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저는 무협(武俠)이란 '무술(또는 무예)을 가지고 협의도를 펼쳐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수호전을 그 기원으로(적어도 그 기반으로) 하고, 서양의 아더왕 이야기나 로빈훗 이야기와도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중국 무협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정의는 매우 타당한 것으로, 한편으로 무협이라는 가능성을 보다 넓게 펼쳐나갈 수 있는(그래서 SF 무협이나, 판타지 무협이나, 혹은 현대 무협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정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이 글을 썼을 때 이야기하셨던 많은 분들의 의견 속에서 제가 뭔가를 빼먹은 게 있다는 기분이 들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 후 여러 작품을 다시 보며 생각하면서 조금은 다른 방향성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기존에 이야기한 정의에 비해 조금 좁지만, '무협의 진실'에 좀 더 가깝게 생각되는 그런 가능성을...


  제가 새롭게 생각한 무협에 대한 정의를 다시 이야기하기에 앞서 제 기준의 정의를 다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무협이란, 무술(또는 무예)을 이용해서 협의도를 펼쳐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때 중심은 '협의도를 펼쳐나간다.'라는 점에 있습니다. 무술(또는 무예)은 이러한 '도(道)'를 펼쳐나가는 도구이며, 이를 적용하면 기존에는 무협이라고 보지 않았던 많은 작품이 '무협의 넓은 범주'에 들어가게 되지요.

  이를테면, 「수호전」은 "무술을 사용해서 도를 행하는 무협 이야기"가 될 것이고, 서양의 「로빈훗」도 "궁술을 사용해서 의적으로 활약하는 무협 이야기"가 됩니다.

  게다가 「스타워즈」 조차 "'제다이 무예'를 사용해서 '제다이의 도'를 펼쳐나가는 무협 작품"이 될 수 있지요. 이러한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무협은 시대와 장소를 벗어나 다채롭게 확장될 수 있게 됩니다. SF 무협이나 SF 판타지가 등장하고 우주에서도 미래에서도, 심지어 검과 마법의 세계에서도 무협의 가능성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던 중에 왠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분명 '무협의 가능성'은 넓어졌지만, 한편으로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듯 한 기분... SF를 "상상 과학"이라 부르며 정의할 때와는 다른, 무언가 찜찜한 느낌이었지요.

  무언가에 대한 '정의'를 떠올릴 때 도움이 되는 것은 역시 그러한 요소를 충실하게 살린 작품입니다. '무협에 대한 넓은 정의'를 떠올릴 때 무협지만이 아니라 수호전을 필두로 하는 여러 작품이 도움을 주었듯, 이번에 제게 도움을 준 것도 역시 '작품'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야마모토 아츠지씨의 「세이버 캣츠」라는 작품이었습니다.

  "김용 등의 무협 소설이 아니라 웬 만화? 그것도 중국이 아닌 일본 작가의 작품이라고?"

  이렇게 의문을 갖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중국이라는 무대에 국한하지 않고 보다 넓은 무대, 그것도 시대를 가리지 않는 '보편적인 정의'를 떠올리는데 있어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SF의 요소가 뒤섞인 만큼 '무협만의 요소'를 찾는 것이 더 편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말은 하지만 정확히는 제 마음에 딱 와닿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이버 캣츠」는, 인류가 우주 각지로 퍼져나간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무협 작품입니다.
(여기서, SF와 무협 중 하나를 고르자면 단연코 '무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에선 SF에 필요한 '과학적인 상상력으로 펼쳐지는 가능성의 세계'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억지로 찾는다면 "미래 세계에서 권법이 존재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정도... 말하자면, SF의 껍질을 쓴 정통파 무협 작품인 것이지요.)

여기 그 내용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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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배권을 공부(工夫, 쿵푸)하고 있는 스쿠네는 어느 날 스승으로부터 친구인 진상무가 도착할 때까지 그 딸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의 쿵푸를 노리는 자들이 그녀의 딸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한 행성에서 와일드 캣 치카라는 이름으로 현상금 사냥을 하던 그녀를 찾아낸 스쿠네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그녀를 보호하지만, 진상무의 무술을 노리는 -그리고 아버지의 원수이기도 한- 뢰대인의 계략에 말려 그녀를 빼앗기고, 당혹한 나머지 분노가 앞서 그에게 패하고 맙니다.

  격정에 휘말려 홀로 뛰어든 나머지 아버지를 잃었던 기억을 떠올린 그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과거 뛰어난 용병이었던 치카의 어머니, 그리고 뢰대인의 동생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형제이기도 한 봉암과 함께 뢰대인의 본거지로 향하여 그녀를 찾는데 성공하고, 드디어 뢰대인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나는 사불상을 세계에 보급한 베트포드공이 아니라 하찮은 동물원장에 지나지 않는다."면서도 "세계에 으뜸가는 무술 진화의 정수를 계승하여 보존하고 싶다."라는 뢰대인에게 스쿠네는 "당신은 우수한 무술을 닥치는대로 수집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뿐, 참된 무술을 이해하지는 못하다."라며 맞섭니다.

  그런 그에게 뢰대인은 '사실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며 대결을 종용하지만, 도리어 스쿠네에게 간단히 당하고 맙니다. 불과 하루 사이에 그의 실력이 향상된 것에 놀란 뢰대인은 '비전'에 대해 묻지만, 스쿠네는 "단지 마음의 평정을 갖고 배우고 익힌 기술을 그저 썼을 뿐."이라고 답하지요.

  압도적인 실력으로 자신을 꺾고도 복수를 하기는 고사하고 자신이 이긴 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다고 하는 그의 말에 뢰대인은 자신의 공부가 부족함을 느끼고, 그들을 무사히 돌려보냅니다. 일본인 애송이라 생각했던 그가 적어도 자기보다는 훨씬 나은 이해자일지 모른다면서...


  많은 격투물에서 승패는 무조건 어느 쪽이 강하고, 어느 쪽의 기술이 더 센지에 따라 나뉘곤 합니다. 이른바 기술의 응용. 초식의 연출에 지나지 않게 마련이지요.

  그러다 보니 많은 작품에서는 이른바 싸우기도 전에 승패를 보여주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경험치나 레벨이 등장하고 "전투력"에, "갑자"가 나오지요. 게다가 「스타워즈」 같은 작품에서마저 "미디클로리안 수치"를 내세워 강함을 판정하려는 이들이 등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무술이라는 것은, 공부(쿵푸)라는 것은 과연 그런 것일까요?


  여기서 「포비든 킹덤」에서 취권의 도사 루얀(성룡)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쿵푸(工夫,공부)란 힘써서 노력하는 것. 화가가 그림에 정진하면 그것도 쿵푸이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데 노력하면 그것도 쿵푸다."

  다시 말해 '쿵푸'란 '쿵푸'라는 이름의 무술이나 초식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노력하려는 자세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포비든 킹덤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겠지만, 적어도 이런 몇 가지 자세에서 만큼은 어지간한 중국 무술 영화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공자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따르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을 따르지 못한다."라는 것이 있는데 어떤 점에서는 이 역시 '쿵푸'와 '무술'에 대한 하나의 자세가 되겠지요.


  그리고, 진정한 무협 작품이란 바로 그런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젠가 「쿵푸보이 친미」를 본 친구에게서 '통배권에다 일지권에다 그 많은 기술을 배웠으니 친미가 무적 아닌가?'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대답하긴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세이버 캣츠」 안에서 스쿠네가 뢰대인을 보며 한 말이 좋은 대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그저 수집가일 뿐이야. 문파를 모으고 기술을 모아... 선반 위의 장식품으로 늘어놓지. 하나의 문파를 수련하면 다른 문파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할 수 있을 리는 없지만 이해하게 되는 거지. 반대로 하나도 수련하지 않으면... 그 하나 조차도 이해하지 못해."


  그렇습니다. 가메하메파니 계왕권, 북두신권이니 남두성권이니 하는 기술을 무작정 모으고 익히는 것 만으로 무술을 익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

  저는 이 말이야 말로 무협의 중요한 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정신을 담은 작품이야 말로 진정한 무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단순히 초식을 늘어놓고 무조건 강한 초식을 등장시켜 억지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작품보다는, 스포츠화 되었다곤 하나 권투라는 무술을 주제로 끊임없이 노력하며 우직하게 배운 것을 펼쳐 나가는 「더 파이팅(시작의 일보)」 쪽이 훨씬 '무협의, 그리고 쿵푸의 정신에 충실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공이라는 말은 털끝 만치도 나오지 않고 초능력 같은 능력을 쓰지만, "분노는 파멸의 시작이다."라고 점잖게 타이르며 주의를 주는 스승이 나오는 「스타워즈」야 말로 우주에서 펼쳐지는 무협의 모습을 잘 재현한 작품은 아닐까요? (물론 「스타워즈」에는 밀리터리의 요소도, 판타지의 요소도, 그리고 SF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지만, 제다이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면 무협의 냄새가 가장 강합니다.)

  물론, "무술을 도구로 협의를 펼쳐나가는 것"도 무협의 한 가지 모습이고, 「사조영웅전」처럼 "무술과 관련된 것(여기서는 구음진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도 역시 무협의 한 가지 모습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분류한다면 극단적으로는 「피구왕 통키」나 「캡틴 츠바사」 같은 작품마저 무협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들 작품에서는 무술의 초식을 방불케 하는 다채로운 기술로 대결에 승리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그리고 기술을 배울 때마다 강해지죠.)

  「드래곤볼」이나 「블리츠」 같은 작품도 그렇겠지요. (심지어 이들 작품은 '기'나 '내공'에 해당하는 것을 거론하기도 하니까요.)

  물론, 이들을 무협에 넣어서 이야기해도 될 겁니다. 넓은 의미의 SF에 별별 작품이 다 들어가듯, 넓은 의미의 무협에는 이들 작품도 포함시키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좁은 기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통파 무협'이라고 이야기할 때, 아무래도 이런 작품은 제외되기 마련이겠지요.


  우주선이나 나온다고, 로봇이 나온다고 다 SF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같은 관점에서 무술이 나온다고, 내공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 무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여기서 무협이라는 것을 나누는 기준은, '무술'이라는 것을 대하는 자세. 무술 그 자체를 진지하게 대하고 노력해나가는 과정이나 자세가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만이 단순히 무술이 들어간 작품과 무협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이니까요.


추신) 사실 저는 '우주선이 나오고 로봇이 나오면 SF라고 해도 좋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술이 나오면 모두 무협'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요. 넓은 기준의 SF나 무협이라면, 그렇게 보아도 좋을테니까요.
  하지만, 엄격한 기준으로, 속칭 '정통 SF'나 '정통 무협'이라고 한다면(판타지에서는 「반지의 제왕」, SF에서는 「나는 로봇」이나 「스페이스 오딧세이」 같은 하드 SF.) 아무래도 그 정의는 더욱 엄격해지고, 폭이 줄어들게 마련일 것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폭을 좁혀 생각하면 김용처럼 무협의 원류라고 여겨지는 분의 작품에서도 일부는 '무협이 아니다'라고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녹정기」같은 작품이 그렇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분명, 다양한 무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에 무술이 차지하는 비중도 꽤 크지요. 하지만, 이 작품 속의 무술은 아무래도 '도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최악의 경우 중국 무술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은 성립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생각할 때 「녹정기」는 무협 소설이라기보다는 위소보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운 '대하 드라마'에 가깝다고 볼수 있지요.

  개인적으로 김용의 작품 중 '무협의 정신'에 가장 충실한 것은 역시 「사조 영웅전」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무술 그 자체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뿐만 아니라, 무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특히, 무술로 강해진 끝에 남을 해친다는 사실에 고뇌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추신) 조금 넓은 기준에서 보자면, 무협의 정의는 매우 다양하게 내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앞서 말한 "무술로 협의를 펼쳐나가는 이야기"(혹은 무술로 활약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술은 반드시 중국 무술'이어야 하고 '내공이 등장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이런 기준은 도리어 '쿵푸의 진정한 정신'을 위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기준에 따르면 이소룡이나 성룡의 많은 영화, 최근의 포비든 킹덤」, 게다가 우리나라나 일본의 여러 작품도 벗어나고 말지요.

  반대로 '중국 무술', '내공'이라는 제약을 버린다면 매우 많은 작품이 무협의 한 작품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때, 「데드 오어 얼라이브」같은 게임 영화나 「장 클로드 반담」, 「스티븐 시걸」 같은 액션물이 '무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경기를 부리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초인물에 「배트맨과 로빈」 같은게 있듯, 무협이라고 무조건 정통파의 명작 만 존재하란 법은 없지요. 이런 건 B급(또는 F급) 무협물이라고 보면 얘기 거리도 많은 것이지요.

  혹은 무술과 관련된 무언가(보약이나 무기, 또는 무술 그 자체 등)를 중심으로 펼쳐나가는 이야기라는 것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김용의 「의천도룡기」 같은 작품은 제목 그대로 의천검과 도룡도라는 무기를 중심 소재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무림을 무대로 무림인이 활동하는 이야기'라는 정의도 있겠는데, 이때 무림과 무림인의 정의가 문제가 되겠죠. (중국의 무림 만 생각하면 역시 우리나라를 무대로 한 여러 작품은 제외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좀 편할 듯 합니다.

추신) 어떤 분은 무협에는 '도'가 담겨 있어야 한다며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준이라면 '선(禪)'을 소재로 한 수많은 작품들이 무협보다 한 발짝 앞서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김용의 작품에는 물론 '선'이나 '깨달음'이 담겨 있지만, 분명 그것이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추신) 일본의 만화 중에는 무협의 정신을 잘 살린 좋은 작품도 많습니다. 「스트리트 파이터~류 파이널~」이나 「권법 소년」 같은 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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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