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케아 이야기 하나 더

게임 <월드 오브 다크니스>의 가장 큰 희열 중 하나라면, 세계관에 등장하는 주요 종족들이 모두 비극으로 끝을 맺고 모순 속에 부대낀다는 겁니다.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는 인간성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하는 가족들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습니다. 자연을 지키려는 늑대인간들은 언젠가 자신들의 터전이 싸그리 잿더미가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전통주의 마법사들은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한 현시대 앞에서 미약한 의지나마 내세우려고 몸부림칩니다. 거기다 비극과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건 비단 한 종족 전체의 위기만은 아닙니다. 늑대인간 중에서도 레드 탈론 부족은 자연을 지키기 위해 인간들을 제압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죠) 쉐도우 로드 자신들은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부족들은 이들을 모사꾼이라고 욕합니다.

아마도 <월드 오브 다크니스> 플레이어가 가장 재미를 느낄 때는 저렇게 비극 속에 처한 괴물들의 입장에서 그 고통을 함께 연기할 때일 겁니다.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간 상황에서 더 이상 물러날 자리도 없을 때 덮쳐오는 좌절감, 이것이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육사의 <절정>이 딱 이런 상황이지 않을까도 싶고…) 이 게임이 노리는 바가 바로 그것이니까요. 괜히 스토리텔링 게임이라고 하는 게 아니죠. <월드 오브 다크니스>는 객관적인 규칙이 없고 설정 위주의 게임이라고 비판 받기 일쑤입니다만, 거꾸로 말하자면 그만큼 분위기 잡는 것에는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어차피 게임을 하는 이유는 재미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꼭 전투력을 수치화해서 주사위를 굴려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모험과 전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고대 신화에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게임에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제작사인 화이트 울프에서는 이를 위해 게임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종족과 부족/동맹에게 비극성을 부여했을 겁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게임의 한 캠페인을 이루는 종족만이 아니라 그 아래로 갈라지는 여러 파벌들 사이에도 잘못된 점이 넘쳐나죠. 부족한 점이 많아 오히려 매력적이라고 할까요.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한 번 던져볼 수 있습니다. <웨어울프 아포칼립스>에 나오는, 바다를 지키는 변신 상어족 로케아들에겐 어떤 비극과 모순이 있을까요. 환경 오염을 막고 변신을 하는 동물이란 측면에서 로케아와 늑대인간 가루우의 입장은 상당히 비슷합니다. 하지만 가루우가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구는 데 비해 로케아는 상당히 느긋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변신족답게 <월드 오브 다크니스> 특유의 비극성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까요.

물론 저는 <로케아> 룰북을 아직 못 봤습니다. 그러니 로케아에게 숨겨진 비극이 있는데, 제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로케아 소개글을 보면 그런 비극적인 면을 별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육지와 거의 접촉을 안 하는 변신족이라는 특징, 상어로 변신해 바다 속을 지킨다는 임무, 군함을 침몰시킬 정도로 무지막지한 전투, 헤엄치고 사냥하라는 단순한 율법… 글쎄요, 어디를 보더라도 갈 데까지 간 자포자기 심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비극성이 있다고 해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별 거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모순이야 있을 수 있겠지요. 룰북 앞부분에 나오는 만화처럼 로케아는 상어이고, 유일하게 바다에 사는 동물입니다. 바다악어를 포함하는 도마뱀 변신족 모콜레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로케아와 자주 접할 변신족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로케아는 다른 변신족을 의심하기 쉽고, 의심 받기도 좋습니다. 이건 상당히 그럴듯한 모순점입니다. 그러나 비극까지는 가지 않죠.

변신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자연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지구는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곱 번이나 죽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예전에도 종의 70% 이상이 사라진 대멸종이 수 차례 있었지만, 결국 살아남은 소수가 지구를 다시 생명체로 메웠습니다. 사실 몇몇 변신족은 가루우와 관점이 다릅니다. 언뜻 멸망 같지만, 사실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 기간일 수도 있습니다. 로케아의 관점 역시 그럴 수 있지요. 가장 오래되었으니 멸망을 바라보는 시선도 느긋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늑대인간의 다혈질과 조급함은 오히려 로케아 특유의 분위기를 망치는 요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늑대인간들이 웜의 광기를 비극으로 생각하는 것도 모순점 중 하나죠)

 

만약 로케아에게 비극성을 부여한다고 하면 뭐가 좋을까요. 게임의 주제인 자연 보호는 무난하면서도 좋은 소재입니다. 여하튼 간에 로케아 역시 청정해역을 지키려고 하니까요. 혹은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사냥을 해 상어가 줄어드는 걸 활용할 수도 있죠. 그러나 요런 걸로는 늑대인간의 비극과 별로 다를 게 없으니. 무자비한 싹쓸이 어업 때문에 바다 속 생명체들이 급감하는 것도 로케아의 비극을 자극하기에 괜찮습니다. 이상 기온 때문에 산소가 모자라는 죽음의 물 지역이 갈수록 늘어나 로케아가 살 곳이 없어지는 구성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빙하가 너무 녹아 마른 땅이 없어지고 먼 미래에 결국 변신족은 로케아만 남는다는 설정도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고독함을 건드리기 알맞고요. 뭐로 정하든 간에 해양동물인 상어라는 점을 부각시키면 늑대인간과 차별되는 로케아만의 비극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공식 설정이 어떠하든 상어들의 비극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건 아쉬운 일입니다. 소개글에 한 번 언급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위기가 진정 로케아에겐 없는 걸까요.

 

아마 플레이어 캐릭터로 고른다면, 14 변신족 중에서 제일 플레이하기 힘든 게 로케아가 아닐까 싶군요. 다른 변신족들은 (플레이어와 같이) 뭍에 사는 동물이라 어느 정도 기준이라는 걸 설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변하는 일도 많아서 인간의 삶을 적용하기도 쉽고요. 그러나 로케아는 해저라는 전혀 낯선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바다 속 삶은 해양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좀 알까, 일반인들에겐 미지의 장소입니다. 거기다 로케아가 인간으로 변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