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역사 포럼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국내의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 이슈 게시판에서 이야기해 주세요.
= 폭락의 향연 - 주식 시장부터 은행까지 =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위기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앞에 2편에서도 설명했다시피, 미국 경제 위기는 2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점증된 문제들이 터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불안한 기반위에 있던 경제였지만, 미국인들은 29년대 중반까지 미국 경제는 튼튼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1922년 전후침체기를 넘긴 미국은 그 과실이 어디로, 어떻게 갔든 분명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위기라는 단어는 당시 떠올리기 힘든 것이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미래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시 경제에 적신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분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지요. “미국 경제 불패” 라는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 한껏 나타난 곳은 다름아닌 주식시장이었습니다. 주식 시장은 기업 장래 예측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곳입니다. 즉, 미래를 보고 사는 곳이지요. 1929년 주식시장의 낙폭은 경제 대공황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신호탄이였습니다.
이 주식시장은 1차 세계대전 전후침체기가 절정이였던 1921년 6월에 미국 주식 시장의 표준 지수인 다우 존스 (Dow Jones Industrial Average)가 바닥인 68.45 포인트를 찍고 난 후, 다시 올라섰습니다. 전후침체가 끝난 1923년 부터 주식시장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929년 중반까지 불패의 신화를 이어갔습니다. 여기 제시할 미국 다우 존스 지수를 추이를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그래프는 다우 존스 지수를 1923년부터 1929년 주식 시작 낙폭 전까지 월별로 측정한 데이터를 그린 것입니다. 보통 안정적인 주식시장을 보면 무작정 상승하지 않고 상승과 하락를 반복하는 보합과 함께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프에서 보다시피, 1923년부터 1925년 초반까지 보이는 주가 추세는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해 서서히 올라가는 안정적인 시장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1925년부터 이 추세가 바뀌게 됩니다. 1925년부터는 주식 시장은 낙폭이 많이 없는 채, 꾸준히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924년 1월을 기준 (100.66) 으로 1927년도 12월에는 지수가 두 배나 올랐습니다(202.40). 4년 정도안에 두배가 올랐는데, 그 당시 평균 인플레이션 비율은 0.3% [1] 봤에 안됬기 때문에, 물가 상승이 거의 없이 순수하게 주식 가치가 두 배나 오른 겁니다. 1923년도에 만약 주식을 두고 4년 간 묵혀놨다면 평균 순이익이 무려 200%나 되는 겁니다. 연간 평균 50%의 이윤 – 1923년부터 1929년까지 평균 단기 자금 연이율이 1.7%, 평균 장기 자금 연이율이 4.7% [2] 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것입니다. 자, 이 황금의 기회를 누가 놓치고 싶어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투기 (speculation) 광풍이 불어닥친겁니다. 이 투기 광풍은 부자부터 현금이 많이 없는 중산층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1927년 중반부터 이 투기 광풍은 더욱 가속하여 1928년부터는 경이로운 상승을 보여줍니다. 1928년 1월을 기준으로 해서 다우 존스 지수가 단 만 1년 7개월만에 두배 가까이 올랐습니다. 1929년 8월에 당시 최고점을 찍은 (380.33, 참고로 이 최고점은 1954년 11월 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3]. 미국 주식 시장은 버블이 엄청나게 끼어있던 상태였지요. 하지만, 이 상승세가 거의 5년 가까이 지속되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주식시장이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 유명한 경제학자였던 예일대 교수 어빈 피셔 (Irvin Fisher)도 대폭락 직전이였던 1929년 10월 15일, “주식 가격은 이제 영구적인 고점으로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다” [4] 는 유명한 발언까지 합니다.
그러나, 불안한 기초위에 올려져 있었던 화려한 경제는 화려하게 종식됩니다.
* 쓰리 쿠션으로 온 운명의 날: 검은 목요일, 검은 월요일, 검은 화요일
10월 24일 1929년, 목요일. 아침부터 뉴욕 증권 거래소 (NYSE)는 분주하게 파는 거래자로 가득찼었습니다. 서로 팔려는 함성이 오갔고, 거래장은 전쟁을 방불케 했습니다. 팔려는 기미는 좀처럼 줄지를 않았고, 오히려 더 늘어가기만 했습니다. 이내 거래장 내부 뿐만 아니라 거래장 바깥에서도 혼란이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폭풍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엄청난 매도 바람은 결국 하루 만에 1290만주나 거래되는 [5] 엄청난 기록을 세웁니다. 아무리 많아도 거래량이 600만주 이상을 넘지 않았던 뉴욕 증권 거래소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이 전례없었던 사태에도 불구하고, 미국 연방정부, 주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를 않습니다. 미국은 당시 자유 시장 경제 (free market economy) 를 신봉하는 나라였고, 그로 인해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laissez-faire) 시장 정책을 고수해왔습니다. 대신, 이런 비슷한 위기가 있을 때 마다 정부 대신 초기업적인 합동 대책이 나오곤 했습니다. 검은 목요일 다음 날인 10월 25일, 토마스 라몬트 (Thomas Lamont) 모간 은행 (Morgan Bank) 이사장, 알버트 위긴 (Albert Wiggin) 체이스 전국 은행 (Chase National Bank) 은행장, 찰스 미첼 (Charles E. Mitchell) 전국시 은행 (National City Bank) 총재를 포함한 월가의 실력자들이 모여 사태 해결을 논의 합니다. 결국, 당시 뉴욕 증권 거래소 (NYSE) 부사장이였던 리차드 위트니 (Richard Whitney)에게 월가 은행을 대신하여 시장 안정책을 시행하게 합니다. 월가 실력자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위트니는 공격적인 주식 매수를 시작합니다. 먼저 당대 최고의 제철 기업이였던 U.S. Steel의 주식을 당시 시장가 보다 높은 가격에 구입 하고, 다른 비슷한 우량주들도 비슷하게 구입합니다. 이런 구입 전략은 시장을 조금이나마 반등시켰습니다. 왜 이러한 전략을 썼는가? 이 전략이 먹힌 전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907년 폭락 때 이 전략을 써서, 폭락을 멈춘 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번에는 그 전략이 안 먹힌 것이였습니다. 임시 변통에 불과 했던 것이였지요. 검은 목요일의 소식은 신문을 타고 전국으로 타진되었습니다. 지난 5년간 이런 폭락이 없었기 때문에, 이 소식을 안다루는 언론이 이상했을 정도였지요. 검은 목요일의 충격은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이 충격은 검은 월요일 (Black Monday) 로 이어집니다.
검은 월요일 (Black Monday). 1929년 10월 28일, 뉴욕 증권 거래소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듭니다. 매도 행진이 계속 되었고, 이 엄청난 매도는 기록적인 낙폭율인 -12.82%를 기록했습니다 [6]. 사람들은 낙폭에 더더욱 당황하게 되고, 그럴 수록 팔려는 사람들은 늘어갔습니다. 공포에 지배당해버리는 사람들의 악순환이 시작된겁니다. 이 공포는 다음날, 가장 유명한 검은 화요일 (Black Tuesday)에 절정을 이룹니다.
1929년 검은 화요일 (Black Tuesday)때 뉴욕 증권 거래소 (NYSE)에 앞에 서있는 투자자들. 출처: New York Times
검은 화요일 (Black Tuesday)에는 말 그대로 엄청난 인파가 뉴욕 거래소에 줄을 서서 증시 시황을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팔려는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 되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관세법인 홀리-스뭇 (Hawley-Smoot Tariff Bill) 이 통과된다는 루머에 투매가 더욱 심했습니다. 이 날 거래량은 무려 1641만주 [7] 나 되었습니다. 검은 월요일 (Black Monday) 거래량 기록을 갈아 치웠지요. 게다가, 이 거래량 신기록을 갱신하는데는 무려 39년이나 걸렸습니다. 얼마나 거래량이 많았는지, 주식 가격을 인쇄하는 티커 (ticker) 가 밤까지 작동될 정도 였습니다. 이 날 장 마감 때 다우 존스 지수는 230.07 포인트로 마감되었습니다 [8]. 이 날에서만, 140억 달러라는 엄청난 돈이 “증발”해버렸습니다 [9]. 이것은 1929년 당시 미국 연방 정부의 총 예산이 31억 달러의 [10] 5배에 가까운 금액이였습니다. 검은 화요일 이후에도, 미국 주식 시장은 계속 추락합니다. 경제 대공황이 수면 위로 나타난 순간이었습니다.그럼 무엇이 이런 엄청난 대폭락을 불러왔을까요?
먼저 겉으로 보이는 추세부터 짚어봅시다. 위의 DJIA 그래프를 보시다시피, 다우 존스는 8월달에 최고점을 찍습니다. 9월달 부터, 미국인들은 점점 주식에서 발을 빼기 시작합니다. 다음 그래프는 9월부터 10월까지 다우 존스 지표를 보여줍니다:

그래프에서 보다시피, 9월 초반부터 다우 존스는 하락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주식의 가치가 꾸준히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인들이 주식 시장이 더 이상 상승하기 힘들다는 관점이 우세해져 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즉, 신앙과도 같은 “불패의 미국 경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1928년, 1929년 초-중반까지 끊어지지 않았던 강력한 상승장이 미국인들에게 계속 황금의 기회라고 손짓했고, 미국인들은 거기에 매수에 매수를 거듭했지요.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하락장은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기 시작했고, 미국인들은 불안감이 점증되면서 매도에 매도를 거듭한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매도세는 10월의 검은 날들에서 절정을 이루었구요. 그러면, 한 가지 간단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왜 팔려는 추세가 이어졌지?”
일견 간단해 보이는 저 질문은, 당시 주식 시장의 근본을 알 수있는 중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주식 가치가 그렇게 올랐으면, 그것을 유지하려는게 인지상정 일테고, 되도록 팔지 않는게 그 가치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텐데 말이죠. 그 보이지 않는 원인은 바로 투기였습니다. 언급했다시피, 1920년대 주식 시장에는 투기 광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이 투기 광풍의 주연들은 돈이 남아도는 부자들, 돈이 없었지만 벌기를 원했던 서민층, 그리고 은행들이였습니다. 부자들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수중에 현금이 많이 없던 서민들은 어떻게 이 주식시장에 뛰어든 것이였을까요? 역시, 이것도 대출이였습니다. 은행은 치솟아 오르는 주식 시장을 보고 주식 투자를 위한 대출이 큰 리스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출 규제가 전무했던 당시, 은행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이 황금 시장이라 생각되어진 주식 투자에 대한 대출을 적극적으로 시행했구요. 1929년 미국 은행들 전체의 대출 규모는 무려 480억 달러 [11]! 이것은 1929년 당시 미국 연방 정부가 소유한 모든 금-은괴와 발행한 전체 화폐의 가치에 반절 [12] 이나 되는, 아찔하게 많은 돈이였습니다. 은행이 또 적극적으로 대출을 장려한 모습은 당시 연이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미국 전체 단기 자금 대출 평균 연이율은 1.7% [13] 봤에 안됬었고, 당시 뉴욕 증권 거래소 (NYSE)에서 브로커들과 매매자들이 대출했던 돈인 콜 머니 (Call money)의 이율은 아무리 높아도 6%를 넘지 않았습니다 [14]. 게다가, 증시 브로커들은 이율이 싼 콜머니를 빌린 뒤 이것을 다시 투자자들에게 꾸었주었지요. 1920년대 주식 호황은 곧 대출로 쌓아올린 탑이였던 것이였습니다.
자, 다시 질문으로 돌아옵시다. 왜 팔려고 했을까요? 대출을 하면 원금과 그에 따른 이자를 지불해야 하고, 이 이자 지불은 일정한 시간에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제때제때 지불해야합니다. 안그러면 파산이 되니까요. 주식을 위해 빌린 돈은 주식을 통해서 갚아야지요. 주식 가치가 오른데서 온 이익을 완전히 환수하려면, 먼저 주식을 매도하고, 매도해서 얻은 현금을 가지고 원금과 이자를 갚은 후, 거기서 남은 돈이 자기 손에 쥐는 돈이 되는것입니다. 고로, 신용 대출을 통해 주식 투자를 한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의 대출을 청산 또는 유지하기 위해서 주식을 꾸준히 팔 수 봤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1929년 8월에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 (Federal Reserve Board)는 투기 과열을 식히기 위해서 은행 일반 이율을 인상합니다 [15]. 이것은 곧 이자 비용이 늘어간다는 것이였고, 신용 대출 투자자들에게 빨리 주식을 청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증가시켰습니다. 이 압박감은 매도세로 이어졌지요.
대출 문제에 더해 부수적인 요인도 있었습니다. 미국 주식 시장은 주식 거래에 대한 규정이나 안전 장치를 거의 마련해 두지 않은, 자유 방임 경제의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현재의 주식 시장은, 서킷 브레이크 (영어로는 trading curb)라는 것이 두어서 막대한 매도 물량이 있을 때 장거래가 중단되거나 장폐쇄를 하여, 투자자들의 매도를 다시 생각케 합니다. 비유를 들자면, 컴퓨터의 CPU가 과열될 때 컴퓨터가 스스로 전원을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대공황 당시 주식시장에는 이런 보호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매도세를 막을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팔겠다는 것을 말리는 것은, 자유 방임 경제 이념이 지배하던 그 당시에는 상상 불가한 일이였으니까요.
끔찍한 사실은, 이건 그냥 시작이었다는 것이였습니다.
* 화려하게 폭파된 시장, 연방 정부는?
화려하게 폭파된 주식 시장의 결과는 자산 가치 붕괴, 파산 소동, 실업율 폭등, 그리고 금융 부실의 시작이였습니다. 우선 주식 폭락으로 인해, 주식,
부동산 등 자산가치가 붕괴해서, 기업들이 투자할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립니다. 주식 폭락은 또 주식 시장의 자금을 썰물 처럼 빼서 기업의 자금 조달이 어렵게 했고요. 주식 폭락 이후, 기업 파산 신청 수는 껑충 뛰어서, 29년 22,909건 하던 것이 공황이 심화된 1932년에는 무려
31,822건 [16] 이나
되었습니다. 기업의 줄파산은 실업율을 엄청나게 증가시켰습니다.
1929년 공황 전 실업율은 3.3% 정도였지만, 공황이
시작된 이후 매년 두 배씩 늘어, 1932년에는 23.6% 라는
놀라운 증가율을 보입니다 [17]. 실업율의 증가로 돈이 없어 거리에 내몰린 사람들이 교외에 판잣촌 같이 모여살게 된 곳이 나타났고, 사람들은 그것을 당시 대통령의 이름을 붙여 후버빌 (Hooverville) 이라
했습니다. 훗날 일본인들이 잃어버린 10년을 ‘헤이세이 불황’ 이라 하는 것 처럼요. 그리고, 이전에 강조했지만, 무리한
대출로 인한 신용 부실은 마침내 금융 부실로 이어졌고, 이것은 무리하게 자본금을 날려버린 은행들의 몰락을
의미했습니다. 1929년 미국 전체 은행 수는 25,330개
였지만, 1932년에는 19,163개로 확 줄어버립니다 [18]. 1차
세계대전 전후 침체 때도 별로 줄지 않았던 은행 수였기에, 이것은 정말 충격이였지요. 은행 붕괴는 자본주의에서 정말로 무서운 일입니다. 먼저, 자본이 모일 구심점이 사라집니다. 자본이 모일 구심점이 사라지기
때문에 투자나 대출이 정지됩니다. 이것은 자본 흐름이 막혀져버려, 기업들이
일어설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게다가, 신용 제공을 할
당사자가 사라져버리는 것이여서, 신용 시장이 말라갑니다.
연방 정부는 무엇을 했을까요? 당시 대통령은 능력있던 광산 기술자였던 허버트 후버 (Herbert Hoover) 대통령 이였습니다. 친기업, 자유 방임 경제, 외국 문제 불개입 이념을 필두로 하던 공화당 (Republican Party)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후버는 1929년 3월 4일, 대공황 이전에 취임했습니다. 당연히 후버의 내각은 공화당원과 공화당의 강령을 지지한 사람들로 앉혀졌지요. 29년 주식시장 폭락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버 내각의 재무성 장관이자 은행 재벌가였던 앤드류 윌리엄 맬런 (Andrew William Mellon)은 균형잡힌 예산, 감세, 재산세 감축, 정부 불개입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그의 감세정책은, 단순히 부자들의 세금만 감세한 것이 아닌, 모든 계층의 세율을 낮춰 평판이 매우 좋았었습니다. 또, 균형잡힌 예산은 연방정부의 부채를 줄였지요. 그러나, 그의 정부 불개입 정책은 말라가는 미국 경제를 그냥 두고 있었지요.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연방 정부가 경제 회복을 위해 개입하는 법안을 통과하는데 상당히 비협조적이였고요. 오히려, 미국의 수출을 더욱 악화시켜, 결과적으로 대공황이 심화되는데 일조한 홀리-스뭇 관세법 (Hawley-Smoot Tariff Acts) 를 1930년에 통과시켰습니다.
그렇다고 연방 정부가 아예 뒷짐을 진건 아니였습니다. 한국에서 출판되는 미국 역사책들 대부분은 후버를 아무것도 안한 무능한 대통령으로 묘사합니다. 후버가 악평을 받는 이유는 루즈벨트의 당인 민주당이 1930년대 당시 후버를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삼아 공격했던 것도 큽니다. 그러나, 후버는 무능했을지언정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후버 대통령은 공황의 늪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몇 가지 방책을 내놓았습니다. 후버 대통령은 자발적인 실천 (volunteerism)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은행들이 서로 돕는 콘소시움인 전국 신용 보증사 (National Credit Corporation)를 설립하게 하여, 은행들이 서로 파산하지 않도록 돕도록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자발적인 실천은 한계가 있던게, 강제성이 없고 정부 지원이 딱히 없었던 것이였습니다. 사기업인 은행은 자신들이 손해를 감수할 용의도 이유도 없었기에, 이 전국 신용 보증사는 흐지부지 하게 됩니다. 또, 당시 경제 공황으로 늘어나던 판잣촌인 후버빌 (Hooverville) 증가를 막기 위해, 후버 대통령은 1932년 연방 주택 대출 은행법 (Federal Home Loan Bank Act)을 통과시켜, 연방 정부가 관리하는 주택 신용 기관을 만들어, 미국인들의 주택 담보 대출을 용이하게 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 였지만, 효과는 크질 못했고,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요. 후버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것은 바로 1932년에 응급 구호 및 건설법 (Emergency Relief and Construction Act)을 통과시킨 것이였습니다. 이것은 공공 근로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재건 재정 공사 (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을 발족해서 산업 내 자금 유동성을 도와주는 역할을 꾀하게 했습니다. 효과는 미비했지만, 중요한 점은 이것이 뉴딜의 전신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뉴딜은 하루 아침에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였던것입니다. 물론, 뉴딜은 이 응급 구호 및 건설법 하나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굵직굵직했지만, 이미 뼈대는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조금 미비했고, 너무 늦었다”는 것이였지요.
미국 경제가 말라가고 있을 동안, 1933년 대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대선은 바로 뉴딜이 탄생하는 계기가 됩니다.
다음편에 뉴딜을 본격적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참고 자료:
[1] www.measuringworth.com
[2] http://www.measuringworth.org/datasets/interestrates/result.php
[3] http://news.bbc.co.uk/2/hi/business/3959005.stm
[4] http://news.bbc.co.uk/2/hi/business/3959005.stm
[5] www.econstats.com
[6] www.econstats.com
[7] www.econstats.com
[8] www.econstats.com
[9]http://en.wikipedia.org/wiki/Wall_Street_Crash_of_1929#cite_note-8
[10] http://www.gpoaccess.gov/usbudget/fy00/sheets/b078.xls
[11] U.S. Abstract of Statistics 1939, Pg 253
[12] U.S. Abstract of Statistics 1939, Pg 238
[13]http://www.measuringworth.org/datasets/interestrates/result.php
[14] U.S. Abstract of Statistics, Pg 290
[15] http://news.bbc.co.uk/2/hi/business/3959005.stm
[16] Statistical Abstract of the United States 1939, Pg 307
[17] http://www.bls.gov/opub/cwc/cm20030124ar03p1.htm#37a
[18] Statistical Abstract of the United States 1939, Pg 253

자산가치 하락으로 인한 은행 - 기업의 연쇄 도산과 실업자 대량 발생이라...
일본의 버블 붕괴라던가 얼마 전 미국의 주택담보대출 사태도 그런식으로 이루어졌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우리나라도 슬슬 조짐이 보인다는게 무섭군요 -_-;;
둑이 무너져 대범람이 일어났다. 왜 견고하게 보이던 둑이 어이없이 무너녔는지. 그 까닭을 안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알지 못한 다른 것도 알아 재미있었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합니다.
clorian
재미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엔 두려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