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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20,622
아베 고보..
알만한 분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이름일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낮설게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처럼 온갖 일본 소설이 다 번역되는 붐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아베 고보는 우리나라 문단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본 작가로 인식되던 사람이죠.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유럽과 구미에서도 한 시절을 풍미한 세계적인 작가이기도 합니다.
아베 고보는 나이 70을 눈앞에 둔 199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1994년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
본래 훨씬 더 유력했던 아베 고보가 그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차선으로 오에 겐자부로에가 수상했다는 그런 말도 좀 있었습니다.
사실 이 바닥에서는 그런 낭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베 고보라는 사람이 일본 SF의 효시로 꼽히는 작가이자
또 데뷔 초기부터 마지막 유작까지 꾸준히 팬터지 작품을 썼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관심사라고 할 것입니다.
<타인의 얼굴>은 아베 고보 특유의 팬터지 세계를 보여주는 우화이고,
또 한편으로는 <모래의 여자>의 연장 선상에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고로 얼굴을 잃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만들어 새로 붙이는데,
그것이 과거 자신의 얼굴이 아닌 타인의 얼굴이라는 컨셉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아베 고보가 즐기는 테마가 고독한 현대인의 잃어버린 길찾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출구를 잃어버린 <모래의 여자>와 얼굴을 잃어버린 <타인의 얼굴>은 쌍둥이 같습니다.
여기에 아예 주인공 탐정이 실종되어 버리는 <불타버린 지도>가 차기작으로 이어지면서
대략 3부작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죠.
남의 얼굴을 갖다 붙이고 돌아다니는 이야기는 영화 <페이스 오프>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영화 <페이스 오프>의 경우 원작이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이 인격을 맞바꾸는 내용은 르네 벨리토의 소설 <기계>에서 가지고 왔고,
남의 얼굴을 하고 부인을 유혹하는 내용은 아베 고보의 소설 <타인의 얼굴>로부터 따왔습니다.
오우삼 감독은 소설 <타인의 얼굴>을 읽고 영화 전개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죠.
다만..
<타인의 얼굴>에서 스스로 얼굴을 바꾸어 신분을 위장할 수 있게 된 인물이
고작 열심히 한다는 일이 본래 자신의 부인을 유혹하려고 애쓰는 것 정도..
자극적인 영상 매체를 수 없이 많이 접해 온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약간 어이없을 정도로 평법하고 순진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든 1960년대에 쓰여진 소설이니까요.
아마도 <페이스 오프>를 못 보았다면 조금 더 괜찮게 생각될 수도 있었겠죠.
아베 고보의 작품은 읽기 편안하지도 않고
상쾌하거나 즐겁게 즐길 수 있는 물건도 아닙니다.
흔히 아베 고보는 카프카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은데,
외로움과 괴로움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마음과 그 상처를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우화적으로 그려내는 데 집중했던 작가이니까요.
또 SF와 팬터지라는 장르물의 속성을 잘 이용하고 활용하는 데 능한데,
장르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이를 별로 달가와 하지 않습니다.
전쟁후 일본 문단을 대표한 순문학 소설가로 구미에 명성을 떨치면서도
데뷔 초기부터 작고할 때까지 장르물 창작을 멈추지 않은 것도 특기할만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1960년대에 이미 장르 소설이 장차 주류가 될 것을
미리 예견한 게 아닐까 그런 억측아닌 어측마저 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로 특이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죠.
사족으로..
아베 고보의 작품 중 번역본들을 좀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표작 <모래의 여자>는 민음사 세계문학으로 나온 게 시중에 있고,
<불타버린 지도>는 중앙일보사 오늘의 현대문학 전집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밖에 아베 고보의 초기 중단편집 <벽>이 위덕대학교출판부에서 번역되어 나왔고
이 단편집에는 아주 괜찮은 팬터지와 SF 단편들이 꽤 많이 실려 있죠.
특히 [홍수]같은 단편은 그렉 베어의 <블러드 뮤직>과 동일한 테마인데
[홍수]의 경우 1950년대 쓰여진 것이지만 <블러드 뮤직>은 1980년대 작품입니다.
<타인의 얼굴>은 2007년 문예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초역본이 나왔고,
이 책의 번역자는 과거 단편집 <벽>을 번역출간했던 이정희 교수입니다.
이 사람은 일본에서도 처음으로 아베 고보를 테마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라고 합니다.