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옹이의 글터 -
“사령관의 명령은 퇴각하는 것이었다. 1번함, 3번함, 본함이 퇴각할때까지 엄호하라.”
“에엑!!” 워프 준비에는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정숙성이 필요했다. 전투를 하면서 워프하는 일 따위 간단한 게 아니었다.
“워프준비를 서둘러라! 절망으로 퇴각한다!”
진한은 눈 앞에 있던 세척의 전함가운데서 검은 기운을 강렬하게 뿜어내는 존재를 느꼈다.
“거기 숨어 있었나!” 진한은 몸을 날려 그 곳으로 급격하게 날아갔다. 지금이라도 박살을 낼 듯했다. 순간 그의 눈 앞에 빛이 뿌려졌다.
‘뭐.. 뭐야!!!’ 잠깐 멈춘 진한의 앞에는 거대한 반투명 스크린이 펼쳐져 글자를 뿌려내고 있었다.
[멈출 것. 움직이면 행성을 폭격하겠다.]
‘뭐???’ 진한이 어찌할까 주저하는 사이에 자막은 계속 올라왔다.
[조금만 움직여도 우리가 가진 초자력 폭탄으로 행성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
‘인질극인가. 방금전에 꿈에서 본 수십억의 생명이란 이걸 말하는 건가.’ 진한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하고 있었다. 싸워야 하는 건 알지만, 이 사람들을 다 죽여서가며 이긴다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오케이. 알아 들은 듯 하군. 껄껄껄.] 자막은 계속해서 올라왔다.
[자. 그럼. 소년. 다음에 또 보자구.] 그 말과 함께 검은 기운을 품고 있던 함정은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글씨도 그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진한은 놓쳐버린 것에 분노하며 이를 뿌득 갈았다. 남아 있던 몇대의 함정도 지워지듯 사라져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두대의 함정은 순간 무엇인가를 쏘아 보냈다. 진한은 그것을 응시했다. 그리고 몸에 모아두었던 기운을 뿜어 두대의 함정과 쏘아진 폭탄을 향해 동시에 쏘아내었다.
“공격해 옵니다!” 함정에서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폭탄을 발사하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진한의 공격은 생각보다 빨랐다. 빛과 함께 지워지던 함정중 한척이 워프에 실패하고 강렬한 충격과 함께 낙오해 버렸다. 다른 한척을 향해 날아가던 기운은 함정이 존재했던 빈 공간을 가르고 우주 저편으로 사라졌다.
“상황을 보고하라!!!” 다급한 함장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함이 크게 흔들렸다. 행성으로 발사된 폭탄이 폭발하며 뿌려낸 에너지가 함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워프! 실패했습니다! 재충전엔 21분이 걸립니다!”
“폭탄, 전부 요격되었습니다. 소년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함이 크게 흔들렸다.
“침입자입니다! 주포가 파괴되었습니다!”
“격벽을 모두 폐쇄하라! 복도도 닫아!” 함장이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폭도 폐쇄! 멈추지 않습니다! 브릿지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오퍼레이터가 놀라 외쳤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복도를 막고 있던 문이 떨어져 나갔다. 그 뒤엔 한 소년이 이글거리는 눈을 불태우며 서 있었다.
“쏴!! 쏴라!!!” 함장은 총을 꺼내들어 쏘아댔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주포 사격으로도 없앨 수 없는 이를, 우주공간을 맘대로 헤집고 다니는 이를 총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멈춰라. 다 죽여버리기 전에.” 소년의 독기 어린 목소리가 브릿지를 채우자 군인들은 말없이 총을 버렸다. 이런 족속들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을 당장 죽이지 않는 것에 일말의 희망을 건 부하들이 모두 총을 버리자 함장은 이번엔 부하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싸워! 싸우란 말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등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랬나? 폭탄을 발사한 건 너의 뜻이었나?” 진한은 눈에서 빛을 뿜어내는 듯 분노를 발산하고 있었다. 함장의 목덜미를 틀켜쥔 손에서는 스물스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함장은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주저 앉았다.
“아.. 아닙니다.” 함장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브릿지 안의 사람들은 그가 명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감히 나서서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관에 대한 배신행위일뿐더러 지금 나서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뒷감당을 어찌 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배를 통째로 날려버리려 들지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그 족속은 광폭하고 두렵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아.. 그 놈들은 도망갔습니다. 쏜 명령을 내린 건 사령관입니다. 저희는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함장은 애써 변명했다. 진한이 틀어쥔 목이 타는 듯 뜨거웠다. 이 소년의 손은 달궈진 쇠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목을 틀어잡히고 낯빛이 변하며 괴로와하는 함장의 모습에 승무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질끈 감을 뿐이었다.
“그 놈을 쫒아라.” 진한이 조용히 속삭였다.
“드.. 들었지! 얼른 워프해라!”
“하지만 함장님. 지금 워프 아웃된 충격으로 워프 드라이브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수리가 필요합니다.”
“다.. 닥쳐라! 이 어르신께서 하라고 하시잖아. 얼른 수리하란 말이다!” 함장은 필사적으로 바둥거리며 외쳤다. 진한은 거칠게 한숨을 내쉬며 함장을 집어 던졌다. 당장 힘없는 자들을 빌미로 협박한 것, 그리고 약속을 어기고 폭탄을 쏜 것에 대한 분노는 대단했지만 아직도 진한은 그 아이를 이길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 대단한 검은 기류를 뿜어내고도 도망친 까닭조차 알 수 없었다. 왜 그가 자신을 버려두고 가버렸는지 진한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가 바뀌었다. 그 안에 있던 분노가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손 주위에 검은 기류가 귀기를 흘리며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저… 우주 스테이션에 가서 수리를 해도 되겠습니까.” 함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진한에게 굽신거렸다.
“함장님, 이 행성엔 우주 스테이션이 없습니다.” 항법사가 함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뭣. 유인행성중에 그.. 그런 미개한…행성이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착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항법사의 말에 진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 검은 기운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일 것이었다. 진한이 잠시 기운을 응시하자 손 주위에 떠돌던 검은 기운이 뭉클거리며 움직였다. 승무원들은 불안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잠시 후 진한이 탄 전투함은 타미나 우주공항에 천천히 내려 앉았다. 진한이 우주전을 벌이는 사이 지상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대피의 와중에서 그들이 입은 피해는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다. 물론 대기권 안쪽으로 추락한 십여대의 전투함들의 잔해가 떨어져 박살난 건물과 시설도 있었지만 대단한 인명피해는 없었다.
처음에 육중한 전투함이 반중력 엔진을 이용해 천천히 내려앉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대응을 고민했지만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천천히 내려서는 동안 걱정과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내려 도열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의 표정도 점점 더 굳어져 갔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온 진한의 모습에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역시 진한군! 이길 줄 알았어!” 그 사이 진한과 작업을 같이 하며 친숙해진 엔지니어들이 진한을 반겼다. 그런 상황에도 꼼짝하지 않는 제국 군인들을 보며 사람들은 다 같이 기뻐하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 휘이나만은 진한 앞에 꼼짝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신녀여. 무슨 문제라도…?”
“진한이 어디 있는 거죠?”
“저기, 저 가운데, 하늘색 옷을 입고 있지 않은가. 역시 그분의 위용은 해과 같이 빛나고 하늘과 같이 높으며 바다와 같이 깊도다. 맨손으로 적을 분쇄하고 이 별을 구하시니 진정한 수호자라 일컫을만 하도다.” 고레아스는 감정에 도취되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냐….”
“뭐가?”
“저건 진한이 아니라구요! 저건 진한의 껍질을 하고 있을진 몰라도 진한이 아니에요.”
“신녀여! 사람을 못 알아보는 건 개인적 사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자인 그분을 몰라본다면 신녀로서의 자격 상실이야! 불경하도다!” 고레아스는 버럭 화를 냈다.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죠! 저건 뭔가 다르다구요! 아닌걸 어떻게 맞다고 해요!”
“허어… 믿음이 부족한 게야. 아무리 모습을 바뀌어도 나는 끝까지 믿을거네. 나의 믿음은 반석과 같이 굳고 강하니…”
“혼자 믿든 말든!” 휘이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고레아스는 그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노래를 계속 부를 뿐이었다.
진한은 행성 곳곳에 추락한 전투함의 잔해를 수거해 우주공항으로 돌아왔다. 널찍한 우주공항의 곳곳이 거대한 고철저장고로 바뀌어 버렸다. 그 와중에 행성 곳곳에 착륙한 탈출선의 제국군 잔당들도 우주공항으로 수용되어 무장해제를 당했다.
몇 명의 기술자들은 타미나의 행성인들에게 고등한 선진 물리학과 엔지니어링을 전수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함정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진한이 파괴한 것이 대부분 엔진이었던 까닭에 진한이 마지막으로 나포해온 한척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함정은 수리한다고 해도 다시 떠오르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날, 고레아스가 치렁치렁한 예복을 입고 진한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어찌된 일인지 그날 이후 진한은 몹시 바빠했고 휘이나와도 거의 만나려 들지 않았다. 고레아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고레아스도 급박했다.
“주인님. 말씀드린 신평회의 날입니다.”
“신평회? 종들이 주인을 심판한다는 그 날인가요.” 진한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형식적인 문답행위입니다.” 고레아스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참가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뒤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