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기의 건설 현장
총과 버터 - 역사의 전쟁(Guns&Butter - War of History)
격동의 20세기. 그러나, 그 20세기의 대부분은 이른바 ‘냉전(Cold War)'이라는, 조용하고도 정체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한편으로는 인류 생존의 위협과 함께, 또 한 편으로는 나름대로의 평화 시기를 유지해 나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철저와 더불어 사실상 종결된 냉전이지만, 그것은 지금도 인류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20세기의 기술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냉전 시대. 그 시대는 한때 반짝했던 ‘국가사회주의’의 등장, 그리고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참혹한 전쟁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1차 대전의 종막과 제국시대의 종결?
1914년.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한 젊은 부부가 테러범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라고 하지만, 심지어 오스트리아 내부에서도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던 이 젊은이의 죽음은 그다지 큰 사건으로 기술될 수 없었지만(그렇기에 그의 장례식엔 유명 인사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극에 달해있던 국제 정세를 움직이게 하는 기폭제가 되기엔 충분했다.
결국 20세기 초반. 아니 아마도 나폴레옹 전쟁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국가 지도층 간의 경쟁의식으로 시작되었던 무의미한 싸움은 자그마치 4년이나 계속되며 유럽 전역을 불바다로 바꾸고 말았다. ‘주들의 전쟁’(미국의 남북전쟁)부터 계속되었던 무기의 극단적인 발전은 참호전을 불러오고 불과 수km를 전진하는데 수십만의 희생을 치르는 전투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항공기, 잠수함, 탱크 등 신병기의 등장을 불러왔고, 한편으로는 국가간의 경쟁의식을 더욱 고조시키는 한편, 불만을 팽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1차 대전이 종결되었음에도 전쟁의 불길은 완전히 식어버리지 않았다. 개전 당사자인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등이 수많은 국가로 갈라졌으나, 또 다른 당사자인 독일은 본래의 영토와 상황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단지 불만 만을 증폭시켰을 뿐이기 때문에...(말하자면, 불완전연소되었다고 할까?)
한편, 1차 대전은 대서양 저편의 미국이 세계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해 주었다. 중립을 지킨다는 선언 속에서도 영국이나 프랑스와의 친분 관계를 바탕으로 대규모 물자를 제공했던 미국은 그 엄청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대전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1차 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남아돌게 된 물자는 대공황의 모습으로서 전세계 경제를 강타하였다.
미국을 기점으로 한 대공황의 영향은 전쟁 피해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던 독일을 직접적으로 강타하였고, 어제까지 1마르크였던 감자가 하루 만에 수천 마르크로... 그야말로 돈을 푸대로 담아 날라야 하는 인플레이션과 사회 불안 속에서 그 불만은 하나로 집결될 수 밖에 없었다.
국가 사회 주의의 등장
아돌프 히틀러. 한때 화가를 꿈꾸었던-그러나 정밀성은 있었으나, 예술가로서의 상상력보다는 선동가로서의 재능이 넘쳐났던- 젊은이는 이렇게 등장하였다. 당시 넘쳐나던 신진 정치 단체 중 하나였던 국가사회당(NAZI)에 들어간 그는 타고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당의 일인자로 부각되었고, 불황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는 대전의 영웅,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 이어 독일의 제2인자의 자리에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80세의 고령으로 은퇴를 생각하고 있던 힌덴부르크는 가라앉고 있었던 반면, 히틀러는 막강한 세력과 지지로 그야말로 떠오르는 태양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하여, 1933년 히틀러는 진정한 2인자(그러나 실질적인 1인자의 자리인) 독일의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독일의 권력은 점차 히틀러의 손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때 나치를 혐오하던 독일군은 히틀러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그의 충성스런 지지자였던 하인히리 히믈러를 중심으로 한 친위대(SS)는 그의 진정한 힘으로 부각되었다.
1934년 6월 30일 ‘장검( 6劍)들의 밤’. 후일 도살자로 불리게 되는 히믈러가 이끄는 열성 당원들은 평범한 군인에 불과했던 -그리고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여겨진- 룀의 부하 1천명을 검거하여 즉석에서 처형했다. 당사자들조차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전개 속에 피의 숙청이 종식되자, 이 소식을 들은 힌덴부르크는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8월 1일... ‘각하’ 히틀러에 대한 힌덴부르크의 호칭이 바뀜으로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수상에 이어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된 그는, 투표자의 압도적인(90% 이상) 지지 아래 ‘총통(F?hrer)’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에 기록된 독일인의 제3제국이 시작된 것이다.
독일 제국의 팽창
그것은 당사자들이 가장 바라지 않았던 형태로 출발하였다. 1938년 3월 증강된 군사력과 나치당의 지지를 바탕으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빼앗겼던 수데텐 지방에 대한 회복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히틀러의 강경한 요구에 대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데텐 지방의 독일 영유권을 인정하였고, 히틀러는 그야말로 총 한방 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히틀러의 자신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영국의 수상 쳄벌레인을 ‘가지고 노는데 성공한’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동맹군을 위하여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토에 대한 야심을 더욱 높여나갔다.
뮌헨 협정은 히틀러의 야욕에 불길을 당겨주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내부의 소수 민족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한편, 군사적, 외교적 압력을 통해서 체코 정부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오직 ‘수데텐 지방 뿐’이라고 선언한지 불과 6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예측했듯 명목상의 항의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히틀러의 다음 행동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 뮌헨 협정의 주역들. 그러나 그들의 시선처럼 마음은 딴데 가 있었다. ]
2차 대전의 발발
독일 제국의 다음 목표. 그것은 대국이라고 할만한 -그러나 그만한 역량은 보유하고 있지 못한- 폴란드의 합병이었다. 세계대전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으나 폴란드의 일부는 차지하고 싶었던 히틀러는 이를 위하여 총력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치적 위협 만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와는 달리 폴란드는 영국, 프랑스의 강력한 동맹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상당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대국이기도 했다.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던 폴란드는 -비록 시대에는 뒤지긴 했으나- 상당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히틀러는 폴란드의 군사력은 그다지 우려하고 있지 않았다. 그와 독일군이 보기에 폴란드군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군대에 지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독일군은 숫적인 우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히틀러는 폴란드의 동맹국(영국, 프랑스 등)조차 우려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폴란드 침공의 유일한 장애는 과거 나폴레옹의 진격조차 멈추게 했던 동부의 붉은 곰, 소비에트였다.
이에 따라 1939년 8월.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간의 동맹 조약이 체결되고, 폴란드는 사실상 둘로 갈라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핀란드에 대한 침공 보장을 대가로 폴란드에 대한 독일 침공을 묵인하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나서서 폴란드의 일부를 갈라 먹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편으로 독일은 괴벨스를 앞세워 군대 증강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버터 이전에 총을!” 그는 이렇게 외쳤으며, 그 자신의 비만에도 불구하고 “총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버터는 단지 비계만 찌게 할 뿐이다.”고 방송하였다.
이렇게 증강된 군사력은 세계 대전을 일으킬 정도는 되지 않았으나 걸림돌 하나 없는 폴란드 침공에는 충분한 전력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초부터 치밀하게 계획되고 진행된 고도의 기계화전. 바로 전격전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 전격전과 독일군
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결코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전격전’이지만, 사실 ‘기계화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전술을 처음 제시한 것은 독일이 아니라, 영국의 장교이자 이론가인 존 프레더릭 찰스 풀러였다. 1차 대전 당시 참모 장교로서 복무하여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을 체험한 그는,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계화전을 이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나, 영국군 내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비판과 함께 거의 인정받았던 그의 전술은 유럽 대륙 내에서 각광을 받아 인정받게 되었다. 소련이나 스페인에서는 그의 이론서를 전술 교범으로 받아들였으며, 특히 독일의 장교단은 이를 성서처럼 숭배하며 그의 전술을 그대로 답습하기에 이른 것이다.(그리하여, 베를린 주재 영국 무관이 ‘전격전의 아버지’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으로부터 이 책을 추천받는 기묘한 일도 있었다.)
폴란드, 프랑스 등에 대한 독일의 과감한 진격 작전은 풀러가 제시한 전술에 바탕을 두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에 따라 소련의 붉은 군대에서도 그의 저서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필적하는 위치에서 검토하기에 이르렀으며, 그의 ‘기계화전’ 개념은 21세기의 지금에서도 중요한 요소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폴란드에 대한 기습은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루밤 사이에 독일의 폭격기들이 폴란드의 주요 시설을 무참히 유린하는 가운데, 탱크를 앞세운 기계화 사단은 다급히 편성된 폴란드 군대를 초토화시킨 것이다. 창과 삽을 들고 폴란드군은 용맹하게 대항하였으나 이는 당랑지부(螳螂之斧)에 불과할 뿐, 전술도 무장도 낡아빠진 폴란드는 불과 2주 만에 처참하게 유린되고 말았다.
그러나, 폴란드 전은 히틀러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바로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뮌헨 협정과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으로 이제껏 눈을 돌리고 있던 두 나라였으나, 폴란드 침공을 용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일까? 여하튼, 이로 인하여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2차 대전은 막을 올리게 되었다.
거짓 전쟁.... 그리고 마지노선의 돌파
하지만, 이러한 선전포고에도 불구하고 두 세력 간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로서는 아직 영국-프랑스 두 강대국을 상대할 역량을 갖고 있지 못했고, 그들 역시 독일과 전면전을 벌이기보다는 독일의 국력 소모를 목적으로 해상 봉쇄나 경제 제제 등으로만 일관했기 때문에...
그리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는 이동시켰음에도 다음해(1940년) 봄에 이르기까지 사실상의 충돌을 겪지 않은 채 상황은 정체되어 있었다.(이 시기를 ‘거짓 전쟁(혹은 가짜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서로 간에 폼만 잡았던 이 시간 동안, 대다수 군인들은 마치 휴가라도 나온 것처럼 편하게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1940년 5월. 독일이 네델란드를 침공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달관의 자세 속에 관망하고 있던 영-불 연합군(특히 프랑스군)은 비로소 독일과의 전면전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풀러의 전술을 채택한 독일의 행동은 그들의 예측을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프랑스가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긁어모아 방어 준비를 시작할 때, 독일은 이미 프랑스 국경 바로 앞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1차 대전 종식 후 프랑스는 독일의 재침공에 대비하여 마지노선이라는 요새를 구축하였으나, 후일 관광지로 전락해 버린 이 낡아빠진 요새는 그들의 패배를 막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 마지노선(Maginot Line)
마지노선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프랑스 정부는 마지노선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네델란드, 벨기에의 침공으로 인하여 프랑스는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예측하였으나, 그 주 진격로는 독-불 국경. 다시 말해 마지노선 쪽이리라 예측하고 이곳에 상당한 병력을 진주시킨 것이다.(실제로 독일 역시 마지노선 쪽에 병력을 파견하여 프랑스의 우려를 더해주었다.)
마지노선은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여 구축한 요새였으나, 프랑스 정부는 이 요새가 돌파될 것을 우려하여 이 지역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했던 것이다. 때문에, 벨기에 지역의 방어선은 약화되었고, 이 지역이 돌파됨으로서 결국 마지노선은 무용지물의 존재로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만일, 프랑스군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 마지노선을 신뢰했다면, 보다 많은 병력을 벨기에 쪽에 투입함으로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냄으로서 역사는 크게 변화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프랑스가 조금이라도 일찍 준비를 시작했더라면 부족한 병력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거짓 전쟁’의 시기에 걸쳐 대대적인 병력 증강을 꾀했던 독일과는 달리 프랑스는 정말로 놀고 있었고, 그들이 부랴부랴 예비군을 집결시킬 당시 독일의 기갑 사단은 프랑스 국경 깊숙한 곳에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곳곳의 도로에선 국경으로 향하던 프랑스의 예비군을 독일 기갑 사단이 무시하듯 지나가 버리는(문자 그대로 아무런 충돌 없이 통과해 버린) 사례가 빈번했고, 심지어 전선으로 출발하려던 예비군이 마을을 제압한 독일군의 항복 방송을 듣고 “엥? 언제 왔지?”라며 무기를 반납하는 촌극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대국 프랑스의 위신을 이야기할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0년 6월 22일. 프랑스-독일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서 나폴레옹 전쟁 이래 최초로 영국은 유럽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배틀 오브 브리튼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소수의 젊은이에게 구원받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일찍이 처칠은 말했듯이, "배틀 오브 브리튼" 당시 영국은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 강대한 공군력을 집결시킨 독일군. 그들은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 ]
영국 침공에 앞서 히틀러는 영국 본토 폭격과 ‘항공 병력의 격멸’을 지령하였고, 막대한 수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영국 본토를 향해 이륙했다. 개전 초기 독일 공군이 투입한 병력은 폭격기 1250기, 전투기 1150기. 영국군의 3배에 이르는 숫자로 가히 파도와 같은 기세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당시 히틀러의 자신감은 영국 공습에 앞서 ‘바다 사자 작전(영국 상륙 작전)’을 위한 병력을 프랑스 칼레에 집결시키고 있었다는 점으로 입증되고 있다. 바람 앞의 등불(風前燈火).
바야흐로 대영제국의 종막이 눈 앞에 다가오는 듯 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독일군에게 유리한 것 만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유럽을 유린한 것에 만족한 탓인지, 승리를 과신한 히틀러는 영국의 항복을 기다리며 1달이라는 시간을 낭비하였고, 윈스턴 처칠이 지도하는 영국은 거짓 전쟁에 이어 계속된 이 작전 정지 기간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던 것이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성공으로 고무되어 있던 그들은, 각지에 흩어진 병력을 재편하여 독일의 공세에 대비하는 한편, 생산 라인을 풀가동하여 1달이란 짧은 시간에 항공 전력을 두 배 가까이 끌어올리는데 성공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전국 각지에 방공 감시대를 갖추고 전화망을 통한 정보 체계를 완비한 것이다.
더욱이, 독일군 자체에겐 크나큰 약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군의 주력 폭격기 였던 하인켈 He111과 도르니에Do-17Z은 튼튼하긴 했지만 속도가 느리고 방어 무장이 부실하여 생존성이 매우 낮았던 것이다.(도버 해협 너머의 영국을 강타하기 위하여 이들은 더 많은 호위기를 필요로 했는데, 특히 가볍고 날렵하지만 연료가 많지 않은 메서슈미츠의 발목을 잡는 엄청난 짐 덩어리이기도 했다.) 더욱이, 스페인 내전에서 활약했던 이들은 폭격의 정밀도가 낮아 도리어 아군에게 손실을 주었던 불길한 전과도 갖고 있었다.

[ 폭격을 퍼붓는 독일군. 그러나, 초기의 폭격은 정밀도가 떨어졌다. ]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제10항공대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신형 폭격기인 융커스 Ju-88이 도입될 때까지 영국에 대한 폭격을 연기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이는 괴링의 판단과 히틀러의 뜻에 따라 무시되었고 즉각적인 영국 공격이 감행됨으로서 <배틀 오브 브리튼>은 막을 올렸다.
(독일의 신형 폭격기인 Ju-88은 폭탄 탑재량은 적지만 보다 정밀한 폭격 능력과 더불어, 빠른 속도와 기동성, 그리고 우수한 방어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스핏파이어 만이 아니라 더 느린 허리케인에게도 손쉽게 잡히곤 했던(쉽게 말해 밥이었던) 구식 폭격기와는 달리 Ju-88은 매우 높은 생존율을 자랑하여 심지어 스핏파이어도 따돌리곤 했다. 그야말로 단독으로 작전 수행도 불가능하지 않았던 이 폭격기가 보다 일찍 배치되었다면(혹은 리히트호펜의 의견대로 폭격이 연기되었다면?) 배틀 오브 브리튼의 향방이나 영국군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Ju-88도, 그리고 한때 스핏파이어를 압도했던 포케볼프 Fw190 전투기도, <배틀 오브 브리튼>이 사실상 끝난 이후에 등장했기에 영국 전선의 상황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소수의 젊은이들
* 배틀 오브 브리튼의 주력기, 호커 허리케인
최대 속력 : 515km/h
상승 한도 : 10120m
항속 거리 : 740m
무장 : 7.7mm 기총 8정
(소련(3000기 이상), 핀란드, 유고슬라비아 등 많은 나라에 제공되기도 한 허리케인은, 전투기형 외에도 20mm 및 40mm 캐논포를 장착한 지상 공격형, 항모에 착함 가능한 함상기형, 플로터를 부착한 수상기형 등 여러 타입으로 제조되었고, 41년부터 생산된 MKIIB형(기총 12정 탑재) 극동에서도 제작되어 일본의 하야부사 등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배틀 오브 브리튼을 이야기 함에 있어 주역으로 얘기되는 것은 역시 스핏파이어지만, 40년 8월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보다 많은 공을 세웠던 것은 영국군 최초의 단좌 단엽 전투기로 개발되었고, 생산이 쉬운 만큼 훨씬 많은 수가 배치될 수 있었던 호커 허리케인 Mk.I이다.
보다 구식의 허리케인은 속도나 상승력 등 비행성능에서 메셔슈미츠에 뒤지는 기종이었으나 안정성과 8정의 기총이 뿜어내는 막강한 화력으로 독일의 폭격기들을 수없이 격추시킴으로서 영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영국은 폭격기를 노리는 전술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
물론, 이런 활약의 이면에는 독일군의 전술적 착오도 함께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허리케인의 주목표였던 He111은 생존성이 낮았고(튼튼하다곤 하지만, 허리케인의 화력 앞에선 수초를 버틸 수 없었다.), 이들을 호위해야 할 메셔슈미츠는 연료 문제로 인하여-그리고 스핏파이어의 교란책에 말려들어-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 이로서 허리케인은 Ju-88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40년 말까지 영국 상공을 수호하며, 독일기의 57%를 격추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1940년 8월 13일. 독일의 괴링 원수는 이 날을 <독수리의 날>이라 정하고, 영국 전투기대 사령부를 4일 안에, 영국 공군 전체를 4주 안에 격멸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하였다. 당시 괴링이 판단한 영국군의 숫자는 300~400대. 하지만 실제 영국군의 전력은 두 배가 넘는 800대에 이르고 있었다. 결국, 개전 초기 독일군은 예상 밖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많은 손실을 입기에 이른다.
하지만, 영국의 희생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다. 전투기는 충분했지만 조종사가 부족했던 -그래서 폴란드나 체코, 미국에서까지 빌려야 했던- 영국은, 언제나 피곤한 상태로 다수의 적들과 직면해야 했으며, -연료 부족에도 불구하고- 메셔슈미츠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 영국군은 항상 다수의 적을 상대해야만 했다. ]
특히 개전 초기, 스핏파이어를 대신하여 투입된 허리케인의 피해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튼튼하긴 하지만 둔해빠진 허리케인은, 그야말로 바람을 가르는 듯한 메셔슈미츠의 기동을 따라갈 수 없었고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결국, 막대한 희생 속에 영국은 스핏파이어로 메셔슈미츠를 상대하는 동안, 무방비 상태의 폭격기를 허리케인이 격파한다는 전술을 채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공세는 결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닥이 없는 듯한 루프트바페의 공습으로 영국군은 점차 와해되어 갔다. 생산 시설은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었고, 연이은 출격으로 피로가 극에 달함에 따라 희생은 조금씩 늘어만 갔다.
그러던 중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8월 23일 야간에 출격한 독일 폭격기가 런던 한복판에 폭격을 가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오폭에 지나지 않았으나 자존심 강한 영국인들의 반감을 얻기에는 충분하였고, 결국 그들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무모한?- 방법으로 보복을 시도하였다.
바로 8월 25일. 베를린에 대한 공습을 감행한 것이다. 그야말로 자살 특공이라고 밖엔 할 수 없는 이 공격은 사실상 독일에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으나, 히틀러의 분노를 유발함으로서 독일의 공격 목표를 기지나 공업 지역 같은 군사 목표가 아닌 런던 등 민간 시설로 돌리는 계기를 가져왔다.

[ 8월 25일의 베를린 공습에 대해서, 히틀러는 영국 도시에 대한 보복을 선언하였다. ]
그야말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지만, 이것은 <배틀 오브 브리튼>에 있어(그리고 어쩌면 2차 대전에 있어) 사실상의 전환기를 제공하는 중대한 전략적 착오였다. 불타는 런던의 소식으로 히틀러의 자부심은 충족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로 인하여 사실상 붕괴 직전에 있었던 영국군 전투기대는 숨통을 돌릴 여유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 방공호 속에서 런던의 시민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
런던과 시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한때 소멸해가던 영국공군은 불사조처럼 소생하였고 독일에 대한 결사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는 런던을 목표로 날아오는 폭격기와 호위기들에 과감히 맞섰으며,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선전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자원자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의 전력은 조금씩 보강되었고, 그에 반해 독일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급기야 영국군은 영국 상공을 벗어나, 독일군 상륙 부대가 집결한 프랑스, 벨기에 등의 항구에까지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9월 15일 대낮에 전개된 독일의 런던 대공습은 영국 국민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으나 독일군은 60대의 항공기를 잃고(영국군은 29대 손실) 영국의 전투기대가 건제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9월 17일에 이르러 히틀러는 영국에 대한 상륙을 무기한 연기하고 프랑스에 배치된 상륙 부대를 해산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로도 영국의 도시에 대한 히틀러의 보복적인 공습은 계속되었으나, 이는 당초의 전략적 목표를 잃어버린 무의미한 소모전에 불과하였고 독일이 얻은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도리어 이런 폭격으로 우수한 조종사를 잃기만 했다.) 이러한 공습은 다음 해 5월까지 계속되었으나, 사실상 40년 10월을 기점으로 배틀 오브 브리튼은 종막을 고했다.(영국은 10월 31일을 배틀 오브 브리튼의 종결로 보고 있다.)

[ 최후의 1기까지... 영국군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

[ 그렇게 소수의 젊은이들. 배틀 오브 브리튼의 영웅은 바로 그들이었다. ]
1940년 8월에서 10월에 이르는 ‘배틀 오브 브리튼’은 결론적으로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기간 동안 영국군은 915대의 항공기를 잃고 수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독일은 -그들의 발표 만 고려해도- 그 두 배에 이르는 1733대(처칠의 발표에 따르면 2698대)를 잃었고, ‘바다 사자 작전’을 위해 집결했던 병력은 허무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그 자신의 전략적 판단 착오에서 비롯되었다곤 해도, 소멸 직전이었던(물론 독일군은 이러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영국 공군의 활약은 히틀러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과 지도부의 실수를 인정하기보다는- 영국의 저력을 과대평가하게 되었으며, 불과 200여 년 전, 그 자신처럼 유럽을 정복했던 또 다른 인물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기에 이른다. 바로, 군사력으로 영국을 침공하지 않고 세력으로서 압력을 가하기로 한 것이다.

[ 동부로 향하는 독일군. 이로서 배틀 오브 브리튼은 막을 내렸다. ]
이에 따라 히틀러는 1943년에 계획되어 있었던 대 소련 침공을 보다 앞당겨서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대서양에 포진하고 있던 주력군을 동부로 이동시켰다. 이것은 본래 그가 선언했던 ‘1차대전처럼 두개의 전선에서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뜨리는 순간이었으며,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독일군 붕괴의 서막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배틀 오브 브리튼은 2차 대전의 운명을 바꾼 중대한 분기점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직접적인 원인은 ‘히틀러의 바보 같은 실수’였다고 하지만, 그러한 행운의 이면에는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베를린 공습이라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고, 10대 1의 수적 열세 속에서도 용감하게 대항했던 ‘소수의 젊은이들’의 희생... 그리고 폭탄비 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았던 영국인의 자부심이 존재하고 있었다.
‘독일의 공세가 불과 1주일만 더 계속되었다면...’
수많은 군사학자나 밀리터리 팬들이 이런 생각을 갖곤 하지만,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던 모든 사건이 그러하듯 이러한 가능성은 결코 운 만으로 찾아오지 않는 것임을 <배틀 오브 브리튼>은 보여주고 있다. 모든 행운과 가능성의 뒤에는 항상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영상, 그리고 게임으로 체험하는 배틀 오브 브리튼
2차 대전에 있어 그 역사를 바꾸는 분기점이 되었던 전장임에도 영상이나 게임으로 배틀 오브 브리튼을 체험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최소한 3개월에 이르는 대규모 공중전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으며, 게임의 측면에서 볼 때, 2차 대전의 초반으로서 초기의 기종 밖에는 몰 수 없는 이 전투는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
하지만, 작년에 SE(스페셜 에디션) 버전의 DVD로 재발매된 MGM사의 영화,「배틀 오브 브리튼(1969)」은 그러한 아쉬움을 덜어주기에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다. 2차 대전 영화의 전성 시대였던 60년대 말에 제작된 이 작품은, 실제 전쟁에 참여했던 에이스 조종사들의 자문을 통한 완벽한 고증을 자랑하며 실제 전투기들에 의한 공중전으로 눈길을 끈다.
프랑스에서의 철수를 시작으로 40년 10월의 종막에 이르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기에 그다지 재미있는 작품이라곤 할 수 없고, 「도라도라도라!」같은 긴장감 있는 연출을 기대하기도 어렵지만, 전투기의 도색이나 킬 마크까지 신경 쓴 충실한 완성도로서 밀리터리 매니아의 눈길을 끈다.(특히 여기서의 공중전은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에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짧긴 하지만, [진주만]에선 배틀 오브 브리튼의 격전을 감상할 수 있다.](http://www.sfwar.com/blog/pyodogi//webmsg/media/upload_images/war04_38.jpg)
[ 짧긴 하지만, [진주만]에선 배틀 오브 브리튼의 격전을 감상할 수 있다. ]
배틀 오브 브리튼을 중심으로 다룬 것은 아니지만, 이때의 상황이나 전투를 사실적으로 체험하고자 한다면, 헐리웃에서 제작한 「진주만」을 보는 것도 좋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원병으로서 영국으로 향하게 되는데, 여기서 과거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눈 앞에서 총탄과 나사까지 튀는’ 공중전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이 정도의 CG로 「배틀 오브 브리튼」이 리메이크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게임으로서의 배틀 오브 브리튼은 -비록 다른 비행 시뮬에 비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나치공군의 비밀병기」를 제작한 루카스 아츠의 「그들의 최고의 시간(Their Finest Hour: The Battle of Britain, 1989)」을 필두로(물론 그 전에도 제작된 게임이 있다.), 다채로운 게임이 준비되어 있다.
근래에는 탈론 소프트의 게임 외에도 MS사의 「컴뱃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3(Combat Flight Simulator 3)」에 미션팩으로 제공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6월에는 역시 다채로운 전쟁, 비행 시뮬 판매사인 GMX 미디어(http://www.gmxmedia.net)에서 「배틀 오브 브리튼 2:윙스 오브 빅토리(Battle of Britain II: Wings of Victory)」를 발매할 예정. 그 완성도는 미지수지만, GMX 미디어의 첫 번째 2차 대전 타이틀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갖게 한다.

[ GMX 미디어의 배틀 오브 브리튼 2. 2차 대전 게임에 굶주린 비행 시뮬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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