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받기 위해 받쳐둔 통은 여전히 거의 비어있었다. 그럴 거라 예상했다. 여기, 게이츠의 기관실에 죽치고 더부살이 하는 존재는 인간뿐이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한 줌도 되지 않는 이들은 빨대 같은 입을 가진 거대한 잠자리를 쫓아낼 기운조차 없었다. 헵자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는 있는 힘을 다 해 녹을 긁어냈다. 거대 잠자리는커녕 파리 한 마리 쳐 죽일 힘도 없었지만, 녹 껍질이 일어난 사이로 흐르는 물방울을 그대로 핥을 수는 없었다. 어제,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 한 부하 하나가 물에 떡진 녹 덩어리를 삼키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 오전 내내 걸쳐 피 섞인 설사를 하며 죽어갔다.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손가락 끝에 젖은 녹가루가 만져지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쌉싸리한 쇠 냄새 따위는 거슬리지조차 않았다. 생존이 중요했다. 혀를 축이고 나자 비로소 정신이 든 헵자이는 물통을 다시 한 번 조심스레 흔들어 보았다. 물통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찰랄이는 관성이 느껴졌다. 아주 희미하게.
그나마 사지가 멀쩡해서 기다시피라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서 한 줌도 되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을 옮겨 담았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반나절을 돌아다니면 물통 한 개는 채울 수 있었고, 결코 충분치는 않지만 부상자들의 목을 적실 수는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죽어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저 복도만 돌아서면 그 다음부터는 무너진 닥트를 미끄럼틀처럼 타기만 하면 된다. 빨대 같은 주둥이와 어른 남자 장딴지만 한 몸통을 가진 잠자리 모양의 생명체와의 경쟁에서 또 한 번 이긴 것이다. 헵자이는 잠시 벽에 기대 무너져 앉았다. 한 숨을 몇 번 몰아 쉬자 다시 참기 어려운 갈증이 밀려왔다. 그는 허리춤에 찬 물통으로 손이 향하지 않도록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머리를 쓸어 올리자 땀이 느껴졌다. 이 땀조차 아까웠다. 이것도 다시 마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막 일어서려는 그의 어깨에 뭔가 불길한 무게가 얹혔다. 기분 나쁜 섬모가 헵자이의 귓불을 찔렀다. 그는 얼어붙었다.
놈들은 살아있는 고기는 먹지 않았다. 추락한 게이츠의 기관실이라는 생태계에서 우점종이 자기들임을 아는 놈들이었다. 헵자이와 부하들이 처음으로 물통을 가지러 갔을 때 놈들은 뾰족한 주둥이를 위협적으로 휘둘러대며 생태계의 진리를 과시했다. 무모한 상병 하나가 벌레들 틈으로 뛰어들자 놈들은 그를 찢어발겼다. 동료들은 그를 말릴 힘도, 구할 힘도 없었다. 놈들은 흩어진 인간의 신체가 썩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워먹었다. 하지만 놈들의 습격 자체는 문제되지 않았다. 벌레들의 수가 적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놈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의 시체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건 생물학자들이 한 말이 아니라, 그저 보기에 그렇다는 불분명한 경험적 사실일 뿐이었다. 헵자이는 조용히 숨을 멈추었다. 어깨에 앉은 놈이 커다란 날개를 몇 번 푸드등거렸다. 부드러운 깃털은 커녕, 거의 나무 껍질에 가까운 날카로운 날개가 헵자이의 볼을 스쳤다. 놈이 가슴을 타고 내려오며 허리춤에 찬 물통의 뚜껑을 주둥이로 툭툭 찍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혐오스런 절지 생물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놈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몸이 온전하다 해도 무기가 없다면 인간의 패배는 거의 자명할 정도로 지독한 놈들이다. 하지만 물을 뺏길 수는 없다. 이 물을 마시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대로 놈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헵자이는 동료들을 결코 그런 식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가슴에 붙은 놈이 천천히 몸을 돌려 헵자이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그는 몸을 벽에 기대 얼어붙은 그대로 눈만 내리깔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어둠에도 불구하고 마디마디에서 비져 나오는 보라색 발광물질에 비교적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딱딱하면서도 흐늘거리는 느낌이 들어, 힘을 주면 ‘뿍’ 소리와 함께 터지면서 사방에 더러운 액체를 뿌릴 것만 같은 몸통. 뭔가 처덕처덕 붙은 고깃덩이 같은 것들이 흘러내리고 있는 길고 뾰족한 주둥이. 참기 어려운 심한 악취. 그러나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저 시커먼… 저 시커먼…
헵자이의 이마에서 땀이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놈의 주둥이가 목덜미를 훑었다. 그는 이빨을 깨물었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위협 때문이 아니었다. 놈의 눈 때문이었다. 그 놈은 천천히 기어올라왔다. 그러더니 마디가 가득한 배를 헵자이의 얼굴에 박은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헵자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뾰족한 주둥이가 이마를 훑었다. 놈은 헵자이의 땀을 정성 들여 한 방울, 한 방울 빨아들이다가, 목덜미에 흘러내려 막 말라가는 물방울까지 쥐어짜낸 다음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하지만 헵자이는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놈의 눈 때문이었다.
놈의 시커먼 눈은… 인간처럼…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비척거리며 돌아온 헵자이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알 바라마드는 그나마 성한 이들 몇 명을 데리고 다시 한 번 탈출구를 찾으러 떠났다.

알 바라마드가 떠난 지 열흘 째 되는 날에, 헵자이는 결국 다른 부상자들처럼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쓰러진 이들을 간호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은 자신이었고, 그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힘내. 구조대가 올 거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거짓말이었으니까.
악몽을 꾸고, 온 몸이 조각나는 듯 한 고통을 겪어가면서도 그는 주변의 신음소리가 점점 사라져 간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알 바라마드가 뭘 가지고 돌아오건 간에 구할 사람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와 일행은 아마도 가장 먼저 죽었을 것이다. 다른 수색대처럼.
마침내 마지막 남은 신음이 멈추었다. 가장 먼저 쓰러졌지만,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용기와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격려해 주곤 하던 여자 과학자였다. 헵자이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지만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영원히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은 왠지 평화로울 것 같았고, 그 모습을 보기만 하면 자신도 그렇게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헵자이는 자기 자신이 작게 기침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느려지는 호흡의 거친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또,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압력이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곧이어, 솔시스 연방군의 레일건 폭발음과 오직 메탈갑옷만이 가진 특유의 쿵쾅거림을 들었다. 그는 가물거리는 눈을 가까스로 치켜 떴다. 뭔가 다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무슨 뜻인지 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익숙한 소리였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외침은 있을 수 없는 광경을 본 이들만이 내뱉을 수 있는, 경악과 공포, 그리고 두려움에 찬, 신음과 비명의 그 어디쯤 있는 원초적인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