌벌 떨곤 했던 전국 시대 최강의 전략가, 그의 이름은 바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었다.

< 비사문천의 화신 우에스키 켄신. 신겐은 그의 유일한 맞수였다. >
그는, 이제껏 다른 방식으로 전국 시대를 종식시킨 오다 노부나가와는 달랐지만 한때 천하에 가까웠던 인물이기도 했다. 전국 최강의 용장, 그가 나서는 전투마자 패할 줄을 몰랐다는 우에스키 켄신(上杉謙信)과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결코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카이(甲斐)의 땅을 기반으로 그야말로 최고의 영지를 구축했으며, 한번 움직이면 천하를 흔들었던 강자. 군대조차 보낼 필요 없이 오직 머리 만으로 그 강대한 오다군을 포위하여 죽음의 위기에 몰았던 강자.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깃발 아래 가는 곳에서 평생토록 결코 참패를 당한 일이 없다는 그를 통해서 일본 역사에 길이 남은 무적 다케다 기마 군단은 탄생했다.
* 풍림화산(風林火山)
< 질서 정연하게 자리잡은 다케다군. 그야말로 정예군의 표상이었다. >
< 다케다 군이 향하는 곳. 풍림 화산의 깃발이 함께 한다. >
다케다 신겐하면 풍림화산이고, 풍림화산하면 신겐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그 자신의 전술을 상징하는 이 말은, 본래 손자병법의 군쟁편에서 나온 말에서 비롯되었다. 수많은 전략, 전술적 명언으로 만인에게 기억되고 있는 손자는 여기서,
風 군대가 움직일때는 질풍처럼 신속하고 흔적이 없어야 하며,
林 군대가 멈출 때는 숲의 나무처럼 엄숙, 정돈되어야 하며,
火 공격할 때는 타는 불처럼 맹렬해야 되며,
山 수비할 때는 태산처럼 동요하지 않고 묵직해야 한다.
라고 했는데, 전국 시대 희대의 전략가였던 다케다 신겐은 바로 이런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는 듯, 항상 풍림화산의 문구가 새겨진 검은 깃발과 함께 출군했다고 한다.
< 당대의 정세. 그는 강자들에 둘러싸인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그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대부분, 이 기마 군단을 통한 전략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신겐 자신의 업적은 -그리고 다케다 기마군의 전설은- 사실 전쟁 자체보다는 내정을 충실하게 구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태어난, 그리고 그의 영지인 카이는 오다의 오와리나, 3대에 걸쳐 안정된 호조(北条)의 오다와라 같은 지역과는 달리 그야말로 산골의 척박한 땅이었다.
< 신겐이 남긴 독특한 치수 시스템은,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
평지를 찾기 어려운 산골에선 풍작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나마 때때로 닥쳐오는 재해로 휩쓸려가기 일수. 부친 노부토라의 폭정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꿈을 잃고 절망하고 있었고 영지에서조차 지도력이 미치지 못하는 불안한 지역이 넘쳐나고 있는 상황.
젊은 신겐(아명은 하루노부)이 영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상황은 이렇듯 절망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신들의 뜻에 따라 아버지를 쫓아내고 다이묘의 자리에 오른 신겐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사람이야 말로 성벽”이라는 뜻을 가진 그는 가신과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시나노 지역으로 출정하는 한편, 카이 전역에서 대대적인 치수 정책을 수립하여 홍수의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더욱이, 카이 서쪽을 흐르는 강의 지류를 통합한다는 이 대대적인 공사를 위하여, 그는 각지에 흩어져 금광을 채굴하며 생활하는 카네야마슈(金山衆-금광을 바탕으로 활동하던 호족 집단)의 안전 보장을 약속하여 휘하로 끌어들임으로서 충실한 재정을 갖추어 나갔다.
< 카이 각지에 흩어진 수많은 금광. 바로 이것이 다케다 신켄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
카네야마슈로부터의 세금은 채굴된 금 중 40% 밖에 되지 않는 양. 이제까지와는 달리 안전하게 생활하게 된 그들의 생활은 점차 풍족해졌고 그에 따라 카이의 재정도 튼튼해졌다. 일본 최초의 금화를 주조하여 가신단에게 제공하여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 금만 파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땅굴 파기에도 천재적이었다. >
이렇게 포섭한 카네야마슈는 재정 만이 아니라 전쟁에서도 큰 도움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터널 기술은 공성전에서 적의 우물을 말라버리게 하여 고갈시키거나, 혹은 성벽을 무너뜨리는데도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에스키와의 대결을 통해 시나노 전역을 통합하는 한편, 도쿠가와와 동맹을 맺고 이마가와의 공백이 생긴 스루가, 우에노 등으로 진출하여 대국을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
거성의 침몰. 그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별
이렇듯 신겐은 어느 면으로 보나 전국 최강의 대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것은 천하제패의 길은 아니었다. 단지, 안정을 위한 부득이한 진출을 감행했을 뿐... 당대의 라이벌로서 그야말로 혁신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던 오다 노부나가와는 달리, 그의 마음 속에는 천하제패보다는 안정적인 국가 건설이 우선되어 있었던 것이다.
< 다케다 신켄 최후의 진군. 그 움직임은 누구나 두려워했다. >
하지만, 백성과 가신들의 뜻을 받들어 일어났기에, 이제껏 그들을 위하여 노력했던 그도 어느덧 50세를 넘기고 있었다. 천하를 차지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다채로운 외교와 계략으로 오다의 전횡을 막고자 했던 신겐. 그의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바로 오다의 독재를 우려한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상경 요청서였다.
이에 대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심경을 남겨주는 말이 존재한다.
“내 스스로 명을 받들어 교토에 깃발을 세우고, 불법, 왕법, 신도를 중심으로 하여 바른 질서를 확립하고, 정치를 바르게 행하는 것. 그것이 내 바램이다.”
이대로 노부나가가 천하를 통일하면 수많은 이들이 고생을 할 것이다. 백성은 제방, 백성은 성벽이라고 생각했던 다케다 신겐. 일대의 결의였던 것이다.
1572년 10월 3일. 2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는 그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아섰다. 그를 무시하듯 당당히 진군하는 다케다군. 농성전으로 시간을 끌기로 생각했던 이에야스였으나, 그런 모습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감히 내 앞을 당당히 지나가다니"
분노한 도쿠가와는 다케다군에게 기습을 걸기로 결심하고 1만 2천의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였다.
< 적 앞을 당당히 진군하는 다케다 군단. 그 모습에 이에야스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 >
추격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조심조심 진군하는 이에야스군. 하지만 신겐군은 진군을 멈추지 않고 전진을 계속한다. 그리고는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평원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려는 듯이 행동했다.
이곳은 길이 좁기 때문에 대군이 단번에 내려갈 수 없는 장소.
'잡았다!'
이에야스는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좁은 길을 천천히 내려가는 신겐군을 급습한다면 아무리 대군이라도 전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전군에 진격을 명한다.
일제 공격!
1만 2천의 도쿠가와군은 미카타가하라 평원으로 뛰어 올라간다. 그러나, 언덕을 올라간 이에야스군은 저 멀리 붉은 갑주의 병세가 포진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무수하게 펼쳐진 풍림화산의 깃발. 다케다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미카타가하라에 포진한 다케다 신켄. 모든 것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
< 장중한 다케다군과 엉거주춤한 도쿠가와군.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
수많은 대군을 마치 수중의 말처럼 자유롭게 다루는 신겐. 그 과감한 전술의 승리였다. 먹이를 쫓던 새가 그물에 빠진 듯. 도쿠가와군은 어느새 다케다군의 붉은 갑주를 마주한 채 당혹감에 빠져 버렸다. 우왕좌왕하는 도쿠가와군과는 달리 질서 정연하게 자리잡은 다케다군.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전투는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신겐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승리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신겐. 그리고 그 때는 도쿠가와군에서 제공하였다.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도쿠가와군의 일부가 멋대로 달려 나가자, 뒤를 이어 이에야스가 돌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2시간에 걸친 격전. 결과는 처참한 것이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듯, 도쿠가와군은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수많은 가신들이 -심지어는 그를 대신하여- 희생당하는 사이, 이에야스 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참패... 성으로 겨우 도망친 그는 신겐의 추격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었고, 농성과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자신의 최후를 기록하려는 듯, 이에야스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하지만, 어째서인지 신겐은 그를 추격하지 않았고 다케다군은 속도를 늦추고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신겐이 사망한 것이다.
(* 기록에 따르면 병사로 되어 있다. 50세를 넘긴 그의 나이나 당시의 의학 수준, 그리고 당시 그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만, -어딘지 미심쩍은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카게무샤」에서는 노다 성 전투 도중 저격으로 인한 부상이 원인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작품에 따라서는 암살된 것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 거성의 침몰. 그리고 시대는 급변하기 시작한다. >
그리하여 영지로 돌아간 다케다군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바로, 하루 아침에 지도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다케다 진영은 이제껏 안정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다케다 신겐이 국가를 안정시키는 한편, 백성과 가신단을 만족시킴으로서 가능했던 것. 그리고 이것은 인심을 모으고, 영지를 갖추는데 뛰어난 신겐의 탁월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는데 그런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사라진 지금, 다케다가는 큰 혼란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에게는 후계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적어도 당대의 무장으로서 후일 노부나가나 이에야스로부터 '신겐에 필적하고 얏볼 수 없는 존재'라고 평가된 4남 다케다 카츠요리가...
하지만, 적수였던 가문의 딸에게서 태어난 그는 신겐의 후계자가 아니라 가신으로서 길러진 인물이었기에, 가신들에게 있어서도, 그리고 신겐 자신에게 있어서도 미덥지 못한 존재였다.

< 그리하여 다케다가는 4남인 카츠요리에게 이어진다. >
"내 죽음을 3년간 감추고 움직이지 말라."
이러한 유언과 함께 신켄은 또 하나의 조건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카츠요리를 -신겐의 손자인- 노부카츠가 16세가 될 때까지의 대리(陳代) 영주로 삼는다."는 것.
시세가 노부나가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던 신겐으로서는, 시대의 변화를 기다리라는 의미의 유언이었겠지만, 이것은 위기의 왕국, 다케다 군단을 이끌어야할 카츠요리의 힘을 처음부터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다.
* 카게무샤(影武者)
한때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이 가짜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지만,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조직의 지도자를 위해서 그와 닮은 모습의 가짜를 내세우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특히, 그 조직이 지도자 개인에게 의존하는 일이 많은 독재 체제일 경우 지도자의 부재가 가져오는 충격을 위하여 가짜를 사용하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
카게무샤는 특히 전선에 서는 일이 많았던 전국 시대의 다이묘들을 대신하여 그를 보호하거나 혹은, 그의 부재 중에 생길 수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한 가짜로서, 적을 혼란시키거나 아군을 다독거리는 역할을 맡았다.
전장에서는 지휘관과 같은 모습으로 적의 저격이나 암살로부터 보호하고, 그가 부재중일 때는 부하들을 안심시키는 그림자. 바로 그것이 카게무샤라고 할까? 실례로 신겐 개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던 다케다 진영은 그가 생존 당시에도 그의 동생으로 하여금 카게무샤로서 활동하도록 했는데, 이러한 상황과 “3년간 죽음을 감추라”는 유언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쿠로사와 감독은 「카게무샤」라는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작품이 영상미나 내용 면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지만 그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다케다가 죽은 후 측근들이 그 사실을 감추고 카게무샤를 내세웠다는 드라마틱한 상황은 존재치 않았으며, 그 때문에 그의 숙적들이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현실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겐의 사망 소식은 -첩자 등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당대의 수많은 패자들에게 바로 전달되었으며, 공포에 질려 있던 도쿠가와의 가신단이 기뻐하자 이에야스는 "신겐과 같은 전략가는 다시 없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를 본받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3년간 자중하라."
풍림화산의 '수비할 때는 태산같이'라는 말에 따른 것이겠지만, 시대의 변화는 그러한 유언을 따를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
신겐을 신처럼 떠받들던 가신단으로서는 신겐의 죽음을 최대한 숨길 생각이었겠지만, 신겐에 필적할 정도로, 아니 그 이상으로 정보 확보에 노력하던 노부나가나 켄신은 신겐의 죽음을 벌써 파악하고 그에 따라 긴급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북방의 비사문천, 우에스키 켄신마저 카이를 압
실질적으로 카츠요리가 통치를 함에도 겉으로는 카게무샤를 내세우는 상황. 이러한 이중성은 -후계자로서 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카츠요리의 초조감을 더하는 한편, 유력 가신단과 그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고 나아가 이제껏 신속함을 자랑으로 삼았던 다케다가의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는 신겐 사망으로부터 불과 2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573년 6월. 도쿠가와군의 정찰 공격에 대한 대처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후계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카츠요리는 전군을 이끌고 반격할 것을 지시했지만, 가신단의 주축인 실전파 무장들은 민심의 동요와 함께 우에스키 등이 뒤를 노릴 가능성을 우려하여 반대했던 것이다. 오직 "3년간 자중하라"는 유언을 따르자는 이유로...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처럼 다케다 진영은 분열되어 있었다. 신겐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결국, 2달이나 지난 뒤에야 출발한 원군이 도착했을 무렵, 나가시노(長篠)성은 이미 함락된 뒤였다.
다케다 필승 신화가 붕괴된 것이다!
< 장고 끝에 다케다 카츠요리는 군을 이끌고 미노로 향하였다. >
다케다가의 필승에 대한 신념을 붕괴시킨 이 패전은, 한편으로 카츠요리의 고집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가신단의 반대 때문에 성을 잃었다고 생각한 카츠요리는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스스로 군을 이끌고 도쿠가와에 대한 반격에 나선 것이다.
< 진군하는 다케다군. 무적 다케다 군단은 아직 건재하였다. >
그리고, 다케다 기마 군단은, 그리고 카츠요리는 강했다.
불과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오다 진영의 18개 성채를 함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적의 최종 거점, 이이하자마성에서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져 들었고, 다시금 '3년간의 자중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작전 회의가 열리고, 신참 가신단은 승리를 다짐하였다. >
< 이이하자마성 함락. 새로운 다케다 군단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
이러한 상황을 타개한 것은 신겐이 사망 전에 노부나가 공략을 위해 모은 신참 가신들이었다. 신겐과 오랫동안 함께 했던 구 가신단과는 달리 신겐 무적 신화에 젖어있지 않은 그들은 과거의 영광보다 카츠요리의 승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야말로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하여 이이하자마성을 함락시켰다.
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출전한 끝에 압승. 카츠요리와 신참 가신들의 기세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카츠요리는 이에야스 진영의 방어 거점, 타카텐진(高天神)성으로 돌진했다.
'타카텐진을 차지하는자, 토토우미(遠江) 지방을 제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전략 거점. 하지만, 이곳은 신겐마저도 함락시킬 수 없었던 천예의 요새이기도 했다.
'아버지(신겐)를 뛰어넘는 업적으로 후계자의 자리를 확고하게 만들고 싶다.'는 바램 아래, 카츠요리는 2만5천의 군세로 성을 포위하고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성주인 오가사와라 나가타다는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면서 영주인 이에야스에게 구원 요청을 보내었으나, 이에야스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미타카가하라 전투에서 경험했던 다케다군의 강력함, 그리고 카츠요리의 공세에 겁을 먹은 이에야스는 자신의 성에 틀어박혀 노부나가의 원군 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다케다 무적 신화의 부활에 겁을 먹은 이에야스는 성에 틀어 박혀 나오려 하지 않았다. → >
< 다카텐진으로 입성하는 카츠요리. 그의 명성은 단숨에 올라갔다. >
그리고, 이런 상황은 카츠요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즉각 전술을 바꾸어 성주 오가사와라에게 '원하는 대로 영지를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항복을 제안했다. 눈 앞의 파격적인 조건, 반면 다케다군을 두려워해서 원군을 보내지 않는 이에야스. 오가사와라가 항복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였다.
다카텐진성의 함락. 그것은 부친 신겐의 업적을 뛰어넘는 동시에, 숙적 노부나가조차 '카츠요리는 방심할 수 없는 적수'라고 평가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케다가를 향한 암운
승전의 기쁨 속에 카츠요리는 잔치를 열었지만, 구 가신단들은 '이대로라면 3년 안에 다케다가는 멸망한다.'며 카츠요리의 행동을 비난했다.
('형 만한 아우 없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아우가 형보다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도 형만큼 평가되기 힘든 현실을 나타내고 있다.(형이 망나니라도 아우는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는 상황인데, 형이 뛰어나다면 어떨까?) 하물며 부친과 아들에서야... 카츠요리는 적들마저 높이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지도자였고, 또한 부친에 비해 부족함 없는 전술가였지만, 너무도 뛰어난 부친의 후광 속에 빛을 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훌륭한 승전고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신겐님이 계셨다면, 신겐님이셨다면..."이라는 말을 되새김질하는 구 가신단. 그러한 상황에서, 부친에게 오직 '대리 영주'라는 평가 밖에는 받지 못했던 카츠요리가 더욱 더 반발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반면, 이이하자마 이래 가츠요리의 승리와 함께 했던 신참 가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가츠요리를 신뢰하고 구 가신단을 '겁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가츠요리가 신참들을 편애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껏 신겐 아래 하나로 뭉쳐 움직였던 다케다 가. 그런 다케다가에 생겨난 파벌 대립은 그들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가져왔다. 마치, 왕회장을 잃어버린 2대째의 재벌 그룹이 신참과 고참의 대립 속에 급격히 붕괴하듯...
< 다케다군의 진군. 역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한편, 카츠요리는 신겐 사후의 다케다가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움직였다. 본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으로부터 직책을 받은 다케다 가문으로서, 노부나가의 전횡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죽은 부친과 가신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공식적으로 타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그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 나가시노로의 진군. 그것은 카츠요리 회심의 도박이었다. >
1575년 5월. 명문 타케다가의 후계자로서, 그는 1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나가시노성을 향해 진군한다. 도쿠가와의 거성, 나가시노는 미카와 지역을 소유하고 있던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
'카츠요리군 출진!'
이 소식은 겁먹은 도쿠가와를 통해 노부나가에게 전해졌고, 그는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출발. 나가시노 지역에서 도쿠가와군과 합류하여 연합 전선을 편다. 노부나가-이에야스 연합군의 수는 4만.
< 4만의 대군.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
수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카츠요리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
그의 의견에 항상 반대하던 중신들은 '싸워봐야 소용없다.'는 말로 신중론을 폈지만, 가신단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카츠요리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더욱이, 4만으로 불어난 적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상황은 그를 더욱 고무시켰다.
'적은 당황해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 카츠요리는 승리를 확신하였다.
나가시노(長篠) 전투. 그때, 역사는 움직였다.
< 카츠요리. 진군을 명하다! >
'무적, 다케다 기마군단', '카이의 기마 전사'라는 말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카이를 중심으로 한 다케다 군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기마 군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의 붉은 갑주가 전장을 수놓을 때, 전선에는 적의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풍림화산의 깃발 앞에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들의 공세는 강력하였고 또한 인상적이었다.
비록 비사문천의 화신, 우에스키 켄신의 검은 갑주가 몇 번이고 그들의 앞을 가로 막아섰지만, 적어도 다케다 무적 신화는 이제껏 불멸의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기마 군단이 건제한 이상 다케다 가문은 문제없다.'
그러한 신념이 그들의 마음 속에 굳게 새겨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1575년 3월 21일. 다케다 기마 군단은 적진의 정면을 노리고 일제히 돌진했다. 1만 5천 군세의 돌격. 그것은 하늘조차 꿰뚫을만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다군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빗발치는 총알 속에 그들은 달려나갔다. >
< 울타리 너머에서 총을 쏘아대는 부대. 그들은 한때 천시되던 사병이었다. >
마방책 너머의 그들. 카츠요리는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를 깨달았다. 바로 그들은, 무적 다케다 기마군을 상대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3000정에 이른다는(현재는 1000정 정도라는 것이 정설) 철포가 불을 뿜고 기마 군단은 하나둘 쓰러졌다.
그것은 신병기 철포 만이 아니라, 오다 회심의 책략에서 비롯된 전술이었다. 그는 기마군의 이점이 바로 돌격에서 나오는 '기동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제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마방책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함정에 이르기까지... 다케다 기마군은 그 기동성을 전혀 살리지 못한 채 하나 둘 쓰러져 갔다. 강력한 화기인 철포에 대하여 기마 군단이 쓸 수 있는 기술은 오직 탄환을 재는 그 순간을 노리는 수 밖에 없었지만, 3인 1조로 한 명이 사격하는 동안 나머지 2명이 총알을 재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발사하는 전술은 오직 1대 1 대결에 치중하는 다케다군을 여지없이 격파해 나갔다.
< 철포를 든 노부나가.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
가신단의 분열은 다케다군에 더욱 더 큰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마치 죽음을 향해 돌격하듯, 그들은 오직 끊임없이 돌진, 돌진 만을 반복하며 적진 앞에 이르러 쓰러졌던 것이다. 적의 정면 방어선이 탄탄하다는 것을 느낀 카츠요리는 측면으로의 돌격을 시도하려 하지만 그곳에도 이미 오다군이 준비한 토대와 방어선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8시간에 걸친 격전.
결국 끝없는 돌격에 지쳐버린 다케다군은 퇴각을 개시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가신단의 분열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신참들이 카츠요리의 명에 따라 충실하게 퇴각 준비를 진행하는 것과는 달리, 다케다 기마 군단 무적 전설의 상징이었던 구 가신단들은 마치 자신이라도 하듯 돌격을 반복하여 쓰러진 것이다.
< 총성이 끝났을 때, 전장에는 다케다군의 시체만이 남아 있었다. >
그리고, 전투가 끝났을때, 그곳에는 거의 1만에 달하는 다케다군의 시체가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다케다 무적 신화의 진정한 붕괴... 그리고 한때 불멸을 자랑하던 기마 군단에 대한 종막을 알리는 결말이었다.
(* 실제로는 8 시간의 격전 와중에서도 다케다군의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케다군의 손실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마지막 구 가신단에 의한 돌격 시에 발생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 구 가신단들은 목숨을 걸고 가츠요리를 후퇴시켰다는 의견도 있지만, 다케다군이 퇴각조차 못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도, 오다군이 추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따라서, 만일 구 가신단이 카츠요리의 명을 따랐다면 피해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고, 다케다 가신단이 큰 피해를 입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케다 군단. 그 허망한 최후
나가시노 전투는 다케다군 만이 아니라, 전국 시대를 주름잡았던 기마군단이 이제는 낡아빠진 퇴물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전투였다. 한때 신겐이 자랑했던 '성벽이자 뚝'인 풍부한 인재단은, 나가시노 전투에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직 신겐의 뒤 만을 좇던 구 가신단은 마지막까지 후계자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라져 갔다.
(동시에, 나가시노 전투의 패전은 카츠요리에 대한 신뢰를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 새로운 포위망과 위기에 빠진 노부나가는 카츠요리의 움직임을 두려워하며 화친을 맺고자 했다. >
하지만, 카츠요리는 패전 직후부터 다케다 가문의 재건을 위한 노력에 착수하고 있었다. 철포를 확충하고 가신을 발탁하는 등 파격적인 정책으로 다케다 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려 했던 그는 정말로 탁월한 정치적인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다 가문은 차츰 쇠망의 길에 빠져 들었던 것이다.
호죠 가문과 손을 잡고 오다 포위망을 확립하기도 했던 카츠요리.
한때는 오다 스스로 그를 두려워하며 화평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시대는 그에게, 아니 다케다 가문에게 미소 짓지 않았다.
상경을 계획하며 오다군을 압박하던 켄신이 병사한 후, 우에스키 가문의 내분으로 호죠가에서 양자로 들어갔던 카게카츠가 사망한 것이다.
결국, 이 정리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